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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곳의 겹침 꼴 예술-그림과 시
정현기(문학평론가)
1. 말문 열기
김봉준 화백의 그림들을 잘 보았다. 예술의 각종 분야 가운데 나는 미술작품에 대하여 보는 눈이 가장 약하고 솔직한 말로는 무식하다. 그러나 울긋불긋 채색에 따라 움직임의 힘찬 세력이나 가락에 대해서는 그래도, 금(線)과 빛으로 꼴 새를 만든 뜻이 무엇인지, 대강 말로 풀이할 수는 있다. 김 화백이 그림에 붙인 표제와 같은 「해」와 「달」, 「가족」으로 이루어진 사람관계, 「빈 집」이 내뿜는 을씨년스럽고도 사무치는 외로움, 그리고 밤중에 무서워하면서 어른들 목소리로 듣던 이야기 속의 도깨비 이야기「번뜩 도깨비」들의 출렁임 같은 우리 삶의 이야기 속 전설을 주어 담을 수도 있다. 우리가 시골에서 듣던 민담 가운데는 도깨비 이야기가 퍽 많았다. 사람들을 퍽 웃기게(諧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 속에는, 별안간 밤중에 나타나 씨름을 하자고 덤빈다든지, 솥뚜껑을 솥 안에 집어넣는다든지, 사람들을 부자가 되게 해 준다는 이야기들로 번져 전해왔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도깨비는 우리들 삶과 가깝고도 친숙한 전설속의 동반자로 살아 있다. 김 화백의 「번뜩 도깨비」는 아마도 이런 우리들의 친숙한 정서를 그려낸 것으로 읽힌다.
미학과 출신 시인 김지하는 전부터 우리 예술의 역동적인 색과 소리와 움직임이 한데 어우러진 문화의 붉은 빛 내림을 예찬하였다. 여기 전시된 김 화백의 여러 그림들 속에서 내가 확인할 수가 있는 것은 신기하게도 이미 고인이 된 사진작가 김수남이 남긴 사진 속의 동남아 사람들의 역동적인 활력과도 너무 닮아 보인다. 김수남은 평생, 동남아시아를 돌면서 사라져 가는 동남아 민중의 전통적 삶길 바탕을 찍어 남겼다. 그가 찍어 보인 사진들 속에는 강렬한 빛깔이 있다. 그를 통해 본 그런 요연한 색과 빛과 율동을 나는 또한 이 김봉준 화백의 작품들에서 다시 본다. 나는 사무치는 느낌으로 이 두 작가의 생각들을 만난다. 그가 찍어 남긴 사진들도 김봉준 화백이 그린 물상이나 사람, 동식물들과 눈짓을 주고받으며 소통의 신호를 보냈었다. 사람과 동식물, 그런 동물 세계와 무생물적 세계가 한데 어우러져 내는 이야기란 대체로 하늘이나 자연에게 풍요를 비는 제례의식(祭禮儀式)에 이어져 있다. 풍요제란 곧 신화이다. 신들은 모두 사람 속에 물질 속에 또 땅이나 흙, 나무, 각종 새나 짐승들 속에 들어 숨 쉰다. 도깨비나 신 이야기는 우리를 있게 하는 지구 전체의 원형질 속에 들어 있는 삶의 출렁임이며 움직임이다. 이런 이야기나 실제 사람들이 꿈꾸는 삶은 각종 사물 속에 꿈틀대며 넘실대는 촛불과도 같다. 그것은 일종의 함성이기도 하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그림에 대한 각기 해석이나 평가 따위의 어떤 이야기도 할 생각이 없다. 실은 그럴만한 위인이 되지 못한다. 게다가 나는 그림과 관련된 생각의 뜰로 나설만한 문화적 감각이 깊지 못하다. 하지만 사람이 살면서 꿈꿔온 여러 방향의 바람에 대하여는 할 이야기가 있다. 나의 전공이 문학평론이었고 또 시를 써왔기 때문에 그림과 시가 만나는 지점에 대해서는 조금 맛을 쳐 간을 좀 낼 수가 있다고 생각하여 이 자리에 선 것이다. 김 화백 그림들의 회화적 역동성은 오늘 우리들 삶의 문제를 치열하게 드러내 보여주려고 한다고 나는 보았다. 정치학자 더글러스 러미스는 일본에 거주하였던 미국인 정치 사상가였다. 그가 발표한 저술 가운데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는 오늘날 우리들 삶이 얼마나 엉뚱한 관념에 묶여 ‘발전’이니 ‘개발’이니 따위 돈놀이꾼들에 의해 휘둘리고 있는지를 설득력 있게 풀어보여 주고 있다. ‘개발’이나 ‘발전’이란 그 실제가 없는 말일 뿐이다. 도시화, 공업화, 상업화, 대량생산 공장설비, 무한경쟁 이런 말들은 모두 다 국제 은행 마피아인 돈놀이꾼들이 만들어 낸 허상이다. 이런 국제 돈놀이꾼들 이야기는 쑹홍빙이 쓰고 차혜정이 옮긴 『화폐전쟁』(랜덤하우스, 2008)에 아주 길고도 자세하게 여러 자료 논증을 통해 밝혀지고 있다. 이른바 근대화라고 이름 붙인 개발 이념은 도시화를 부추겼고, 이에 따라 농촌은 늙은이들만 남아 집을 지키거나 아예 빈집들로 남아 퇴락해가는 모습들이 여기저기 많았다. 김 화백의 그림에 「빈집」이 하나 덩그러니 남아 있다. 당연하게도 그런 빈집은 도시 서울이나 부산에 있는 게 아니고 시골인 농촌에만 쓸쓸하게 서 있다. 우선 시 한편부터 보기로 한다. 「빈집」이야기이다.
집 한 채가 을씨년스럽게 빈집으로
놓여있다 울긋불긋 문설주 구멍 난 문풍지
바람 불어 부르릉 방안 드나드는 바람마저
별 재미없다고 들기를 꺼린다, 왜 이 집은 비었나?
아들내미 서울이 좋다고들 꼭 거길 가야 한다고들
부리나케 서둘러 떠난 자리엔 설운 외로움만 가득 차
일찌감치 홀로 되어 키운 자식 떠난 자리 그렇게 뽀얀
먼지만 들락날락 켜켜이 쌓여도 빈집은 이제 온기마저
차지 않는다, 빈집 여기저기 농촌 어디엔가 횡하니
푸른 하늘만 떠 인 채 비바람에 삭아가고 있다.
⼀「때와 곳이 만나는 설운 맛」(994) 정현기⼀
어느 한 곳에 서 있는 물체는 늘 이런 이야기가 들어 있다. 물체나 사물, 사람이나 나무, 가족, 현상 모두 다 이야기를 거느린 채 어딘가에 서 있거니 앉아 있고 또 누워 있다. 누운 불상들 즐비한 곳 <운주암>을 둘러싸고 있는 하늘이나 허름한 집채, 뾰족하게 병풍처럼 둘러친 뫼들까지 바람과 구름만 들락날락 떠돌고 있지만, 그게 실은 우리들 삶 있음 꼴 모두의 다인 셈이다. 거기는 물론 소리도 냄새도 또 빛도 있지만 누가 그걸 예술작품으로 전할 지는 아무도 모른다. 김봉준 화백이 오늘 여기서 그걸 전하고 있다.
