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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9월 22일 주일
[(녹) 연중 제25주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오늘은 연중 제25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시지만, 정작 제자들은 누가 큰 사람인가 하는 문제로 논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첫째가 되려면 꼴찌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거룩한 지혜를 주시어, 성자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섬기는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가장 큰 사람임을 깨닫게 하여 주시기를 청합시다.
말씀의 초대
지혜서의 저자는, 악인들은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인지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고 말한다고 한다(제1독서). 야고보 사도는, 위에서 오는 지혜는 순수하고,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2,12.17-20
악인들이 말한다.
12 “의인에게 덫을 놓자. 그자는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
우리가 하는 일을 반대하며 율법을 어겨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나무라고
교육받은 대로 하지 않아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탓한다.
17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그의 최후가 어찌 될지 지켜보자.
18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19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0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
▥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 3,16─4,3
사랑하는 여러분, 16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행도 있습니다.
17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순수하고,
그다음으로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18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
4,1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2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3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30-37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30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31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33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34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35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36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37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제자들이 서로 다투는 모습은 자주 우리에게 위안을 줍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게 되고, 사람들이 모이면 이런 다툼은 피할 수 없는 모양이라고 스스로 위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독서와 복음을 함께 읽으면,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를 두고 다툰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이었는지 알게 됩니다.
그들의 행동은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평화롭고 관대한 자비와도 거리가 멀고, 평화 속에 심어진 의로움의 열매도 아닙니다(3,17-18 참조). 싸움과 다툼, 분쟁은 욕심 때문에 일어납니다. 시기는 살인까지 불러올 수 있지만, 그렇다고 바라는 바를 얻지도 못합니다.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 논쟁하였을 때, 그들은 위에서 오는 지혜에 따라 행동한 것이 아니라 분쟁을 일으키는 욕정에 굴복한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를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어린이들이 함께 있는 그림들에서 어린이들이 매우 예쁘게 그려져 있지만, 사실 복음에서 말하는 어린이들은 율법을 지키지도 못하고 아무 능력도 없는 이들입니다. 나이가 어린 어린이만이 아니라, 제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무능력한 이들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가장 큰 사람이 누구인지 물을 것이 아니라 가장 작은 이들을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서 지혜서에서 말하는 온유함은 박해자들 앞에서 모욕과 고통을 견디는 인내입니다. 박해자들을 힘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죽임까지 당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녀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이의 종이 되는 것, 여기에서 그가 예수님의 제자임이 확인될 것입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있는 그대로의 나, 있는 그대로의 너를 존중하고 인정해 줍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젊은 수도자들의 선생 역할을 하던 때가 기억납니다. 초단기간에 세상의 물을 쫙 빼고 멋진 수도자로 탈바꿈시키려는 욕심에 도에 지나친 요구도 참 많이 했습니다. 제 코도 석 자인데, 저도 제대로 실천 못하면서 형제들을 몰아붙이던 기억이 떠올라 씁쓸한 미소가 지어집니다.
그래도 제 마음 안에는 어떻게든 형제들의 초보 수도 생활을 일취월장시키려는 열정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요구도 많았고 기대치도 높았습니다. 그 결과 갈등도 많았고 실망도 컸습니다.
