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범
조용휘
크리스마스를 열흘 앞둔 12월 중순 직원 종례시간이었다.
“숙직 교사는 교내·외 순찰을 철저히 하세요! 텔레비전만 시청하지 말고.”
이통달 교장의 목소리가 교무실 안을 쩡쩡 울렸다. 직원들은 목소리가 큰 그를 ‘소리통’ 교장이라고 불렀다.
“선생님들! 요사이 사육장의 토끼와 닭이 몇 마리나 없어졌는지 알기나 합니까?”
“도둑이 훔쳐갔거나 살쾡이나 오소리가 잡아먹었든지 둘 중 하나겠지만…”
교장의 일장 훈시는 계속되었다. 그동안 학교에서 일어난 도난 사고를 일일이 열거했다.
기억력도 좋으셔라. 직원들의 얼굴 표정이 굳어지는가 하더니 펴졌다.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도난 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반복하는 레퍼토리였다. 어젯밤 숙직인 박팔용 선생은 입술을 모아붙이고 입에서 바람소리가 나오다 멈추었다.
숙직실 왼편에 교원 사택이 두 채 있었다. 숙직실 바로 옆은 술탁보로 부부싸움이 특기인 정직해선생의 집이고, 그 옆집에 소리통 교장이 살고 있었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학교에만 교육용 17인치 흑백 텔레비젼 한 대가 있었다. 낮에는 교무실에 두었다가 밤이 되면 숙직실로 옮겨 놓았다. 텔레비전은 방송 앰프와 더불어 학교의 재산 목록 1호였다. 여름밤이면 마을 사람들이 텔레비전을 시청하러 운동장에 모여들었다. 조회대 위에 옮겨 놓은 텔레비전에서 중계 방송하는 프로 레스링 시합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김일 선수의 박치기 한 방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묘기에 환호성을 질러댔다. 날씨가 서늘해지는 가을부터는 텔레비전을 운동장에 내놓지 않으니까 자연스럽게 마을 사람들의 발걸음도 끊어졌다.
그날도 박선생은 숙직 근무를 위해 하숙집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학교로 향했다. 하늘에선 쌀가루 같은 눈이 내렸다. 운동장은 하얀 눈으로 덮였고 화단의 나무 가지에도 눈꽃이 피었다.학교 소사인 김억돌씨가 교사동의 출입문 단속을 하고 있었다.
“김씨, 저녁 식사는 했어요?”
“아직요, 나중에 먹을 것이구먼요.”
이틀에 한 번꼴로 숙직 근무를 하는 김씨는 숙직실 부엌에서 저녁 식사를 지어 해결하였다.
숙직실 문 앞에 털신 한 켤레가 놓여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신발 주인은 교장 사모님인 박말순 여사이다. 박여사는 누구인가? 교직원들에게는 왕비와 같은 존재이다. 평소 그녀는 마치 자신이 교장인 것처럼 행동하기도 했지만 인정도 많았다. 젊은 시절 술 때문에 간경화로 고생하는 ‘소리통’ 교장과는 달리 술과 노래를 좋아하여 남자 직원들과도 자주 어울렸다. 그녀는 매일 밤이면 숙직실에 출근하는 단골손님이다. 일일 연속극을 시청하기 위해서였다. 박선생이 숙직실 문을 열자,
“아, 총각 선생이 숙직이네. 나 마실 왔어요.”
“사모님, 오셨어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우리 종씨 박선생 주려고 밤참도 준비했지. 호호”
박말순 여사의 반 말투에 기분은 나빴지만 밤참까지 준비했다는데 말에 부드럽게 대꾸했다.
“정말요? 저 말고 김씨 아저씨 주려고 가져왔겠지요?”
“아니, 두 사람 나까지 셋이 마시려고 술은 내가 가져 왔응께, 안주는 김씨가 준비해.”
그녀는 한 쪽 눈을 찡긋하며 김씨에게 명령했다.
