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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진 샘의 협박에 못이겨 기행문을 올립니다. 저희 학교 선생님들과 함께 했던 1박 2일의 여행기입니다.
2012 겨울, 순천여행
하나. 여행은 수행도 구도도 아니다
점심시간마다 밥을 나눠 먹는 밥상공동체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학교 급식이 싫어서 도시락을 싸오던 분들이 하나 둘 모여 만들어진 공동체입니다. 서로를 위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해서 점심때마다 싸들고 오는 반찬이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두 어 시간동안이나 정성들여 만든 반찬, 바쁜 시간을 쪼개서 시장을 봐오고 요리를 하여 대접하는 모습은 희생과 나눔의 가치실현이었습니다.
박제순 선생은 ‘밥은 하늘’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늘을 공유하고 나누는 사이입니다. 정현 샘이 밥을 나누는 자리에서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책을 읽으며 선암사를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더라는 말에, 이번 겨울에 한 번 가보자고 제안했습니다.
사람들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여행을 한다고 말합니다. 많은 현인들도 여행을 통하여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사실 여행길의 경험은 좋은 공부가 됩니다. 세상을 보는 눈도 넓혀줍니다. 옮고 그름을 몸으로 체험할 수 있다는 것도 짜릿한 체험입니다. 하지만 여행은 그것만을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나누고, 느낌을 공유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야 말로 여행이 가져다주는 최고의 축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둘. 소박하고 푸짐한 산채 비빔밥
일곱 명 가운데 다섯 명이 동참했습니다. 여행 이틀 전 지도를 펴 놓고 전체일정을 짜고 숙박시설을 알아보았습니다. 책 몇 권을 가져다가 사전학습도 미리 해두었습니다. 가장 걱정이 되었던 자동차는 정현 샘이 제공하기로 하였고, 홍성에 거주하는 명상 샘은 기차를 타고 내려가서 선암사에서 만나기로 하였습니다.
순천 선암사는 마음의 거리보다 가까웠습니다. 휴게소에서 한 번 쉬고 운전대를 바꿔가며 세 시간 반쯤 달렸더니 승주면에 다다랐습니다. 우리일행과 거의 같은 시간에 도착한 명상샘과 함께 선암사 입구 길상식당에 들어갔습니다. 대찰(大刹) 입구의 식당답게 길상식당 한쪽에는 스님들과 처사들 몇 분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반대편 홀에는 중년의 여성 두 분이 산채정식에 만찬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산채비빔밥과 도토리묵 한 접시 그리고 동동주 한 되를 시켰습니다.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은 눈부셨고 소박하면서도 푸짐한 밥상은 입맛을 돋웠습니다.
셋. 선암사는 이른 봄에 답사하면 좋겠다
주차장에서 선암사까지 오르는 야트막한 언덕에는 따스한 겨울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습니다. 제법 긴 거리가 부담스러웠던지 영애 샘은 너무 멀다며 투덜거렸습니다.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며 부도밭을 지나 언덕빼기를 올라섰더니 눈앞에 승선교가 나타났습니다. 아무래도 절에 들어가기 전에 선암사에 관한 몇 가지 내용을 알아 두어야 할 것 같아 대각국사 의천과 천태종, 제1공화국의 불교정화와 조계종과 태고종 문제, 조선시대 이판승과 사판승 문제, 중창불사를 일으킨 약휴스님 이야기를 이야기하였습니다.
구부러진 오르막길을 걸어올라 일주문에 들어섰습니다. 선암사에는 대각국사 의천의 불교개혁 의지가 배어 있는 사찰입니다. 또 태고종의 총림이며 종정이 주석하는 사찰이기도 합니다. 태고종 계열의 스님들은 이곳에서 동안거와 하안거를 하며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정진합니다. 그래서 일반 사찰과 달리 공개되는 장소와 출입이 금지된 장소가 나눠졌고, 종정과 주지의 거쳐, 예불하는 공간과 수행하는 공간, 강학하는 공간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선암사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권위적이지 않은 건축이었습니다. 건축에 권위가 없다는 것은 대중을 배려하는 ‘불교 철학적 표현’ 일수도 있고, 실제 재정적으로 궁핍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김봉렬 선생은 ‘조선 후기 불교가 쇠퇴하면서 좀 더 민중지향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상황이 건축에 표현된 것’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저는 그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관음전(원통전) 앞에서 순조와 선암사의 관계에 대하여 한두 가지 더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19세기 초 선암사 중창불사에 가장 크게 기여하였던 조선왕실과 순조임금에 관한 이야기지요.
