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제(無題)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相見時難別亦難(상견시난별역난)
만나기도 어렵지만 헤어지면 더 힘들어
東風無力百花殘(동풍무력백화잔)
봄바람 살짝 불어도 꽃송이가 떨어진다.
春蠶到死絲方盡(춘잠도사사방진)
봄누에는 죽어서야 겨우 실 뽑는 것을 멈추고
蠟炬成灰淚始乾(랍거성회루시건)
촛불은 재가 되어야 흐르는 눈물을 비로소 거두리.
曉鏡但愁雲鬢改(효경단수운빈개)
아침 거울 앞에 앉으면 검은 머리 변할까 걱정되고
夜吟應覺月光寒(야음응각월광한)
저녁 시 읊조릴 땐 달빛 처량함을 느끼게 된다.
蓬山此去無多路(봉산차거무다로)
그대가 머문 봉래산은 여기서 멀지 않아
靑鳥殷勤爲探看(청조은근위탐간)
파랑새 오가며 서로 소식 전해다오
이상은(李商隱)
이상은(李商隱812-858)은 중국 만당(晩唐) 시기의 대표적인 애정(愛情) 시인이다. 그는 독특하게 시의 제목을 무제(無題)라 하여 20수를 남겼는데 거의 모두가 사랑(愛)을 주제로 다룬 것이다. 그중에 위에 소개하는 상견시난별역난(相見時難別亦難)은 읽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애정시의 정수(精髓)라 할 만한 대표작이다.
이 시는 만남과 헤어짐의 안타까운 사연으로 점철(點綴)되는 남녀 간의 애틋한 사랑을 잘 표현한 애정시(愛情詩)의 백미(白眉)로 꼽는 대표적인 시이다.
이상은(李商隱) 무척이나 정(情)이 많은 사랑의 음유시인(吟遊詩人)시인으로 전하는데 감당하지 못 할 사람에게 정을 쏟았다가 결국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 앞에서 애를 태우며 혼자만이 간직한 비밀스런 사랑의 감정을 고백하지도 못하고 무제(無題)라는 제목을 빌어 혼자만의 언어로 표현하였다.
음유시인(吟遊詩人)이란 사랑의 시를 지어 읊으며 여기저기 떠돌아다는 유랑시인(流浪詩人)을 말한다. 조선시대는 김삿갓을, 독일의 미네젱거, 이탈리아 트로바토레등을 들고 있다.
이상은(李商隱)은 여자들 마음을 끌어내는 매력이 있었는지, 그에겐 궁녀, 유부녀 처녀등 비밀 연인이 많았었다고 하며, 드러내놓고 말하기 곤란한 이들 여인과의 사랑 이야기를 시로 그려내고 있다.
이시의 절정은 “누에가 죽어야만 실 토해내기를 그치 듯” 그들의 사랑도 죽음이라야 갈라 놀을 수 있을 것이라 표현하고 “촛농(촉농燭膿)의 흐름을 눈물로 비유하고 흐르는 눈물의 그 끝은 재가 되는” 사랑의 깊은 우울과 절망을 구구절절이 나타내고 있다.
헤어져 시간이 흐른 것을 아침의 거울에 비친 귀밑머리 희어지는 것을 세어보는 것으로 오랜 시간의 흐름을 말하고, 저녁 차가운 달빛으로 임 그리워하는 애달픈 마음을 표현했다.
전설의 산, 즉 갈 수 없는 곳에 있는 임에게 전설의 소식 심부름꾼으로 파랑새을 등장시켜 간절한 내 사랑의 마음을 전하여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이 시에서 그리운 임의 소식을 전하는 파랑새(청조靑鳥)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영조(靈鳥)로서 길조(吉兆)를 상징한다. 요즘에는 듣기가 어려운 말이지만 사랑하는 연인의 대명사나 시나 소설에서 “나의 파랑새”라는 단어를 사용하였고 반가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나 기다리는 편지를 뜻하기도 하였다.
서양에서는 벨기에의 인형극 작가 마테를링크가 지은 동화극 속에 남매가 크리스마스 전야에 파랑새를 찾아 헤매는 꿈을 꾸다가 문득 깨어나 자기들이 기르던 비둘기가 바로 그 파랑새였음을 깨닫는다는 내용으로, 행복은 가까이에 있다는 의미를 주고 있다.
한편 심리학에서는 마테를링크의 동화극 파랑새에서의 주인공처럼 미래의 행복만을 꿈꾸면서 현재의 일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파랑새증후군(靑鳥症候群)을 경계하고 있다.
-농월-

청조가(靑鳥歌) 사랑의 파랑새 노래
靑鳥靑鳥(청조청조)
파랑새야 파랑새야
彼雲上之靑鳥(피운상지청조)
저 구름 위의 파랑새야.
胡爲乎止我豆之田(호위호지아두지전)
어이해서 내 콩 밭에 머물러 있었던가.
靑鳥靑鳥(청조청조)
파랑새야 파랑새야
乃我豆田靑鳥(내아두전청조)
내 콩 밭의 파랑새야.
胡爲乎更飛入雲上去(호위호경비입운상거)
어이해 다시 날아 구름 위로 가버렸나?
旣來不須去(기래부수거)
왔거든 모름지기 가지를 말것이지
又去爲何來(우거위하래)
또 갈 걸 어이해 찾아 왔더란 말이냐.
空令人淚雨(공령인루우)
부질없는 눈물만 비 오듯 하고
腸爛瘦死盡(장란수사진)
애간장 다 녹아 죽을 지경 되었구나.
吾死爲何鬼(오사위하귀)
나는 죽어 무슨 귀신이 될까?
吾死爲神兵(오사위신병)
나는야 죽어서 신(神)이 보낸 강한 군사가 되리니.
飛入殿君護護神(비입전군호호신)
궁궐에 날아들어 임금 지키는 호신(護神)이 되어
朝朝暮暮保護殿君夫妻(조조모모보호전군부처)
아침마다 저녁마다 임금 부처(夫妻) 보호하여
萬年千年不長滅(만년천년부장멸)
만년 천년 길이길이 스러지지 않게 하리라.
화랑세기(花郞世紀)
화랑세기(花郞世記)
신라 성덕왕 때의 학자 김대문(金大問)이 화랑의 유래에 관해 적은 책을 말한다. 지금까지 신라 화랑에 관한 자료는 학자들이 쓴 기록에 의존하였으며 대부분 김부식의 삼국사기 열전에 근거 하여오다가 1980년대 후반 김해에서 조선 순조 때의 필사본이 발견되어 화랑제도 연구에 획기적인 사료가 되고 있다.
이 화랑세기(花郞世紀)에 청조가(靑鳥歌)란 노래가 실려 있다. 화랑 사다함이 미실(美室)이란 여인을 사랑하였는데, 전쟁에 나갔다 돌아와 보니 이미 궁중으로 들어가 왕의 부인이 되어 있었다. 이에 상심한 사다함이 지어 불렀다는 노래가 바로 청조가(靑鳥歌 파랑새 노래)다. 그 내용이 너무나 구슬퍼 당시 사람들이 다투어 이를 외워 전하였다고 한다.
파랑새는 미실(美室) 여인을 뜻한다.
미실이란 여인은 화랑세기에 기록된 신비의 여인으로 타고난 미색으로 진흥왕, 진평왕 사다함 등 당대 영웅호걸들을 녹여내고 신라왕실의 권력을 장악해 간 여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파랑새(靑鳥청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길조(吉兆)를 상징하는 새로서 반가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나 편지를 이르는 말로서 푸른 새가 온 것을 보고 동방삭이 서왕모의 사자라고 한
한무제(漢武帝)의 고사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서왕모(西王母)는 중국 곤륜산(崑崙山)에 사는 선녀로 사람 얼굴에 호랑이의 이빨 표범의 털을 가진 죽지 않는(不死불사) 약(藥)의 선녀로서 중국고대 주나라 목왕과 사랑에 빠져 왕이 궁궐로 돌아오는 것을 잊었다는 고사가 있다.
파랑새 이야기는 장화홍련전에서는 계모의 학대에 못 이겨 장화가 빠져 죽은 연못까지 파랑새가 홍련을 안내하는 슬픈 사연으로 등장하며, 호남 지방 어린이들의 자장가로 오랫동안 전해 내려오는 녹두장군 전봉준의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에서 청포 장수는 조선 민중을 가리키고 파랑새는 조선 농민군을 끊임없이 탄압하는 일본군으로 상징되어 악역(惡役)을 맡기도 한다.
