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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 몽고에 맞선
고려의 30년 위대 항전
- 숨겨진 고려 영웅 낭장 (郎將)문대(文大)의 죽음
제목이 의미하는 이글의 취지가 무엇인지 독자 여러분들은
짐작이 갈 것이다.
오늘 한국 5000년역사에서 ‘최고’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뭐 별로 틀리지 않을 고려 민군의 영웅적인 민족 보존 투쟁을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 조상이 수나라나 당나라 그리고 일본등을 상대로
상상을 초월한 대 저항전을 전개해서 이들을 격퇴한 것은
역사에 길이 남겨져 있다.
그러나 다른 고구려와 조선의 적이 아시아 급 챔피언이라면
고려 민군이 대결한 몽골은 세계를 휩쓴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었었다.
이미 아시아 챔피언 급인 대륙의 금나라를 박살냈고 중국인 남송도
쓸어버린 무서운 기세로 고려를 덮친 슈퍼 파워급 대군이었다.
그리고 이들 몽골군은 항복하지 않은 적은 몰살시키는 잔인한
야만성을 발휘했었다.
고려의 민과 관과 군은 이런 끔찍한 공포에도 굴하지 않고
죽을힘을 다하여 저항했었다.
그리고 이들 고려 민과 관과 군이 이들 몽골군과 살을 깎이고
뼈를 잘려 가면서 혈투를 벌린 기간이 우리 민족사
어느 전쟁보다도 긴 장장 30년의 세월이었다.
대몽 전쟁은 (對蒙戰爭) 누가 보아도 한국 민족 항쟁사에
최고, 최장의 영웅적인 전쟁이었다.
나는 이 대몽 전쟁을 보면서 항상 왜 이 전쟁은 왜 우리 현대에
크게 평가 받지 못하는 것인가 하는 점에 의문을 가져왔었다.
을지문덕이나 이순신이나 강감찬 같은 영웅이 없어서인가?
그러나 대몽 전쟁에도 이 분들과 비교할 영웅들은 여럿 있었다.
먼저 이야기가 한참 동안이나 삼천포로 빠지는 것 같지만 시공을
훌쩍 건너뛰어 한참 뒤 1500년대 전국시대 일본으로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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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5년 가히의 영주 다케다 가쓰요리는 삼만 병력을 일으켜
인접 도쿠가와 영지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도쿠카와 영내의 나가시노 성을 포위했다.
성의 성주는 도쿠가와의 사위 오쿠다히라 사다마사가 단지
500명의 부하만 데리고 성을 지키고 있었다.
나가시노 성- 아래 소개하는 스네에몬은 이 강을 타고 탈출하여
오다와 도쿠카와 연합군에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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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쓰요리는 나가시노 성의 군세가 미약하게 보여
금방 함락 시킬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급한 지세에 지은 성은 공격하기에 워낙 안 좋았고
오쿠보 사다마사의 지휘가 출중해서 좀처럼 함락을 시킬 수가 없었다r
그렇다고 나가시노 성 부대의 형편도 느긋한 것도 아니었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카와 이에야스의 원군(援軍)이 좀처럼
달려 와주지 않은 것이었다.
이 때 오다 노부나가는 차제에 다케다 군을 쓸어버릴
비책을 짜고 필요한 철포를 긁어모으고 부대를 훈련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원군 파견의 시간이 지체되었다.
기진맥진한 성주 오쿠다이라 사다마사는 부하 중에 성실한
도리이 스네에몬(鳥居 强右衛門)을 밀사로 도쿠가와에게 파견했다.
도리이 스네에몬은 심야에 성에서 나와 강을 따라 헤엄쳐 올라가
다케다 군의 포위망을 뚫고 오다와 도쿠카와에게 가는
밀사 임무 완수에 성공했다.
오다와 도쿠카와는 시급한 출동을 약속한다.
스네에몬은 성으로 돌아오다가 다케다 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그를 심문한 다케다의 중신 아나야마 겐바노가미는 그에게 제안한다.
살려 줄테니 성의 방어군에게 오다와 다케다의 부대가 구원군을
보내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지요.”
꽁꽁 묶인 스네에몬은 가까운 본성의 망루가
잘 보이는 앞 바위위로 끌려갔다.
스네에몬은 시키는대로 성을 향하여 외쳤다.
“성안에 있는 분들에게 말합니다.”
바위위에 오른 스네에몬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 도리이 스네에몬, 성으로 돌아가려다 이렇게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나 전혀 후회는 없습니다. 오다 도쿠가와 두 대장님은---”
일단 말을 끊었다.
“이미 사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오카자키를 출발하셨습니다.
이삼일 안으로 반드시 운이 트일 것입니다.
성을 굳건히 지켜주십시오!"
“ 와아 !"
성안에서 함성이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다케다 군 졸병 두 명이
바위에 뛰어 올라 스네에몬을 끌어내어 사정없이 구타했다.
그리고 중간은 생략 --
놀림을 당해서 분노 할대로 분노한 가쓰요리의 직접 지시로
내린 처형이 뒤따랐다..
스네에몬은 십자가에 묶이고 손에 못이 밖혀서 성을 바라보는
바위위에 높이 세워졌다.
구타로 정신을 잃은 스네에몬이 정신을 차리려 했을 때
두 겨드랑이 밑에서 창끝이 교차하여 양 어깨를 뚫고 나갔다.
“으으으-----”
스네에몬 시야가 갑자기 어두워지고 귀에서 소리가 울렸다.
그런 가운데서 누군가가 열심히 무언가를 말했다.
“ 도리이님! 도리이 님이야말로 참다운 무사,그 충성을 본받기
위해 최후의 모습을 그려 기치로 삼으로 하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다케다 군의 가신 오치아이 사헤이치
(落合 左平次), 스네에몬님,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스네에몬은 그 말에 웃음으로 답하려 했으나 더 이상
얼굴 표정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상대방 무사는 붓통을 꺼내 종이에 스네에몬의 최후를 그리고 있었다.
장소는 아루미가하라 , 사다마사 부대 야마가카 사부로베에의
진지 앞, 이미 석양이 시뻘겋게 물든 대지의 핏빛을 비추어
반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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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라면 가슴이 뭉클할 만큼 감동이 드는 전쟁의 로망이다.
스네에몬 말대로 며칠 뒤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카와 이에야스가
대군을 이끌고 전장에 도착해서 나가시노 성은 구원을 받았다.
그리고 다케다군은 밀어닥친 오다와 도쿠가와의 대군과
나가시노 전장에서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역사의 큰 기록으로 남는 대전투로서 오다의 철포 부대
3,000명의 연사로 다케다 군은 궤멸적인 대패를 한다.
나가시노 전투 - 오다군의 철포대에 의해서 다케다군은
거의 전멸,가쓰요리는 단지 댓명의 가신들과 함께 전장을 빠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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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네이몬의 주군과 동료을 위한 신의는 잊혀지지를 않아 그의
아들들은 대대로 오쿠다이라 가문의 중신이 되었다.
60년대 소설 도쿠카와 이에야스의 대 히트 이전부터 이 일화는
일본에서 잘 알려진 역사의 감동 전쟁 스토리였다.
십자가에 묶여 죽은 스네에몬을 그린 오치아이 사헤이치는
그 그림을 자기 전투 깃발에 새겨 넣어 사용하였다.
