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노 6 - 마츠시로성에서 성을 쌓은 다케다 신겐을 회상하고 가와나카지마로 가다!
2019년 4월 13일 쿠사츠온센 (草津溫泉) 에서 가루이자와 (軽井沢) 에 도착해 구시가를
보고는 기차로 우에다(上田) 에 도착해 사나다 (真田 진전) 3대 가문의 상징인
육문전(六文銭) 과 유키무라(真田幸村) 동상을 보고 우에다번주 저택과 우에다조
上田城(상전성) 를 구경하고는 신칸센을 타고 15시 52분에 나가노 長野 시에 도착합니다.
30번 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달려서 사나다(真田 진전) 가문의 혼을 이어받은 '마츠시로성'
(松代城) 을 구경하는데, 사나다 가문은 우에다시의 우에다성(上田城) 의 성주였지만
이후 가장 오랜 기간을 지내온 성으로 여기서 북시나노 10만석 영지 를 다스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마츠시로성(松代城) 은 16세기 센고쿠(戰國 전국) 시대 시나노(나가노현)국을
침공해 나가노시 젠코지(선광사) 를 노리던 가이국(야마나시현) 다케다 신겐 에
의해 세워진 성으로.... 가와나카지마 전투의 무대인데 카이즈성(海津城) 이라고
불리다가 에도 시대에 마츠시로성(당시 待城, 松城) 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전해집니다.
1464년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 는 아들이 없으니 동생 요시미를 후계자
로 지명했는데... 그 1년 후에 도미코에게서 친아들 요시히사 가 태어나니 부인은
쇼군직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은지라 정권의 실력자 야마나 소젠에게 협력 을 부탁합니다.
이에 대항하여 요시미는 간레이 호소카와 가쓰모토 와 손을 잡았는데... 시바 가문과
하타케야마 가문의 가독 상속 문제 까지 더해져 1467년 오닌의난(應仁亂) 이
발발했으니... 호소카와 가쓰모토의 동군은 24개국에서 16만명 그리고 야마나
소젠의 서군은 20개국에서 9만명 을 동원해 교토 시내에서 전투 가 벌어지게 됩니다.
병력 수에서 앞선 동군으로 기울던 전세는 야마구치와 히로시마등 6개국의 영주 로 백제
성왕의 셋째 아들인 임성태자의 28세손 오우치 마사히로씨가 2만 군세 를 이끌고
서군에 참가하니 승부를 낼수 없는 가운데 "교토 민가의 절반이 불타는" 지경에 이릅니다.
지방에서 병사를 이끌고 상경한 무장들 은 막대한 전비 를 쓰며 전투 과정에서 희생
을 치르는데도 10년이 지나도 승부가 나지 않으니 논공행상이 없자 빚더미 에
올라앉으면서.... 자기 고향으로 귀향해 자립 하니 일본은 300여개 나라 로
쪼개져서 약육강식 전투로 날을 지새는 "센고쿠 (戰國 전국) 시대" 에 접어 듭니다.
전투로 날을 지새는 약육강식 센고쿠 시대가 100년이 지날무렵 아시카가 막부를 대신해
교토로 올라가 일본을 통치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다이묘가 두명 있었으니
하나는 시즈오카현인 스루가와 도토미의 영주 이마가와 요시모토 이고
다음은 가이국(야마나시현) 의 호랑이 라는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무전신현) 입니다.
하루노부 (후일 출가해 신겐) 는 약관 13세에 처음으로 전투에 출전 하였고, 16세 때에는
300명의 적은 인원으로 큰 성을 빼앗기도 하였다는데 격렬한 성격으로 인해
아버지의 신임을 받지 못하다가 1541년 가신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아버지가 사돈
이마가와씨의 나라인 스루가 (駿河) 에 방문했을때 귀국을 막고 정권을 획득 하였습니다.
가이국의 군을 재정비한 후에 교토로 올라가 문란해진 아시카가 막부를 대신해 일본을
호령할 큰 뜻을 품고는 교토로 올라가는 두 길 가운데 하나인 지금의 나가노현
(長野縣)에 속하는 시나노(信濃)를 침입해 10여명의 군소 다이묘들을 차례로
제압하고 시나노를 통일 하는데 그 첫 번째가 길목에 자리한 스와 取訪(취방)국 입니다.