반면에 새해 설날에 즐겨보는 한해 운수(運數)인 토정비결에는 대부분
“靑鳥傳信(청조전신) 파랑새가 반가운 소식을 전하니”
“靑鳥報喜(청조보희) 푸른 새가 기쁜 소식을 가져오니”
등으로 행운을 가져다주는 길조(吉鳥)로 묘사 되고 있다.
청색(靑色)은 침착 냉정 고독 정절(貞節)과 행복한 상상(想像)을 느끼게 하는 색이다.
매사에 좋은 징조나 조짐이 좋을 때 청신호(靑信號)라고 한다.
그런 의미로 파랑새(靑鳥청조)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새이다.
잠간 틈을 빌려 화랑세기 발굴에 따라서 필자가 동서양 종교사에 관한 책을 읽는 중에 알게 된 고대문서 발굴에 대한 정보를 드리고자 합니다. 중국의 “마왕퇴와 곽점”에서 노자 텍스트인 백서(帛書)와 죽간(竹簡)의 발굴로 송(宋)대의 교정의서국(校正醫書局)에서 편찬한 중국역사 내용이나 특히 한의학(漢醫學) 의서(醫書)인 상한론(傷寒論) 금궤요약(金櫃要約)등 많은 부분의 내용이 발굴서 내용과 차이가 나 비교 검토 중에 있으며 현재 우리나라 한의대에서는 송(宋)대의 교정의서국(校正醫書局)에서 편찬한 책으로 공부하고 있으므로 한의학 기본에 대한 진실성이 의문되는 실정입니다.
기독교 성서는 “사해문서(쿰란동굴) 나그함마디 파피루스 코덱스” 등 기원전 3세기 성서기록이 무더기로 발견되어 로마황제 콘스탄티우스 3세황제때 밀라노칙령과 니케아종교회의를 계기로 헬라어로 만들어진 현재의 기독교성서와 깊은 비교가 되고 있습니다.
이 사해문서 발굴품이 서울 전쟁기념관에서 “사해사본과 그리스도교의 기원 특별전”이 6월 4일까지 열리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나 관심 있는 분들은 좋은 기회가 될것입니다.
입장료 성인 15000원 중고생 12000원--입장료가 비싼 것으로 보아 귀한 전시로 생각됩니다.
-농월-

곡우(穀雨)
城南城北閙鷄豚(성남성북료계돈)
고을의 남북쪽에선 닭 돼지 우는 소리 시끄럽고
賽罷田神穀雨昏(새파전신곡우혼)
땅 신(神)에게 고사를 끝내니 곡우 날이 저물었다
太守遊春勤勸課(태수유춘근권과)
원님은 봄놀이 삼아 농사일 부지런히 권하노라니
肩興時入杏花村(견흥시입행화촌)
가마가 때마추어 살구꽃 핀 마을로 들어선다.
유호인(兪好仁)
오늘(4월 20일)은 곡우(穀雨) 절기다.
사실 50살 이하 되는 사람들은 이 절기가 낯설지도 모른다.
그만큼 세월은 많이 변하고 인간의 삶은 자연과 상당히 멀어졌다는 의미도 된다. 곡우(穀雨)는 봄비가 백가지 곡식(百穀백곡)을 윤택하게 하기 위하여 내리는 비다. 곡식에 필요한 비가 내린다는 곡우는 옛날에는 농사에 가장 중요한 절기중의 하나였다.
곡우 무렵은 농촌이 한창 농사 열기로 후끈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농사 중의 농사인 벼농사의 파종이 있는 날에는 죄인도 잡아가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곡우 무렵에 대부분의 농가에서는 못자리를 만든다. 시골 출신인 50~60대 들에게는 잘 아는 일이겠지만 종자 볍씨를 약한 소금물에 담가 물위에 떠는 것은 버리고 가라앉은 것만 골라야 한다. 좋은 볍씨를 얻기 위해서다. 부정을 타지 안기위해서 몸과 마음도 정갈히 해야 한다. 일 년 농사의 성패가 걸려있는 행사다. 세월이 변하여 지금은 자동이양기용 모판을 만들므로 이런 정서는 찾아볼 곳이 없다.
눈을 감고 50년 전의 내 고향 곤양(昆陽) 앞들 뒷들 언내들을 아련히 회상한다. 모판을 만들기 위해 옆집 아저씨는 소가 끄는 쓰래로 모판을 갈고 작두로 자른 볏짚과 자운영을 섞은 밑거름을 모판에 뿌려 놓고 발로 골고루 밟는다. 그리고 직사각형의 모판을 몇 개 만들고 나무판자로 표면을 바둑판처럼 평편하게 다듬고 그 위에 볍씨를 뿌리고 물을 적당히 들여 보낸 후 비닐로 모판을 덮고 나온다.
논 뻘이 묻은 아저씨의 장딴지에 흡사 정맥(靜脈)처럼 붙어 피를 빨고 있는 거물이를 떼어 눈부시게 초록빛을 띤 보리논으로 휙 던지면서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보리고랑 사이로는 너불단지(꽃뱀)가 스르르 꼬리를 감춘다.
후한서(後漢書)에는 곡우(穀雨)절기에 물고기들의 활발한 모습을 아래와 같이 표현한다.
어영곡우인인(魚迎穀雨鱗鱗)-물고기가 곡우를 맞으며 비늘을 번뜩인다.
곡우전후에 따는 잎으로 만든 차를 우전차(雨前茶)또는 세작(細雀)이라 하여 최상품으로 친다. 원(元)의 양조영(楊朝英)은 그의 수선자(水仙子)란 시에서 아래와 같이 곡우차를 귀하게 선보이고 있다.
客到家常飯(객도가상반)
손님오시면 늘 먹는 집안 음식을 내어놓고,
僧來穀雨茶(승래곡우차)
스님 오시면 곡우 때 딴 차를 내어놓는다.
얼마나 소박하면서도 멋과 풍치가 있는 손님 접대 아닌가?
곡우때는 나무가 한창 물이 오르는 시기이다.
호남, 영남, 강원도 등에서는 깊은 산 속으로 곡우물을 약수로 마시러 가는 풍속이 있다고 한다. 경칩의 고로쇠 물은 여자 물이라 해서 남자에게 좋고, 곡우 물은 남자 물이라 해서 여자들에게 더 좋다고 한다.
내 고향 곤양(昆陽)에는 신라때 창건한 쌍계사의 말사인 다솔사(多率寺)가 있는데 곡우 무렵을 삼월 삼짇날이라고 하여 이절로 동네 부녀자들은 “물맞이”를 갔었다. 삼짇날 물을 맞으면 부스럼도 안생기고 감기도 안 걸린다고 했다.
다솔사에는 고색창연한 대양루(大陽樓)가 있는데 일제강점기에 만해 한용운(韓龍雲)이 이곳에서 수도하였고 김동리(金東里)가 그 유명한 등신불(等身佛)을 쓴 곳으로도 유명하다.
곡우를 전후하여 요 며칠 날씨는 초여름을 방불케 한다. 어제 이어 오늘 아침 6시 현재도 섭씨 16도다. 곡우비는 안오고 계속 날씨만 더울 것인가---
미국쇠고기 수입으로 열 받는 축산농민들의 머리라도 식혀주기 위해서는 곡우 비라도 꼭 내려서 새로운 희망을 주었으면 좋겠다.
-농월-

하숙생(下宿生)
人生是流浪路(인생시유랑로)-인생은 나그네 길
何處來何處去(하처래하처거)-어디서 왔다가어디로 가는 가
如行雲悠悠路(여행운유유로)-구름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에
勿留情勿留戀(물류정물류연)-정이랑 두지말자 미련일랑 두지말자
人生是遊人路(인생시유인로)-인생은 나그네길
如天上雲飄飛(여천상운표비)-구름이 흘러가듯
不知歸向哪里(부지귀향나리)-정처없이 흘러서 간다.
하숙생(下宿生)
위의 글은 한시(漢詩)가 아니고 최희준씨가 부른 노래입니다.
1960년대 서민들의 지친 삶을 어루만지는 노래로 대표되는 “하숙생”을 불러 공전의 힛트를한 톱가수 최희준씨가 벌써 72세라고 합니다. 믿어지지가 않네요. 세월이 그렇게 흘렀습니까?