이 기치는 지금도 일본 후쿠오카 시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도쿠가와 막부시대 스네에몬의 죽음은 사무라이들이 즐겨하는
군담(軍談)의 주요 화제의 하나였었다.
그에 대한 사랑은 현대에 들어서도 식지를 않아
그의 전기도 출판되었었고 영화로도 만들어졌었다.
지금 일본 국영 철도 (JR)의 이이다선에는 도리이 스네에몬이라는
역이 있어 그의 충의가 어느정도 후세인들의 사랑을 받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위의 감동스러운 전쟁 로망의 이야기는 한국사에도 있다.
단지 이 영웅의 이야기는 일본과 달리 영웅 모시기가
게으른 후손 때문에 고려사라는 책속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묻혀있을 뿐이다.
1231년 일차로 고려를 침공한 몽고군은 압록강 아래
철주 산성을 공격했다.
기고만장했었던 침공 초반 몽고군은 앞으로 이 작은 반도에서
끔찍하게 힘든 전투를 겪게 될지는 모르고 철주 산성의
수비군이 자신들이 천하에 용맹을 드날린 몽고군이 아니라고 믿어서
저렇게 건방지게 저항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앞서 포로로 잡은 고려군 낭장 문대(文大)를 철주 산성으로
성문 앞으로 보내서 자신들이 진짜 몽고군이라는 사실을
말하라고 했다.
무시무시한 원조 몽고군이 왔으니 알아서 빨리 항복을
권고하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성 앞으로 끌려간 문대는 큰 소리로 외쳤다.
“ 이 놈들은 가짜 몽고군이다! 절대로 항복하면 안 된다!”
기대치 않았던 돌발 상황에 기가 차게 놀란 앞의 일본군과는
달리 몽고군은 재차 한번 기회를 주었다.
그에게 그러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 달랬다.
그러나 문대는 성을 향하여 꼭 같은 말을 되풀이해서 외쳤다.
“ 이놈들은 가짜 몽고군이다! 절대로 항복하지 말고 끝까지 싸워라!”
울화통이 터진 몽고군은 그를 즉석에서 베어 죽여 버렸다.
그의 죽음에 눈물로 감동한 철주 산성의 군과 민은 처절하게
저항하며 반달을 버티었다.
그러나 양식도 떨어지고 병력도 소모되어 8월29일 몽골군이
성내로 난입하는 것을 막아내지 못했다.
상황이 막바지에 오르자 지휘자인 방어사 이원정과 판관 이희적은
자신들을 따라서 성에 들어와 있던 어린 자식들과 부녀자들을
몽고군에게 도륙 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창고에 넣고 불을 질러
죽이고 자신들은 쇄도한 몽골군에게 최후 돌격을 함으로서 스스로
호국 산화의 길로 갔다.
몽골군은 성의 군민들을 포로로 잡고 쓸 만한 사람들은
자기 부대의 노무자로 징발하고 끝까지 저항한 사람들은
남김없이 학살했다.
위의 밋밋하게 쓰여 있는 낭장 문대의 영웅적 산화는 앞에서 소개한
일본 전국시대 도리이 스네에몬의 죽음보다 덜 감동적으로
느껴질지 모른다.
그러나 위에 소개한 스네에몬의 일화는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쓰’의
작가 야마오카 쇼바지에 의해서 극적으로 윤색되고 문장적으로
미화 된 것이다.
자 -여기서 다시 여몽 전쟁의 배경으로 이야기를 옮겨보자
초원의 푸른 늑대 - 징기스칸
징기스칸의 등장은 별빛같이 미약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거대한 태양 같은 존재로 세상을 뒤흔들다가
사라졌다.
몰락한 가문에서 몸을 일으켜 부족을 통일하고 국가를 세우고 그 기세를 몰아 들불처럼 유라시아 대륙을 짓밟았다.
그가 죽고 나서도 몽고족의 정복 사업은 그의 아들과
손자 대까지 계속되어 동으로는 중국, 서쪽으로는 러시아,
남쪽으로는 인도 북부까지의 넓디넓은 영토를
몽고인들의 수중에 들어가게 하였다.
몽골의 소수정예 기병 군단의 공격을 받고 쓰러지지 않은
군대와 국가는 거의 없었다.
아시아의 패자 중국은 물론 역시 광대한 러시아, 그리고 더 서쪽으로
나가서 폴란드와 헝가리 등의 유럽 군대까지도 이 몽골 기병군단의
강습 앞에서는 추풍 앞의 낙엽이었다.
기병끼리 붙은 야전(野戰)은 물론이고 성의 공성전(攻城戰)에서 세계
제국(諸國)과 기라성 같은 국가의 군대로서 몽고군의 적수가 되는
군대가 없었다.
무적 몽고 기병군단-페르시아의 세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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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은 국가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동쪽을 보자.
아시아 최강국 중국(남송)이 끝까지 저항하다가 멸망했다.
그리고 여진족이 건국해서 한때 중국을 누르고 중원의
패자 노릇도 해본 금나라도 멸망했다.
더해서 티베트 계통의 민족이 세운 서하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금나라에게 망했지만 서쪽으로 가서 서요라는 신생 국가도 세웠던
글안 족은 민족 자체가 완전히 역사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 나중에 소규모로 토벌차원에서 정벌했다가 실패한 월남과 바다를
건너 있던 일본은 제외)
그러나 그런 나라보다도 훨씬 작고 약한 고려만이 작은 반도에
끈질기게 매달려 몽고군의 거센 침략을 열 한번이나 맞받아치며
30년간 항복하지 않고 버티어내서 민족과 국체를 보존해냈다.
몽고는 결국 무력정복을 포기하고 회유와 외교술로 고려를 달랬고
국토가 결딴나고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고려는
결국 고개를 숙여 몽고와 강화했으나 민족의 정체성,
다시 말하면 국가와 민족은 물론 왕조까지도 유지할 수 있었다.
징기스칸의 세계 정복 주요 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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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전쟁에서 패했더라면 고려와는 비교도 안 되게 큰 중국과
금나라 그리고 서하와 서요까지 멸망시킨 몽고가 고려를 예외적으로
그냥 놔두지 않았을 것이었다.
고려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몽고인이 통치하는 지배구조가
들어섰을 것이고 문화적인 동화 정책이 실시되어 것이다.
또는 그들이 지배하던 몽골 직할령이나 중국의 일개
부속 성으로 편입되어 연명하다가 나중에 들어선 명나라에 의해서
접수되어 영원히 벗어날 수 없었던 중국의 한 변방 지역으로
흡수되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티베트가 17세기에 내부에 분쟁이 일어나서 한쪽이
청나라에 원조를 청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가 청나라의
어이없는 속국이 되었고 그 정복 왕조인 청은 망했지만 공산 중국이
배턴을 이어받아 그대로 차지 해버린 것을 보면 짐작이 가리라 본다.
그 민족 말살정책의 가능성이 보이는 몽고의 야심이 들어나는
대목을 한번 보자.
1254년 고려에 침공한 몽고군 사령관 자랄타이는
철군을 요청하는 고려에게 아래와 같은 조건을 제시했다.
“ 고려의 국왕과 신하 그리고 백성들은 모두 육지로 나올 것이며
두발 모두 몽골식으로 깎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왕을 몽고로 압송해 갈 것이다.