“예, 어떤 분의 분부신데 여부가 있겠습니까?”
김씨는 기다렸다는 듯이 문밖으로 나갔다.
“사모님, 저도 순찰하고 올 테니까 텔레비전 보고 계세요.”
박선생도 손전등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 사이 눈은 그쳤으나 사방은 캄캄하였다. 숙직실 오른편의 사육장에서는 횃대에 앉은 닭이 날개를 푸드덕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토끼는 토굴 속에서 잠을 자고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교사 유리창에 전등을 비추며 교실 안을 자세히 살폈다. 마룻바닥이 삐거덕거리는 복도에서는 자신의 발자국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다. 교사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화장실을 순찰할 때는 달걀귀신 생각이 떠올라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삼십여 분간의 순찰을 마치고 숙직실 안으로 들어왔다.
텔레비전 화면에는「여로」의 여주인공인 아씨 태현실이 바보 신랑 장욱제를 야단치며 가르치다가 시어머니에게 호되게 꾸중을 당하는 장면이 나왔다. 박말순 여사의 눈가에는 이슬이 맺혔다. 연속극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벽장에서 상을 꺼내 방 가운데 폈다. 보자기 속에서 김치보시기와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를 꺼냈다. 물론 수저 세 벌과 막걸리잔 세 개도 상에 올려놓았다. 숙직실 부엌에서는 냄비 뚜껑 달그락 거리는 소리와 고기 삶는 냄새가 났다. 조금 후 문이 열리며 냄비를 든 김씨가 나타났다. 상 한가운데 냄비를 놓고 뚜껑을 열자 보글보글 찌개가 끓고 있었다. 구수한 냄새에 저절로 코가 벌름거렸다. 그녀는 먼저 박선생의 잔에 찰랑찰랑 넘치도록 술을 따르고 김씨의 잔에도 가득 부었다. 주전자를 박선생에게 건네주면서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게 했다.
“박선생은 좋은 배필 만나 장가들고, 딸부자 김씨는 아들 낳고, 우리 고추장(교장)은 내년에 읍내 학교 영전을 위하여!”
세 사람은 잔을 부딪친 후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빈속에 들어간 술이라 금방 취기가 돌았다. 박선생은 냄비 속에 끓고 있는 찌개 한 숟가락을 떠먹었다. 무슨 고기인지 약간 역했지만 맛은 있었다.
“무슨 고기에요? 비린내는 조금 나지만 맛은 좋은데요.”
“박선생, 토끼고기 처음 먹어봐?”
“토끼고기요? 처음인데요. 그런데 어디서 났어요?”
“어디선 나긴요. 사육장에 있는 토끼 한 마리 잡았지유.”
박선생은 갑자기 술이 확 깼지만 배가 고파 토끼고기를 맛있게 먹었다.
“앞으로 학교의 물건을 도난당하면 숙직교사에게 변상조치 시키겠어요!”
이통달 교장의 말에 남자선생님들은 눈치를 주고받으며 터지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2014. 10. 9.)
첫댓글 ㅎ ㅎ ㅎ 지난날 아름다운 얘기이군요
저도 수복지구 학교에서 숙직실 잠 많이 잤습니다
풋볼선생님, 건강하시지요? 늘 멀리 계셔서 자주 뵙지 못해 서운합니다. 건강 유의 하시고 좋은 글 많이 쓰세요.
참바세님, 오랜만입니다. 꽁트들고 오셨네요. 재밌습니다. 이젠 적당히 하시는 일도 조금씩 줄이고 우리 카페도 많이 찾아주세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감사합니다. 이제 명동 학교 졸업하면 제 시간을 많이 가져보려고 합니다.
지나간 옛날이 생각납니다
학교에 어정거리고 돌아다니던 개 잡아먹던 추억입니다
건강은 어떠신지요? 항상 활발하게 카페에 좋은 정보 올려 주셔서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