개성 송도삼절 중의 하나인 박연폭포로 가는 천마산 산길 도중에 두 갈래의 길이 나타난답니다. 한쪽 길은 돌아가는 길로 험하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길이고 다른 한 길은 길은 좋은데 중간에 약 1m 넘게 끊어진 곳이 있어 넓게 뛰면 가까스로 저편에 건널 수 있는 위험한 낭떠러지가 있는 길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 이르면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지 망설인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도 살아가는 동안 어떤 경우에 선택의 기로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어느 길로 가야 내 인생의 길이 바른 길인가----
최희준씨도 서울법대 출신으로 법관이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뜻과 다르게 가수의 길을 택했다고 합니다.
노랫말처럼 인생은 어떤 길을 선택하든 나그네 길입니다.
역려과객(逆旅過客)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뜻은 세상은 여관과 같고 인생은 그곳에 잠시 머무는 나그네와 같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나그네는 참 외롭고 쓸쓸합니다.
때로는 길동무가 한둘 있을 때는 이런 저런 이야기로 시름을 잊다가 갈림길에서 혼자가 되면 그 적막함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습니다.
인라인을 타는 동호인중에 필자보다 나이 세살 위인 친구가 한분 있습니다. 어느 날 점심을 같이 하면서 소주잔을 같이 나누는 자리의 대화입니다.
『농월은 노래 18번이 무엇이요?』
『저요? 애수의 소야곡입니다. 박형은 무슨 노래요?』
『나는 최희준의 하숙생이야』
『참, 나는 하숙생 같은 나그네 생활을 했지. 정신없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동안에 십 년 전에 환갑을 맞이 했어. 그저 환갑이구나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또 왔다 갔다 했지.
그러다가 졸지에 2년 전에 아내를 저세상으로 먼저 보냈어.
평소에 건강이 좋지 못했지,
가만히 생각하니 참 기가 막히더군.(박형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있을 때는 예사로 여기고 몰랐는데 인생의 동반자를 잃으니 말이야.
왜 진작 좀 더 나와 함께 오래 살도록 내가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 주는 노력을 못한 것이 후회돼. 지금 생각하면 죄스럽기도 하고,
그러나 이미 상황은 다 끝난 것이야.
죽음은 연습이 없더군. 후회를 하여야 아무런 소용이 없어.
(소주잔을 단숨에 넘긴다)
이제는 나 혼자 살 궁리를 하기가 더 급해졌어.
그러다가 작년에 아들놈으로부터 “아버지, 이번 생신날이 고희(古稀)에요”
하는 소리를 듣고 부터는, 자다가도 깜짝 놀라곤해.
가만히 생각하면 유아독존(唯我獨存)이란 말처럼 “이 세상에 나 혼자 남았구나” 하는 외로움이 몰아쳐 왔어요.
친구들도 이상한 눈으로 보는 것 같애--
혼자 살면서 식사, 세탁,등 일은 진작에 생각하였던 일이라 별것 아닌데,
같이 걸어가는 인생의 동반자를 잃으니 자꾸만 어두운 그림자만 생각하게 돼.
사는 재미도 없고 맥이 풀어져, 첫째 사는 의욕이 없어--
집도 20평자리 아파트로 확 줄였어.
『박형은 경제적인 면은 어떻세요?』
『응, 세끼 밥은 먹을 수 있어. 아이고 그것마져 안되면 정말 문제지
내수중에 돈마져 없으면 약먹고 콱 죽어버리지, 농담 아니야』
『농월 자식에게 절대 재산 넘겨 주지마. 그때부터 끝장이야』
자식? 우리집 새끼 불효자 아니야. 아직까지 용돈도 그냥주고 보통은돼. 그런데 자식보고 마음에 있는 소리 할 수 있어?
자식이 내 외로움 달래줘?
난 농월 김형이 더 좋을 때가 있어. 이렇게 인라인도 같이 타고 술도 한잔 하면서 이런 이야기도 할 수 있으니 말이야.
농월도 부인이 아파서 힘든 것 알지만 그래도 살아있으니 장땡이야.』
『박형 말씀이 맞아요. 인생은 나그네인데 언젠가는 어느 쪽이던 혼자가 되겠지요. 조금 빨리 가고 늦게 가는 차이 뿐이지요.
힘내세요! 박형은 성격이 좋으니 어디 비슷한 처지의 부인이라도 친구로 사귀면서 다시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 보세요. 잘 될거예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봄 날씨 치고는 맑은데 오늘따라 자전거 페달이 무겁게 느껴진다.
“하하~하~하” 훈련할 기분도 안난다.
하늘에는 흘러가는 구름이 더 정처 없이 보인다.
-농월-

送春(송춘) 봄을 보내며
三月三十日(삼월삼십일)-삼월 삼십일
春歸日復暮(춘귀일부모)-봄이 떠나가는 하루가 또다시 저문다.
惆悵問春風(추창문춘풍)-서글픈 마음에 봄바람에게 물어보네.
明朝應不住(명조응부주)-내일아침에는 아마 여기있지 않을 거지?
送春曲江上(송춘곡강상)-봄을 곡강(曲江) 위에서 보내는데
眷眷東西顧(권권동서고)-마음을 가눌 길 없어 동서로 돌아보지만
但見撲水花(단견박수화)-보이는 것은 물위에 떨어지는 꽃잎뿐
紛紛不知數(분분부지삭)-펄펄 날리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구나.
人生似行客(인생사항객)-인생이란 마치 나그네 길과 같아서
兩足無停步(량족무정보)-두 다리는 잠시도 멈추질 않는다.
日日進前程(일일진전정)-날마다 앞을 향해 나아가지만
前程幾多路(전정기다노)-앞으로 갈 길은 얼마나 남아있을까.
兵刀與水火(병도여수화)-전쟁과 병사의 칼과 물 불은
盡可違之去(진가위지거)-모두를 피해 갈 수가 있지만
唯有老到來(유유노도내)-오직 늙음이 오고 나이를 먹는 것만은
人間無避處(인간무피처)-인간세상에선 피할 길이 없구나.
感時良爲已(감시량위이)-가는 계절이니 어찌할 수 없다 생각하고
獨倚池南樹(독의지남수)-홀로 곡강의 남쪽 나무에 기대어 서서
今日送春心(금일송춘심)-오늘 이 봄을 보내는 마음
心如別親故(심여별친고)-마치 친한 벗과 헤어지는 심정과 같구나.
백거이(白居易)
백거이(白居易)는 이름보다 자(字)인 낙천(樂天)이 더 많이 알려져 있고 이보다 더 할려져 있는것이 당현종과 양귀비의 뜨거운 사랑을 노래한 시 장한가(長恨歌)
이다. 중국 당나라를 시대별로 구분하면 초당(初唐) 성당(盛唐) 중당(中唐) 만당(晩唐) 으로 구분하며 백낙천은 중당(中唐)시대의 시인이다.
백낙천은 중국 시인 중에서도 시를 가장 많이 쓴 사람 중의 한사람이다. 그의 시가 인기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글과 내용이 이해하기 쉽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일화 중에 백낙천은 길거리 노파에게 자신의 시를 보여 주고 자기의 시를 이해 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고 노파가 이해하지 못하면 시를 다시 이해 할 수 있도록 고쳤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암송하기 쉽고 문장이 쉽고 아름답고 편안한 것이다.
위의 시는 백거이가 마흔 네 살때 봄이 떠나감에 따라 나이가 많아짐을 한탄하여 지은 시로서 한줄 한 줄에 모두 무정한 세월의 아쉬운 정감이 넘치고 있다
요즘은 봄이 너무 짧고 여름이 빨리 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지구의 환경오염으로 인한 온난화(溫暖化)가 그 원인이라고 한다.
꽃도 움이 터고 봉오리를 맺어 점차로 개화(開花)하면서 꽃이 질 때도 한잎 두잎 시일을 두고 떨어지지 않고 한꺼번에 활짝 피고 단번에 지고 만다.
어제 같이 담아래 하얀 눈을 머리에 얹고 다소곳이 매화꽃 필 때에도, 북쪽 창문 앞에 쌓인 잔설(殘雪)이 녹지 않아
봄은 더디더디 오는 줄 알았더니
어느 날 갑자기 목련과 벚꽃이 앞 다투어 피고 지더니만
진달래술 담아 친구와 정담(情談)을 나눌 시간도 없이
삼각산 쪽으로 봄자락을 감춘다.
봄이 온다는 것은 추운겨울이나 어려운 상황이 지나가고 희망이 온다는 것이고 봄이 간다는 것은 좋은 세월이 다 간다는 아쉬움을 뜻하는 것이다.
좋은 세월이란 인생에 있어서 젊음을 말하는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 봄이 빨리 간다는 것은 늙음이 빨리 온다는 것이다. 늙음이 온다는 것은 죽음이 가까워진다는 신호인 것이다.