넷. 섬섬옥수같은 순천만 갈대
서둘러 하산을 해서 순천만으로 달렸습니다. 오늘 일정의 대미는 순천만 갈대밭입니다. 지인(知人)은 용산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저녁놀과 갈대밭이 압권이라고 했습니다. 시계는 3시 40분 경, 늦어도 4시 30분이면 갈대공원 앞에 도착할 것 같았습니다.
입구에서 매표를 하고 천천히 공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세계 몇 대’ 어쩌고 하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순천만에 ‘세계 5대 갯벌’이라는 영예로운 매달을 달아주었습니다. 순천만의 갈대는 환상적이었습니다. 서천 신성리 갈대밭이 바닷바람에 거칠어진 어촌여인의 손등같다면, 순천만의 갈대는 고운 여인의 섬섬옥수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진을 찍어가며 용산 언저리에 당도했더니 어느새 해는 뉘엿뉘엿, 표지판에는 20분쯤 더 올라야 한다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두 분 여선샘의 체력과 걸음이 느린 명상샘의 걸음걸이로 볼 때 어쩌면 20분이 아니라 30분을 넘길 수도 있었습니다. 구름다리를 건너 산길을 올랐습니다. 산 정상부에 오르니 순천만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저는 갯벌을 좋아합니다. 능욕당한 여인의 자궁같으면서도 한 번 바닷물에 씻겨나가면 금세 깨끗하게 치유되는 넉넉함이 좋습니다. 내 어머니와 누이들은 갯벌을 터전삼아 바지락을 캐고 굴을 따며 힘든 세월을 견뎌냈습니다. 삭풍이 불어대는 한겨울에도 아버지는 지게와 광주리를 지고 김양식장으로 나갔습니다. 그래서 나는 갯벌이 낳은 자식입니다. 갯벌은 나의 영원한 고향입니다.
다섯. 찰진 벌교 겨울꼬막
겨울 바닷가에는 금세 어둠이 찾아왔습니다. 어둠이 잦아들자 청둥오리, 고니, 흑두루미가 갈대숲으로 날아들었습니다. 겨울바람에 더욱 차가워졌을 갈대숲과 웅덩이를 보금자리로 여기는 그들이 참 대단하게 여겨졌습니다.
저녁밥은 가까운 벌교에서 먹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밥상공동체로 모였으니 먹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마침 1월은 꼬막철입니다. 선암사 대처승의 아들로 순천과 벌교에서 살아온 작가 조정래의 태백산맥에는 꼬막에 관한 다양한 형용사와 수식어가 등장합니다. 우익의 압잡이로 등장하는 염상구가 그토록 탐내던 외서댁을 범하면서 ‘찰진 벌교 꼬막’에 비유한 것은 그 중 압권입니다.
몇 년 전 벌교를 답사하면서 벌교시장에서 꼬막과 새조개를 사서 근처 식당에서 삶아 먹었던 기억은 아직도 새롭습니다. 조정래의 표현처럼 처음에는 짭쪼롬해서 얼굴을 찌푸리다가도 먹으면 먹을수록 감칠맛 나는 중독성에 매료되었던 기억은 아직도 혀끝에 남아 있습니다. 늦은 시간 때문에 벌교장에는 갈 수 없어 우리는 꼬막요리로 유명한 ‘벌교꼬막식당’을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내비게이션에서 검색했더니 벌교꼬막식당은 나오지 않고 ‘벌교꼬막회관’만 검색되었습니다. 같은 집이겠거니 하고 찾아든 식당은 기대만큼은 아니었습니다만, 참꼬막과 꼬막무침 맛은 예전 그대로였습니다.
여섯. 갈대밭 사랑채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아름답고 푸근한 잠자리입니다. 잠자리가 불편하면 하루 종일 몸이 찌뿌등하고 여행기분은 반감되기 마련입니다. 처음에는 호텔이나 펜션이 너무 비싸서 엄두를 못 내다가 정현 샘이 차량비를 면제(?)해주는 바람에 자금의 여유가 생겨 명성이 높은 ‘갈대밭 사랑채’라는 펜션을 예약하였습니다.
