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한 해가 저물어 가는 11월 26일. 이른 새벽을 깨워 전철을 타고 시청역에 도착하니 우리를 태우고 갈 관광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으로 참가하는 팀이라 아는 사람도 없고 분위기도 낯설지만 한 가지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통하는 것이 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여행이라서 그런지 금방 정감이 느껴진다.
버스는 7시30, 예정된 시간을 지켜 출발을 하였다. 차를 타고 가면서 겨우 김밥 절반으로 아침을 때우고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도착하였다는 소리에 눈을 뜨니 첫 번째 목적지인 감곡성당이다.


감곡은 1970대까지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경기도 장호원에서 밤늦도록 놀다가 통금시간에 쫓기면 청미천 다리를 건너서 충북지역인 감곡으로 넘어와서 지내다가 통금이 해제되면 돌아 가곤했다는 재미있는 이야기 거리가 스며있는 곳이다.
감곡성당은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성당리 높은 언덕에 멋지게 자리를 잡은 12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름난 곳이다. 날씨는 잔뜩 흐리고 최저 영하3도의 음산한 날씨에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매괴박물관으로 들어 가니, 성당을 지은 임 가말로 신부를 비롯한 역대 주임신부들의 사진과 성물들이 전시되어 있고, 역사를 설명한 글귀가 곳곳에 붙어있었다. 여러 가지 중에 가장 핵심적인 것은 성당의 자리다. 원래 조선말 명성황후의 6촌 오빠인 민응식의 99간 집이 있던 곳에 프랑스에서 파견된 가말로 신부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을 받고 감곡을 한 눈에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성당을 지어서 지금에 이른다고 한다. 일본 놈들이 이렇게 멋지고 성스러운 자리에 신사를 짓겠다고 시작을 했다가 신부님의 간절한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는지, 갖가지 사건과 기후 불순 등,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에는 포기했다는 이야기는 참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게 하였고 임 가말로 신부의 신앙심이 대단했구나 하는 짐작을 하게 하였다.
특히 본당에 모셔진 성모상은 6,25때 북한군이 인민군 사령부로 사용하면서 여러 가지 일이 생겨서 그 원인이 성모상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총을 쏘았지만 성모상은 끄떡도 하지 않았고, 화가 난 인민군이 다발총을 쏘았는데 모두 빗겨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직접 올라가서 성모상을 끌어내리려고 하니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인민군은 스스로 철수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유명하고 유서 깊은 감곡성당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서 늘 탐방단이 끊이지 않고, 한적한 시골 성당이지만 지하에는 까페로 들어서는 순간 짙은 커피향과 따뜻한 기운이 초겨울 탐방객의 움추린 가슴을 녹여주었고, 고적한 분위기와 함께 유서깊은 감곡성당은 보는 것 자체로도 깊은 신앙심과 정감을 느낄 수 있는 인상 깊은 곳이다.


인근의 식당에서 생전 처음 들어보는 스찌개를 먹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흔히 말하는 도가니가 들어 있었다. 우리나라 유일의 얼큰한 스찌개를 하는 곳이라고 한다. 맛이 좋고 개운해서 맛나게 점심을 먹고 다음 장소로 이동을 하였다.
권근의 삼대묘소를 찾아가니 첫눈이 내리기 시작하였다. 한 시대의 큰 별이요, 역사를 이끌어 오신 선생님은 700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고요히 잠들어 계셨고, 아들 권제와 손자 권람의 묘가 차례로 우리의 산하를 아우르고 있는 것이 이색적으로 다가왔다. 한 가지 놀라운 이야기는 권람의 개가 주인이 죽게 된 상황에 혼신의 힘으로 주인을 구해낸 충견으로 주인이 죽은 후에 개도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서 주인 무덤 아래쪽에 조용히 묻혀있는 忠犬塚이라는 비석이 당시의 사실을 증명해 주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수많은 무덤을 탐방하였지만 개무덤을 탐방하기는 생전 처음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충견총 비석을 누군가가 뽑아 가서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바로 뒤에 새로 세운 비석이 아담한 봉분을 하고 있는 개무덤을 지키고 있었다.



권근은 익히 알거니와 유명한 학자요, 조선 개국을 노래한 상대별곡이라는 노래가 잘 알려져 있고, 권제는 정인지, 안지와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은 학자요, 당대의 정치가로, 음성군수를 역임하였다고 한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음성군 생극면 능안로 일대 35만평의 넓은 땅을 하사받아 아버지의 묘는 원래 성남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모셔 와서 아들 권람과 함께 삼대묘역을 꾸미게 되었다고 한다. 묘지로 오르는 길이 딱히 나 있지도 않은데 눈발이 날리는 미끄러운데다가 아주 비탈이 져서 어른들은 상당히 힘이 들었다.
다음 장소를 찾아가는 길에 가을걷이를 마친 텅 빈 들판은 말없이 내리는 눈을 맞아 하얀 옷으로 갈아입고, 마치 인간사 희로애락을 모두 보듬을 것 같은 포근함을 느끼게 하였다.



이무영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농촌 소설가이다. 그의 생가 터는 여름내 자랐던 잡초를 제거하고 추워지는 날씨에 키가 작은 풀이 발목을 덮을 정도로 발이 푹푹 빠지며 건물은 흔적도 없고, 담 아래에 작가의 흉상과 시비가 첫눈을 맞으며 쓸쓸한 뜨락을 지키고 있을 뿐, 정자의 처마 안쪽으로 몇 장의 사진이 전부다. 사진 속에서 초라한 생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였다. 설명을 들으니 친일파 작가이기 때문에 집도 철거되고, 정비도 하지 않으며 찾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잠시 시대적 아픔을 되 뇌이며 누구도 원망할 수 없는 모두가 타고난 운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반기문 생가는 원남면 상당리 행치마을 전부가 상전벽해가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전에 와본 적이 없기 때문에 옛 모습을 알 수는 없지만 깊은 산골의 작은 마을이 입구부터 정비가 잘 되어있고, 마을 중간에 자리 잡은 작은 초가집이 반기문 생가라는 이정표가 아주 세련된 느낌이요, 바로 앞 쪽에 있는 기념관은 시골의 정서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현대적인 모습이 약간의 이질감을 느끼게 하였다. 마을 뒤편에는 마을의 몇 배는 될 듯한 넓은 공원이 조성되어있었다. 이름하여 평화공원이다. 우리나라의 지난 정부가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는 중에 가장 잘 한 것 중의 하나가 외교부 장관까지 지낸 반기문을 유엔사무총장으로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내 정치에 발을 들이기 전에 마을과 생가를 정비하고 공원을 조성하였으니 망정이지 만약에 국내 정치에 손을 댄 다음에 이런 일을 시작했다면 또 어떤 변수가 생겼을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첫눈이 내리는 11월의 끝자락, 초겨울의 맛을 제대로 온 몸으로 받으며 김경식의 인문학 여행을 하게 되어 이런 좋은 기회를 만들어 준 진행자 측에 감사를 드리며 특히 예쁜 박은정 선생님의 밝고 친절함으로 전혀 낯설지 않았고, 김경식 강사님은 시인으로, 팬클럽 사무총장 일을 맡고 계시면서 이런 인문학 여행을 주도 하고, 역사와 문학에 대한 해박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으며 알 찬 설명을 해주시며 여행을 친히 진행하는 선생님께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2016. 11.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