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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이성대로'가 아닌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로마서 11장 34-36절 / 34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36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34-36에서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36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이라고 교회에 말씀해 주십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에 있는데, 하나님의 자녀는 어떠하겠는지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삼고 그들에게 주시는 은혜로운 선물인 하나님의 구원을 이방인들에게도 베풀어주셨습니다. 비록 이 과정에서 유대인들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곡해하여 은혜를 배척하는 악한 죄에 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언약을 인해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과 부르심은 결코 철회되는 일이 없으니,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언약에 신실하십니다. 여기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위한 구원에 하나님의 은혜의 절대 주권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바울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높여 찬양하였으며,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의 크심에 경외하며, 하나님의 정하심과 방법을 사람이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닌 심오함에 경탄하였습니다. 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갖고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살다가 자신의 근원인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에 소망을 갖습니다.
우리 또한 바울이 말한 바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듭남 – 중생 - 이 하늘로부터 주어진 생명으로 다시 태어남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우리는 의문을 갖지 않으며 의심하지 않습니다(참조. 요 3:3-8). 그러한 우리에게서 있는 특징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갖고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사는 것인 하나님의 은혜의 절대 주권에 우리의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자기 이성대로 신앙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는 신앙에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는 신앙에 있는 성도에 의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그분의 ‘참된 교회’를 대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온 이스라엘에게서 하나님의 참된 백성을 남기신 ‘남은 자’를 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부르시는데, 그렇게 불러 모은 자들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와 동일한 하나님의 아들들로 ‘남은 자’에 있게 한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알고 받들어 따르며 섬김에 있은 것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아들들인 특징인 거듭남에 있는 새생명으로 낳으신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알고 받들어 따르며 섬김에 있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있어갈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에게서 구약의 이스라엘을 비롯하여 교회의 역사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해 주는 거울 – 본보기 - 이 됩니다. 하나님의 복음인 그리스도의 이름의 전파를 통해 부름을 받아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의 신앙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로서의 참된 교회인지,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복음인 그리스도의 이름의 전파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로 휩쓸려 들어오긴 했지만 ‘자기 이성대로’ 신앙하는 것에 있는 거짓 교회인지를 말입니다.
그 분별을 구약의 이스라엘에게서 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어 그에게 주실 아들을 통해 그와 함께 하는 그의 후손을 크게 번성시킬 것을 뜻하셨음을 알리시고 이를 그의 믿음으로 있게 하셨습니다. 그에 따라서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을 낳게 하셨으며, 그 이삭을 통해 이스라엘을 이룰 열 두 지파가 될 열 두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 열 두 아들에 의해서 형성되는 각 지파는 크게 번성해 나갔으니 야곱의 아들 요셉 때에 야곱의 가족 70명1)이 애굽에 들어가 고센 땅에 정착하고 그곳에서 430년의 세월을 보내면서입니다(출 1:1-7).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을 애굽에 아주 머물게 하지 않으셨으니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끌어가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광야에서 40년을 보내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곳에서 시내산 아래에 이스라엘을 집합해 있게 하시고 모세를 시내산 위로 올라오도록 불러 그에게 하나님의 계명인 십계명을 주어 이스라엘에게 들려주게 하였습니다. 이 십계명을 이스라엘에게 들려줌은 광야생활 40년을 마치고 마침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시점에 있게 될 때에 다시 한 번 있게 됩니다. 이는 출애굽 세대인 이스라엘 제1세대는 광야에서 다 죽고 광야에서 출생한 이스라엘 제2세대만 남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와가 그와 함께 한 갈렙과 더불어 이끌게 됩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광야에서의 40년 세월에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주신 십계명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음에 있었습니다. 