두 가지 조건 중 한 가지라도 우리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철수를 할 수 없다.”
비교적 외교적 수사라 하더라도 머리를 깎으라는 소리는
그들이 고려를 정복하면 고려민의 정체성을 완전히 말살시켜
버리겠다는 야욕을 들어낸 소리였다.
하여튼 그 무렵 어느 민족이나 국가도 맞서보지 못한 슈퍼 파워
몽고의 쇄도한 무력 앞에 그만큼 풍전등화인 운명에 있었던
고려의 악착같은 항전으로 민족의 정체성을 보존했다.
몽고군이 간 곳 어디에서도 이런 치열하고 매서운 민족의
저항은 없었고 세계가 알아주던 몽고의 자랑스러운 기병 군단이
이렇게 볼품없는 전투를 한 적도 곳도 없었다.
고려는 어떻게 버티었을까?
알아보자--.
대몽 30년 전쟁에서 중국이나 유럽에서 많이 보이던 몇 만 명의
대 병력이 들판에 집결하여 격돌하는 그런 대규모 야전은
고려에서는 한 번도 없었다.
오로지 공성 전투와 야별초가 주도하는 게릴라 전투만이 있었다.
몽골이 주도한 여몽 연합군과 일본 가마쿠라 막부 무사의 전투
일본은 아무것도 모르고 몽골과 대규모 야전을 벌였다가 대패했다.
오로지 태풍이 이들을 구해주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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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공할 몽골의 침공을 고려가 방어 해 낼 수 있었던 것은
한민족이 삼국시대부터 부지런히 고구려 때부터 전 국토에
구축해 놓았던 각지의 산성(山城)들 공로가 제일 컸다.
주민들이 거주하는 곳이 아닌 주변의 높고 가파른 산정에
힘들게 쌓아 놓은 산성은 몽골의 장기인 기병 전략이 전혀
통하지 않는 곳이었다.
기병대는커녕 말도 올라가기 힘든 곳도 있었다.
몽고 기병단의 핵심 동력- 강인한 몽고말
고려의 산성은 이런 말들의 활동무대를 원천 봉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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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한반도 국방에서 산성의 중요성을 대몽 전쟁에서 절감했던
조선 세종 때 장수 최윤덕은 자신의 경험으로도 산성을 중요성을
인식하고 산성의 건설을 항상 역설했기 때문에 주변 정승들로부터
축성(築城)대감이라고 불렸다.
성에 이어서 고려의 항전에 중요한 역할은 한 것은 고려의
조정이 틀거 앉아 대몽 전투를 지휘했었던 강화도를 비롯한
서해안의 각 도서였다.
고려민은 섬으로 도망쳐 들어가 기회만 있으면 육지의
몽고군을 치고 빠지는 유격전을 전개했었다.
여기서 한마디 부언한다.
알려지기를 몽고군이 수전(水戰)이 서툴러서
강화도를 침공하지 못했다고 한다.
아무리 수전이 서툴다 해도 강화해협은 육지의 강과 폭이 비슷하다.
모든 압록강 청천강 대동강 한강등의 강은 문제없이 도강하여
한반도를 휩쓴 몽고가 이런 좁은 해협은 30년을 넘어
못 넘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고려는 강화도로 천도해서 막강한 해군을 만들었다.
해상 방어의 최대 유효 방어수단은 해군이라는 기본상 상식을
상기해보시기 바란다.
그리고 강화도를 둘러싸다시피 초계하며 몽골군의
해상 내습을 경계했다. 더해서 서해안 지대를 계속 감시하며
몽고군이 강화도 침공을 위한 선박을 모으거나 건조하는 것을
계속 감시했다.
강화도의 고려군에게는 몽골군이 가지지 못한 이런
해상 방어력의 중추를 담당한 수군은 육지에 대한 통치와
육지로부터 물자 수송에 유효하게 쓰이기도 했다.
강화도의 수군 크기가 어느 정도 되었는지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나중에 고려조정이 몽골과 타협하고 강화하자 반발한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인원과 물자를 싣고 진도로 간 배는
무려 일천척이나 되었다는 사실은 고려 수군이 만만치 않게
컸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고려군의 강함도 있었다.
이미 몽고 침공 10 년 전 글안과의 전투로 이미 상당한
국방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고려군의 야별초군이 고려 전역에서 지방민과 지방군을 조직해
만든 야별초 게릴라 부대는 몽골 침공군을 뱀처럼 휘감고 물고
늘어져 지쳐 나가 떨어지게 만들었다.
전쟁중 입지가 강화되고 확대된 삼별초군이 항전 계속을
주장하다가 결국 뜻을 이루지못하고 반발했다가 역사의
어두운 그늘로 사라진 것이 유감스럽다.
대몽 전쟁을 주도한 고려 무신정권이 세운 강화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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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군만이 아니었다.
공성전으로 치러진 대몽전쟁에서 승패는 항상 성을 지키다가도
틈만 나면 성 밖으로 쇄도해나가 몽골군을 공격한 고려 군민의
용감함이 결정지었었다.
이 세계 공성전에서 그렇게 흔하지 않은 간단없는
성외 출격은 고려군민의 강함을 증명해준다.
다음으로 무신 정권의 실력자였던 최우, 최항 부자의
항전의지가 대단히 강했던 것도 한몫했다.
그 강한 세계 슈퍼 파워 몽고에 뭣을 믿고 저렇게
항거했을까 했을 정도로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끈질긴 저항과
외교전을 병행했었다.
무신 정권이 몽고에 벌인 외교전의 교묘함은 대단했다.
끈질기게 출륙(강화도에서 나와 개경으로 되돌아가는 것)과
입조(고려 왕의 몽고 왕 알현)를 요구하는 몽고를 우롱하다시피
응대하며 전쟁을 이끌어 가서 위기 때마다 이 두 조건을
들어 주는 척하는 외교술로 고비를 넘기기도 했었다.
왕의 입조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태자의 입조로 대신했다.
더해서 왕조의 개경 환도도 전쟁이 끝나고
10년이 지나서야 행해졌다.
외교전을 한마디로 평한다면 대몽 전쟁을 주도했던
무신정권은 요새말로 말하면 몽고를 데리고 놀았다는
말이 적절할듯하다
무신 정권이 무너지고 결국 피폐해진 백성의 사정을 보다 못한
조정이 몽고와 강화를 맺었지만 삼별초는 항전 의지를 이어받아
진도와 제주도로 전전하며 몽고에 대한 저항을 계속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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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검색을 하고 보니 영웅 문대는 모든 것을 담는
백과사전에만 단 몇 줄 나온다.
한일 영웅 모시기의 차이가 너무 실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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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공군 대장 살레타이 사살
몽고는 1231년 최초로 고려에 침공하여 여몽 전쟁의 전단을 열었다.
대몽전쟁은 침공과 방어의 특성상 일차와 이차로 분류한다.
일차 대몽 전쟁이 1231년에 시작하여 1234년까지 비교적 짧게
지속되었지만 이차 대몽 전쟁은 고려가 개경에서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본격 항쟁함으로서 1235년부터 1259년까지
무려 25년까지 장기간 계속되었다.
이 30년 두 번의 전쟁에서 몽고는 그들의 기병군단을 휘몰아 무려
열한차례나 고려를 침공하였다.
몽고가 작은 국가하나 말살하겠다고 열 한 번이나 침공한 예는 없었다.