공간예술과 시간예술은 언제나 넘나든다. 공간예술은 어느 곳, 어떤 자리에 한 눈에 띄도록 서 있거나 자라거나 멈추어 있는 것들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그 사물의 본질을 찾아나서는 예술 행위이다. ‘사물의 본질’은 그러면 무엇일까? 가령, 저녁 느지막히 피어, 여름 더위에 지친 사람들의 눈을 시원하게 하는 메밀꽃 밭이 펼쳐 있다고 치자. 이 메밀꽃과 관련된 이야기는 여러 갈래로 번진다. 번져나가는 이야기 흐름에는, 중국과 경계를 사이에 둔 옛 고구려(‘리’로 읽는 게 맞다) 시대와 겹쳐 한 갈래 이야기를 꾸민다. 중국에서 패권을 쥔 몇몇 왕권패들은 고구려를 공략하여 깔아 눕히려는 야심으로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다. 수나라 양제니 당나라 태종이니 <살수대첩>이니 하는 이름을 단 싸움을 벌여,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는, 한 왕권이 무너진 이야기 속에 숨겨진 속말 입담에 메밀과 관련된, 이야기 흐름 하나가 졸졸 흐른다.
‘저 고구리 놈들이 저렇게 쌈질을 잘하는 이유가 뭐냐? 저 놈들 체력을 약화시키려면 메밀을 좀 흘려보내라! 이 메밀은 매가리도 없고 독성도 있는 곡물이니 그걸 처먹고 나면 힘도 약해질 것이다.’ 그렇게 해서 메밀이 고구리 땅에 흘러들어 왔는데 그걸 처먹고도 여전히 싸움질은 잘 하니 뭔 조홧속이냐? 은밀하게 염알이꾼을 보내어 알아본 바에 따르니, 고구리 사람들 메밀 먹는 법에는 메밀국수에다가 무김치와 돼지고기를 썰어 넣어 먹음으로써 영양가는 물론이고 무가 갖는 해독작용까지 이 메밀 곡물에다가 보탰다는 이야기 말이다. 이런 것이 메밀이라고 불리는 실존, 명사에 따라붙는 본질의 하나가 된다. 모든 말은 여러 낱의 본질을 거느린다. 메밀에 관한 또 하나의 본질은 더욱 커지고 깊어진다.
1930년대 작가 이효석이 써서 그의 지지부진하던 소설 말길을 한 순간, 번쩍 눈에 띄게 올려 세운 「메밀꽃 필 무렵」이 그 또 다른 본질을 이룬다. 메밀꽃이 서늘하게 핀 강원도 평창군 봉평 마을에 도붓꾼 떠돌이 장사 하나가 떠오른다. 다 늙어빠져 눈꼽이 꾀죄죄하게 달라붙은 당나귀 등에 이것저것 시골 장터에 내놓고 팔 물건을 싣고 이 장터 저 장터를 옮겨 다니는 홀아비 허 생원의 아린 생애가 불꽃처럼 떠오른다. 20여 년 전에 시골 마을 방앗간에서 만나 얼결에 사랑을 나눈 이 허 생원에게 아들이 생겼다는 벼락같은 생애 터침 이야기가 하얗게 핀 메밀꽃 밭 두메산길을 걸으면서 솟아오른다. 아들! 동이! 꿈도 꾸어본 적이 없는 이 돌발사건은 문학적 이야기 틀로뿐만 아니라 하나의 사물이나 현상, 사건이 품어 지닌 뜻, 곧 본질을 드러낸다. 이 소설작품으로 이야기되는 메밀꽃 피는 샛길 이야기에는 여러 가닥의 가족사와 역사, 그리고 힘겨운 나날 밑바닥 삶의 험로가 다 들어 있다. 이렇게 본질은 깊거나 넓고 또 겹친 이야기 틀로도 확장된다. 본질은 사물이나 현상 뒷켠을 둘러쌓고는 사물이 지닌 뜻의 떨기를 펼쳐 놓기도 한다. 그런데 만일 한 화가가 메밀밭에 흐드러지게 핀 메밀 꽃 무더기를 그렸다고 친다면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보고 읽어야 할까? 이제 우리는 메밀밭으로부터 눈을 달리 돌려야 한다. 오늘 나는 김봉준 화백의 <우리가 확보해야 할 풍요>가 꿈꾸고 가꾼 그림 이야기를 펼쳐야 한다. 모든 곳에 있었던 사물은 그것 속에 시간을 품고 있으며 그 시간은 거기 맞는 공간울림이 어우러져 서로 겹치고 엉키며 서로를 품어 안는다. 공간 예술의 대표를 회화, 그림이라고 놓는다면, 시간예술의 대표주자는 물론 음악일 수도 문학일 수도 있다. 그림과 문학, 그림과 시! 이것이 만나는 지점에서 우리는 서로가 만난다.
2. 풍요를 꿈꾸는 딴 나라 삶 이야기들
어떤 사람이든 잘 사는 걸 꿈꾸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딘가 다른 세상, 풍요롭고 평화로운 삶의 자리가 있는 곳을 언제나 꿈꾼다. 이런 꿈은 곧 우리가 믿거나 믿으려고 하는 신 이야기 또는 전설이나 신화다. 모든 신화란 사람들이 꾸는 꿈의 내용이다. 그랬으면 좋은 것, 그런 곳, 그런 때, 그런 사람, 그런 만남, 그런 인연, 그런 관계, 그런 잠자리, 그런 먹을거리, 그런 물건, 그런 성공, 그런 즐거움 따위 모두 바라는 것들이 대체로 신화를 이룬다. 신화를 이야기하는 이들은 사람들의 바람을 꿈꾸는 이들이다. 그리스 시대에 저 휘황한 그리스 신화 속에 들어 있는 무수한 유형의 동식물과 자연 질서,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꿈 꾸기들에, 실은 우리들 모두가 다 같이 꿈꾸는, 그런 바람이거나 소망과 나날 겪음 살이의 슬픔과 괴로움이 담겨 있다. 우리들 삶은 다 신화에 해당한다고 나는 풀이하려고 한다. 신이나 하나님은 곧 사람 그 자신이거나 아니면 사람이 만들어 믿고 따르고자 하는 어떤 마음 그림자일 터이니까!
동양 쪽에 익히 알려진 전설 신화와 서양 쪽 신화에는, 우리에게 꽤나 익숙한 이야기들이, 몇몇 갈래로 살아 전해지고 있다. 먼저 ‘무릉도원’ 이야기가 그 하나이다. ‘무릉도원’은 그 말부터 우리 귀에 따뜻하고 정겨우며, 아름다운 언덕과 냇가, 그림처럼 봄꽃들로 둘러쳐 진 마을이 있고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으며, 어른들 또한 여유롭게 옷을 풀어헤친 채 장죽을 물고 장기를 두거나 바둑을 두며 한가하게 늘고 있다. 놀고먹는 것,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것과 곳, 그리고 온화한 날씨가 이어지는 밝고 환하며 풍요로운 그런 곳이 우리 머릿속에 들어 잇는 무릉도원이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우리가 써먹곤 하는 ‘유토피아’라는 말 또한 우리 귀에 익숙한, 무릉도원과 맞먹는, 그런 평화로운 어떤 곳의 마음 그림자를 품고 있다. 16세기 영국왕권치하에서 대법관까지 했다가 런던 탑에 갇혔었고 또 결국은 왕권에 의해 단두대에 목 잘려 죽은 영국사람 토마스 모어 변호사! 그의 「유토피아」가 그려낸 이 작품 이야기 또한 또 다른 전설이자 신화의 하나이다. 이 두 딴 나라 이야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느 엉뚱한 곳에 대한 그리움이다. 신화나 전설은 풍요로움에 대한 그리움의 일종이다. 동양 쪽 이야기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1) 무릉도원
동양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딴 나라 삶의 신하 전설의 하나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이야기이다. 이런 ‘딴 나라 사람들 삶 이야기’를 이 자리에서 하는 이유는, 오늘 우리 앞에 펼쳐져 보이는 김봉준 화백의 그림들 모두가, 오늘날 우리가 꿈꾸는 풍요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내가 풀이하려 하기 때문이다. 공간예술의 대표 격 화가나 시간예술 대표 격 시인은 모두 다 곳과 때를 뒤섞으며 꿈을 엮는 신화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다. 조선조에 그려져 오늘날까지 전하는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는 조선조 당대의 신화를 만들어 낸 것이었다. 무릉도원, 복숭아 꽃 피는 언덕배기! 이곳은 분명 사람이 보았으면서도 다시 불 수 없는 딴 나라, 다른 곳의 풍경이다. 이런 곳을 그려 보인 그림이나 시는, 누군가의 꿈 곧, 신화 전설의 말길로 들어서는 열쇠를 내 보인 것이다. 실제의 삶 속에서 팍팍하거나 고된 나날을 견디는 사람이, 어디론가 그런 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는 마음을 그려내어 보인 그림이란 실은 사람이 꿈꿀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바람직한 삶의 바탕(理想)을 드러낸 것이다.