갈대밭 사랑채는 벌량면 교량리라는 마을에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마을 앞 물굽이를 ‘벌량’이라고 불렀고, 입구에는 갈대밭으로 넘어가는 다리가 놓여 그렇게 불렀는가 봅니다. 펜션은 깔끔한 한옥이었고 내부에는 샤워장과 화장실이 달려 있어 하룻밤 유숙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습니다.
간단히 술과 안주 그리고 다음날 아침거리를 사서 술상을 봤습니다. 여행은 숙소에서 나누는 못다한 이야기들로 더욱 풍성해지기 마련입니다. 두런두런 왁자지껄 이야기를 나다보니 어느 새 밤 12시가 넘었습니다.
서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늦게 잠들었습니다. 수면시간이 많이 부족했는데도 따끈한 방바닥은 어제의 피로를 말끔히 털어주었습니다. 아침 일곱 시 반쯤 잠도 뒤척이기도 뭐해서 점퍼를 걸치고 하구둑으로 나갔습니다. 순천만 물굽이를 타고 불어오는 이른 아침 바닷바람은 강렬하고도 살 떨리게 하였습니다.
숙소로 돌아와 아침 준비를 하였습니다. 아침메뉴는 콩나물 라면입니다. 아직 대중화가 덜 되어서 그렇지 콩나물 라면은 끊이기도 편하고 아침 숙취해소에도 그만입니다. 일행의 반응도 좋아서 마음까지 흐뭇했습니다.
일곱. 낙안읍성
삼사년 사이에 두 번이나 답사했지만 낙안읍성은 늘 생소합니다. 이태 전에 왔을 때는 성 안 은행나무집에서 민박했습니다. 그 때도 겨울이었는데 문풍지를 뚫고 들어오는 바람은 콧등을 얼얼하게 하였지만 절절 끊었던 방바닥이 그것을 상쇄시켰던 기억이 납니다.
남문을 지나 객사와 동헌을 답사하였습니다. 북문 근처에서는 47년째 대금과 소금을 제작하고 있다는 장인(匠人)의 솜씨를 견학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순천에 거주하며 낙안읍성 공방에서는 악기만 제작한다는 장인은 우리를 위해 대금과 퉁소를 연주해주었습니다. 그것도 삼천만이 즐겨 듣는 ‘나그네 설움’을 말이죠.
명인이 만든 대금은 정말이지 명품이었습니다. 명품이 탄생하려면 특수한 대나무를 먼저 구해야 하고, 대나무 속의 구멍을 적당한 크기로 넓혀줘야 하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구멍을 뚫어야 한다는 설명을 듣고는 고된 준비와 단련의 과정이 없이는 명품이 탄생할 수 없음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북문에서 계단을 타고 성벽위로 올라갔습니다. 북문과 남문 사이는 낙안읍성 전체를 가장 아름답게 조망할 수 있는 코스입니다. 우리도 남들처럼 이곳에서 사진도 찍고 풍광도 감상했습니다. 남문 근처에서 일행이 대장금 촬영장으로 간 사이 정현샘과 나는 골목길을 걸었습니다. 사람 냄새 풍기는 골목길은 마음을 따뜻하게 합니다. 아쉬운 것은 겨울이어서 골목길에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은행나무집 앞에 있는 주막집은 전에도 한두 번 들렀습니다. 마침 주막집 입구에 걸어 놓은 가마솥에서는 소머리, 돼지머리를 삶아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가마솥에서 풍겨오는 음식냄새에 현혹되어 야외 식탁에 자리를 잡고 홍어무침과 돼지국밥, 소머리국밥에 막걸리 한 되를 주문했습니다. 따사로운 햇볕을 받으며 나눠 먹은 음식은 분위기도 그만, 맛도 그만이었습니다. 어쩌면 음식 맛보다도 사람 맛, 분위기 맛이 좋았다고 해야 옳겠지요. 사실 낙안읍성 음식점들의 솜씨는 그저 그렇거든요.