지면은 한정되었으므로 이 침공을 하나하나 소개하기조차 힘이 든다.
그래서 고려의 군민이 한 몸이 되어 싸웠던 영웅적인 전투를
중심으로 소개를 해본다.
1. 귀주성 싸움
귀주성은 이미 그 200년 전 1019년
강감찬 장군이 고려를 침공한 글안대군 10만을 궤멸시킨 역사적
전적지이기도 했다.
조선 시대 동국통감 저자 서거정은 이렇게 이 귀주성을 싸움을 평했다.
‘오호라 ! 외로운 성, 약한 군사로 천하의 사납고 강성한
오랑캐를 맞아 동으로 내려오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국가를
산악처럼 우뚝 서게 하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성을 잘 지킨 것은 안시성 이후 또 귀주가 있으니
박서와 김경손의 공은 크다 아니 할 수 없도다.‘
이곳에 몽장 살레타이의 지휘아래 1231년, 4만 병력으로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에 있던 함신진성과 철주성을 함락한
몽고군의 일대가 귀주성으로 몰려 왔다.
그 병력은 일 만 명에 달했다.
여기에 맞서는 고려 병력은 근처의 성의 군민을 집결시킨
5,000명에 불과했다.
병마사 박서가 분도 장군 정주, 분도장군 김경손, 삭주 분도장군 김중온,
정주부사 박득분, 위주부사 박문창 및 5000명의 삭주 태주 귀주의
수령들과 함께 5,000명의 병력으로 수비하고 있었다.
귀주성의 위치 - 약도는 강감찬 장군의 작전 상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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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삼 만 명의 몽고 기병군단의 바람과 같은 기세로 서경을 지나고
개경을 목전에 둔 동선역 북방 증산 답동 탑동일대까지 진출하여
개경을 공략할 준비를 한다.
이때만 해도 몽고는 고려를 쉽게 먹어치울 줄 알았다.
여기서 공격하는 몽골군과 방어하는 고려군민 사이에 40일간
피비린내 나는 공방전이 벌어진다.
영웅적인 귀주성 전투를 소개한다.
▼엄청난 대군이 성 밖에 포진한 것을 본 고려 군민은 위축되었다.
그러자 남문을 지키던 분도 장군 김경손은 12명의 지원자로
결사대를 조직하여 서쪽 성벽을 넘어 용산에 있는
몽고군의 서측방을 기습했다.
흑기를 들고 있던 몽고의 지휘관 한 명을 일격에 죽이고
그 들 진중에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베고 찌르고 쏴 죽였다.
몽고군 진영에 혼란이 일게 하였다.
이와 같은 용감한 활약을 본 귀주성의 군민은 사기가
백배 충천하였다.
박서는 군사를 휘몰아 일제히 성문을 열고 뛰쳐 나가
몽골군을 공격했다.
견디다 못한 몽고군은 북쪽으로 철수했다.
▼ 이틑날 9월 4일 몽고군은 압도적인 대군으로 다시 귀주성을
파도와 같이 파상 공격했다.
귀주군은 이들을 선방하며 중간 중간 성외 출격을 감행해서
몽고군을 타격했다.
몽고군은 성외 출격을 한 위주부사 박문창을 포로로 하였다.
몽고군은 간단한 심문만 한 뒤 그를 성안으로 되돌려 보내며
투항을 권고하게 했다.
돌아와서 시키는 대로 하는 박문창에 분노한 박서는 몇 시간 전까지
부하였던 그의 목을 쳐서 그 목을 몽고군에게 돌려보내
항전 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추상같은 결사의 의지였다.
▼ 같은 날 여몽군 사이에 바위를 멀리 발사하는 발석기라는 무기를
동원하여 현대의 포격전과 비슷한 대규모 화력전이 있었다.
몽고군은 주공격 대상을 남문으로 전환하고 거대한 발석기 15량을
남문 밖 수십 보 지점의 대로상에 거치하고 남문의 성루를 향하여
포격을 가하였다.
몽고군의 포격에 의하여 남문 문루와 성문 동쪽이 성벽 일부가
파손되었다.
고려군도 이에 지지 않고 성벽위에 포좌를 쌓고 포차로 바윗돌을
날려 몽고군의 포대에 맹렬한 포격을 가했다.
현대어로 이야기해서 반 포대 사격을 한 것이다.
고려군의 정확한 포격으로 몽고군의 장수 1 명과 수 십 명의 병사가
포살되자 몽고군의 포격을 중지하고 귀주 북쪽의 본진으로 철수하였다.
▼9월 달에 귀주성 공격을 개시한 몽골군은 무려 다섯 차례나
총공세를 가했으나 다 실패했다.
12월 하순 침공 몽고군 총사령관 살레타이는 직접 총병력을 지휘하여
귀주성을 공격했다.
이때 공성용의 사다리인 운제(雲梯 )수 십기를 일시에 동원하여
4면에서 성벽을 기어오르자 고려군은 대형 칼인 대우포(大于捕)를
동원하여 사다리위에 붙은 몽고군을 살상했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성내 남녀노소의 구별이 없이 모두 성벽위로
올라와 필사적으로 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고려군은 궁시와 석포로 몽고군을 공격하는가하면 일부 날쌘
장정들은 성문을 열고 뛰쳐나가 몽고군과의 백병전을 벌리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저항에 끝장을 보려고 덤벼들었던 몽고군도 할 수없이
귀주성 점령을 포기했다.
전투가 한창일 때 몽고측에서 70이 다된 노장 한 사람이 성밑까지
접근하여 고려군의 배치 상황과 병기및 장비들을 살펴보고 나서
다음과 같이 찬탄해 마지않았다.
“내 소년 시절로부터 수없이 많은 전투에 종군하였지만 이처럼
아군의 맹공을 받고도 끝내 항복하지 않은 경우는 본적이 없었다.
이 성안의 장수들은 반드시 훗날 장상(將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미 남쪽으로 내려간 몽고군에 위협을 느낀 조정은
강화를 서둘러 했다.
왕명에 의해서 장장 사 개월을 아수라와 같이 싸워서 성을 지킨
박서는 다음 해 일월 성을 몽고군에 내주고 철수해야 했다.
사실 침공 몽골군의 삼분지 일을 넘는 몽고 북로군 일 만 명을
무려 4개월이나 귀주성에 붙잡아 놓은 바람에 몽골군의
고려 침공은 초반부터 차질를 면치 못했다.
주력 부대는 이미 황해도 동선령 부근까지 남진하여 고려 중앙군격인
경군(京軍)과 치고받는 전투를 벌이며 대치하고 있었으나 후방에
불안을 느껴 스스로 청천강 이북으로 철수하며 눈치를 보아야 했다.
여기서 시간을 번 고려는 개경의 주력부대로 구성된 경군을 구성해서
파견하여 동선령에서 일대 격전을 벌이게 된다
2.동선령 전투
동선령 전투는 30년 대몽전쟁에서 야지에서 여몽군이 야전으로
붙은 흔치 않은 전투이다.
▼산적마저 달려 나와 싸운 격전
대장군 채송년이 최고 사령관이었던 병마사 고려 경군은 황해도
봉산 서쪽 동선령에 방책을 치고 몽고군을 기다렸다.
그러나 서경을 우회한 몽고군은 놀랄만큼 빠른 속도로 동선령의
고려군을 급습했다.