이 이야기에는 중국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가상의 선경(仙境)이 들어 있다. 꿈꾸는 이야기. 꿈길로 달려가 보고 온 곳, 그곳은 중국 후난 성이다. 이 작품은 거기 살았던 한 어부가 어쩌다가 가 보았지만, 다시는 갈 수 없었던, 복숭아꽃 만발한 낙원이었다고 전해온다. 이 말 무릉도원은 ‘별천지(別天地)’나 ‘이상향(理想鄕)’을 비유하는 말로 흔히 쓰인다. 전쟁도 없고 질투나 서로 빼앗는 도둑질도 없으며, 남을 억압하는 왕권 폭력도 없는 곳, 그곳이야말로 사람들이 꿈꾸는 복사꽃 피는 언덕이다. 툭하면 잡아다가 죽이고 목 잘라 없애며 엉뚱한 곳으로 귀양질 보내는 권력악귀들이 판치는 시대에 아랫사람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 나날의 삶을 버틴다. 그런 때에도 복사꽃은 핀다. 언덕이든 들판이든 산모퉁이이든! 왕권이든 황제권이든 교황권이든 폭력이 없는 곳에는 늘 복사꽃이 핀다.
한국회화사에서 조선조 초기 화가 가운데 빼어난 천재 화가 안견(安堅)의 1447년도 작품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는 어떤 경유로서인지는 모르되 현재 일본 천리대학 중앙도서관에 그 원본이 소장되어 있다. 조선조 넷째 왕 세종 임금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은 글씨를 아주 잘 쓰는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당대 왕권정부에 소속된 화원(畵圓)으로 활동한 안견(安堅)의 적극적인 후원자였다고도 전해진다. 그런데 어느 날 안평대군이 꿈을 꾼 것을 안견에게 이야기해준 다음 그것을 그림으로 그려달라고 해서 그린 그림이 바로 저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였다고 한다. 복숭아꽃이 만발한 동산에 사람들이 모여 하하하 웃으며 다정하고 평화롭게 노니는 삶, 그런 곳은 어디에 있는가? 실제로 왕이나 제왕, 황제, 천자, 대통령, 수상, 제 1비서, 지도자 따위 권력을 움켜쥐는 사람들이란 근본적으로 날도둑이거나 악랄한 폭력배들이다. 그들은 시시때때로 싸움을 일으켜서 남의 재물과 토지를 빼앗고 사람 생명을 죽이며, 남이 아끼던 재산 모두를 불 지른다. 그 권력자들이 근본적으로 나쁜 부라퀴(惡黨)라는 이유는 그들이 남의 권리를 빼앗아 마음대로 제 맛에 맞게 권력을 휘두르기 때문이다.
조선조를 일으킨 태조 이성계(李成桂) 또한 이 범주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인물은 아니다. 말 잘 타고 권력욕이 강하며, 왕권에 대한 야심이 가득한 그는 드디어 고려조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세웠다. 이름 하여 조선조다. 이 시기에 앎 꾼들 가운데서 우리는 정몽주(鄭夢周)와 정도전(鄭道傳)을 나란히 놓고 세속적인 삶의 험난한, 앎 꾼들의 드난살이 이야기를 펼치곤 한다. 정도전이 새로운 정권 잡는 몰이에 참여한 속된 인물이었다면, 정몽주는 한번 섬긴 왕권에서 몸을 돌리지 않는 충성심을 보이겠다는 결기를 보여줌으로서, 선죽교(善竹橋)에서 쇠몽둥이에 맞아 죽었다고 역사가 전하는 또한 속물이다. 태종이 정몽주를 불러 마음을 떠보는 시 한 편을 읊었다.
이런ᄃᆞᆯ 엇디ᄒᆞ며 뎌런ᄃᆞᆯ 엇디ᄒᆞ료
草野 愚生이 이러타 엇다ᄒᆞ료
ᄒᆞᄆᆞᆯ며 泉石膏盲을 고텨 므슴 ᄒᆞ료
권력자나 그 하수인들은 늘 사람됨의 가치 잣대를 얼버무린다. 적당히 잘 먹고 살다 죽으면 그만이지 지켜야 할 민족의식이나 민족적 자존심 따위가 무슨 뜻이 있겠느냐고 따지며 몰며올 때 앎 꾼들은 늘 눈 바로 뜨기를 두려워한다. 위의 것은 국내에서 동족끼리 벌이는 권력싸움에서 어느 편을 들 것이냐는 좀은 단순해 보이는 가치 잣대에서 멈출 수도 있는 양날의 칼이다. 그러나 막상 이런 양 칼 경우가 남의 나라의 것으로 다가설 때면 그 잣대의 단순성은 금세 사라진다. 왜정시대 조선 앎 꾼들이 지켜야 할 것으로 믿었고 그래서 그것을 지키느라 몸(身世)을 망쳤거나, 가족이 뿔뿔이 부서져 나간 사례들은 아주 많았다. 한 칼은 왜정 깡패들의 무서운 위협과 폭력이고 또 한 다른 칼은 민족의 양심이라는 도덕 칼날이다. 이 두 칼날은 언제 어느 때나 사람의 사람됨을 재어 읽게 하는 무서운 외줄이다. 이런 때에 춘원 이광수니 최남선이니, 서정주니, 또 최재서니 하는 당대 수많은 앎 꾼들이 망가져 갔다. 망가진다는 말은 떳떳한 자기를 잃었다는 뜻이다. 머리도 좋고 재주도 뛰어난 인재가 친일파로 찍히고 나면 그 똑똑했던 사람이 푸석돌 인격으로 바뀌고 만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시험이 없는 곳, 무릉도원에 살기를 늘 꿈꾼다. 우리 노래 가운데 동요로 널리 불려왔던 아름다운 노랫말도 꽤 여럿이 있다. 1920년대 왜정시대를 겪어 거치면서 아이들에게 부르게 하였던 노랫말이다. 그 가운데 하나; 「고향의 봄」, 1923년 이원수가 노랫말을 짓고 여기에다가 1926년도 쯤 홍난파가 작곡을 한 이 노래는, 1919년 3.1운동이 풍비박산 난 뒤끝, 조선 사람들의 실심과 절망을 역설적으로 노래한 동요이다. 여기도 복숭아꽃이 나온다. 복숭아꽃에는 늘 풍성한 이야기가 따라 붙는다. 이 꽃과 열매가 하늘나라 신들이 좋아하는 열매이기 때문일 터이다. 천도복숭아! 죽을병에 걸렸던 어머니나 아버지의 병을 낳게 하는 복숭아와 효심, 그런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마을, 그런 곳이야말로 우리가 확보해야 할 풍요의 땅이자 꿈꿀만한 고향이다. 고향을 잃은 사람들은 어떤 꿈으로 그걸 달래 왔는지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지 않고 산다. 잃어버린 기억과 양심을 일깨우는 꽃, 복숭아 꽃!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동네 새 동네 나의 옛 고향
파란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1920년대, 나라를 빼앗긴지 10여년 만에 전 민족이 들고 일어나 나라를 되찾겠다고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불렀지만 뒤에는, 미국이라는 엄청난 힘으로 부추기는 악당 응원 국가를 거느린, 왜놈들이 총칼로 이런 움직임에 도륙을 내었다. 1920년대는 조선 사람들 가슴이 시커멓게 타고 있었던 시기였다. 일패도지(一敗塗地)! 왜놈 순사들이 툭하면 동네방네 쑤시고 다니면서 가구조사다 누룩조사다 처녀 사냥이다 하면서 조선인 마을마다 누빌 때 조선 사람들은 늘 가슴 철렁대는 긴장과 쫓김으로 살고 있었다. 이럴 때 아이들을 시켜 위와 같은 노랫말의 노래를 부르게 한다. 희망을 잃지 말자는 한 종족의 소망과 꿈이 여기 들어 있다. 그러니까 이 노랫말 속에 음험한 세력은 몸을 숙인 채 숨어 있다. 이 노랫말 속에 숨어있는 폭력은, 어디까지나 현실적이고도 실질적인 가치 잣대만으로, 움트고 있다. 그들이 삶의 중요목표로 정한 것은 날강도가 꿈꾸는 제국으로 되어 있고, 훔쳐다 굴 창고에 쌓아올리는 물질적 재부들만 있다. 그들은 그런 재부 앞에서 언제나 으르렁거리는 야수들이어서 복숭아꽃조차 그들 옆에서는 곱게 필 생각을 못한다. 복숭아꽃은 대체로 집 뜰 앞에 심는다. 붉은 꽃으로 피워내는 이 나무는 지극한 평화를 상징한다. 때론 악귀를 몰아내는 영험한 힘도 지닌 것으로 한국 사람들 의식 속에서는 살아왔다. 복숭아꽃이나 그 나무, 특히 동쪽을 향해 뻗은, 나무는 귀신도 두려워하는 힘을 지녔다고 우리는 믿어왔다. 복숭아꽃이 피는 마을은 곧 신화 마을에 속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제나 이렇게 바알갛게 피는 복숭아꽃 그늘에 앉기를 바라고 그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룬 마을에 살기를 꿈꾼다. 여기 정지용의 시 「고향」 또한 우리들 마음 속 신화적 정조(情調)를 꿈틀대게 하는 울림이 있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 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 철에 울건만 마음은