스와 取訪(추방)국 에는 스와대명신 을 모시는 신사가 4곳 이 있었으니 가미스와는 상사로
전궁과 본궁이 있고 시모 스와에 하사인 춘궁과 추궁이 있는데 4개의 신사를
관리하는 총 신관은 오래전 부터 스와씨 가 맡고 있었으니 센고쿠(戰國) 시대에
이르러 스와씨는 영주 를 겸하면서 다카시마성 을 지어 주민들을 통치하니 신정정치 입니다.
스와대사 는 1145년에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역사서인 김부식의 삼국사기 보다 425년
이나 앞선 서기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 에 보면 지토왕(천황) 때인 서기 691년에
일왕이 사자를 보내어 시나노(나가노) 스와대신사에 축원 을 했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로 매우 오래된 신사니 헤이케 이야기 平家物語 (평가물어)에도 스와대사가 나옵니다.
스와대사의 대 신관“스와 요리시게”는 “우에하라 성”과 "다카시마성" 을 쌓고 일대의
백성을 다스리는 다이묘(영주) 였는데..... 다카시마성은 일본에서 시마네현의
마쓰에성과 시가현의 제제성과 더불어 호숫가에 위치한 3대성 으로 치니 신정(神政)
정치를 펴던 스와씨 는 정치적으로는 사가미국 호죠씨 로 부터 후원을 받는 처지였습니다.
동남쪽에 인접해 전국 제패의 야망을 가진 가이(야마나시현 고후)국의 다케다 신겐 은
1537년 여동생 네네를 스와 요리시게의 후처 로 시집을 보내니 이듬해에 아들
도라오마루 탄생 으로 스와 요리시게가 방심 하자 신겐은 스와국을 삼킬 모략을 꾸밉니다.
스와 백성들은 스와대명신 신앙심이 돈독한지라 단순히 무력으로만 점령하면 승복하지
않고 끈질기게 저할할 것이기 때문에 먼저 백성들로 부터 스와 신관을 떼에놓을
필요가 있었으니... 요리시게의 동생으로 형의 대신관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교토 방면 남시나노 (나가노 현 남부) 다카토성의 성주인 스와 요리쓰구 를 부추킵니다.
다카토성의 성주 스와 요리쓰구 는 가이국 다케다 신겐의 꼬임에 넘어가 1540년에 군사
를 일으켜 스와를 점령하기 위해 진격하니 이에 다케다 신겐 은 내란을 당한 매제
스와 요리시게 를 구하겠다는 명분으로 고 출전 해서는 100명의 병력을 다카시마
성에 원군 으로 보내는데...... 너무 많은 병력을 보내면 매제 요리시게가 의심할 것이라?
다카토군의 공격 이 시작되자 100명의 가이군은 야심한 밤에 성에 불을 지르는등 소란
을 일으키니 놀란 요리시게는 엉겁결에 다카시마성을 버리고 우에하라성으로
도망치는데... 이에 본색을 들어낸 다케다 신겐 은 군대를 진격시켜 다카토군
으로 부터 다카시마성을 되찾은 후에 1천명이 수비하던 우에하라성으로 진격 합니다.
대신관이자 영주인 스와 요리시게에게 항복을 하면 신겐의 조카이기도한 아들 도라오마루
를 스와의 영주 로 보장한다는 조건 을 내거니..... 스와 요리시게는 항복한후
고후로 잡혀왔는데 아들 도라오마루를 영주로 보장한다는 조건에 할복을 강요
당했으며 요리시게가 죽자 다케다 신겐은 전처의 딸 미사를 강제로 부인 으로 맞이합니다.
후처 미사 에게서 태어난 아들 가쓰요리 는 후일 본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적자 를
제치고 가이국 다케다 신겐의 후계자로 지명되는데..... 신겐의 장자 요시노부
는 남쪽 스루가의 영주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딸을 처로 맞아 혼인 동맹을
이루는데 1560년 교토로 진격하던 요시모토는 오다 노부나가군의 급습으로 전사 합니다.