이에 상장군 이자성, 장군 이승자 노탄등의 장수들이 힘을 다하여
막았으나 이자성이 화살에 맞아 쓰러지고 노탄은
창에 맞아 말에서 굴러 떨어지는 대 피해를 입었으나 다른
경군 부대가 몽골군의 배후를 쳐서 겨우 물리쳤다.
다음날 야전은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채송년은 이미 설치한
목책에 의지한 방어 전투로 전술을 바꾸었다.
그러나 몽고군은 다시 공격 해 와서 목책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일부분의 목책이 다 타버리자 그 사이로 그들의
타격부대인 기병을 투입하였다.
이에 목숨을 벗어던질 각오를 한 산원 이지무와 이인식이 이끄는
너덧 명의 용사들이 백병전으로 겨우 이들을 물리쳤지만
몽골군은 계속 목책을 불태우며 돌입 기회를 노렸다.
실로 위기였다.
이때 인근 언덕에서 전쟁 구경을 하고 있던 황산이 근거지인
두 산적 놈이 있었다.
관군에 체포되면 극형을 면치 못할 범죄인 신분의 이들에게
뜨거운 민족의 피는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이 위기를 보다 못해 달려 내려와 경군에 합류했다.
그리고 선두에 나서 활로 연사하여 몽고군 서너 명을 사살했다.
동선령 전투는 역시 경군의 한 부대가 몽고군의 후미를
기습하자 몽고군은 패주했다.
이 일화는 대몽 전쟁이 민(民)과 관(官)과 군(軍)뿐만 아니라
산적 (賊)까지도 총동원했던 민족 대항전이었슴을 알 수가 있다.
3.자주성 최춘명의 옹고집 전투
동선령에서 몽고군에게 힘든 전투로 겨우 승리를 한 고려 경군은
북상해서 안북성에 방어진을 쳤다
그러나 안북성 전투에서는 고려 경군은 대패하여 경군의
절반이 전사했고 성은 함락되었다.
이때 고려군은 작전 실패로 몽골군이 그들의 장기인
기병부대를 마음껏 쓰게 하는 실수를 범했었다.
안북성을 함락시킨 몽골부대는 그 다음 성이 자모산성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방어사 최춘명은 군민이 합동한 부대를 잘 지휘하여
몽고군의 공격을 잘 받아냈다.
그러나 고려 조정과 침공 몽고군 사이에
강화조약이 잘 추진되어 조정에서는 일선 전투 부대에
적대 행위를 중지하고 몽고군에 항복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앞에서 선전한 귀주성도 항복했고 안북성에서 대패하고
서경성으로 물러나 있던 경군도 항복했다.
그러나 자주산성 최춘명은 조정에서 파견한 내시낭중 송국첨과의
면담을 거절하고 성문을 굳세게 잠그고 저항을 계속하였다.
조정이 다시 집대성이라는 중신을 보내 몽고의 장수들과 함께
성문으로 다가가 면담을 요청했다.
할 수없이 성문을 열고 이를 만나 본 최춘명은 단호히 항복을
거부했다.
그러자 때를 엿본 몽고군은 열려진 성문으로 돌격을 했으나
성루에 미리 배치해 놓은 고려 궁수들이 일제 사격으로 몇 명을
쓰러뜨리자 단념하고 물러났다.
최춘명의 저항은 전원 몰살의 위험성을 각오한 것이었다.
그 해 11월 인근 평주성은 저항하다가 함락 당했는데 몽고군은
성의 군관민 전원을 한 명도 남겨두지 않고 살해했었다.
최춘명은 몽고군의 배후에서 위협적인 무장 세력으로 존재하며
다음해 일 월 그 들이 철수할 때 까지 옹고집으로 버티었다.
4.충주성 전투
개경을 돌아 남쪽으로 진군한 몽고군은 지금 남한산성인 광주산성
공격에 실패하자 다시 남하하여 충주성을 포위했다.
이 충주성 전투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지휘관없이 싸워 이긴 노비 부대
충주성에는 방어군인 별초군이 조직되어있었다.
양민들인 양반 별초와 관노비들로 구성된 노군 (奴軍) 그리고
관청의 잡역 종사자들로 구성 된 잡류(雜類)등의 세 부대가
별초 부대의 기간이었다.
그러나 몽고군이 몰려오기 전부터 양반 별초 부대 대장 충주부사
우종주와 다른 두 부대 지휘관 유홍익 사이에 전술에 대해서 심한
의견 갈등이 있었는데 몽고가 공격을 개시하자 두 사람과 간부들
그리고 양반 별초 부대는 빠짐없이 성을 버리고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심지어 노비 부대를 지휘해줄 초급 간부 한 명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전투 경험 없던 노비들과 잡류들은 자치적으로 지휘관을 뽑고
방어 작전 계획을 나름대로 세워서 이들 세계 최강 몽고군을
물리치는 진기한 기록을 세웠다.
5.처인성 전투
몽고군이 이차로 내침한 1232년 침공군 대장 살레타이는 다시
광주성을 공격했다가 실패하고 용인으로 방향을 틀어 진격했다.
지역 군관민은 전부 근처의 산성으로 도주해버려 몽골군은
텅텅 빈 용인성을 점령했다.
살레타이는 그 남방 처인성에 고려 군관민이 있음을 알고
이를 공격하기로 했다.
여기서 세계 전사에서도 드문 침공군 대장 사살이라는
대사건이 발생했다
▼ 살레타이 사살
이 처인성은 둘레가 단지 425미터에 지나지 않는
작은 시골 공설 운동장 크기의 성이었다.
이곳에는 군창이 있었다.
전쟁이 전에는 부곡(部曲)천민들이 모여 살았었다
이곳의 지휘관은 정식 군인이 아닌 승장(僧將 ) 김윤후였다.
그는 지휘를 맡자 성의 방비를 단단히 하고 성 밖 300미터 지점
언덕에 (현재는 살장터로 불림)에 수 십 명의 저격수를 배치했다.
아무도 몰랐던 적장 살레타이는 단지 5,6명의 기병만을 데리고
지형 정찰에 나섰다.
그 일행이 고려군 매복지점에 이르자 이들은 갑자기 집중사격을
가해 이들을 전원 사살하고 살레타이의 목을 베었다.
몽고군 기병들은 외곽에서 이를 보고 달려 왔지만 처인성에서
달려 나온 본대에 의해 대패 당한뒤 그들의 대장 시신도 수습 못하고
도주하였다.
고려군은 틈을 두지 않고 혼란에 빠진 그들 본대까지도 기습하여
이들을 패주시켰다.
살레타이의 전사로 2차 침공 몽고군은 지리멸렬하게 되었고 그 뒤
고려영내 도처에서 고려군의 반격으로 패배를
거듭하다가 다시 강화를 요청하고 철군했다.
한국인들의 대몽 전쟁 인식 부족을 나타낸 그림.- 박물관(기념관)에
걸린 민족 항쟁화 - 성밖에서 살레타이가 사살됐는데 그림은
그가 수천명의 처인성 공격 몽고군을 지휘하다가
사살된 것으로 그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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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몽골 총사령관 살레타이의 습격 살해는 마치 한국 전쟁 중
미군 사령관 릿지웨이, 또는 반대로 중공군 사령과 팽덕회가
살해당한 것과 마찬가지다.
