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증인을 고민하는 이들에게서 [증인이 잘못되었다면 대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종종 받습니다. 이 물음에 한 두 마디로 대답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실 저 자신도 탈관념을 한 후에 증인조직을 나간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소위 [진리생활]이라는 증인생활을 40년 삶속에서 해 왔으니 절대적이었던 인생궤도에서 이탈해서 무엇으로 나를 채워야 할지 막연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죠.
이런 대안에 대한 문제를 풀기 위해 증인조직이 우리의 정신에 심어놓은 [유일조직구원론]을 새삼 돌이켜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충성증인들은 단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지요. 바로 [이 조직에 굳게 고착하여 하느님을 섬기면 다가오는 신세계로 가서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다]라는 희망입니다. 즉, 천하의 선물인 영생을 누리려면 여호와의 증인으로서 충성스러운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이 여호와의 증인조직은 지상 유일의 참 조직이고 진리조직이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통로로서의 조직이기 때문입니다. 증인들은 [지상에 하느님의 인도를 받는 하나의 참 종교가 있다]는 생각을 주입받아 왔습니다. 따라서 만약 이 종교가 참 종교가 아니라면 다른 참 종교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 되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 이 생각은 성서적일까. 이 문제를 풀지 않으면 [대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는 짐짓 어렵습니다.
이제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아래의 소제목들을 통찰해 보도록 합시다.
1.하느님의 인도를 받는 참 종교(조직)는 단 하나밖에 없다?
(에베소 4:5)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침례도 하나입니다.
위 말씀은 증인들이-지상에 승인받는 종교는 즉 참 종교는 하나일것이라고 - 추리하는 대표적인 근거입니다. 그러나 이 성구만 보면 이 결론이 나오는 것 같지만 전후문맥의 흐름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성구는 아래와 같이 다른 개념을 전달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4:6)모든 사람의 하느님 아버지도 한 분이시니, 그분은 모든 것 위에, 모든 것을 통하여,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자, 이제 생각해 보십시오.5절의 말씀을 보고 [하나님은 지상에 종교 하나만 승인한다]라고 해석한다면 [그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라는 6절의 말씀은 [모든 종교를 승인하신다]라는 논리로 해석해야 되지 않을까요. 이것이 일관성 있는 성서해석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증인들은 6절의 성구는 무시합니다. 오직 자신들의 조직논리에 맞는 5절만을 인용하고 강조할 뿐입니다. 성서를 조화롭고 전체적으로 보는 사람이라면 유일조직론과의 개연성이 아니라 5절의 말씀은 믿음의 일체감을 강조한 성구라고 6절을 하나님의 관대함을 강조한 성구라고 해석할 것입니다. 어느 성서해석이 더 자연스럽습니까.
성서를 지엽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특정성구 하나만 놓고 교리적 명제를 만드는 것은 아니 되는 일입니다. 성서는 수 없이 구원은 - 특정조직이나 종교를 통해 오는 것이 아니라 - 그리스도를 통해 온다고 알려줍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통해서 온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때가 가까울수록 모이라는 성구도 자세히 보면 [모여야 구원받는다]라는 명제가 아니라 모이는 것을 권장하는 것일 뿐입니다. (히브리 10:24, 25) 특정성구를 보고 교리를 확대 생산해서는 안됩니다. 기억하십시오.히브리 10장의 내용은 모임을 권장하는 것이지 모임에 속해야 구원받는다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인도하고 관리하는 지상의 참 종교조직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는 성서에 없습니다.
흔히 증인들은 고대 노아의 방주를 조직과 연계합니다. 방주에 타는 것이 구원을 의미하였듯 조직과 연합하는 것이 그러하다는 것이죠. [일반화의 논리]를 잘못 적용한 예입니다. 방주는 타면 살 수 있었겠지만, 영원한 생명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하느님의 나라에도 속했다고 다 구원받은게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성서는 구원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개인의 행실과 관련지었습니다. 비록 어떤 종교조직에 속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영은 우리 한 두사람에게도 함께 하지 않습니까.
(사도 2:21) 그리고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2.진리는 어디에 있는가
흔히 증인들은 진리가 하느님의 조직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의 조직을 실제로 [진리조직]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서적 정답은,진리는 하느님의 말씀안에만 있다는 것입니다. 수 많은 예언과 예측을 틀려 온 증인조직을 진리조직이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였다는 이스라엘 왕국도 결국 수 많은 악한 왕들을 배출하면서 불순종으로 멸망당했습니다. 백보 양보해서 [여호와의 증인조직]이 하느님의 신권조직이라고 해도, 그간의 많은 오류와 예언실패가 참 종교의 자격을 의심케 하는 것이라면 이스라엘처럼 하느님에게 버림받지 않는다는 보장을 어찌 하겠습니까.
진리를 가르치는 인간조직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애초부터 비성서적이며 틀린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는 일이 있을 것임을 다음과 같이 경고했습니다.
(마태 24:4-5) 아무도 여러분을 그릇 인도하지 못하도록 조심하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을 근거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그릇 인도할 것입니다.