봄이 다른 계절에 비하여 짧은 것은 우리 인생에 대하여 즐거움이 짧은 것이다.
그러기에 봄은 화창해지기도 하고 슬퍼지기도 하며,
노래가 나오기도 하고 눈물이 나기도 하는 감정의 계절이다.
아래의 글 구절은 우리의 마음을 더욱 슬프게 한다.
花不送春春自去(화부송춘춘자거)
꽃은 봄을 보내지 않았지만 봄은 스스로 떠나가고
人非迎老老相侵(인비영노노상침)
사람은 늙음을 맞으려 아니해도 늙음이 저절로 침범하는구나!
즉 세월은 기다려 주지 않고 지나가니 지금 남아 있는 눈앞의 이 시간을 소중히 쓰고 감사하라는 것이다.
나는 스스로에게 간절히 다짐하고 있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때는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닌 바로 지금이 시간 이고,
나에게 가장 귀한한 사람은 지금 눈앞에 내가 만나는 사람이고,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오늘을 즐겁게 감사하는 일이라고--
-농월-

기(棋) 바둑
縱橫黑白陳如圍(종횡흑백진여위)
흑백이 종횡으로 에워싼 것처럼 진을 치니
勝敗專由取舍機(승패전유취사기)
승패는 오로지 때를 잡고 못 잡음에 달렸네
四皓閑秤忘世坐(사호한칭망세좌)
사호가 숨어살며 바둑으로 세상을 잊었고
三淸仙局爛柯歸(삼청선국난가귀)
삼청 신선들 대국에 도끼자루 다 썩더라
詭謨偶獲擡頭點(궤모우획대두점)
뜻밖의 속임수로 세력 뻗을 점도 얻고
誤着還收擧手揮(오착환수거수휘)
잘못 두고 물러 달라 손 휘두르기도 하는구나
半日輪營更挑戰(반일윤영갱도전)
한나절 승부를 걸고 다시금 도전하니
丁丁然響到斜輝(정정연향도사휘)
바둑알 치는 소리에 석양이 빛나네!
김병연(金炳淵)
바둑
바둑을 한자로는 기(棋-碁)라고 쓰며, 바둑의 옛 명칭을 난가(爛柯)라고도 한다. 일본에서는 고(GO)라고 하고 중국은 웨이치(Weichi-圍위 棋기)라 부른다.
난가(爛柯)라는 말은 신선(神仙)들의 바둑 두는 구경이 재미가 있어 나무꾼이 도끼자루 썩는 줄도 모를 정도로 세월이 지나 있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중국고전 술이기(述異記)라는 책에 왕질(王質)이라는 나무꾼이 깊은 산속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두 동자(童子)가 나무 아래에서 바둑 두는 구경을 했는데 동자가 귤 비슷한 것을 주어 먹으니 배고픈 줄 모르고 바둑을 구경했다.
바둑이 한판 끝나자 한 동자가 “왕질의 도끼자루가 썩었다”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어 황급히 마을로 내려와 보니 전에 살던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마을사람들은 그의 집에서 제사 준비하느라 분주하였다. 이상하여 물으니 이 집 주인의 증조부인 왕질 이라는 사람이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아 이 날을 제삿날로 삼았다고 하였다. 두 동자는 신선이어서 바둑 한판 두는 데 수백 년의 세월이 흘렀던 것이다.
바둑의 어원(語源)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가지 설이 있다.
바둑은 순수한 우리말이다.
육당 최남선은 인도네시아어인 바투(Batu)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바둑학자인 안영이씨는 티베트의 산스크리스트어 바드(Badh)가 바독→바둑으로 변화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광복 전까지 바독 또는 바돌이라 불렸으며 지금도 일부지방에서는 그렇게 부르고 있는데 “독”이나 “돌”자는 한자의 돌석(石)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바둑은 밭(田전)과 돌(石석)의 결합으로 본다. 밭돌(田石)→바돌→바둑으로 변한 것이다. 밭(田)은 바둑판과 비슷하게 생긴 글자이다.
바둑의 어원은 “바닥”에서 시작된 것이다.
바둑의 아홉 개의 화점(花點)은 주역(周易)의 구궁(九宮)과 같고,
바둑판에서 가장 가운데 점인 천원(天元)을 제외한 여덟 개의 화점은 주역의 팔괘를 의미한다. 바둑은 “바닥의 돌” 이란 뜻이다.
바둑의 역사는 오랜 옛날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요(堯) 임금이 좀 모자라는 아들 단주(丹朱)를 깨우치기 위해 바둑을 만들어 가르쳤다. 순(舜) 임금이 아들 상균(商均)이 어리석었기 때문에 바둑을 만들어 가르쳤다.
위의 두 이야기는 바둑의 전설이라고 볼 수 있다.
바둑은 고대 중국에서 발생된 것이 아니고 동이족(東夷族)에서 나왔다는 주장도 있다.
바둑 흑(黑)의 “덤”은 1940년 일본 본인방(本因坊)기전에서 “흑 덤4집”을 시작으로 발전하여 오늘날 5집반 덤으로 진행 중이다.
바둑은 왜 9단까지만 있을까?
바둑에는 10단이 없다. 10단전이란 경기의 타이틀을 말하는 것이다.
중국의 삼국시대의 바둑경기에 바둑실력을 평가하는 품급제(品級制)가 있었다. 바둑 두는 사람을 9단으로 나눈 역사는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시대부터 이다.
위진남북조 시대란 중국 역사상 후한(後漢)이 멸망한 다음 해부터 수(隋)의 문제(文帝)가 진(陳)을 멸망시키기까지(221∼589)의 368년 동안을 말한다. 위진남북조 시대는 관리(官吏)의 등급(等級)이 9품으로 나눴졌다. 지금 우리나라 공무원 급수 9급부터 1급까지와 비슷하다.
선비나 학자들의 지위도 역시 9등급으로 나눴다.
심지어는 당시의 신선(神仙)들까지도 9품으로 나누었다.
이러한 인품(人品)과 공무원들의 관품(官品) 구분제(區分制)의 제도는 문화 예술까지 영향을 미쳐 바둑기사 역시 9등급으로 나뉘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 것이다.
북송(北宋)의 장의(張擬)가 쓴 기경품격편(棋經品格篇)이라는 책에서 바둑을 9품으로 나누어 9단부터 아래로 입신(入神9단) 좌조(坐照8단) 구체(具體7단) 통유(通幽6단) 용지(用智5단) 소교(小巧4단) 투력(鬪力3단) 약우(若愚2단) 수졸(守拙초단)로 분별했다.
대만에서는 지금도 “단(段)” 대신 품(品)으로 사용하고 있다.
※참고
★사호(四皓)-상산사호(商山四皓)라고 하며 중국 진시황 때에 난리를 피하여 산시성 상산(商山)에 들어가서 숨은 네 사람. 동원공, 기리계, 하황공, 각리 선생을 이른다. 호(皓)란 본래 희다는 뜻으로, 이들이 모두 눈썹과 수염이 흰 노인이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삼청(三淸)-도교(道敎)에서, 신선이 산다는 옥청(玉淸)·상청(上淸)·태청(太淸)의 세 궁(宮)을 이른다.
-농월-

수묵노도(水墨鷺圖) 먹물로 그린 백로
雪作衣裳玉作趾(설작의상옥작지)
눈으로 흰옷을 짓고 황금 옥으로 다리를 갖인 학이
蘆渚窺魚幾多時(노저규어기다시)
갈대 숲 물가에서 얼마나 물고기를 엿보았던가?
연비과산음현(偶然飛過山陰縣)
우연히 하늘을 날아 산음현을 지나가다가
오락희지세연지(誤落羲之洗硯池)
실수로 황희지의 벼루 씻는 못에 떨어져 빠졌네!
성삼문(成三問)
성삼문(成三問)
우리는 상삼문이라는 역사적인 인물을 접할 때 수양대군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족하인 단종을 밀어내고 왕위를 찬탈(簒奪)한데 반발하여 죽음으로 충절을 지킨 충신으로, 또한 세종 때 집현전 학사로 예기대문언두(禮記大文諺讀)를 편찬하여 한글 창제때 음(音)과 운(韻)을 정확하게 하는데 큰 공을 세운 학자로 알고 있습니다.
예기대문언두(禮記大文諺讀)이란 예기(禮記)의 본문에 토를 달아 해석하고 어려운 글자에는 네 종류의 소리인 사성(四聲)과 반절(反切)을 중요한 내용으로 훈민정음에 적용한 책입니다.