후세 사가는 이를 30년 대몽전쟁사에서 최대의 승리라고 평가하고 있다
승장 김윤후에게 조정에서 상장군이란 벼슬을 내렸다.
김윤후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 저는 전시를 당해서도 무기를 잡고 일어서지 못했던 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잘 것 없는 공으로 후한 상을 내리십니까 ? ”
그러나 고려 조정은 그의 능력을 알아보고 중용했다.
김윤후는 대몽 전쟁 후반기 충주성의 방어사령관으로
다시 몽고군을 격퇴하는 위대한 공을 세운다.
- 스님 부대가 격파한 세계 최강군
몽고는 금나라와 동진국을 멸망시킨 1234년 다란바스에서
전략회의를 하고 앞으로 세계 정목 사업에 관한 토의를 벌인 결과,
다음과 같은 세계 정복을 위한 군사행동을 결정하게 되었다
1.바투 귀유그 뭉케 군; 동남 러시아와 동부 유럽방면을 공략한다.
2.코돈 코츄 거우본부카 군 :중국 남방의 남송을 정벌한다.
3.당꾸 군: 고려를 정벌하여 남송과의 연합체제 구축을 저지한다.
보시다시피 비록 고려가 작은 나라이긴 하나 몽고가 몽고를
남송 즉 중국과 그들이 한껏 휘저은 러시아와 유럽과 같은
거대 국가와 같은 전략적 가치를 있는 중요 목표로 보고
국력을 다하여 정벌하겠다는 심중이 보인다.
고려에게는 괴로운 일이었다.
이 결정으로 1235년 몽고는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였다.
당꾸 군은 1235년 여름 몽고군은 고려를 다시 침공한다.
1234년부터 1259년까지 장장 25년이나 계속되는 제2차
여몽 전쟁이 시작 된 것이다.
이 전쟁에서 고려군은 전번 전투에서 지방군의 전투 실력을
익히 보았던지라 정규군은 강화 일대에 집결시켜 철통 방어에
힘썼다.
더해서 경기도 서해안은 물론 지금 서울 지역의 주민들까지
강화로 이주시켜 방어군 규모를 크게 증강시켰다
전투 준비도 치밀하게 하였다.
야별초 부대를 국내 도처에 파견하여 게릴라전을
지도케 했다.
야별초 부대의 대활약은 산성 방어와 함께 고려의
대몽 2대 방어 전략의 주축이 되었다.
이들의 활약과 공로를 일일히 소개하지 못함이 아쉽다.
삼별초가 본격적으로 전장에 데뷔하는 막이 오르게 된 것이다.
몽고군에게도 변화가 있었다.
몽고군의 전술에도 변화가 있었다,
이번에는 대규모 야전을 피하고 산성 작전으로 몽고군을 농락했던
고려군의 작전을 감안하여 몽고군은 소규모의 기동 부대로
여러 곳으로 분진하기로 했다.
6.죽주성 전투
1234년 남하한 고려군은 철통같이 지키는 개경과 강화도를
공략하지 못하고 계속 남하하여 죽주성(경기도 안성소재)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죽주성 방어 사령관은 죽주성 방호별감 송문주는 중앙에서
파견 되어 와서 죽주와 그 일대 군민 3,000명을 규합하여
방어군을 조직해서 몽고군의 공성에 대항했다.
죽주성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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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귀주성에서 명장 박서의 밑에서 치열한 대몽 방어전투를
끝까지 치러낸 노련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몽고군의 공성 전법의 뼛속까지 들여다보고 있었다.
몽고군은 공격에 앞서 수백기의 기마부대를 죽주성으로 보내서
우선 점잖게 투항을 권유했다.
그러나 투항을 권유 받자 말자 죽주 성병은 성문을 열고
뛰쳐나가 몽고 기병대를 급습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몽고 기병대는 당황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성이 머리끝까지 난 몽고군은 먼저 발석기 수 십대를 동원해서
성의 사대문에 치열한 포격을 가했다.
성문 앞을 가득 메울만큼의 바윗돌이 성루를 때리자 4 대문은
거의 다 파괴 될 지경이 되었다.
몽고군은 일제히 성안으로 난입하고자 쇄도했다.
그러자 침묵을 지키던 성안의 고려군 발석기들이 갑자기
일제 사격을 하는 바람에 몽고군의 공격이 제대로 되지를 않았었다.
공격이 돈좌된 몽고군의 자기들의 돌격을 연막 차장 하고자
성벽 밑에 나뭇단을 가득 던져놓고 사람을 죽여서 짜낸 기름을
끼얹고 불을 질러 연기를 가득 피웠다.
불은 연기뿐만 아니라 때 마침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성안의
건물들로 옮겨 붙어 성내에 연기가 가득했다.
성병들과 주민들은 불길을 피해 이리저리 피해 몰려 다녀야 했다.
이에 송문주는 최후를 각오하고 전병력을 동원해서 성 밖으로
출격해서 몽고군에게 덤벼들었다.
성안에 이는 거센 불길을 보고 좋아하던 몽고군은 갑자기
검게 그을린 고려군민들이 성문 밖으로 뛰쳐나와 죽기 아니면
살기로 돌격해오자 감당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큰 피해를 입고
도주했다.
고려군은 도주하는 이들을
계속 추적하며 몰아대자
이들은 북방 50리 밖의 양근(지금의 양평)까지 쫓겨났다.
그 뒤에도 몽고군은 반달가까이 죽주성을 공격했으나
죽을 고비를 넘긴 고려군의
더욱 완강해진 저항으로
할 수없이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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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군이 발석기로 발사한
수많은 바위로 난타 당했던
죽주성 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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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죽주성의 선방은 차후 몽고군의 남하정책에 큰 브레이크를
거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 후 계속 남진했지만 대규모 공성 전략은 포기하고
소규모로 부대를 분할 편성하여 각지를 초토화시키는 소극적인
작전을 했다.
소위 그들이 새로 채택한 ' 고려 영토 쑥밭 만들기 '전략이
제대로 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의 말발굽은 먼 남쪽 경주에 까지 이르러 1238년
황룡사의 구층탑에 불을 질러 소실시킨 것도 이런 쑥밭 만들기
작전의 일환이었다.
그렇다고 공성 전략을 다 버린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잡아 죽이기 쉬워 보이는 작은 성은 서슴치 않고 공격했다.
(상편에서 고려군 산성전투의 핵심중 하나가 그냥 성벽에 의지하여
성안에만 안주 했던 것이 아니라 몽골군의 틈만 보이면 과감한
성외 출격으로 적을 쳤던 것이 산성전투의 고비를 만들었다고 썼다. )
아래 두 개 작은 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7.작은 두 성의 성외(城外)출격
▼몽고 남로군은 9월3일 온수군(지금의 온양)의 성을 공격했다.
군리라는 작은 직책에 있었던 현려는 때를 보아 성문을 열고
뛰어나가 몽고군에게 맹공을 가해 몽고군 200명을 살상하고
여러 마필과 병기등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온수군 공격에 실패한 몽고군은 서남방으로 이동하여
예산의 대흥성을 공격했다.