12사도를 당신의 최측근 협력자로 부르신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열두 제자 한명 한명을 두고 따져보니 한 마디로 오합지졸, 당나라 군사들이었습니다. 대체로 가방끈도 짧았고, 뭔가 내세울 것도 마땅히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했을뿐 아니라 묻는 것조차도 두려워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제자들이었지만 아직도 세속적인 야심으로 가득했고, 예수님을 통해 뭔가 얻어내고, 한 자리 차지하고픈 기대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해도 해도 너무한 제자단의 모습이 오늘 복음 안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카파르나움으로 가는 길에 제자들은 자기들끼리 길에서 한바탕 논쟁을 벌였습니다. 논쟁의 주제는 일종의 서열 싸움이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의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분노에 앞서 큰 서글픔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높아지지 말고 낮아져라, 커지지 말고 작아져라, 섬김을 받으려 하지 말고 섬겨라, 그렇게 목청껏 외쳤건만, 아직도 서열 싸움을 하고 있으니, 한숨이 저절로 나왔을 것입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십니다. 아무리 말로 교육을 시키려 해도 안되니, 특별한 교육 방법을 선택하십니다.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살암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코 9,37)
어쩌면 오늘 우리도 그 옛날 극도로 미성숙했던 제자들, 틈만 나면 내가 높으니, 네가 높으니, 서열 싸움을 하는 제자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살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 있는 그대로의 너를 존중하고 인정해주면 좋으련만, 수시로 나와 그를 비교하고, 어떻게든 상대의 위에 서려고 발버둥 치는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말씀을 하시리라 확신합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은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코 9,35)
순교는 과연 행복한 선택인가?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은 한국 순교 성인들의 업적을 기리고 본받으려는 마음을 갖는 날입니다. 그런데 요즘 순교는 조금 남의 이야기이고 어리석은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하시지만, 사실 사람은 어떤 것이 ‘행복’으로 보여야 선택합니다. 자살까지도 이 세상이 너무 고통스러워 더 행복해지는 길이라 여기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교의 길로 가려면 순교가 참으로 행복으로 보여야 합니다.
만약 죽을 때도 후회가 없다면 그 삶은 행복일 것입니다. 『죽을 때 가장 후회하는 다섯 가지(The Top Five Regrets of the Dying)』라는 책을 쓴 브로니 웨어(Bronnie Ware)는 죽기 직전 사람들이 후회하는 것들 중에 공통된 다섯 가지를 찾아냈습니다.
첫째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한 것`입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의 시선과 기대에 맞춰 자신의 삶을 살았던 것을 후회했습니다.
둘째는 `일을 너무 열심히 한 것`입니다. 대부분 남성 환자들이 이러한 후회를 했습니다. 이들은 직장 생활 때문에 아내, 자녀들과 따뜻한 가정생활을 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셋째는 `감정 표현에 솔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타인들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숨긴 것이 어쩌면 지금의 `병`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었습니다.
넷째는 `옛 친구들의 소중함`입니다. 죽음을 앞두고서야 오랜 친구들이 보고파 연락을 시도했지만 그들의 연락처조차 알 수 없어 절망스러웠다고 합니다.
마지막은 `내 행복을 위해 노력하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많은 행복을 위한 선택을 하며 살았지만,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면 순교자의 삶을 이 다섯 가지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최초에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오게 한 광암 이벽 성조를 봅시다. 그는 정약용이 친구로서 인정할 정도로 천재였습니다. 그러나 과거를 보지 않고 학문 연구를 통해 천주교가 진리임을 깨달았고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일하는 것보다 진리에 더 심취했습니다. 진정 의미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찾았습니다. 이승훈을 중국으로 보내 세례를 받게 하고 자신은 스승인 권일신, 권철신까지 설득하여 박해받는 상황에도 천주교 신자를 늘렸습니다.
아버지가 문중의 꾸중을 받고 오자 아버지는 이벽을 집에 가둡니다. 그리고 배교하라고 강요합니다. 이벽은 솔직히 자기감정을 털어놓고 집에 갇혀 죽습니다. 아버지에게 독살을 당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주위에 친구들이 많았을까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 때문에 같은 유배나 순교의 길을 가야만 했지만, 이승훈, 권일신, 권철신 외에도 정약용, 정약전, 정약종 등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수많은 목숨을 함께 할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이러한 선택을 한 것은 누구의 행복도 아닌 자기 행복을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내가 행복이라고 믿는 길을 갔기 때문에 후회가 있을 수 없습니다.