마음은 제 고장 지니지 않고 먼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 끝에 홀로 오르니 흰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이
쓰디 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 푸르구나
2) 유토피아
『유토피아』는 토마스 모어(1477-1535)가 1516년도에 발간한 책으로 본래 라틴 말로 씌어진 것이었다고 풀이되어 있다. 이 ‘유토피아’라는 말은 이상향이라는 뜻으로 많은 앎 꾼들이 쓰고 있어서 앞에서 우리가 지껄인 중국식 ‘무릉도원’이야기와 겹쳐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막상 이 책의 뚜껑을 열면 이 책은 아주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말씀들로 그럴듯한 나라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무릉도원’이 추상적으로 그려진 마을 이야기라면 ‘유토피아’는 정치 경제 문제에 아주 본격적인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대담 형식으로 짜여진 이 이야기 틀에는 우리들 삶의 계급모순 실상이 적바림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제문제에 대해서도 꽤 깊이 있는, 자산 불균등 이야기까지 뻗쳐 깊은 통찰을 보여주고 있어, 어느 시대에나 눈길을 끌만 하다. 오늘날 이른바 자본주의이니 신자유주의, 완전한 시장개방이니 하는 경제행위 문제가 이 책에서조차 일찍이 아주 깊은 눈길로 비판되고 있어 참 재미있다. 농촌과 도시의 살림 꼴 새를 이야기 하면서, 이를테면 이집트에서 인공부화 한 병아리 얘기라든지 말 사육에 관한 이야기가 펼쳐진 다음, 사람들이 감당해야 할 노동시간에 대하여, 착취계급에 대하여, 따위 이야기가 퍽 흥미롭게 전개되고 있다. 한 구절 인용해 보이면 이렇다.
“그런데 각별히 주의가 필요한 사항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들은 하루에 여섯 시간만 일하므로 틀림없이 필수적인 물품이 모자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는 것입니다. 사실은 반대입니다. 여섯 시간으로 충분하며, 오히려 안락한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초과 생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다른 나라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실직을 하고 있는 가를 고려한다면, 그 이유를 이해할 것입니다. 우선 다른 나라에서는 실제로 여자들―여자는 처음부터 거의 5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이 모두 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자들이 일을 하는 나라에서는 그 대신 남자들이 게으름을 피우고 있습니다. 이들은 일을 얼마나 합니까? 게다가 부자들, 특히 일반적으로 귀족이나 신사로 알려진 지주들 그리고 그들의 가복(家僕)들―나는 앞에서 말한 무장한 악한의 집단들을 이렇게 부릅니다―이 있습니다. 끝으로 아주 건장하고 병이 없으면서도 게으름을 피우는 구실로 병을 가장하고 있는 거지들을 꼽아야 합니다, 이러한 자들을 모두 헤아려 볼 때, 소수의 사람들만이 인간이 소비하는 것을 실제로 생산하는데 종사한다는 것을 알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유럽, 우리가 서양이라고 알고 있는, 영미 제국, 프랑스, 스페인 등 나라들이 얼마나 야만적으로, 남의 나라를 침략하였고 또 사람들을 살육하는데 길들어 있는 나라 족속들인지는 알면 알수록 솜털이 곤두서게 된다. 화가나 시인은 가끔씩 삶의 부조리나 부당한 폭력에 맞서는 작품들을 남김으로써 그 당대폭력 세력의 입김 속으로 빨려든다. 그들이 이렇게 사람들 살림살이 규모 키우기에 의해 번지는 부조리를 절실하게 그려냄으로써, 우리들 삶의 힘겨운 내면을 보여준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복일시 분명하다. 김봉준 화백의 그림들은 오늘 여기에, 큰마음 손과 발을 걸쳐 놓고, 우리를 꿈틀대게 만든다. 19세기 프랑스 사람 얘기를 조금 더 빌려오기로 한다.
“오늘날에는 부자의 문을 걸쇠질하여 여는 도둑과 부자의 잠을 엿보는 자객을 그에게 보여준다. 탈옥수와 도둑의 형상을 한 이 가난뱅이를 부자에게 보여준다 해도 우리는 부자가 경멸하는 인류와 그를 어떻게 화해시키며, 그가 무서워하는 가난뱅이의 고통을 어떻게 동정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너무도 알지 못함을 인정한다. 홀바인과 그의 선배들의 그림에서, 이를 갈면서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무서운 죽음조차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악인들을 회개시키고 피해자들을 위로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우리 문학도 이 점에서는 중세기와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과 지금도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닐까? 홀바인의 술꾼들은,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으나 작부 노릇을 하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물리치기 위해 거의 미친 듯이 그들의 잔을 채운다. 예술이 그들에게 사회 계급을 무너뜨릴 순간을 기다리며 비밀리에 조금씩 조금씩 음모를 꾸미는 것을 보여준 그 어떤 농민 폭동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현대의 사악한 부자들은 요새를 쌓고 대포 만들기를 바란다. 중세기의 교회는 면죄부를 파는 것으로 이 땅의 세력가들의 공포를 어루만져 주었고, 현대의 정부는 헌병과 간수를 많이 두고 총검과 감옥을 많이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을 부담하게 함으로써 부자들의 불안을 가라앉혀 준다.”
