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사연 항일독립운동 역사 살아 쉼쉬는 곳
편편한 평야 많아 초기 한인 정착민들 이주
이상설 이동후 등 우국지사 독립운동 근거지
류득공 영토 잃어버린 안타까움 '발해고' 엮어
연해주, 러시아와 공동 발해유적 발굴작업 한창
우수리스크(Ussuriysk)는 블라디보스토크 북쪽 약 112㎞ 지점에 있으며, 항카호(湖) 남쪽의 저지대에 위치하며, 동해로 흘러드는 우수리강 지류에 자리한다.
우수리스크는 늪지대라는 뜻으로 지대가 낮다는 의미다. 우수리스크 지역은 보편적으로 편편한 평야가 많아 논농사나, 목축하기 편해, 초기 한인 정착민들의 이주했던 곳으로 아픈 사연과 항일독립운동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최근 재이주 고려인들의 활동중심지역으로 많은 고려인들이 모여 살고 있다. 또한 중국국경 지대로 항일투쟁 현장으로, 이상설, 이동휘, 이동녕, 홍범도 등 우국지사들의 독립운동 근거지였으며, 이상설이 숨을 거둔 곳이다.
군납업으로 많은 재산을 모아 의병대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한 최재형이 일본군에게 잡혀와 총살당한 곳이기도 하며, 1917년 고려족회 창설, 후일 대한국민회의로 발전해 최초의 독립운동을 했던 지역이다.
1917년 고려족중앙총회가 설립한 사범전문학교가 있으며, 이곳은 국내에서 카프파로 활동하다 망명한 조명희가 강의했던 곳으로 지금도 초급사범대학로 사용하고 있다.
시베리아 철도와 하얼빈·무단강(牧丹江)·둥닝(東寧)을 연결하는 철도와의 분기점으로, 극동지역의 경제적 중심지를 이루고 있는 산업도시이며, 중국국경과 접경지대로 연해주일대에서는 가장 큰 시장을 지닌 상업도시로 이루고 있다.
발해시대에 5경15부의 하나인 솔빈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그때 지명은 쌍성자였다. 발해의 유적이 곳곳에 흩어져 있고 옛 이름은 니콜리스크-우수리스키 (Nikol’sk-Ussuriiski), 보로실로프 (Voroshilov)도 불렸다.
연해주를 알려면 발해사는 한번 읽어야 한다. 연해주를 여행하고 글을 쓰면서 조선 정조 시대를 넘나들었다. 규장각검서(奎章閣檢書)로 일하던 실학자 류득공이 발해에 관한 체계적인 역사서인 '발해고'(渤海考)를 남겼기 때문이며, 또 우리의 뇌리에 기억되는 이유는 KBS에서 '대조영'이란 사극으로 발해 건국을 주제로 인기리에 방영됐기 때문이다.
| 발해성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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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가 햇빛을 보게 된 배경을 류득공의 발해고 때문이다. 그는 서술에서 “(고려가) 끝내 발해사를 쓰지 않아서 토문강 북쪽과 압록강 서쪽이 누구의 땅인지 알지 못하게 돼 여진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고 거란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고려가 마침내 약한 나라가 된 것은 발해의 역사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니 크게 한탄할 일이다”라고 통탄한다.
류득공은 조선과 중국 및 일본의 역사서 24종을 참고해 발해에 관한 역사서 발해고를 저술했다. 조선 정조 8년(서기 1784년)에 1권본을 완성했고, 나중에 내용을 대폭 수정 보완해 4권본을 완성했다.
발해고는 '신당서', '요사', '청일통지'에 기록된 발해의 지리에 대해 인용, 4권본에서는 내용이 대폭 증가했다. 류득공은 '신당서'에 기록된 발해의 5경, 15부, 62주에 대해 인용했다.
발해의 5경은 상경, 중경, 동경, 남경, 서경이며, 지금은 상경은 중국 흑룡강성 영안시 남쪽의 발해진으로 보며, 중경은 중국 길림성 화룡현 서고성이며, 동경은 중국 길림성 훈춘시 팔련성이며, 남경은 함경남도 북청군 청해토성이며, 서경 압록부는 지금의 압록강 근처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발해고 1권본 기록에는 5경 중 상경 용천부는 지금의 영고탑이고, 중경 현덕부는 지금의 길림이고, 동경 용원부는 지금의 봉황성이고, 남경 남해부는 지금의 해성현이며, 서경 압록부는 지금의 압록강 근처 기록돼 있다.
후에 발간된 4권본에서 상경을 영고탑, 중경을 길림, 동경을 경성, 남경을 함흥, 서경을 강계 동북 200리의 압록강 건너편으로 기록되어 혼돈이 오기도 한다.
현대 역사학자들의 첨단장비를 사용한 발표여서 정확도에 대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으며, 특히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과 맞물려 우리의 역사가 점점 왜곡되고 있고, 더군다나 일제 강점기까지 중간에 끼어들어, 더더욱 우리의 역사의 왜곡이 심해 진 것 갔다.
15부는 용천부, 현덕부, 용원부, 남해부, 압록부, 장령부, 부여부, 막힐부, 정리부, 안변부, 솔빈부, 동평부, 철리부, 회원부, 안원부인데 지금의 연해주가 회원부, 안원부, 안변부, 솔빈부, 동평부 등이었다.
발해가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이 지난 뒤인 698년에 건국되며, 대조영 왕을 '가독부'(可毒夫)라고 칭하고, 지금의 중국 지린성 일대에 세워져 한반도 북부, 만주 및 러시아의 연해주 지역을 장악했던 나라이며, 주변의 말갈, 거란족, 해족 등 소수민족을 규합해 건국했다.
926년에 발해가 무너지는데 백두산 화산폭발로 인한 국가적 재난, 그리고 말갈과 이원화 다민족 체제 구성원과 왕정의 불안정이 등이 종말을 고한다.
유득공은 474년의 고려사에, 발해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많은 영토와 역사적인 명분을 잃어버린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나머지 ‘발해고’를 엮었다. ‘발해고’의 중요한 가치는 우리민족의 역사 무대를 발해의 영역이었던 만주 일대와 연해주로 확장시킨 것이다.
| 고려인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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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는 한반도 면적의 6배에 달하는 만주와 연해주 지역을 차지한 해동성국이었다. 발해 성터에 대한 발굴이 1933년에 일본의 동아고고학회(東亞考古學會)가 동경성(東京城)을 발굴하면서 체계적인 학술조사가 시작됐다.
만주 지역에서 80기 이상, 북한에서 20여기, 연해주에서 28기 정도가 돼 전체 숫자가 128기를 넘는다. 지금 연해주에서는 발해유적 발굴사업이 한창이다. 러시아와 함께 공동사업으로 진행되고 있다.
여름방학을 맞아 자녀들과 발해유적을 찾아 멀지않은 나라 연해주 발해유적을 만나러 가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