75년간 하버드에서 연구한 행복은 돈이나 명예가 아닌 ‘관계’였습니다. 주위에 생명의 은인이 많이 모이는데 어떻게 행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 쓰나미가 몰려오는 것을 보고 사람들을 자신이 사는 언덕으로 올라오게 하려고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것 때문에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주위에 많다면 그 사람은 집을 잃었어도 사람을 얻었기에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요셉 의원 선우경식 원장은 수십만 명의 환자를 거저 치료해주었지만, 가난한 그 환자들이 자신에게는 행복을 위한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말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맞아준 철거민들과 학생들은 그분을 생명의 은인처럼 좋아했습니다. 이태석 신부나 마더 데레사 주위의 많은 이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십자가는 사람을 모읍니다. 나를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게 하는 수많은 사람을. 그래서 십자가의 삶은 행복의 유일한 길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본당의 날’입니다. 본당의 날을 지내면서 4행시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본당의 날에 우리는 무엇을 할까요? 당연히 친교를 나누어야 합니다. 의로우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이웃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혼인 잔치에 초대된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오늘 본당의 날에 잔치를 벌였습니다. 맛있는 점심이 준비되었습니다.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되었습니다. ‘족구, 피클 볼, 포인트 게임, 길거리 노래방, 찬양 팀 공연, 경품추첨’이 있습니다. 모두들 잔치에 참여하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이분들은 열정과 땀으로 한국의 초대교회를 이끌었습니다. 이분들은 박해를 받아 순교함으로써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신 진정한 ‘영웅’들입니다. 오늘은 한국교회의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관악산 줄기에 삼성산 성지가 있습니다.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 범 주교, 성 베드로 모방 나신부, 성 야고보 샤스땅 정 신부님’의 묘소가 있는 성지입니다. 이분들은 박해의 시기에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조선의 정부는 외국인들이 선교를 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신자들에게 외국인 신부의 거처를 밝히라고 고문을 하고, 죽였습니다. 범 주교님은 신자들의 고난이 큰 사실을 알았고, 다른 두 신부님에게도 신자들의 고통을 줄일 수 있도록 자수할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이렇게 외국의 사제들은 1839년 새남터에서 순교를 하였습니다. 서울 가회동에는 복자 최인길 마티아의 발자취가 있습니다. 최인길 마티아는 중국에서 온 선교사 주문모 신부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신부님을 대신해서 관원들에게 잡혀갔습니다. 최인길 마티아는 중국말을 잘하는 역관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최인길 마티아가 중국인 사제가 아닌 것을 알게 된 관원들은 더욱 가혹하게 고문을 하였고, 결국 최인길 마티아는 1795년에 순교하게 됩니다. 사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최인길 마티아의 뜨거운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사제들은 신자들을 위해서 순교를 하고, 신자들은 사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고, 감동스럽습니다. 이분들이 한국교회의 영웅들입니다.
신자들에게 짐을 떠넘기려는 사제들이 있습니다. 사제의 작은 허물을 크게 부풀려서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강론 준비에 소홀한 신부, 성사를 정성껏 준비하지 않는 신부,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는 신부, 세상의 일에 더 관심을 두는 신부들은 삼성산 성지에 계신 외국인 신부님들의 마음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려하지 않는 신자, 가진 것을 이웃들과 나누지 않는 신자, 자기의 십자가를 남에게 지우려는 신자, 불평과 불만을 입에 달고 다니는 신자들은 복자 최인길 마티아의 헌신적인 삶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분의 도움을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높은 곳도, 천사도, 권세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 깊은 존경을 드립니다. 한국 최초의 사제이기도 하지만 순교로써 신앙의 모범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을 사랑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였고, 길 위에서 순직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역시 자랑스러운 신앙의 선조들처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그와 같은 삶이 현재의 제도와 불의한 세력에 의해 탄압과 고통을 받는다 할지라도 신앙인들은 자신이 져야할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뚫고 부활하여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과 환난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성인
성 마우리시오 (Maurice)
활동년도 : +287년경?
신분 : 군인,순교자
지역 : 아가우눔(Agaunum)
같은 이름 : 마우리시우스, 마우리씨오, 마우리씨우스, 마우리티오, 마우리티우스, 모리스
성 엑스수페리오 (Exsuperius)
활동년도 : +287년경?