사성(四聲)이란 중국 국어의 4가지 소리 내는 방법인 술어 소리인 평성, 상성, 거성, 입성을 말합니다.
반절(反切)이란 훈민정음의 다른 이름으로 역시 초성, 중성, 종성을 합하여 한 글자를 이룬다는 내용입니다.
성삼문은 그 시대에 대단한 명성을 떨친 학자였습니다.
성삼문의 명성은 중국에서도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위의 한시는 성삼문의 한시 감각에 대한 재치를 유감없이 발휘한 대단히 유명한 작품입니다. 기억해 두실만한 한시입니다.
저의 설명이 좀 부족할지는 모르지만 차분한 마음으로 서둘지 말고 냉정히 읽어 보십시요.
성삼문이 중국 사신으로 명(明)명나라 에 갔을 때에 그의 학문과 시의 수준이 이름 높다는 말을 듣고 명(明)나라 황제(일설에는 어느 귀족이라고도 함)가 그의 재주를 시험해 볼 양으로 어전에 중국의 신비들을 불러 모은 자리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내 보이며,
『지금, 짐이 가진 두루마리에는 백로(白鷺흰학)의 그림이 그려져 있소. 이 백로(白鷺)를 두고 시(詩)를 지어 보시오.』 라고 하면서 백로(白鷺)의 그림을 보여주지 않고 시를 지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림을 보아야 감정이 나오고 시상이 떠 오를 것인데 보지를 못하니 참 딱한 일이지요.
백로(白鷺)의 특징은 이름대로 몸 전체가 하얀 새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성삼문(成三問)은 즉시 1행과 2행의 시를 아래와 같이 지었습니다.
雪作衣裳玉作趾(설작의상옥작지)
눈으로 흰옷을 짓고 황금 옥으로 다리를 갖인 학이
蘆渚窺魚幾多時(노저규어기다시)
갈대 숲 물가에서 얼마나 물고기를 엿보았던가?
자, 우리도 같이 상상해 보고 나름대로 시를 짓는다고 생각해 봅시다. 백로(白鷺)는 몸 전체가 눈같이 흰 백색이고 다리는 황금색의 새입니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옆으로 하고 물고기를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성삼문도 우리와 같은 생각으로 이렇게 1행과 2행의 시를 지었습니다.
성삼문이 위의 두 구절을 짓자 황제는 벽에 그림 두루마리를 펼치는데, 놀랍게도 그림은 먹으로만 그린 묵화(墨畵)의 검은색 백로(白鷺), 아니 흑로(黑로鷺) 였습니다.
그리고 황제는 비웃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시에는 “눈으로 옷을 짓고 황금색 옥으로 다리를 ....”라고 하였는데, 이 그림은 흰 눈과 같이 백색의 의상도 아니며 황금 옥으로 된 백로의 다리도 아니니, 시와 그림이 틀린 것 아니요?』
하며, 성삼문(成三問)을 트집 잡아 당황하게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삼문(成三問)은 의연한 자세로 말하기를
『폐하, 외신(外臣)의 시가 다 완성되려면 아직도 두 구절이 남았는데 나머지 까지 채워 보겠습니다.』하고 다음과 같이 이었습니다.
偶然飛過山陰縣(우연비과산음현)
우연히 날라 산음현을 지나다가
誤落羲之洗涓池(오락희지세연지)
잘못으로 왕희지의 벼루 씻는 물에 떨어졌구나.
!!~ !
산음현(山陰縣)은 명필 왕희지(王羲之)가 살던 고을입니다.
성삼문은 나머지 두 구절에서 백로(白鷺)는 원래 흰색 이였는데 왕희지 벼루 씨는 못에 빠져 먹물이 배어 검어졌다고 명나라 황제의 회롱에 대응한 것입니다.
벼루의 먹물 씻은 못은 칠흑(漆黑)같이 검습니다.
이 재치에 황제이하 모든 선비들이 놀라 마지않았다고 합니다.
시공을 초월한 성삼문의 기발한 상상력은 살아있는 학 한 마리를 왕희지가 벼루를 씻던 산음현 못에 빠져버리게 만들고 있습니다.
두루마리 그림 속의 학이 하늘을 날아올라 멀고 먼 산음현, 그것도 왕희지가 살던 아주 오래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벼루 씻던 못에 빠졌으니 대단한 비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쩌면 족자의 그림은 성삼문의 시로 인하여 살아있는 한 마리 학으로 다시 태어 났는지도 모릅니다.
정(停)에서 동(動)으로의 윤회(輪廻) 환생(還生)!
수묵(水墨)으로 그린 학 한 마리를 왕희지가 벼루 씻던 못에 빠진 학으로 표현한 것은 가히 화룡점정(畵龍点睛)의 경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화룡점정(畵龍點睛)이란 용(龍)을 그린 다음 마지막으로 눈동자를 그린다는 뜻으로 가장 결정적인 부분의 일을 끝냄을 이르는 말입니다.
왕희지는 중국 동진(東晋)시대 때 명필로 산음현에서 벼슬을 할 때 “난정((蘭亭)”이라는 곳에서 선비들과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돌리면서 함께 글을 지었다는 곳입니다. 경주에 있는 포석정도 난정((蘭亭)의 본을 따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의 글들을 모은 것이 그 유명한 난정집서(蘭亭輯敍)인데, 왕희지는 그 책의 서문(序文)을 써서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너무 아름다운 글이라서 다음에 소개 하겠습니다.
머리빗을 창공에 던져 “반달”을 만든 황진이나 백로를 왕희지 벼루 씻은 못에 빠트려 검은 학을 만든 성삼문이나 한시(漢詩)의 매력은 여기에 있습니다.
-농월-

부절명시(賦絶命詩) 목숨이 끊어질 때 남긴 시
擊鼓催人命(격고최인명)
둥둥둥 북소리가 사람의 목숨을 재촉하는데
回頭日欲斜(회두일욕사)
머리 돌리니 해는 서산을 넘어가는 구나
黃泉無客店(황천무객점)
황천가는 길엔 주막도 없을 것이니
今夜宿誰家(금야숙수가)
오늘밤은 누구 집에서 잘 것인가?
성삼문(成三問)
성삼문(成三問) 절명시(絶命詩)
위의 절명시는 성삼문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38세의 나이에 새남터 사형장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시라고 합니다.
이 시는 조선시대 몇몇 절명시중에 최고봉으로 식자층과 지조를 중히 여기는 절개파(節介派) 간에는 익히 읽혀지는 한시 입니다.
새남터는 조선시대에 사형을 집행하던 곳으로 사남기(沙南基)라고도 하며 지금의 신용산 철교와 인도교 사이 이촌동(二村洞)부근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절명시(絶命詩)란 죽음을 앞두고 이 세상 마지막에 남기는 시(詩)입니다. 유언(遺言)과는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역사적 인물로 세인(世人)의 기억에 남고 있는 절명시로는 성삼문의 부절명시(賦絶命詩), 매천 황현(黃玹)의 절명시(絶命詩), 녹두장군 전봉준 절명시(絶命詩), 조광조 절명시(絶命詩) 그리고 앞에 소개드린 민영환등의 시가 식자층에 회자(膾炙)되고 있습니다.
성삼문(成三問)!
노량진 사육신 묘지를 찾아 성삼문의 묘소 앞에 서면 이 세상에 사나이 대장부로 태어나서 성삼문만큼 지조(志操)를 지킨 인물이 우리 역사상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부귀(富貴)와 공명(功名)을 얻기도 어렵지만 그것을 버리기는 더 어려운 게 인간의 삶인데 부귀 보다는 인간의 높은 가치에 삶의 비중(比重)을 더 두었던 것 같습니다.
수양대군의 혹독한 고문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세조(世祖)가 “나를 왜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느냐”고 호통 치자 성삼문은 끝까지 그를 전하(殿下)라고 부르지 않고 “나는 단종대왕(端宗大王)의 신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세조는 대노(大怒)하여 불에 벌겋게 달군 쇠꼬챙이로 성삼문의 다리를 지지고 팔을 자르고 결국 사지(四肢)를 찢어 죽이는 사형(死刑)을 집행하게 됩니다. 집행관이 마지막으로 남길 말을 하라고 하자 그은 태연히 위의 절명시를 남긴 것입니다.