여덟. 지눌을 떠올리며 개신교의 개혁을 생각하다
점심을 챙겨 먹고 고개를 넘어 승주 송광사로 향했습니다. 낙안읍성에서 고개를 넘어서니 외서면입니다.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외서댁의 고향이 이곳이었군요. 송광사 표지판을 보며 조금 더 들어갔더니 먼저 사찰 입구에 즐비한 상가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송광사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고려 후기 정혜결사를 맺어 불교개혁운동을 이끌었던 보조국사 지눌과 16명의 국사(國師)를 배출한 승보사찰이라는 점과, 근대 고승인 효봉선사와 법정스님이 주석했던 사찰이라는 점이 가장 눈길을 끕니다. 송광사 입구에서 일행들에게 사찰의 역사와 여러 고승들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우리나라 종교계의 반성과 개혁이 절실한 지금, 돈오점수, 정혜쌍수를 주장하며 권력과 재물의 노예가 된 고려 후기 불교를 개혁하려고 했던 지눌이 그립기만 합니다. 종교계 중에서도 개신교의 타락상은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인데, 쪽팔리게도 저는 개신교도입니다.
근대의 고승 효봉은 평양고보와 일본 와세다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한 수재였습니다. 고등고시에 합격하고 26세에 판사가 되어 승승장구하다가 36세에 내린 사형판결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습니다. 번민의 나날을 보냈던 효봉은 결국 법복을 벗고 엿장수가 되어 전국을 떠돌았고 인연이 있어 승려가 되었습니다. 구산선사, 시인 고은, 법정은 그의 제자입니다. 그밖에도 우리가 모르는 수많은 제자들이 효봉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효봉 뿐 아니라 법정까지 세상을 떴지만 아직도 그리움으로 남아 있는 그들을 떠올리며, 정의가 짓눌리고 진리가 외면당하는 현실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묻습니다.
아홉. 뒤풀이
송광사 입구 길상식당에서 여행의 뒤풀이를 했습니다. 송광사의 초명이 길상사였다지요. 그러고 보면 이 식당은 송광사 창건 주 혜린선사의 은혜를 입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서샘은 또 다시 홍어회와 꼬막 그리고 막걸리를 주문했습니다. 홍어는 비교적 잘 삭힌 것이 나왔는데 꼬막은 불행히도 세꼬막이었습니다. 어제 저녁밥을 먹으며 참꼬막과 세꼬막의 차이를 열강했던 터라 머쓱했습니다. 다행히 막걸리 맛은 낙안읍성보다 좋았고, 인심이 넉넉한 주인장이 개평으로 도토리묵까지 내주어서 푸짐한 술자리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흥겨운 뒤풀이 덕분에 어둑해질 때쯤에야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순천에서 기차로 홍성까지 올라가겠다는 명상 샘을 억지로 자동차에 태우고 출발했습니다. 이틀 동안 기쁨을 나눴던 동료가 추운 대합실에서 덜덜 떨고 있을 생각을 하니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죠. 명상 샘을 익산역에 내려줄 때는 마음이 뜨듯했습니다. 섬김과 나눔이 있는 여행은 그래서 즐겁습니다. (2012.01.11)
첫댓글 와우~~ 1박2일 여행이 아니라 마치 6박7일 여행같슈~.
선암사~순천만~낙안읍성~송광사 답사를 1박2일만에 댕겨올 수가 있네요. 전 아직 선암사랑 순천만은 가보지 못했구먼유~ 부럽네유.
食爲天 밥이 곧 하늘이지요. 구성진 비빔밥에 쫀득 쪽득한 외서댁 꼬막맛.... 으~~이~~그~~ 쥑입니다.
그럼 우리도 마곡사 말고 순천으로 직행할까요?
순천도 좋지유~~~~ㅎㅎㅎㅎㅎ
쥔장 허락도 없이 제 집을 방문하시었군요..재밌고, 즐겁게 보내고 가셨다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리고 낙안읍성내 식당 음식 그런대로 맛남니다...특히 제가 자주가는 3호집 백반과 나물로 나온 반찬은
직접 그 곳 분들이 재배해서 만든 반찬 이랍니다. 다음에 오시면 꼭 드셔보세요..ㅎㅎ
음~마~~ 그럼 순천댁 이신감유? 룰루랄라~~~ 순천행이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