흔히 19세기 프랑스의 여자 바람둥이로 잘못 알고 있는 조르즈 상드는 사람살이의 부조리를 꿰뚫어 읽었던 눈 뜬 여성이었다. 일곱 차례나 결혼을 하여, 그의 뛰어난 풍요로운 삶 꿈꾸는 이야기 세계를 흐려놓고는 하였지만, 그는 농촌 사회에서조차 부자와 가난한 이의 눈빛 고르기를 잘 알았던 작가였다. 그가 전하고 있는 앞의 이야기 속 부자 새끼들이 저지르는 짓거리들은, 오늘날 이 나라나 미국, 일본을 감고 있는, 중세기적인 면죄부 팔아 재산 쌓기 이야기와, 너무나 닮아 있지 않는가? 나날이 천둥치듯 달리고 쏘아대는 비행기 폭음이나 대포와 총탄 세례로 연습을 삼는 군대와 군비, 무기상들의 장삿속이야말로, 부자 그룹인 빌더버그 패들이 저지르는 흉한 부라퀴 짓의 내림이 아니고 무엇인가? 상드의 위 이야기는 바로 이것을 드러낸 것이다.
문학예술이 감당해야 할 몫은 언제나 이렇게 험하고 어려운 길 위에 놓여 있다. 누군가 남을 수단으로 삼아 자기 삶의 행복이나 즐거움, 기쁨을 찾으려고 한다면, 먼저 내가 누구든지 남을 억압하는 악당으로 떨어져야 한다. 내가 남보다 많은 돈과 명예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부터 그는 남과의 평화로운 거리를 유지하기 어렵다. 이런 마음 쓰기가 누구로부터 발원하든 그것이 넘쳐나고 있는 한, 이 세상에는 유토피아든 무릉도원이든, 풍요로운 삶이란 존재할 수가 없다. 그래서 유토피아나 무릉도원이나, 그런 것은 아예 없는 것이라는 뜻으로, 널리 이해되고 있기도 한다. 나와 너, 그리고 그와 그들, 이렇게 각자 선 자리에서 사람들은 그들의 틀과 가락을 만든다. 마을도 이웃도 다 그렇게 사람끼리 만나는 자리에서 오붓하거나 다정한 울림으로 흘러가도록 서로 참고 견디며 마음을 연다. 그런 마을이나 나라만이 풍요로운 곳으로 된다. 그런 모임자리, 만남이나 모임이 즐거운 자리를 만들기 위해, 화가들은 붓을 들어 줄을 긋고 색을 칠하며 시인들은 글을 쓴다.
동양에서나 서양에서나 아예 없는 어떤 상태의, 현실을 벗어나는 어떤 새 세계를 꿈꾸는 예술작업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당대 현실이 각박하면 할수록 예술의 치열한 형상화는 더욱 풍성하고 또 단단해진다. 그만큼 사람들은 우리가 확보해야 할 풍요로운 삶, 평화로운 삶에 대한 꿈이 크고 깊다. 시대가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사람의 꿈은 더욱 깊어지는 법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험난하고도 고통스러웠던 왜정시대 한 복판 1930년대에는 무수한 작가 시인들이 별빛처럼 떠올랐다. 염상섭을 비롯하여 이기영, 이효석, 정지용, 박태원, 이상, 박영준, 채만식, 김기진, 김유정, 홍명희, 이범선, 안수길 등 무수한 그야말로 예술의 별들이 태어났다. 뿐만 아니라 1970년대, 혹독한, 왜병 오장 출신 박정희가 저지른, 군사독재의 횡포가 자심하던 때에 우리 문학의 별들 또한 찬연하게 떠올랐다. 소설가들로 이른바 70년대 작가 군으로 평가받았던 윤흥길과 황석영, 조세희를 비롯하여 김원일 김주영, 이청준, 이제하, 문순태, 강용준, 조해일, 김용성, 한승원, 이문구 등 그야말로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 이 시기에 떠올랐다. 어두운 밤에만 별빛은 빛나는 법이다. 현실적으로 가장 어둡던 시대, 폭력과 억압, 더러운 소리들로 사람들을 기죽게 하면서 거들먹거리던 악당들이 횡행하던 시대, 그 시대가 왜정시대였고 박정희 군사독재 시대와 그를 잇는 폭력패들이 걸터듬던 시대였던 것이다. 이런 어두운 시대에 문학예술은 별빛처럼 떠오르게 되어 있다. 김봉준 화백이 다시 이런 빛을 내며 떠오르는 텃밭은 무엇일까? 틀림없이 이명박 정부 패들이 저지르는 더러운 악업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나는 읽는다. 이명박은 2012년대 오늘날 우리 사회를 새까맣고 어둡게 한 천박한 부라퀴의 하나다. 박정희, 전두환을 가장 확실하게 잇는 어리석은 날강도 이명박, 그에게 떨어질 합당한 복이 있을진저!
3. 돈 또는 폭력배 하느님과 착한 마음
오늘날 세계 만민이 믿는 신은 오직 하나 ‘돈이라는 이름’으로 몸을 바꾼 폭력 조직 신이다. 돈은 세계 인민들 모두를 빚 올가미로 묶어 노예로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이른바 ‘빌더버그’니 ‘로스차일드 일가’니 하는 은행 마피아들 행튀를 보면 그들이야말로 오늘날 악마 조직의 올림포스 신전에 자리 잡은 제신들이다. 올림포스가 지금은 미국의 월가니 ‘뱅크 어브 아메리카’니 하는 따위 악령패들의 본거지로 옮겨 앉았다. 이들의 정확한 몸꼴 이름을 적어보이기로 한다. 몬산토, 헬리버튼, 록펠러, 벡텔, 제너랄 엘렉트리, 쉘, 엑슨, 골드만 싹스, 체이스 맨하탄, 디피, 뱅크 어브 어메리카, 이들 돈 놀이꾼들이 전 세계에 다리를 걸쳐놓고 세계인민 모두를 돈놀이 노예로 만들어 놓았다. 전 세계 사람의 빚쟁이화가 그들이 노리는 악의이다. 이들 돈놀이 꾼 패를 더 보태면 이렇다. 더 지엠, 방크 어브 아메리카, 시티 뱅크, 월 앤드 마트, 윈 딕시, 피 앤 지(Proctor and Gamble), 맥도넬 더글러스, 네슬레, 허쉬(HERSHEY'S), At and T, 사우스 웨스턴 벨이 그들이다. 지금도 세계 어느 곳이든 벌어지고 있는 모든 전쟁에 돈을 대는 이들은 바로 이들 후안무치의 악마 조직들이다. 세계 제 1, 2차 대전에 그들이 양 쪽에 다 돈을 대고 이자 따먹기로 세계를 공략한 이야기는 쑹 홍빙의 『화폐전쟁』 (랜덤하우스, 2009)을 참조하면 그게 잘 보인다.
그들은 오직 그들 자기들 패 몇 놈들만 위해 돈을 찍어 세상 사람들 모두를 포획한다. 각국 정부의 대통령이니 수상이니 하는 따위들이 실은 모두 다 그들의 하수인이자 지옥 안내자들일 뿐이라는 것도 여기서는 밝혀내고 있다, 이 나라 대통령, 청와대에 앉아 있는, 이명박이라는 사람도 실은 그 허름한 하수꾼 졸개일 뿐이라는 것도 금세 알 수가 있다. 오늘날 폭력배들은 어떤 꼴 새로 사람들을 겁주고 억압하는가? 2012년 8월 2일자 <한겨레> 신문 13쪽에 이런 기사가 우리 눈을 찌른다.