성삼문의 절명시는 죽음을 재촉하는 북소리와 서산에 지는 해를 통해 생명의 마지막 순간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찾아 볼 수 없고 황천 가는 길에 주막이 없어 오늘 밤은 어디에서 쉬어야 할지 걱정하는 성삼문의 모습은 마치 먼 여행을 준비하는 담담한 나그네의 모습처럼 느껴집니다. 실로 대인(大人)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출세를 위해서라면 이 당(黨) 저 당(黨)을 가리지 않고 기웃거리고 부끄러움도 모르고 아무런 신념(信念)도 신의(信義)도 국민을 위한 정신도 없이 거짓말을 물 마시 듯하며 철새처럼 날아다니는 오늘날의 정치인들과 는 너무나 비교되는 모습입니다.
-농월-

절명시(絶命詩)
鳥獸哀鳴海岳嚬(조수애명해악빈)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槿花世界已沈淪(근화세계이침륜)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비렸구나.
秋燈掩卷懷千古(추등엄권회천고)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 날 생각하니,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기만 하구나.
매천(梅泉) 황현(黃玹)
매천(梅泉) 황현(黃玹)은 성삼문과 함께 매천(梅泉) 황현(黃玹)의 절명시는 너무 유명하기 때문에 소개를 드립니다.
두 분 다 나라를 위한 우국충정과 굳은 절개의 절명시라는데 공통점이 있습니다.
황현(黃玹1855∼1910)은 조선 구한말의 학자로 호는 매천(梅泉)이라하며 영남·호남 선비들의 성금으로 매천집(梅泉集) 이 간행 되었고, 한말(韓末)의 역사를 쓴 매천야록(梅泉野錄)이 유명합니다.
시인인 황현은 구례에서 작은 서재를 마련해 3,000여 권의 서책을 쌓아 놓고 독서와 함께 시문(詩文) 짓기와 역사 연구, 경세학 공부에 열중하였습니다.
황현(黃玹)은 1910년 8월 22일 매국노 이완용과 데라우치 사이에 한일 합방이 이루어지자 하룻밤에 절명시 4편을 짓고 망한 나라가 부끄러워 목숨을 끊으려 더덕 술에 아편 덩이를 타서 마시기 전에 부른 노래입니다. 이시는 4수중 제 3수입니다.
마지막 결심을 하고 흔들리는 호롱불을 보며 읽던 책을 덮었겠지요.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나라를 잃은 상념(想念)들---
차라리 머릿속에 지식이라도 없었으면 무지렁이 백성으로 살아가겠는 되, 나라가 망한 이때눈앞에 갈 길이 분명히 보이는데 가지 않는다면 글자 배운 보람이 없지 않겠는가. 고개 한 번 돌리면 외면할 수도 있었을 그 부끄러움조차 지니지 않으려고 그는 아편 덩이를 삼키고 목숨을 끊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세상이 변하여 지금은 메일을 통한 편안한 마음으로 이 절명시를 읽고 있지만, 시류에 영합하여 권력과 이권이라면 국가, 민족 명예 체면도 심지어는 신앙도 자신의 정체성도 다 저버리고 돈이라면 최고라는 이시대의 우리 모두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국가의 수난기에 대처하는 모습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직접 나라를 이끄는 주체가 되기도 하고, 저항적이기도 하고, 외세와 타협하여 민족을 저버리기도, 국권을 강탈당하는 위기에 처하자 선비로서의 힘과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고 그 고민과 고뇌를 목숨을 던져 의사를 표시하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중시하면서도 역사를 이끄는 힘을 갖지 못하여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서지 못하는 선비의 한계가 드러난 절규라 볼 수 있습니다.
황현은 나라(宗社종사)가 망하는 날 국민이면 누구나 죽어야 옳다고 여겼습니다. 사대부들이 염치를 중히 하지 못하고 직분을 다하지 못하여 나라를 망쳐 놓고도 자책할 줄 모른다고 통탄하였습니다. 어떤 면으로는 극단적이라 할 수도 있지요.
그는 인간 양심의 각성을 외치며 순명(殉名)한 강화학파(江華學派)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순명(殉名)이란 명예를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강화학파(江華學派)란 조선 후기에 강화 출신 정제두(鄭齊斗)를 비롯한 양명학자(陽明學者)들이 강화도를 중심으로 형성한 학파로서 양명학은 기존의 유학과 반대되는 입장을 취한 일종의 진보성향의 신유학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은 양명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참고
제 4수에 있는
진동(陳東)-중국 송나라 선비로, 국가의 기강을 세우는 상소를 하 고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억울하게 죽음을 당합니다.
윤곡(尹穀)-중국 송나라 진사로, 몽골 침입 때 가족이 모두 죽음 을 당합니다.
-농월-


우주 만물은 변화의 연속입니다.
결론적으로 63괘 수화기제(水火旣濟)의 괘(卦)는 우주만물이 완전한 상태로 이루어져 완성되어 끝맺는다는 괘상(卦象)입니다.
6효(爻)가 모두 제자리에 안전하게 위치하고 불 위에 물이 끓고 있으니 이상적인 모양입니다.
성경 요한복음 19장 30절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다 이루었다” 하시며 천국으로 승천 하시는 것과, 부처님이 쿠시나가라 강가의 사라쌍수아래서 꽃비를 맞으며 열반(涅槃)에 드시는 것이 다 완성(完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 이제 완성이 되었다는 것은 더 필요치 않고 끝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끝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더 나아갈 일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없어지는 것은 무(無)입니다.
우주는 존재라 볼수 없으믈 무(無)나 허(虛로 표현 될 수 없습니다.
우주 속의 만물은 종말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주역은 다시 64괘 화수미제(火水未濟)를 등장시킵니다.
끝나지 않았다!
끝이라는 것은 우주만물의 무대에는 등장 할 수없다! no end !
64괘인 화수미제( 火水未濟)는 매우 불완전한 모양으로 구성된 괘(卦)의 형태입니다.
물위에 불이 있으니 가장 불안전한 상태입니다.
불완전이라는 것은 완전을 전제로 다시 시작하는 암시가 있습니다.
우주만물은 불완전에서 완전으로 미완성에서 완성으로 가기위해 부단한 변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위의 글은 역경(易經)의 팔괘(八卦)에서 거듭 세분화된 육십사괘(六 十四卦)중 마지막의 두 괘입니다. 역경(易經)은 너무나 현묘(玄妙)하여 필자가 감이 여기서 논할 수 없고 또한 그럴만한 식견(識見)도 없습니다. 다만 지나가는 구경삼아 읽어본 내용 중에 마지막 두괘가 항상 우리의 삶에 연속성을 의미하는 것 같아 소개를 드립니다. 역경(易經)을 고대 중국의 주(周)나라때 문왕(文王)이 64괘를 만들고, 점치는 효(爻)를 주공(周公)이 만들었다고 하여 주역(周易)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여기서 역(易)이라는 말은 이(易)라고 읽을 때는 “쉽다”는 뜻이 되고 역(易)이라고 읽을 때는 “변(變)한다”는 것을 의미 하며 변하는 것은 “바뀐다”는 뜻입니다.
결국 주역(周易)의 요체(要諦)는 우주의 모든 사물(事物)과 인간이 지각(知覺)할 수 있든, 또는 지각할 수 없든 모든 상황들이 고정(固定) 불변이 아니고 항상 변(變)한다는 뜻입니다.
미항공우주국 나사(NASA)과학자들이 1969년 인류사상 최초의 달 착륙 우주선을 개발할 때 우주를 철학적으로 접근하기 위하여 동양철학의 정수(精髓)인 주역(周易)을 읽었다는 기사를 기억합니다.
저는 이번에 삼성사건에 즈음하여 역경(易經)의 두 괘를 다시 생각하여 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동기가 오스트리아 황태자 페르디난트 내외가 세르비아인 청년에게 암살당한 사건으로 이것은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와 외교적인 문제에 불과한 것이 세계대전으로 비화(飛火) 확대된 것입니다. 이정도의 사건으로 세계대전까지 일어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고 세계적인 기업이며 70년의 역사를 갖인 삼성이 사원 한사람의 문제 제기로 큰 변화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역경의 이치입니다.
변화의 결과에 대하여는 논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글에서는 모든 것은 항상 변한다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주만물의 모든 것은 그 동기가 어디에 있었던 변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요람에서 죽음에 이르는 것도, 병이 나고 치료가 되는 것도, 기업이 흥하고 망하고 권력이 바뀌는 것도 지구의 모든 생물 무생물이 진화(進化)의 과정도 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윤회(輪廻) 사상은 생명이 있는 중생이 반복되는 괴로움의 연속을 의미합니다. 이 괴로움(苦고)의 연속인 윤회(輪廻)에서 벗어나려면 열반(涅槃)에 들어야 해결됩니다.