이때 받은 하나님의 계명은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여서 받게 될 하나님의 통치이기도 합니다. 그러한데, 이스라엘은 광야생활 40년에서 이 십계명을 받은 후 펼쳐지는 하나님의 백성된 삶을 보내지를 못했습니다. 그때의 일을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말해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0:1-11 / 1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5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6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7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①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8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②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9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③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④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11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사도 바울은 이때에 있은 일을 ‘우리의 본보기’가 되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있은 ①우상숭배 ②음행 ③주를 시험함 ④원망, 이런 일이 왜 있었는지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율법에 나타내신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름에 있는, 곧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에 그들이 주 하나님께 가진 믿음이 있지를 않고, 자신들에게 율법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생각대로’, 곧 ‘자기 이성대로’,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움직인 것에 있습니다. 그로 인해 출애굽한 이스라엘 세대는 광야에서 모두 죽었으니 곧 율법의 정죄 받음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한데, 이스라엘 제2세대는 자신의 부모, 자신의 조상들이 받았던 하나님의 계명을 그들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할 것을 명령 받았음에도 그들 또한 조상들이 걸었던 악행을 그대로 따르는 죄에 있었습니다. 사사 시대에서의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함”(삿 2:11; 3:7, 12; 4:1; 6:1; 13:1)에 있는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17:6; 21:25)가 그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르보호암 왕 때 분열된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 모두, 곧 온 이스라엘에게서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이 여호와이신 하나님을 떠나 악한 죄에 있으므로 그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빼앗아 나라를 찢어 여로보암에게 열 조각을 갖게 하실 것을 작정하심(왕상 11:31)에 따라 솔로몬이 죽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 위에 올랐을 때 다윗 왕조의 유다 지파와 형제 지파인 베냐민 지파 외의 나머지 열 지파는 여로보암을 따르며 북왕국 이스라엘을 세웠습니다. 여로보암은 처음에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건축하고 수도로 삼아 통치하였으나 애굽의 시삭왕이 이곳으로 원정와 공격하므로 얍복 강가의 부느엘(브니엘)로 옮겨 성을 건축하고 통치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자신들에게는 하나님을 모실 성전이 없으므로 백성을 위하여 성전을 지어 주지 않으면 백성들의 마음이 유다의 예루살렘에게로 가 있게 될 것이므로 절기 때마다 예루살렘을 찾아가 성전에 제물을 바칠 것이고, 이 일이 반복된다면 필연적으로 백성들의 마음이 남왕국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기울어져 그를 다시 자기들의 왕으로 인정하고 자신을 죽일 것을 염려하여 벧엘과 단에 산당을 짓고는 금송아지 둘을 만들어 각각 그곳에 두고 레위 자신이 아닌 일반 백성으로 제사장으로 삼아 섬기게 하는 우상숭배에 있게 하는 악을 행하였습니다. 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땅 위에서 끊어져 멸망할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작정되었는데, 그렇게 시작된 여로보암의 죄에서 그의 뒤를 잇는 열왕들이 따라 하여 똑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이에 거듭하여 말씀해 주시어 그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내가 너를 티끌에서 들어 내 백성 이스라엘 위에 주권자가 되게 하였거늘 네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하여 그들의 죄로 나를 노엽게 하였은즉 …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한지라 … 이스라엘 자손이 여로보암이 행한 모든 죄를 따라 행하여 거기서 떠나지 아니하므로. (왕하 15:24, 16:2, 17:22)
이렇게 거듭하여 하신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북왕국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의 악한 죄를 그의 후손들이 그대로 따라 하는 것에 있은 것을 북왕국 이스라엘의 열왕들과 그들의 통치를 받는 백성에게서 보는데, 또한 그 모습을 남왕국 유다도 따라 하고 있었으며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이르기까지도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보게 되는 악한 죄는 북왕국 이스라엘에 한정하지 않고 남왕국 유다에게로 확장되어 온 이스라엘이 범하는 악한 죄에 있는 것이며, 이는 또한 이스라엘에서 그치지 않고 더욱더 확장되어 온 세상에서도 보게 되는 같은 모습에 있으니 이방인들이 우상숭배 하는 그 악한 죄를 따라 하는 모습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곳의 교회에서도 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속으로도 파고 들어와 있습니다.