신분 : 군인, 순교자
지역 : 아가우눔(Agaunum)
같은이름 : 엑수뻬리오, 엑수뻬리우스, 엑수페리오, 엑수페리우스, 엑스수뻬리오, 엑스수뻬리우스, 엑스수페리우스
성 비탈리스 (Vitalis)
활동년도 : +287년경?
신분 : 군인, 순교자
지역 : 아가우눔(Agaunum)
같은 이름 : 비딸리스
성 빅토르 (Victor)
활동년도 : +287년경?
신분 : 군인, 순교자
지역 : 아가우눔(Agaunum)
같은 이름 : 빅또르, 빅똘, 빅톨
성 인노첸시오(Innocent)
활동년도 : +287년경?
신분 : 군인, 순교자
지역 : 아가우눔(Agaunum)
같은 이름 : 인노첸시우스, 인노켄티오, 인노켄티우스
성 칸디도 (Candidus)
활동년도 : +287년경?
신분 : 군인, 순교자
지역 : 아가우눔(Agaunum)
같은 이름 : 간디도, 간디두스, 깐디도, 깐디두스, 칸디두스
프랑스 리옹(Lyon)의 주교인 성 에우케리우스(Eucherius)에 의하면, 막시미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테반의 헤르쿨리우스 부대는 이집트 상류에서 온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 부대장인 성 마우리티우스(Mauritius, 또는 마우리시오)와 수많은 동료들은 바고데족을 격퇴한 승전 축하연에서 이방신에게 희생 제물 드리는 것을 거절하였다.
거듭 같은 명령이 떨어졌지만 그들은 요지부동이었기 때문에 황제는 반란을 두려워한 나머지 일단의 테반 부대원들을 아가우눔(Agaunum)에서 전멸시켰다고 한다.
이들의 지도자는 성 마우리티우스와 엑스수페리우스(Exsuperius) 그리고 칸디두스(Candidus)였다고 한다. 또한 이름이 전해지는 군인 순교자로 성 비탈리스(Vitalis), 빅토르(Victor), 인노켄티우스(Innocentius) 등이 있다. 후일 전기 작가들은 쾰른(Koln)에서 파엔그라까지 무수한 무명의 테반 부대 순교자들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현재
생 모르스 앙발래에 있는 수도원은 이때 죽은 순교자들을 기념하여 세운 수도원이라 한다. 이들은 보통 아가우눔의 순교자들로 기억되고 있다
성 이냐시오 (Ignatius)
활동년도 : 1686 –1770년
신분 : 신부
지역 : 산티아(Santhia)
같은 이름 : 이그나티오, 이그나티우스, 이냐시우스
성 이냐시오는 1686년 7월 5일 북부 이탈리아 베르첼리(Vercelli) 지방의 산티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로렌조 마우리지오(Lorenzo Maurizio)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부유한 벨비소티(Belvisotti) 가문의 육남매 중 넷째로 자랐다. 그는 훌륭한 신부로부터 초기 교육을 받으며 그로부터 사제직에 대한 영감을 받았다. 1710년에 교구 신부로 서품을 받은 그는 6년 동안 사제 직무를 수행한 뒤 카푸친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그때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들과 본당 신자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성 이냐시오는 카푸친회에서 그가 그토록 갈망했던 내적인 평화를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를 따르는 생활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1717년 5월 24일 서원을 한 그는 장상들에게 순명하는 삶을 살았다. 그의 영적인 여정은 이탈리아 북부 사부아(Savoie) 지방에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복종을 넘어서 그의 형제들을 섬기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하였다. 그는 완전히 ‘주님의 의향’을 따랐다. 1727년 성 이냐시오는 토리노 몬테(Torino-Monte)의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이 공동체에서 그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여겨졌고 예수님의 제자로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영적 지혜를 베풀었다. 그래서 신부들과 영성적으로 성숙한 이들 그리고 타락한 죄인들이 수도원으로 그를 찾아와 죄를 고백하고 영성지도를 받았다.