“‘주민 목숨 걸고 포탄 치울 때 정부는…’
폭격장 폐쇄 7년째 매향리의 한숨
‘4년 동안 주민들이 포탄 3만개를 목숨을 걸고 건졌는데 정부는 도대체…’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군 전투기들이 포탄을 퍼붓는 경기 화성시 매향리 농섬. 지난 31일 물에 바진 갯벌을 따라 2km를 걸어 도착한 섬 곳곳에는 여전히 포탄이 박혀 있다. 밤낮 없는 폭격으로 섬이 3분의 1로 줄어들고 '민둥산‘이 된 정상에는 10여 그루의 앙상한 매화가 시들시들하다. 포연 대신 매화 향기가 퍼지길 바라는 주민들의 갈망이지만 현실은 정반대다.………가운데 줄이고……채인석 화성시장은 ’폭격장 때문에 매향리 주민들은 50여 년간 일방적으로 피해를 당했다.’며 ‘서울 용산기지는 정부가 전액 토지매입 비용을 대주면서 화성시에는 돈 내고 땅을 사가라는 것은 대단히 비역 차별적이고 형평에 안 맞는다’고 말했다. 화성/글 홍용덕 기자 ydhong@hani.co.kr”
김봉준 화백의 그림 가운데 ‘김미선’이라는 청순한 소녀 얼굴 그림이 하나 있다. 이 그림은, 몇 년 전,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기지에서 굴러다니던 탱크에 깔려 죽은 ‘김미선’이라는 대한민국 소녀와 이름이 같다. 그게 그것인지 아닌지 따질 필요는 없다. 어째서 미군 기지는 이 나라 도시 한 복판과 또 국토 가운데에 와서 몇 십년동안 미국군인 떨거지들을 이 나라에 풀어놓고 거들먹거렸으며, 이 국토 가운데 쯤에다가는 저렇게 끊임없이 포탄을 퍼부어 산야를 피폐하게 하였는가? 왜 그들은 저렇게 포탄을 많이 만들어 쏘고 또 쏘는가? 누굴 죽이려고 저런 포탄과 무기들을 생산하는가? 무기란 사람 잡는 기계가 아닌가? 이런 무기 장사꾼과 돈놀이꾼들이 미국을 지탱하는 힘이라면, 이미 그들의 도덕성은, 거덜난지가 오래된 셈이다. 그러니 그들이 믿는다는 여호와 하느님과 기독교 하느님이란 필경 폭력배 뒷배나 보는 그냥 별 볼일 없는 관념일 뿐이다. 그들이 쏘아 댄 포탄으로 망가진 이 나라 토지 몸꼴을 이 신문 이야기로 조금 더 옮겨 보인다. 미국군인들이 수십 년 동안 포탄을 쏘아댄 결과가 어떤지, 그 국토가 어떻게 더럽혀졌는지, 2일자 같은 신문 기사에 이어진 내용으로 보이면 이렇다.
“국방부 쪽은 앞서 지난 27일 화성시에서 ‘농섬 오염 추가 정밀조사에서 48개의 조사지점 중 39곳에서 중금속인 납과 카드뮴, 구리가 허용기준치를 넘었다고 보고했다.’ 납의 최고 오염 농도는 이 지역 허용 기준치(200mg/kg)보다 59배, 카드뮴은 17배, 구리는 14배를 넘었다. 국방부는 바지선을 이용해 오염토양을 육지로 반출하는 오염 제거안을 제시했다. 농섬의 오염토양 면적은 7949m2로, 간조시 드러나는 곳을 포함하면 섬 전체가 해당된다.”
미군부대가 왜 이 나라 중부지역 한 복판에 떡 자리 잡고 머물러 있게 되었는지는 상당한 역사적 논증이 필요할 터이다. 그러나 일단 그들이 태평양 지역방위를 위해 엄청난 군사조직을 여기 투입하여, 이 지역 각 나라를 힘으로 위협하면서, 겉으로는 동맹이다 우방이다 각종 책략을 동원하여 이 나라 지성을 완전히 초토화시켜 놓았다. 미국을 비판하거나 그들의 비행을 따지는 일은 그것 자체가 범죄행위로 근 반 백년을 넘게 우리나라 지성인들을 세뇌시켜 왔다. 그들이 겉에 내세우면서 늘 하느님을 부르며 기도하는 셈속에는 이런 폭력배 뒷배 신인, 돈과 이스라엘 유대민족이 만든, 폭력신이 도사리고 있다.
1910년도에 이 나라는 왜놈들에게 겁탈 당해 식민지 백성으로 수모를 36년 동안이나 견뎌야 했다. 미국 대통령 시어도르 루스벨트가 용인한 왜놈들의 한국지배 원리(이것은 아직도 미국 내에 살아있는 원리로 ‘캐넌 프로젝트’라 불린다고 알려졌다)에 따라서 한반도는 견딜 수 없는 피살과 침탈, 착취와 억압을 받았다. 1910년도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곽 찬 36년, 이 시기에 예술가들은 여러 방식으로 국외로 빠져나가기도 하였고, 국내에서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왜적들에게 저항하였다. 수많은 시인과 작가들이 이 때를 노래로, 이야기로, 증언하면서 우리가 겪어야 한 설움과 아픔을 기록하였다. 이 때에 보인 시 작품 가운데 이른바 신화처럼 아름답게 울리는 시가 아주 많았다. 대구에서 태어나 독립운동을 하던 형님을 따라 중국으로 갔었던 이육사(李陸史1904-1944)의 생애는 참으로 씩씩하고도 당당하였다. 먼저 그의 시 한 편을 보이기로 한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광야⼀
한국 근•현대 사람들 마음에 불꽃으로 떠오른 이야기에는 이육사의 이 시편 「광야」에 나오는 ‘초인’이 있다. 초인이란 예사 사람이 아닌, 착하고 힘이 강력하되 남을 괴롭히지 않는 인간적 미질을 모두 지닌, 그런 인물이다. 이인(異人)이라고도 불러 특별한 능력을 지닌 사람에 대한 기대치가 오래 전부터 착한 사람들 마음속에는 늘 있어왔다. 이유가 뭘까? 이 나라 백성들은 늘 남의 나라에 부대끼며 살면서, 못된 놈들 등쌀을 견디기 힘들어 한, 역사적인 질곡 햇수가 길고도 깊기 때문일 터이다. 영웅에의 기대! 영웅이란 그러나 누구일까? 실제적으로 그런 영웅은 누구라고 읽어야 할까? 각 왕권을 장악하였던 왕이나 그 권력을 확장하여 크게 영토를 넓혀놓은 인물을 영웅이라 부를 수 있을까? 나는 그게 아니라는 결론에 생각의 닻을 내린다. 참된 영웅이란 어쩌면 작가나 예술가들이 작품 속에 그려내는 인물로 신화적인 꿈속의 인물일 뿐이다. 지상에 가끔씩 나타나 남들의 아픔과 설움을 달래어 주었던 인물들은 따지고 보면 우리 이웃 사람 가운데 착한 한 사람이었고, 그는 이웃 사람들의 아픔을 그대로 봐 넘기지 못하는 바른 눈길이 있었다. 1909년도였나? 꾀죄죄한 왜적 이등박문을 총으로 쏘아 죽인 안중근 같은 이도 실은 자기 삶을 철학적으로 선택하여, 깨끗하게 굽은 사람살이를 바로 잡은 영웅이었다. 우리는 여전히 그를 잊고 있지만 그런 영웅은 오늘도 어딘가에서 묵묵히 숨 쉬고 있고 김봉준 화백이 그려 보인 춤꾼 속에서 꿈틀대고 있기도 하다. 탈춤~! 탈은 우리가 마음속에 그리는 풍요의 신을 상징한다. 겉보기에 무섭거니 우습고 우람이 이 탈 속에 얼굴을 가린 인물이 나와 농경민족이 오랫동안 이어 내려온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지신을 밟거나 조왕신에게 비나리로 풍요를 빈다. 그런 신은 우리를 도덕적으로, 바르게 살 길로, 이끄는 힘이다. 동양 사람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믿어왔던 용신사상(龍神思想) 에는 우리들 마음속에 거느린 용을 향한 믿음이 있었다. 용신사상!