하여, 우리네 주변의 교회도 그렇고 우리네 모습에서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는 신앙에 있다고 여겨지지 않고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하고 있는 것에 우려를 갖습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란 ‘자기 마음대로’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고, 또한 ‘자기 이성대로’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의 믿음에 있는 것이지 ‘자기 이성대로’가 아닙니다. 그러한데 자기 이성대로 신앙한다고 보아지는 것은 왜인지요.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인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함에 있는 ‘공예배’의 참여에 있는 ‘공교회’인 까닭에 성도들 모두는 ‘믿음의 일치’에 있는 보편성을 띠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배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진리를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따라서 가져나갑니다. 이것에 같은 마음, 곧 한 마음에 있는 것이 보편성을 뜻하는 ‘공’(公)입니다. 이렇게 보편적인 같은 것에 있는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전하는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좇는 것에 있을 경우에는 ‘거짓된 믿음’에 있는 ‘거짓된 교회’라고 말하게 되고 생명 얻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전하는 바른 복음을 좇는 것에 있을 경우에는 ‘참된 믿음’에 있는 ‘참된 교회’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신앙이 그리스도의 진리를 전하는 바른 믿음에서 함께 잘 서나가야 하는 까닭에 성도는 그리스도의 진리로 서로 연합되어서 그리스도 한 분의 몸으로 온전히 교회를 이룸에 있어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것이 보이는 신앙생활에 있으면 그 성도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며, 이러한 것에 있어 나가지 않는 생활을 하면서 ‘공교회’다운 모습에서 벗어나 있고 ‘공예배’에의 참여에 있어나가지 않으면서 자기를 위하여 자기 삶을 살아가는 생활을 가져나가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있다고 그 자신은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자기 생각대로’, ‘자기 마음대로’, ‘자기 좋은 대로’ 하는 것에 있는 ‘자기 이성대로’ 신앙을 가져나가는 것이라고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이성대로’ 신앙생활 하는 모습을 구약의 사사기에서도 보게 되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와 주셨으며, 그 뒤를 이은 것이 예수님 당시에서의 유대교 신앙에 있는 유대인 지도자들과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서 지적되고 있는 ‘외식하는 자들’, ‘위선자’란 표현이 그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신앙하게 해 주셨습니다만, 유대교 지도자들과 그들의 교훈을 따르는 유대인들은 마음에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어 하나님을 공경함이 없이 ‘자기들 생각대로’, 곧 ‘자기 이성으로’ 하나님을 섬김에 있었으며, 이러한 신앙에 있는 것을 자신들에게 구원 얻는 의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의가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한 그들 앞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로 오심으로 그들의 잘못된 의관(義觀) – 율법관 – 을 본래의 의미와 그 정신에 의해서 바르게 세우셨습니다. 예수께서 구속사를 시작하시는 시점에서 하신 산상설교는 그러한 것에서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보게 되는 ‘자기 이성대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주 두드러지게 나타난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중세시대의 교회입니다. 이 시기에 등장한 스콜라주의는 “할 수 있는 한 신앙을 이성과 결합하라!”에 따라 신앙과 이성을 조화 또는 결합시키려는 시도에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적어도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에서는 – 혹자 간에 그러한 생각을 내면적으로 가져 본 사람이 있을지라도 - 이러한 생각을 가져보지를 않았습니다. 어거스틴에 의해서 보는 대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절대 주권으로 알고 이를 굳건히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펠라기우스와 그를 따르는 제자에 의해서 인간이해와 하나님의 구원을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가 아닌 ‘자기 이성대로’ 이해함으로써 ‘전적 타락’에 의한 ‘전적 부패’를 부정하면서 인간 의지에 의한 선택의 자유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여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며 구원 얻는 신앙을 인간 의지의 이해에 따른 이성적 판단에 의해서 가져나가는 것이 오늘의 시대적 사조인 형편입니다. 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에 의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성대로’ 신앙하는 모습이 표면화된 것이 역력하고 있습니다. 해서, 우리 성도들 또한 점차 이렇게 시대적 사조에 휩쓸려서 같은 모습을 띠고 가는 것이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여, 권면합니다. 매주일 가장 직면하고 있는 것인 공교회를 이루고 공예배에 참여함에서 내가 오늘도 움직이고 행동함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인 옳은 것인지, 아니면 사사기에서 말씀하신 대로 ‘왕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 자기 생각대로, 자기 마음대로, 자기 멋대로’ 하는 것인지를 분별함에 있는 자신의 살핌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더불어 지혜의 영이신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의 선함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의 악함의 분별에 있게 하십니다. 그렇게 분별한데 따라 선한 지식에 선 믿음에서 옳은 일을 하며 이를 지향해 나가야 하며, 또한 그렇게 분별한데 따라 악함인 것을 알게 해 주신 믿음에서 악은 멀리하고 억제, 제거하는 것에 있어야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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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해 사본과 칠십인역(LXX)에는 '일흔다섯 명'으로 그 수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사도행전 7장 14절에서도 '일흔 다섯 명'이라고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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