(마태 24:11) 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을 그릇 인도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요한 6:68)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여,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당신에게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3.성서를 이해하는 데는 가르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가
증인들은 성서를 이해하는 데 누군가 가르침을 줘야 한다 즉 권위있는 가르치는 자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가르치는 자가 신권조직이고 통치체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따라서 나홀로 하느님을 섬기는 자는 오류에 빠지기 때문에 참 숭배의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물론 에디오피아 환관은 빌립에게 자신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사도 8:31)사실, 누가 나를 인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이 부분 역시 성서를 지엽적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가르치는 자가 필요하다는 논리는 당연 맞는 것이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올바른 것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거짓선생들을 경고했으며 가르치는 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위험할 수도 있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다음 성구들을 참고해 보십시오.
(야고보 3:1)여러분 가운데 가르치는 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는 안 됩니다. 알다시피, 우리가 더 무거운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첫째 2:27) 여러분으로 말하자면, 그분에게서 받은 기름부음이 여러분 안에 물러 있으므로, 아무도 여러분을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도리어 그분에게서 받은 기름부음이 모든 것에 대하여 여러분을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그것이 여러분을 가르친 대로 그분과 결합하여 머물러 있으십시오.
가르치는 일을 체계적으로 하기 위해 인간조직이 필요하다는 논리는 일견 맞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고 누가 올바른 것을 가르치는 가를 식별 할 수 없을 때에는 차라리 그리스도만을 스승으로 삼고 성서와 성령을 통해 배우는 것이 더 올바른 행동입니다. 사실 인간이나 인간조직의 가르침은 모두 옳을 수 없으며 언제나 옳을 수 없습니다.그래서 성서도 사람이 사람을 인도하여 해로운 일이 생긴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특정 인간조직을 진리조직이라고 절대적으로 따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요한 첫째 4:1) 영감받은 표현을 다 믿지 말고, 그 영감받은 표현들을 시험하여 그것이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인지 알아보십시오. 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르침을 전혀 섞지 않고 순수한 성서의 가르침을 알려 주는 인간조직이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그런 조직을 분간하기 힘들다면 차라리 특정 조직에 속하지 않는 편이 더 좋습니다. 적어도 특정조직이 그리스도와 같은 가르치는 목자로서의 지위를 얻으려면 거짓 예언자 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요한첫 4:1) (마태 24:11)여러분 주위에 거짓 예언을 하지 않은 종교조직이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간 거짓 예언을 하지 않은 종교조직이 있다면 그 조직이야말로 가르치는 자로서의 자격을 갖춘 것입니다. 그런 조직이 없다면 차라리 가르치는 자로서 성령을 초대하는 것이 훨씬 성서적이 아닙니까.
(요한 14:26)돕는 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칠 것이고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 준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해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이는 조직을 찾지 마십시오. 특정조직을 거짓이라고 판정했다고 또 다른 조직이 있을 것이라고 단정하여 온 세상을 헤매지 마십시오. (성서적으로) 과거 인간의 특정한 조직은 그 시대에 특정한 역할을 했지만, 그것은 절대로 구원의 통로도 아니었으며 존재 자체가 절대적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 6:68)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여,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당신에게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 이 세상에는 대안이 없는 게 얼마나 많습니까. 세월이 흘러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부모님의 대안은 없습니다.
존경하는 은사님이 돌아가셔도 대안은 없습니다. 로또에 떨어져도 대안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여호와의 증인이 참 종교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을 때는 또 다른 종교조직이라는 대안이 필요합니까.
[인간에게 가장 놀라운 일은 자신이 언젠가 죽을 목숨이라는 것을 잊고 사는 것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이 세뇌차원정도로 강력하게 실현되는 곳이 증인조직입니다. 증인들은, 절대로 죽지 않고 가까운 때에 세상의 종말을 맞이하여 자신들만이 살아남아 영생을 누릴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강력한 환각속에 있다가 그것에서 깨어 탈관념을 하게 되면 혼란과 좌절로 그 환각을 대체할 그 무엇을 찾게 마련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환각속에 아니 마취속에 있던 사람이 느끼던 그 환청과 환시를 그 무엇으로 대치할 수 있겠습니까.
그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에 대한 자각일 뿐입니다. 비록 그 현실이 쓰리고 아픈 것이라도 나만 아니라 수십억이 함께 걸어가고 있
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길]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나름대로 그 현실속에서 사랑하고 나누고 행복해 하고 있지 않습니까.로또
당첨을 극도로 바라는 사람에게 그 당첨을 대신할 대안이 있을까요. 영원한 생명이라는 로또 당첨을 바라던 사람에게 그 어떤 대
안이 행복을 가져다 줄까요.
인간은 누구나 외롭습니다. 탈증인이 외로운 것은 유별난 일이 아닙니다. 외로울때 찾아오는 친구가 있고 한잔하며 떠들 벗이 있다면 그 또한 외로움의 대가로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변덕스런 종말예언과 거짓 희망을 위안으로 삼는 것보다 말이죠.