열반(涅槃)이란 모든 번뇌의 얽매임에서 벗어나고, 진리를 깨달아 불생불멸(不生不滅)의 법(法)을 체득한 경지를 말하며 불교의 궁극적인 실천 목적입니다.
그러나 저는 단정(斷定)코 말하고자 합니다. 불교에서 열반(涅槃)은 없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불교에 열반이 있으면 그것은 완성이며 끝이기 때문에 불교가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불교는 열반과 극락을 목표와 희망으로 삼고 끝없이 염불을 하는데 불교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불교는 열반을 추구하기 위해서 소승(小乘)에서 대승(大乘)으로 교종(敎宗)에서 선(禪)으로 교학(敎學)에서 불입문자(不立文字)불교로 끊임없이 변화하여 왔습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천당이 도래하면 그것 역시 완성이므로 기독교는 존재할 가치가 없습니다. 거듭되는 부활의 정신으로 하나님의 보좌 옆에 앉을 천국을 목표로 기도하는 것이 기독교의 존재 가치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기독교도 율법(律法)위주의 구약(舊約)의 계약서를 사랑을 중심으로한 신약(新約)의 계약서로 바꾸었습니다. 이것이 천국으로 가기 위한 변화입니다.
2000년 전부터 다시 온다는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까지 기다림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앞으로 또 2천년 아니 영원히 이어 질 것입니다. 그래야만이 기독교의 존재 이유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63괘 수화기제(水火旣濟)와 64괘 화수미제(火水未濟)의 반복되는 변화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주 속에서 숨 쉬고 있는 우리의 삶입니다.
-농월-

농월정(弄月亭)
足翁亭子澗之幽(족옹정자간지유)
그윽한 시냇가에 지족당의 정자
曠世吾行爲暫留(광세오행위잠류)
귀한 여행길에 잠시 발길이 머무네
月出金砂燦可數(월출금사찬가수)
달뜨니 금빛 모래 찬란히 새겨지고
谷虛雲日遞相浮(곡허운일체상부)
골짜기 텅 비니 구름 해 번갈아 뜨네
風光乍動紛盈目(풍광사동분영목)
풍광이 언뜻 이니 눈에 가득하고
塵土旋銷在轉頭(진토선소재전두)
먼지는 고개 돌리는 사이에 사라지네
始識子荊非善謔(시식자형비선학)
자형(子荊)이 농담 잘 못함을 알겠으니
終宵一枕枕寒流(종소일침침한류)
밤새도록 찬 물결에 선잠을 이루네!
하겸진(河謙鎭)
우리 집에 아름다운 집 이름(당호堂號)을 붙여 보세요.
사람이 사는 생활 주변에 자동차, 산, 강, 음식점 심지어는 애완동물도 고유한 이름을 지어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데 안식(安息)의 기본이 되고 추위, 더위, 비바람을 막고 외부로부터의 자연적 인공적 위험의 방책(防柵)이 되어 주고 재산으로서 가장 소중하고 가치가 제일 높은 집은 그 흔한 이름하나 붙여주지 않고 있습니다.
“집”이라는 보통명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름처럼 고유명사를 붙여주자는 것입니다.
평생 월급을 모아 어렵게 마련한 집, 전쟁을 방불케 하는 치열한 경쟁에서 분양받은 아파트, 수십년 전셋집 서러움에서 마련한 내 집, 이 얼마나 소중한 집이 강아지에게도 붙여주는 그 흔한 이름이 없다는 것은 집이 갖고 있는 위상(位相)에 비하여 너무나 야박하고 무관심한 대접입니다.
집에 이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문인(文人)이나 예술인 또는 사회적으로 특별한 분야에 종사하는 명사(名士)들은 당호(堂號)를 지어 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역사 속에는 다산 정약용 생가의 여유당(與猶堂), 사임당(師任堂), 대원군의 이노당(二老堂), 이승만의 이화장(梨花莊), 김구의 경교장(京橋莊), 만해의 심우장(尋牛莊), 등이 당호(堂號) 입니다. 사임당(師任堂)은 당호를 따서 호(號)로 사용했으며 이름은 신인선(申仁善)입니다. 지면 관계로 긴 설명은 못하지만 만해의 심우장(尋牛莊)도 매우 소박하면서 의미있는 당호며 불교와 깊는 관련이 있습니다.
저는 평범한 생활을 하는 우리 서민(庶民)들의 집에 의미 있고 아름다운 이름을 붙여 주자는 것입니다. 집전체의 이름도 좋고 컴퓨터가 있는 방을 서재(書齋)로 정하여 이름을 지어도 매우 훌륭하고 멋있습니다. 예를 들어 달빛에 책읽은 곳이라는 월광재(月光齋)는 어떻습니까?
저는 33년전 대전(大田)으로 근무처가 발령되는 바람에 그곳에 살면서 30대 초반에 아무 연고도 없는 그곳에서 저축한 돈으로 땅을 50평 산후 돈이 부족하여 돈대로 짓는다고 건평 16평의 집을 지었습니다. 집을 지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얼마나 건축업자에게, 지역 깡패에게 시달림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집이 80% 될 때에 업자가 돈을 갖고 도망을 간후 내손으로 집을 완성시키면서 많이 울기도 하였습니다. 집이 완성된 후 너무나 감격하고 꿈만 같아서 그 집에다 이름을 붙였습니다.
피우당(避雨堂) !
비바람을 겨우 피할 수 있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이후로 제가 사는 집, 지금 사는 신림동 집 이름도 피우당(避雨堂)입니다.
경남 함양군 지리산 자락 수정 같은 맑은 물이 흐르는 화림동 계곡 1,000여 평되는 바위위에 아름다운 농월정(弄月亭)이 있습니다. 이 정자는 조선 광해군 때 예조 참판을 지낸 박명부가 정계에서 은퇴한 뒤 자연에 묻혀 살면서 분수(分數)에 만족(滿足)하는 안분지족(安分知足)을 생활신조로 삼고 만족함을 안다는 뜻의 호(號)를 지족당(知足堂)으로 삼았던 한 선비의 심미안(審美眼)을 빛내기 위해 후손들이 지은 정자입니다.
농월정(弄月亭)은 달을 회롱하며 벗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스스로 만족을 아는 지족(知足)의 깊은 뜻을 마음에 담기위해 호(號)를 정한 것이 “농월(弄月)”입니다.
-농월-
※참고-자형(子荊)
자형(子荊)은 진나라 사람으로 속세를 떠나기 위해 친구인 왕제에게 마음을 털어놓으면서 “돌을 베개 삼아 눕고 흐르는 물로 양치질하는 생활을 하고 싶다(枕石漱流-침석수류)“라고 말할 것을 잘못하여
“돌로 양치질하고 흐르는 물을 베개 삼겠다(漱石枕流-수석침류)”라고 말했다. 왕제가 실언임을 지적하자 자형는 자존심이 상하여 “흐르는 물을 베개삼겠다는 것은 옛날의 은자인 허유(許由)처럼 쓸데없는 말을 들었을 때 귀를 씻으려는 것이고, 돌로 양치질을 한다는 것은 이를 닦으려는 것일세.” 하고 억지 변명을 하였다
그후 수석침류(漱石枕流)는 남에게 지기 싫어하여 사실이 아닌 것을 억지로 고집부리는 것, 또는 실패를 인정하려 들지 않고 억지를 쓰는 것을 일컫는 말로 쓰인다.

게(蟹해)는 남의 구멍에 들어가지 않는다.
負石穿沙自有家(부석천사자유가)
돌을 지고 모래를 파니 저절로 집이 되고
前行卻走足偏多(전행각주족편다)
앞으로도 가고 뒤로도 가니 발이 많기도 하다.
生涯一掬山泉裏(생애일국산천리)
평생을 한 움큼의 샘물로도 부족함이 없으니
不問江湖水幾何(불문강호수기하)
세상에 물이 얼마이건 물어 무엇 하리오.
이황(李滉)
무장공자(無腸公子)
이 시를 쓴 퇴계(退溪) 이황 선생은 가정 형편이 워낙 어려워 스승을 뫼시고 공부를 할 수가 없어 혼자 절에 가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몸에 고질병이 나도록 공부를 하였다.