신겐이 스루가국을 노리자 장남이 결사반대하니 며느리는 스루가국으로 돌려보내고 아들은
할복시켰으니 1568년에 스루가를 침공하면서 스와 공주의 태생인 차남 가쓰요리
가 적자 가 되는 것인데, 가쓰요리 는 후일 다케다 신겐이 죽은후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연합군 에 맞서 나가시노 전투의 패하니 몇년후 가이국은 멸망 합니다.
다케다 신겐은 누이동생을 시집보내 경계심을 풀게한후 침공하는 모략으로 시나노(나가노)
의 입구인 스와국을 지략으로 손에 넣고는 시나노 슈고(信濃守護) 오가사와라씨 를
치고 중부 지방을 차지한후 1557년 이곳 북부 까지 침공해오자 나가노 나리마사
는 소수의 병력임에도 불구하고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과의 전투에서 승리 를 거둡니다.
1559년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의 1만 3천여명에 재침에 맞서 나리마사 는 북부 나가노
각 지역에서 끌어모은 2만명의 연합군을 인솔하여 자신도 창을 쥐고 분전했지만
잡다한 연합군이라 통제가 되지 않아서 패퇴 하는데, 그러나 다케다 가문의 피해도
적지 않았고 나리마사가 미노와(箕輪) 성을 굳건히 수비했기에 다케다군은 철수 합니다.
이 때 가이국의 호랑이라 불리며 센고쿠시대 최고의 기마군단 을 이끌었던 불세출의
영주인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은 '나리마사가 살아있는 한 시나노(信濃 신농,
현재 나가노현) 의 북부 지역인 코즈케를 병탄 할 수 없다' 라고 한탄 했을
정도였다는데 그가 죽은후 다시 공격해 기어이 나가노현 북부지방 까지 손에 넣습니다.
이런 침공으로 인해 다케다 신겐은 에치고국(니가타현)의 우에스기 겐신 (上杉謙信)
과 대립하게 되어, 1564년 까지 총 5차례의 대전을 치른 끝에 힘겹게
승리하였으미 이 5회의 전투가 바로 유명한 가와나카지마전투(川中島合戰) 로,
특히 4번째 전투 는 일본 전사(戰史) 에서 전설적인 전투 로 불릴 만큼 유명 합니다.
오가사와라 나가토키(小笠原長時)를 격파하고 무라카미 요시키요 (村上義淸) 군대와
싸운 전투에서 승세를 타기 시작한 신겐 은 이후 스루가와 미카와(三河) 그리고
고즈케(上野) 등지로 계속 영토를 확장하였으니 1569년에는 지금의 가나가와현
(神奈川縣) 오다와라성(小田原城) 을 포위한 뒤, 1571년 호조 가문과 강화 를 맺었습니다.
그 무렵 나고야 못미쳐 오케하자마(桶狹間) 에서 2만 5천 대군을 이끌고 교토로 상경하던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 를 패배시킨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결혼동맹
을 맺었으나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노부나가의 연합군 에 맞서
대립하던 중, 1572년 미카다가하라 전투(三方が原戰鬪) 에서 연합군을 대파 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여러 성들을 잇달아 함락시키면서 교토로 진격하는 길 을 열다가
1573년 초 이에야스 및 오다 노부나가 연합군과 대립하던 중 진중에서 병이 들어
급사 하였으며 아들이 뒤를 이었으나 그뒤 다케다 가문은 가쓰요리가 나가시노
전투(長篠戰鬪) 에서 에야스와 노부나가 연합군에게 패한 뒤, 몰락의 길 을 걷게 됩니다.
다케다 신겐 武田信玄(무전신현)은 일본 전국 통일의 길을 연 인물로, 손자병법의 풍림화산
(風林火山)을 도입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으니..... 일본 최고의 전략가, 가이의
호랑이 등으로 불리며.... 일본의 민간설화나 연극, 소설의 주인공 으로 많이 등장 합니다.
마츠시로성 을 나와 도로를 건너 마츠시로 마을 안쪽에 자리한 사나다 보물관 (真田宝物間)
과 옛 번주 저택 을 구경하고는 다시 나가노행 30번 버스 를 타고 북쪽으로
달려서 가와나카지마 川中島古戰場(천중도고전장) 에서 내리는데 요금은 370엔 이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