“무엇보다도 용은 우리 내부에서 살아 움직이는 유체이다. 그것은 빠르고, 펄쩍 뛰는 생명운동의 상징이다. 뱀과 같이 우리를 통과하기도 하고, 우리 내부에 숨어서 똬리를 틀고 기다리고 있는 용은 그 펄쩍 뛰는 생명이다. 우주도 그와 같다. 인간은 처음부터 그의 내부에 있는 ‘힘’, 잠재력을 뜻하는 용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 그리고 또한 용은 밖에도 있었다. 인간은 그 용을 어쩌지 못한다. 그 용은 잠자는 듯 누워 있다가 기대치 않게 뛰어나올 태세를 항상 취하고 있는 유체로, 파문을 일으키는 잠재력이다.”
신라적 스님 일연이 쓴 『삼국유사』 헌강왕(憲康王) 조에 이미 이 용신 이야기가 나온다. 「처용가」나 처용무 등속의 예술적 자료들은 모두 디 신이하고도 특이한 삶의 이적들을 기록한 내용들이었다. 이 예술자취들에 대한 해석방향이 여러 곳으로 흘려나가기는 하지만 우리들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생명력에 대한 믿음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흘러넘친다. 엉뚱하게도 영국의 작가 디 에이치 로오렌스가 이것을 지적하여 놀랍기는 하지만 그가 창작으로 내세운 『날개 돋친 뱀』 속의 신화 분석 또한 범연치는 않다. 사람들의 생명력은 어쩌면 무한한 것인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사람을 이끌어줄 신을 만들어 왔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누군가가 새로운 신을 만들어 사람을 지배한다.
앞에서 이미 밝혔듯이 우리 시대의 하느님은 돈 그 자체로 살아 있다. 유대인이 만들어 전 세계로 뿌려댄 기독교 하느님이나 우리 조선 사람들이 믿었던 범신론적인 자연신이나 이 돈이라는 근대 신 앞에는 쪽도 못 쓴다. 게다가 이 ‘돈신’은 곧바로 폭력과 이어져 있어서 이 돈신이 강요하는 말이나 법규에 따르지 않으면 곧바로 지옥으로 떨어져 나간다. 앞에서 옮겨와 보여준 미군들의 포탄 쏘기란 실은 돈신과 관련이 없을 수 없다. 실탄 한 발에 얼마씩이나 하는 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다. 쏘아 날리면 누군가가 죽고 그 실탄 값은 그것을 만든 무기장사치들 은행 구좌에 들어간다. 포탄이나 실탄을 쏘게 만드는 정부라는 집단은 포탄 값으로 돈을 무기장사꾼에게 집어넣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시대에 돈놀이꾼들은 곧바로 악마이자 부라퀴이며 더러운 폭력배들이다. 누가 나쁜 악마이고 착한 신인가? 평화를 꿈꾸는 이들은 이런 나쁜 악마들의 움직임에 대해서 늘 똑바로 보고 깨우치는 생각자리를 확보해야 한다. 눈 똑바로 떠 제대로 된 예술가나 시인, 그들이야말로 그런 폭력배 하느님이나 ‘돈신’에게 맞서는 유일한 영웅들이다. 이 돈을 찍는 사람들이 오늘날 곧 신 하느님이자 부라퀴, 악마들이다. 이런 악마들의 몸꼴을 제대로 벗겨 보이는 이들! 그들이 영웅이자 예술가들이며 진정한 시인이라는 나의 진술에 복이 있을진저!. 김봉준 화백이 꿈꾼 촛불 이야기 하나를 보태기로 한다.
마음이 어두워 힘겨운 사람들은 늘 옆에 촛불을 밝힌다. 이 정권이 들어서서, 미국 쇠고기 수입과 관련된 시시껍절하고도 던적스러운 정치적 하수인 노릇을 하던 대통령 이명박 씨 정책 결정에 반대한, 민중의 촛불 집회가 광화문 쪽에서부터 엄청난 열기로 번져 나아갔었다. 촛불은 기도의 일종이다. 그리고 마음 불꽃을 사람들은 그 촛불로 대신하여 보인다. 흠이 많아 자신 없는 정권일수록 이런 민권의 촛불 밝힘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이 촛불은 당대에 권력 집행자들의 위협으로 꺼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아직도 타고 있는 촛불이다. 김봉준의 작품 「촛불」에는 광장 한 복판에 촛불을 밝힌 사람이 있다. 이 민중의 촛불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이다. 그러기에 그 환한 주위를 넓게 차지한 촛불행렬이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돈만 모으면 다들 살 길이 열릴 것으로 믿고, 죽을 둥 살 둥 돈이나 모으던 정신 나간 이권 패들이야 정권 패, 늘 뒷구멍으로 잇권 질에 마음을 다 두고 살았던 패들은, 늘 그런 촛불이 두렵겠지만, 아직 지금도 광화문이나 시청 앞 광장에는 민중의 촛불들이 활활 불타고 있다. 1860년대 후반 저 전라도를 위시하여 농민들의 참 살이 뜻을 모아 지폈던 동학의 불꽃도 실은 다 여기 아직도 살아 꿈틀대는 이 도심 촛불에 이어져 있다. 그것이야말로 사람들이 지핀 마음불이기 때문이다. 권력자들이나 탐욕스런 사람을 제켜놓고 마음 통하는 이들끼리 모여 춤추고 노래하며 깔깔깔 맛깔스레 웃는 물상, 짐승, 나무나 풀, 그런 푸새 밭에 모인 사람들의 흘러넘치는 화기와 사랑, 나눔 정신을 전하고자 하는 이들이 예술가들이다. 그들의 속뜻에는 늘 이렇게 불타는 저항과 꽃동네 꿈이 있다. 21세기 폭력배들은 이미 200여 년 전부터 전 세계 민중에 그 피 빨이 흡판을 내리꽂아 놓은 부라퀴 돈놀이꾼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은, 아니 그냥 그런 악의가 없는 물상이나 사람들은, 착한 눈빛으로 서로를 보고 웃음을 던지며 따뜻한 마음 꽃을 나누며 생각을 보낸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곧 신화가 살고 있는 마을이다. 빛과 소리와 냄새 그리고 느낌은 모두 다 이런 곳과 때에 겹쳐 어우러진다. 바로 그 메시지가 바로 김봉준 화백의 작품 「촛불」이 나타내고자 하는 신화적 이야기이자 메시지라고 나는 읽을 생각이다. 어떤 곳이든 공간은 시간을 빨아들여 자기 자리를 정리한다. 그게 곧 미술이 갖는 신화적 마술이다.
4. 맺는 말
1930년대 시인 이상화(李相和 1901-1943)는 그의 대표 시작품 「나의 침실로」의 제목 바로 아래에 붙인 덧말로 이렇게 써놓았다.