대흥성은 역시 수일동안 문을 닫고 완강히 저항해서 몽골군의
공세를 비껴낸 후 지친 몽골군이 틈을 보이자 성 밖으로 출격하여
몽골군을 대파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8. 삼별초의 대활약
이 2차 대몽전쟁이 터지면서 삼별초, 그 중에 지방에 파견된 야별초의
활약이 대단해졌고 전쟁이 진행되면서 그들의 역할은 더욱 커졌다.
그들의 게릴라 전투의 하나가 10월 22일 현 경기도 양평에 있는
지평현 전투였다. 수백기의 몽고군이 보급품 수송 부대와 함께
지평현에 도착해서 숙영하자 지역에 미리 조직되어있던
야별초부대는 지방민과 함께 이 부대를 야간 기습했다.
결과 몽고군의 태반이 죽고 기병용 마필
그리고 수송 우차가 다량이 노획되었다.
이들 몽고군 패잔병들은 그날로 북쪽으로 도주했다.
1235년 12월 5일 호남과 호서의 주요 간선 도로인 공주의 효가동에서 야별초 지유(指兪) 이임수와 박인수가 각각 100여명의 유격대를
이끌고 도로를 따라 이동하던 몽고군을 기습하여 다수를 살상시켜
도주하게 만들었다.
몽고에서 1241년 몽고의 장종(오코타이) 죽자 다시 강화가
성립되고 불안한 휴전이 성립되고 몽골군은 철수했다.
이때쯤부터 지긋지긋하게 고려에게 당한 몽고내부에서 고려는
무력으로 점령할 수 없다는 무력 정복 가능성에 대한 회의가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그 때 러시아나 중국을 공격한 몽골군은 빛나는 전공을 세우며
그 거대 국가들의 심장부로 쾌속 진격하고 있었다.
반면 고려 침공군은 처음부터 죽을 쑤고 못난 꼴을 보이고만 있었다.
그러나 몽고 내부의 정쟁이 맺음을 하고 정종이 왕이 되자 몽고의
목의 가시 같았던 고려에 대한 미움이 다시 폭발했다.
강화 조약 따위는 습관적으로 차버리고 대제국 몽고에 공공연한
도전과 조롱을 일삼는 고려를 멸하기 위해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남송 정벌 전에 배후의 위협세력을 제거한다는
실질적인 목표도 있었다.
1247년 몽고 아무간 군이 고려를 침공했다.
이 침공의 특징은 1231년 살레타이 일차 침공 때 인주의
도령으로 있다가 1,500명의 부하를 이끌고 일찌감치 몽고에
투항한 민족 반역자 홍대선의 아들 홍복원이 앞장섰다는 점이다.
홍복원의 아들 홍다구는 나중에 삼별초의 토벌에 앞장섰던
민족 반역을 대물림했던 역적 가문이었다.
이번 침공군도 경험을 살려 큰 싸움대신 고려 “쑥밭 만들기”를
전면적으로 시도했다.
러시아와 유럽을 침공한 바투군이 호쾌한 야전과 공성으로
역사에 기록되는 공포의 타격을 주었던 모습과 비하면
졸장스럽기 짝이 없었다.
아무간군도 바투군처럼 대활약을 하고 싶었지만 노회한 고려군은
그런 틈을 보여주지 않으니 이런 비적형 전투밖에는 할 방법이 없었다.
고려는 이들이 갈만한 지역의 백성과 물자를 강화와 서해안 섬으로
옮기고 유격전을 전개하는 청야(淸野)작전을 폈다.
몽고의 황제 정종이 또 짧은 재위기간을 지내고 저 세상으로 가자
몽고군은 두 해 동안 비적형 작전에서 고생만 하고 별다르게
얻은 것도 없이 철군하고 하고 말았다.
대신 고려내부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최충헌 이래 무신정권의 실권을 잡고 대몽 강경노선을 주장하던
최우도 1249년 죽었다.
그 아들이 최항이 집권했으나 그도 아버지와 같은
강화 조약 따위는 우습게 짓밟고 대몽 강경정책을 계속했다.
1253년 몽고군은 다시 고려를 침공했다.
이 침공에서 성 방위군과 주민 천명 가까이가 대 옥쇄하는
장렬한 전투가 춘주성에서 있었다.
9.춘주성 싸움(춘천 봉의산성)
춘주성에서 안찰사(按察使) 박천기와 문학(文學)가 주변 주민을
모아 방어하고 있었다.
장렬한 순국의 성 춘천 봉의 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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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초에 성을 공격한 몽고군은 투항을 권했지만 물론 결연한
거부 통보를 받았다.
▼고려군의 성외 출격에 항상 골탕을 먹은 공격군은 이번에는
교활한 작전을 썼다. 주변에서 포로로 잡은 주민들을 동원하여
성 주변에 목책을 이중으로 두르고 그 것도 부족해서
한길 깊이의 호를 빙 둘러 가며 팠다.
이것들이 완성된 뒤에야 비로소 공격을 개시했다.
몽고군은 압도적인 병력을 동원하여 반달 동안이나 수 십 차례의
파상적인 공격을 성에 퍼부었다.
공격이 장기화되자 식량이 다 떨어지고 시석(矢石)도 바닥이 나자
성에서는 최후의 상태에 까지 몰렸다.
성의 우물마저 말라 식수가 떨어지자 마소를 죽여 그 피를 마시는
최악의 장면이 나타났다.
그러자 안찰사 박천기는 죽기를 결하고 활로를 찾기로 했다.
그는 60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결연히 성 밖으로 출격했다.
결사대는 빗발치는 몽고군의 화살을 뚫고 목책을 뚫었는데
결국 호를 넘지 못해 몽골군의 공격에 전원 전사하고 말았다.
이들을 전멸시킨 몽고군은 성을 바로 공격하여 남은 노약자와
군병 300명을 전원 몰살시켰다.
▼ 그러나 더 큰 옥쇄가 황해도 양산성에서 있었다.
8월12일 황해도 양산성이 운제를 타고 성벽에 넘은 몽골군이
불화살을 성내에 마구 쏘아 대 화재를 일으키고 성내로 쇄도했다.
성 방호별감 권세후는 칼로 자기 목을 찌르고 죽고
남은 성병과 주민 4,700명이 최후까지 싸우다가 전멸을 했다.
10.적장 예꾸 암살 작전
소수의 삼별초 특공군이 적 몽골 총사령관 암살을 시도한
작전은 특기 할만하다.
1253년 11월 중순에 교동도의 별초군 특공대가
교위(校尉)장자방(張子方)의 지휘 아래 해협을 건너 황해도
평산까지 잠입해 들어갔다.
목표는 고려 침공 총사령관 에꾸였다.
그들은 야간에 대담한 야습을 감행, 에꾸를 처치하지 못했지만
초급 지휘관급 10호장 20여명을 비롯한 다수의 병력을 사살하고
기마 병기들을 탈취해서 몽고 군 수뇌부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장자방은 다른 전투에서도 특공대장의 능력을 발휘했다.
다음해 1254년 8월20일 몽고군은 괴주성(지금의 충북 괴산)에
몽고 기병대가 주둔하자 장자방은 야간에 일대의 별초군을 거느리고
성을 기습하여 다수의 몽고 기병을 죽이고 성 밖으로 축출시켰다.
이들은 50리 거리의 충주성을 위협하여 자연히 항복시키고자
침공군 대장 자랄타이가 파견한 특수 임무부대 였다.
그런 중요한 부대가 기습당하여 볼품없이 돌아오자 자랄타이는
격노하여 직접 충주성으로 출동했다.