어머니는 종종 자식들을 꿇어앉히고 “너희들은 아버지가 안계시므로 남의 집 아이들과는 달리 공부만 잘 해도 안 되고 행실을 각별히 조심해야 된다. 만약 행실이 올바르지 못하면 애비가 없어 교육을 옳게 받지 못해 그렇다고 남들이 손가락질을 할 테니 특별히 명심하여 조상들을 욕먹게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니 과부의 자식은 몇 백 배 더 조신(操身)하여야 한다.”
이처럼 선생께서는 어머니와 스승의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 몸소 실천하고 꾸준히 공부하여 세계적인 대학자가 되었다.
이 시는 퇴계(退溪) 이황 선생이 15살 때 개울가의 가재(石蟹석해)를 보고 지은 시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시는 제목이 없는데, 그것은 겨우 15살의 소년이 냇가의 가재를 보고 떠오른 감상을 글로 옮겼기에 시를 대표할만한 무슨 거창한 제목이 필요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위의 제목은 필자가 이 한시를 옮기면서 편의상 붙인 것이다.
이 시는 “자유부인”으로 유명한 소설가 고 정비석 선생이 쓴 퇴계소전(退溪小傳) 이라는 책에서 나오는데 정비석은 설명을 통해 『게가 구멍을 파고 들어가는 광경을 보고 읊은 천진난만한 노래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한 움큼의 샘물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으니 강호에 물이 아무리 많기로 탐낼 것이 아니다.” 라는 대목은, 열다섯 살에 이미 세상을 관찰한 철언(哲言)이었다고 말해도 그다지 과언은 아닐 것이다. 15세라는 어린 나이에 이미 주체의식(主體意識)이 확립 되었고, 인생관(人生觀)이 확고해졌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한의학 의서(醫書)인 본초강목(本草綱目)에 게의 다른 이름을 무장공자(無腸公子)라 하였다. 이 이름은 창자 없는 공자라는 뜻이다.
게를 특히 조선의 여인들이 부러워하였다. 시어머니와 남편의 구박 속에 자식을 키우면서 숙명적인 천대를 받아 벙어리 귀머거리 장님9년에 속은 타고 애간장이 녹아내려 창자 없는 게를 부러워하였다. 게는 창자가 없으니 속탈 애간장도 없기 때문이다.
1908년에 안국선(安國善)이 쓴 금수회의록(禽獸會議錄)이라는 신소설이 있다. 이 소설에는 까마귀, 여우, 개구리, 벌, 게, 파리, 호랑이, 원앙 등의 금수(禽獸)들이 사람으로 가장하여 회의를 하는 장면이다. 회의 내용중에 게((蟹해)가 발언한 내용을 아래와 같이 정리하여 본다.
게의 연설 부분을 무장공자전(無腸公子傳)이라 하는데 세상을 빈정거리고 사람을 희롱한 내용이다. 사람들은 앞을 보면서도 똑바로 걷지도 못하고, 창자 없는 게보다 자존심도 없는 모습을 비꼰 내용이다.
연단에 선 연사(演士)는 생김새가 괴상하고 강열한 눈빛과 힘센 장수같이 두 팔을 쩍 벌리고 어깨를 추썩추썩하며 하는 말이,
『나는 게올시다. 지금 무장공자라는 제목으로 연설할 터인데, 이 말은 창자 없는 공자란 뜻으로 이는 대단히 무례한 말이로다. 그렇소, 우리 게는 창자가 없고 사람들은 창자가 있소. 지금 세상 사람 중에 옳은 창자 가진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소?
사람의 창자는 참 더럽소. 비단으로 옷을 잘 입어서 겉은 화려해도 가죽만 사람이지 그 속에는 똥으로만 차 있소. 칼로 배를 가르고 그 속을 보면, 구린내가 물큰물큰 나오.
지금 어떤 나라 정부를 보면 깨끗한 창자는 아마 몇 개가 없으리다. 신문에 그렇게 나무라고, 사회에서 시비(是非)하고, 백성이 원망하고, 욕들을 하여도 모르는 체하니 이것이 명색이 창자 있는 사람들이오?
그 정부에 옳은 마음먹고 벼슬하는 사람 몇 명이나 되오?
머리 쓴다는 것이 봉급 올릴 생각, 백성 등쳐먹을 생각, 나라 팔아먹을 생각밖에 아무 생각 없소. 이같이 썩고 더럽고 똥만 들어차서 구린내가 물큰물큰 나는 창자는 우리 게들에게는 없는 것이 도리어 낫소.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압제를 받아도 분한 마음이 없고, 욕을 보아도 노여워할 줄 모르고 종노릇하기만 좋고 달게 여기며, 자유를 찾을 생각이 도무지 없으니, 이것이 창자 있는 사람들이라 하겠소?
우리 게는 창자가 없어도 남이 나를 해치려 하면 죽더라도 큰 가위 게발로 집어 한 놈 이라도 물고 죽소.
내가 한번은 어느 나라에 가보니 외국 병정이 그 나라 부인을 회롱하여 젖통을 만지려 하매 그 부인이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한즉, 그 병정이 발로 차며 폭력을 가해도 사람들이 구경만 하고 한 사람도 대들어 그 부인을 도와주고 구원하여 주는 사람이 없으니, 그 사람들은 자기와는 상관이 없어서 그러한지 겁이 나서 그러한지 분낼 줄 모르고 도리어 웃고 구경만 하니, 그 부인의 오늘날 당하는 욕이 내일 제 어미나 제 아내에게 또 돌아올 줄을 왜 알지 못하는가?
이런 것들이 창자 있는 사람이라 스스로 자랑스러워 하니 게허리가 아파 못 살겠소. 창자 없는 우리 게는 어찌하면 좋겠소?
나라에 경사가 있어도 기뻐할 줄 모르고 국기 달 성의도 없으니 그것이 창자 있는 사람의 할 짓이요? 그런 창자는 부럽지 않소. 창자 없는 우리 게의 행한 일을 좀 들어 보시오.
한 처녀가 뱀에 물려 죽게 된 것을 살려 내느라고 위험을 무릅쓰고 그 큰 뱀을 우리 게발 가위로 잘라 죽였으며, 객사한 송장을 드러내어 음란한 계집의 죄를 발각하는 옳은 일을 하였소.
우리 게는 사람같이 더러운 일은 하지 않소. 또 사람들도 우리의 행위를 자세히 아는 고로 『게도 제 구멍이 아니면 들어가지 아니한다』는 유명한 속담이 있소.
참말이요. 우리는 암만 급하더라도 들어갈 구멍에만 들어가지, 부당한 구멍에는 들어가지 않소. 사람들은 부당한 구멍으로 들어가는 일이 참 많소. 부모처자를 내버리고 중이 되어 산 속으로 들어가는 이도 있고, 양가집 부인네들은 음란한 생각으로 불공한다 핑계하고 절간 초막으로 들어가는 이도 있소, 불공드리다가 초막(草幕)에는 왜 들어가오?
명예 있는 신사라 자칭하고 남의 부인 사타구니에 들어가는 이도 있소, 당연히 들어갈 데와 못 들어갈 데를 분별치 못하고 들어가서 화를 당하고 눈물을 흘리니, 이런 사람들이 창자 있는 것이 무슨 자랑이라고 우리 게의 창자 없는 것을 비웃는단 말이요?
지금 사람들을 보면 그 창자가 다 썩어서 얼마 후에 창자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이 다 무장공자가 될 것이니, 이다음에는 사람더러 무장공자라 불러야 옳겠소.』
게가 연설을 끝내고 연단에서 개선장군처럼 내려온다.
게는 창자가 없어도 무지하게 잘 먹는다. 게를 자세히 보면 사람의 손등 손가락과 닮아서 그 성질이 종(縱세로)을 꺼려하고 횡(橫가로)에 길들어져 있다. 즉 앞으로 가기를 싫어하고 옆으로 다니는 것을 좋아 한다. 두 눈은 앞으로 드러내고도 걸음은 옆으로만 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 발들이 종(縱세로)으로 거스르면 다 떨어져 나가게 되어 있다. 이 게를 보면 근래 이 나라 정치인들의 행적과 비슷하다.
동의보감에서는 게가 가슴속 맺힌 열(結熱결열)을 다스리고, 위(胃)의 기운을 좋게 하여 소화력을 향상시키며, 산후에 배가 아픈 통증을 다스린다고 나와 있다. 게껍질과 새우 껍질은 키토산이 풍부하나 그대로 먹으면 물에 녹지 않아 효과가 없으므로 매우 부드럽게 가루를 내어 먹어야 하고 새우를 먹을때는 꼬리부분이 최고의 영양가다.
-농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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