첫댓글 그냥 평범한 자연인으로 살다가 죽으라는 말씀으로 보입니다.오늘 동네 교회를 다녀왔습니다.정말,여증들은 철저한 성서교육을 받았구나..라는것을 매번 갈때마다 느낍니다.!초청목사분 세상학력이 대단합니다.국내최고의대학을 나와서 영국웨스터민스터..어쩌고저쩌고 신학대학을 나오셨고 등등..내가 중언부언으로 듣는건지 이사람이 중언부언하는건지 이제는 햇갈립니다.매번 듣는 기도지만,왜저리 내용은 똑같을까..라는 생각,회사ceo가 해당교회 목사에게 제상황을 세세히 설명을 해서 제가 가면 정말 환대를 받습니다.내용은 그러할지라도 사람들의 진실성은 이곳에서도 엿보기는 한데,마취가 10년이 지났어도 아직 안깬것인지 ...
아 그렇게 보였나요 ~~^^ 너무나 올인하던 종교를 버리게 되면 다들 허탈해 집니다. 대안을 찾으려 하지요. 또는 대안이 없다고 나오질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서적 고찰을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죽어서야 깨는 강한 마취제를 맞았는지,도통 햇갈립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그렇죠. jw가 주장하는 보이는 조직으로서의 참 종교라는 대안은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 외에 삶이 살아가는 문제에 있어서는 대안이 얼마든지 있겠죠.
대안이란 "기존의 방식을 대체할 새로운 방식"이라고 정의합니다. 대안의 종류에는 기존 방식과의 의존관계에 따라 종속대안과 독립대안이 있습니다. 기존 종교 조직의 교리를 몇가지 수정하고 새로운 형태의 조직을 만든다면 그것은 종속 대안에 불과합니다. 기존에 신과 보이는 조직을 통한 구원이라는 종교적 알고리즘을 버리고, 보이는 모든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하나로 보는 포괄적 사유를 개인적으로 독립적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증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종속적 대안을 찾는 것이겠죠. 증인들은 늘 그런 고정관념(참 종교가 지상에 하나 존재한다)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 관념은 성서적으로도 모순이 된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종교=조직 이라는 등식도 모순이 있지요
오랜 숙고와 정성이 보이는 글입니다. 노고가 크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증인들이 틀리다 한들..갈데가 어디냐...이런 말로 증인들은 복지부동합니다.
물론 기존 종교들보다는 좀 꺠끗한 면이 있겠지만 알고보면 증인들도 많이 타락했고 이중적입니다. 종교역사라는게 수백년은 되봐야 아는데 이제 백년되어 놓고 깨끗하니 하는 식으로 자화자찬하는 그룹은 앞날이 뻔합니다.
대안의 부재로 인해 회귀본능에 시달리는 것이 탈증인의 보편적 코스이겠지요. '조직'...참 섬뜩한 단어입니다. 저는 그보다는 공동체라는 말을 좋아하는데요.(용어 하나하나를 바꾸는 것도 의미가 있기도 하고요.) 형제 자매라 부르는 그들의 공동체를 '조직'이라는 삭막한 단어를 사용하는 JW는 역시 참 인간미가 없어요. 누가 성경을 가르쳐야 하는가라는 질의에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성구를 인용하거나 하나님의 성품을 그저 전달하여 씨앗을 뿌릴 뿐이다.(제대로 가르친다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은 듣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는 것이다.(알려주는 사람은 필요하지만, 강압적 세뇌가 아니라면 결국은 듣는 사람의 마음이 열려져 그 성구나 하나님이 들어와야 하나님을 결국 알게 되는 것이지요.) 피터 드러커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같습니다. Communication takes place in the mind of the listner, not the speaker.
가족에게서 행복을 느끼고 작은것에 감사하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주고 가난한자를 보살펴주는, 주는자는 행복합니다. 인간의 삶의 목적은 크게는 창조주께 감사해야 하지만 작게는 이웃을 도와주고 베풀때 만족한 삶을 살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 입니다. 첫째, 하느님을 사랑하고 둘째,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정답 입니다.
명쾌한 글입니다.
이곳에 오시는 분들에게 가장 설득력이 있는 대안이 될 것 같습니다.
이 글을 따르고자 하시는 분이 있다면?
혼자 성서를 읽고 기도하며 해석하십시오.
구원을 받는데 필요한 지식은 혼자서도 충분히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해석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신다면 주석책을 사서 보시되 여러 사람의 것을 보시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해석을 따르십시오.
혼자 특별한 것을 깨달은 것처럼 신령한 척하며 주장하는 사람의 글은 멀리하십시오.
아무튼 말씀대로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뜻대로 산다면 충분할 것입니다.
외롭다면 당신 같은 사람들을 만나 함께 예배하고 교제를 나누셔도 좋을 듯합니다.
지금 숲지기님이 쓰신 댓글은 저의 글 의도와는 많이 다릅니다. 독자들의 오해가 없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