1731년에 그는 몬도비(Mondovi)의 수도원으로 파견되어 수도원의 총대리 겸 수련장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는 14년 동안 수련장으로서 자신의 지도에 맡겨진 수련자들이 주님의 진실한 추종자로 그리고 성 프란치스코의 순종적인 아들이 될 수 있도록 지도하는데 유일한 관심을 두었다. 성 이냐시오의 가르침은 두 기둥에 그 기반을 두고 있었다. 즉 수련자들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과 말보다는 행동으로 그들을 가르치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는 도움이 필요한 수련자들에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함께 해 주었고, 그들의 양성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겼다. 1744년 그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눈병으로 인해 거의 실명 상태가 되었고, 그로 인해 수련소를 떠나 토리노로 돌아오게 되었다. 어느 정도 치료가 된 뒤에 그는 다시 활동 사도직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1743년부터 1746년까지 피에몬테(Piemonte) 지방에서 발생한 전쟁으로 인해 많은 희생자들이 생기고 질병이 돌기 시작하였다. 사르디니아(Sardinia) 왕국(사르디니아와 피에몬테)의 샤를 엠마누엘 3세(Charles Emmanuel III) 왕은 카푸친회 수도자들에게 병원에서 의료적이고 영성적인 지도를 부탁하였다. 그래서 성 이냐시오는 군종신부의 책임자로서 아스티(Asti), 비노보(Vinovo), 알레산드리아(Alessandria)의 병원에서 복음적인 사랑을 실천하며 2년 동안 활동하였다.
피에몬테 지방이 평화를 되찾았을 때 성 이냐시오는 토리노 몬테의 수도원으로 돌아와 생의 마지막 24년 동안 영적 지도자와 고해신부로서 지냈다. 그는 병든 이들을 찾아 다녔고 불쌍한 이들을 위해 돈과 먹을 것들을 구하러 다녔다. “낙원은 게으름뱅이들을 위한 곳이 아니다. 어서 일을 하자!”라고 줄곧 이야기하던 그는 1770년 9월 22일 토리노 몬테 수도원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수도자들과 평신도들을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거룩한 길을 안내하였고, 하느님으로부터 버려졌다고 느끼던 사람들을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다시 진정한 신앙에로 이끌었다. 그는 카푸친회 신부로서 특히 충성심, 검소함, 겸손함을 통해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에 충실했다. 그는 영성적으로 병든 이들을 잘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죄인과 고립된 이들의 아버지’라고 불렸다. 그는 1966년 4월 17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2년 5월 19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성 토마스 (Thomas)
활동년도 : 1488-1555년
신분 : 대주교
지역 : 빌라노바(Villanova)
같은 이름 : 도마, 토머스
알론조 토마스 가르시아와 루치아 마르티네스 카스텔라노스의 아들로 태어난 빌라노바의 성 토마스는 에스파냐 카스티야(Castilla)의 푸엔텔라나(Fuentellana)에서 나서 자랐고, 10세 때에 알칼라(Alcala)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여기서 문학 석사와 신학교수 자격증을 받고, 불과 26세의 나이에 그 대학교의 교수로 발탁되었다. 1516년 그는 성 아우구스티노회에 입회하여 1518년에 사제 서품을 받고 여러 수도원의 원장을 역임하다가 안달루시아(Andalusia)와 카스티야의 관구장이 되었다. 이때 그는 성 아우구스티노회 최초의 선교단을 멕시코로 파견하였다.
그 후 그는 카를로스 5세의 전속사제로 임명되었으나 그라나다(Granada)의 주교직은 거부하던 중 1544년에 발렌시아(Valencia)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이 교구는 90년 동안이나 주교좌가 공석이었기 때문에 그는 즉시 개혁에 착수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으로 일약 유명한 주교로 인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무어인들의 개종을 위해서도 정열을 쏟았다. 또한 그는 사제들로 하여금 개종자들의 어린이들을 교육할 수 있도록 조처하였다. 비록 트렌토(Trento) 공의회에는 참석하지 못하였으나 에스파냐 교회 내의 개혁 운동에는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1658년 교황 알렉산데르 7세(Alexander V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