⼀가장 아름답고 오⼀랜 것은 오직 꿈속에만 있어라. 「내말」⼀
열 두 연으로 된 이 시는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는 호격으로 되어 있다. 나의 침실로 빨리 달려오라고 애타게 외쳤던 그 싯적 자아의 몸부림은, 당대를 포위하고 있던 절대폭력에 대항할 유일한 방법으로, 예수의 생애 방식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싶어 했던 것이다. 신약 성경에 있는 예수의 생애는 다섯 복음서에 잘 기록되어 나타난다. 유대인들이 꿈꾸던 신적 기대이자 영웅 기다림일 터이다. 이상화는, 이렇게 적들에게 죽었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난, 예수 행적을 우리 민족에게 전해주고 싶어 했다. 왜놈들의 악의와 행패로 캄캄한 어둠 속에 갇혀있던 우리민족과 이 나라는 곧 되살아난다고 그는 읊었다. 그것은 꿈이자 기도이며 신화적 창작행위에 속한다. 그런 꿈을 읊으면서 맨 먼저 던진 말이 바로 저런 꿈 이야기였던 것이다.⼀가장 아름답고 오⼀랜 것은 오직 꿈속에만 있어라. 「내말」⼀
꿈속에만 아름다운 것이 들어 있고 또 오래고 귀한 것이 들어 있다는 이 진술은, 참기 힘겨운 시절을 버티고 이겨 나아갈, 마음 쌓는 내공의 힘 모으기와 아주 잘 맞아 떨어진다. 눈에 띄게 부라퀴(악당)들이 설치는 시대일수록 거기 대응하는 전략과 전술은 쉽게 정해질 수가 있다. 1930년대나 1970년대는 바로 그렇게 눈에 띄는 부라퀴들이 횡행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겉보기에 아무런 폭력도 부조리도 없어 보이는 오늘과 같은 이런 시대에 작가나 예술가들의 행보는 흐릿해질 수밖에 없다. 누가 악당인지 누가 진짜 나쁜 짓을 저지르는지 모르게 우리들 몸속에 파고 든 악당의 행악이 있다면 그건 참 다루기 어려운 문제와 맞닿는다. 뿐만 아니라 사회 바뀜이 정신없이 복잡하고 그에 따라, 뭔가 되돌릴 수조차 없이 인간관계가 뒤엉켜 더럽혀져 있으면 있을수록, 사람들은 꿈꾸는 몸 갖춤으로 머리를 수그릴 수밖에 없다. 이런 시기에 예술 활동을 한다는 것은 이중으로 어렵다. 1930년대나 1960-70년대에는 눈에 띄는 폭력배들 행패가 있었다. 그랬기에 당대에 나온 많은 뛰어난 예술 작품들을 오늘에 볼 수가 있다. 그런데 2012년 오늘날의 이 사회는 어떠한가?
김봉준 화백이 그림으로 내린 이 사회 진단에 의하면, 우리 시대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만만찮게 꿈꾸도록 만드는 설화, 전설 및 신화의 시대이다. 어떤 악령이 다가와도 결코 깨지거나 흐트러지지 않고 반드시 우리가 지키고 확보해야 할 풍요로움의 길은 우리가 치열하게 열어가야 할 모든 예술의 명제일 뿐만 아니라 미래 세대에게 짐 진 의무이기도 하다. 잘 사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 계속해서 그 뜻ㅇ 무엇인지에 대해서 물어야 한다. 남의 노예가 되더라도 배만 부르면, 그래서 자주 두들겨 맞는 일이 있더라도, 배만 부르면, 기라면 기고 엎드리라면 엎드리는 그런 삶도, 잘 사는 삶인지 자주 물었어야 하고 또 앞으로도 물어야 한다. 개발 이념! 이 개발독재는 1960년대 박정희와 그의 뒷 군부독재 패들 만에 의해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박정희 그가 저지르던 개발이라는 이념은 돈놀이꾼들이 땅과 산야 바다를 파헤치며 메우고 깨부수면서 뒤로 흘러 쌓여 모이는 돈 긁어모으는, 재난 자본가들이 일으킨, 식탐주의 실상의 한 꼴 새였다. 자본 곧 돈 곧 신을 기축으로 하면서 사람들을 거기 종속시키는 사회개편은 나오미 클라인의 위 저술에서 일목요연하게 드러난다. 문제는 우리 한국이라는 나라다. 미국에 본거지를 둔 이 돈 놀이꾼들은 어제도 그제도 그그저께도 오늘도 담날도 또 담날도 신인 돈에 이자를 붙여 끊임없이 신의 새끼를 칠 것이다. 그것을 깨우친 예술가들은 각기 그가 지닌 무기를 들어 표현한다. 색으로 빛으로 또 소리나 맛으로 그랬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는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며 그들은 노래를 부른다. 정지용이 읊은 시편들 가운데는 가곡으로 작곡되어 애창되는 노랫말 시가 많다. 앞에 옮겨놓았던 「고향」도 많이 노래 부르는 가사로 살아 있다. 1980년대까지 남한 정부는 월북 작가들의 작품을 읽거나 지녀 갖지 못하게 통제하던 때가 있었다. 남북 분단을 정치적 책략 수단으로 이용하였던 남북 정권 패들은 오늘까지도 늘 그렇게 꾀죄죄하였고 또 옹졸하였다. 정권의 이익을 챙기는 것을 일로 삼는 정치패들이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 같은 날강도 패들일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늘 금서나 금지곡목 금지된 그림을 설정한다. 이따위 어두운 꼼수는 근현대 한국 역사의 불행한 내상으로 자리잡혀오고 있다. 그런 시대에 정지용은 월북 시인이어서 그 노랫말을 마음 놓고 부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의 「고향」 노랫말을 아동작가 시인 박화목이 다시 지어 부르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두 동강이 난 이 나라에서는, 아직도 노랫말이나 시조차 눈치를 보거나 숨죽여 부르거나 발표길이 막힌 설움을 겪어야 한다. 정지용의 노랫말이나 시집 갖기를 두려움 속에 지녔었다는 걸,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볼 수가 있다. 월북, 월남!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벗어나야 할 꽃동네에의 그리움이다. 정지용, 그의 아름다운 시 한 편 내용은 이렇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 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러치도 않고 어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 도란 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향수(鄕愁)⼀
(1946년도 판 정지용 시집, 건설출판사, 38-9쪽)
정지용은 우리말의 맛깔스럽고 아름다운 가락을 찾아내어 시에 맛을 낸 뛰어난 이 나라 시인이었다. 그와 맞먹거나 버금가는 시인이야, 당대에나 지금도 상당히 많이 있지만, 그가 우리 말글을 그렇게 맛깔스럽게 다룬 재능에는 가히 따를 이가 드물다는 게 한국 현대 시문학사가들의 판단이다. 이런 시를 김봉준 화백에 대해서, 내가 뭔가 헤매며 중언부언하는 끝 마디에 넣는 이유가, 바로 이 이야기의 결론이다. 정지용이나 김봉준이나 모두 다 우리 시대를 꿈꾸며 마음 앓이를 심하게 하는 동격의 예술가라는 뜻을 전하고 싶다. 그런 내 정성이 이렇게, 유행이 뒤진 것처럼 보이는, 가곡 한 수를 끼워넣은 바로 그 이유이다. 이 화가의 이번 전람회 행사를 진심으로 축하한다. 아주 좋은 일들이 이 그림들로 하여 화백 본인에게는 물론이고, 여기 모인 모든 이들에게도, 또 우리 시대를 사는 모든 인총들에게도 널리 퍼져 나가기를 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