이 충주성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었지만 성의 방호별감
김윤후가 (처인성의 살레타이 사살 주인공)
잘 선방해서 성을 지켜내게 된다.
11.상주 성의 스님 부대 대활약
앞의 동선령 전투에서 산적까지도 보다 못해 떨쳐 나왔다는
사실을 소개했었다.
중생의 구도에 삶을 던진 스님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1254년 20 년 전 처인성에서 살레타이를 사살한 김윤후가 지키던
충주성을 공격했다가 갑자기 악천후로 혼란이 있던 사이 고려군의
성외 출격으로 큰 피해를 입고 패퇴한 몽골군은 남하하여 상주산성
(지금 백화산성 추정)을 포위하고 공격을 준비했다.
마침 근처 황령사 주지이고 승장이던 홍지가 지방 사찰의 스님들을
모아 만든 승병부대 수 백 명을 거느리고 오다가 이를 발견하고
후방에서 몽고군을 급습했다.
홍지스님이 주지로 있었던 황령사- 후에 중건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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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군이 스님부대의 기습을 받고 동요하는 것을 본
상주산성의 군병들은 크게 고무되었다.
그들은 즉시 성 밖으로 밀고 나가서 스님 부대와 합세하여
몽고군을 타격했다. 몽골군은 대패해서 대구 쪽으로 패주했다.
그러나 전쟁은 이제 끝물에 다가가고 있었다.
위에서 고려의 영웅적 투쟁을 소개했다고 해서 고려가 상승무드의
승전 국가의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 아니었다.
몽고군이 몰려오자 손을 들고 항복했던 성들도 부지기 수였고
성이 함락당해서 군민이 떼죽음 당한 성들도 적지 않았다.
홍유선 홍복원 가문과 같은 배신자들도 나왔었다.
그러나 중요했던 것은 국토 전체가 수시로 극히 야만적인 몽고군의
군마가 휩쓸고 다녔던 전장터가 되었었다는 사실이었다.
더구나 대몽전쟁 후기 몽고군이 주요 작전 목표로 자행했었던
고려 쑥대밭 만들기의 분탕질과 이에 맞서는 고려군의
청야 작전이 고려백성들에게 준 피해는 극심했다.
물적 피해만이 아니었다.
고려군에 징집되거나 양민으로서 전투에 동원돼
전사한 백성은 물론 인명경시의 몽고군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로 잡혀가서 노예생활을 하던 고려민의 숫자가 엄청나게 많았다.
그때 고려의 작은 인구수를 감안하면 천문학적인 인적피해였다.
모든 피해는 고려 백성이 감내해야 했다.
대몽 전쟁은 고려 백성의 껍질을 벗겨내고 살을 저며 내고
뼈를 갈아내는 희생과 고통으로 치루어 낸 민족과 국가 보존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고려민의 항전 의지는 여전히 높았지만 전쟁을 끝낼 조건도
무언속에서 조용히 자라고 있었다.
반면 몽고에도 헌종 때부터 무력 정복을 포기하고 회유로서
고려를 포섭하려는 분위기가 짙어졌다.
30년간을 저항한 저 고슴도치같이 지긋지긋한 인간들을 무력으로
점령해보았자 앞으로 100년인들 저항하지 않는다는 법은 없다는
느낌이 몽고 수뇌부에 몸서리가 일기도 했다.
잘 달래서 말을 듣게 하자는 판단이 몽고 조정내에 퍼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고려의 국체와 왕조를 보장해주고 강화하기를 은밀하게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몽고는 줄기차게 요구했던 고려 왕의 몽고수도 카라호름에 있던
몽고왕을 찾아와 뵙는 입조(入朝)와 개경으로의 출륙(出陸)중
앞의 왕의 입조를 왕세자의 입조로 변경시켜주었다.
몽고가 고려왕이 찾아와서 항복하기를 줄기차게 요구하던
몽고 수도 카라호름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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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도 최씨 무신 정권 마지막 후계자 최의가 타도되었다
그 뒤에도 김준이니 임연이니 하는 무신들이 무신정권을 계승했지만
이미 세태는 문신들이 득세를 해가고 있었다.
결국 고려의 세자 왕전이1259년 4월 21일 입조를 위해 고려로 떠났다.
그 사이 1259년 6월 30일 그간 30년 대몽 저항의 상징적 역할을 했던
고려 고종이 승하했다.
세자 왕전이 중국땅에 도착해보니 몽고왕 정종 문게도 승하했다.
그들은 급히 방향을 돌려 다음 몽고 황제가 될 미래의 세조 쿠빌라이를
만나러 중국 깊숙이 들어가 하남성 임여헌에서 쿠빌라이 칸을 만났다.
그리고 왕전은 돌아와서 승하한 고종의 뒤를 즉위했다.
이가 고려의 원종이다.
이 대에 끝까지 대몽 강경정책을 밀었던 무신 정권이 종말을 고했다.
고려군의 주력으로 성장했던 삼별초가 크게 반발하고 저항했지만
압도적인 병력의 동원으로 제주도에서 섬멸당하고 말았다.
국체와 왕조는 보존 할 수 있었으나 고려가 몽골에 무릅를 꿇은 뒤
일본 정벌에 내몰리고 갖가지 굴욕과 간섭을 받은 이야기는
여기서 논하지 않겠다.
단지 말했듯 고려는 몽고가 무력으로 점령하지 못한 유일한
대륙의 국가였다.
여기서 단지 상편에서 썼던 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한다.
고려가 몽고의 무력침공에 무릅을 꿇었더라면 고려는 왕조는
멸망하고 몽고 왕족이 다스리는 국가가 되었거나
후금이나 서하처럼 중국의 일부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랬었다면 고려는 다음에 중국 대륙의 패자가 된 명나라가 극히
자연스럽게 몽고의 유산이었을 한민족의 영토를 전리품으로
거두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은 가공할 중국의 이민족 동화력(이것이 몽고의 직접
통치보다 더 두려운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이 한자를
공용 문자로 쓰고 사대부 사이에 어느 정도 모화사상마저 있었던
한민족에게 효력을 발휘해서 지금쯤 서울의 한복판에 오성홍기가
휘날렸을 가능성도 배제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오로지 치열한 고려의 대몽 항전의 강도가 어땠던가 하는 것을
다음 왕이 된 원 세조 쿠비라이 칸의 직접 발언으로 보여준다.
원의 세조 쿠빌라이 칸 -마르코 포로가 만난 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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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입조한 고려 세자를 만난 자리에서 기고만장해서 한마디 했다.
“ 고려는 만리 밖의 먼 나라로서 그 옛날 당 태종이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정벌에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이를 굴복시키지
못하지 않았던가?
이제 바로 그 나라의 태자가 스스로 나를 만나러 왔으니,
이것이야 말로 하늘의 뜻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몽골이 간단히 휩쓸어 버린 거대한 러시아나 또 중국의
몇십분지 일에 지나지 않은 소국 고려가 입조했다고 해서
원대 명군으로 꼽히고 그간 수 십 개국의 항복을 위한 입조를
받아온 세조가 이렇게 어린애처럼 좋아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좀 이상하게도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30년의 긴 세월동안 작은 고추 고려가 초강대국 몽고에게
어느 정도의 호되게 매운 맛을 맛보게 했는지를 짐작하게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