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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수, 채승병, 『복잡계 개론』, 삼성경제연구소, 2006
- 1~2장 (15쪽~102쪽)
최 기 현
프롤로그
2004년 크리스마스 연휴에 평화로움과 여유가 가득하던 인도양 연안을 휩쓸어간 쓰나미와
1997년 크리스마스 연휴에 번영과 희망으로 가득했던 한국을 휩쓸어간 금융위기, 여기서
우리는 전혀 다른 원인에서 비롯되었지만 뭔가 다르게만 보이지 않는 닮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과연 이들 사이에는 어떠한 유사점이 존재하는 것일까?
해일이나 IMF 금융위기 모두 공통적으로 시스템의 복잡성으로 인해 발생한 현상이다.
자연계와 경제계는 모두 수많은 구성요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수많은 구성요소가 끊임
없이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 상호작용의 결과 음의 되먹임(negative feedback)이 발생하기도
하고 양의 되먹임(positive feedback)이 발생하기도 한다. 평소에는 잘 균형을 잘 이루고
있지만, 그 균형이 깨지는 순간 급진적인 양의 되먹임 현상으로 극단적 변화가 발생하는 것이다.
비단 자연계나 경제계뿐만 아니라 세상은 이미 복잡하게 얽혀있는 복잡계(complex system)다.
복잡하게 얽힌 버스 노선과 지하철, 전 세계를 복잡하게 연결하는 항공망, 통신망, 인터넷 등이
대표적 복잡계다. 또, 다양한 구성요소를 가진 국가와 도시, 기업생태계, 수많은 사람들로 구성된
조직 등 우리가 사는 일상 자체가 복잡계다. 이러한 복잡계의 특징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다.
‘복잡한(Complex)'의 의미
복잡계란 말 그대로 복잡한 시스템이다. 여기서 ‘복잡한(complex)'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말에서 복잡하다고 하면 흔히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 혼란스러운 상태를 연상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complex'가 아니라 'complicate'에 해당하는 의미다. 반면에 영어의 ‘complex'의
어원인 라틴어의 ‘complexus'는 ‘엮는다’는 뜻의 그리스어 ‘pleko'에 ‘함께’라는 뜻의 접두사 ‘com-'이
붙어 생긴 말이다. 즉, 함께 엮임으로써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질서정연한 상황이 복잡함을 뜻한다.
옷감의 씨줄과 날줄처럼 다양하게 얽혀 있어 겉보기에 쉽사리 그 구조가 눈에 들어오지 않지만
나름대로 질서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재미있게도 한자 ‘섞일 잡(雜)’자 또한 비슷한 어원을
가지고 있다. 이 글자는 ‘여러 빛깔의 실을 써서 옷을 만들다’는 의미에서 ‘섞인다’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물리학, 생물학, 수학 등의 자연과학에서는 이러한 복잡성을 가진 시스템, 즉 복잡계에 대해 1900
년대 초부터 인식해왔으며, 이러한 복잡계를 파헤칠 여러 가지 이론을 발전시켜왔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일상의 사회․경제현상에서 느끼는 복잡함이 자연현상에서 연구해온 복잡성과 본질적
으로 매우 비슷하다는 점이다.
1980년대 무렵부터 산타페 연구소(Santa Fe Institute)를 중심으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여러 분야의
자연과학자들과 사회과학자들이 모여 그전까지 서로 단절되어 독자적인 해결을 모색해오던
문제들이 실제로는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러한 공통된 문제
인식을 바탕으로 각 분야의 사고방식과 방법론을 융합하여 새로운 문제해결의 길을 열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 결과 태어난 것이 복잡계의 개념과 이론이다.
1장 복잡한 세상으로의 초대
다이내믹한 현상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이동전화, 초고속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통신망의 발달은 세계를 한층 역동적으로 바꿔놓았다.
과거의 대중은 현실의 광장에 모여 얼굴을 맞대고 토론하며 여론을 모았지만, 이제는 닉네임만을
드러낸 존재들이 가상공간을 자유롭게 들락거리며 여론을 만들어 낸다. 기존의 물리학적인 한계를
뛰어넘어 연결되었지만 순식간에 이합집산하는 개인들이 창조해내는 놀라운 변화는 통제도, 예측도
불가능하다.
다이내믹스(dynamics)는 이런 다양한 변화를 기술하기 위한 이론체계이다. 가을바람에 무심히
떨어지는 낙엽에서 거대한 경기순환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세상의 변화를 기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물리학과 같은 자연과학은 물론 정치학, 사회학, 경제학 등의 사회과학 각
분야까지 다이내믹스라는 이름 아래 변화에 대한 해답을 갈구해왔다.
그 결과 다이내믹스는 자연과학과 공학 분야에서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21세기는 우주시대라는 장밋빛 전망이 팽배했다. 지구 궤도의 우주정거장과 달의 우주기지로
휴가를 가는 시대가 오리라는 예측의 이면에는 다이내믹스의 이해를 바탕으로 한 과학기술의
발달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다. 2005년 7월, ‘딤 임펙트(Deep Impact)'라는 이름의 우주관측선을
시속 10만Km가 넘는 속도로 움직이던 템플1 혜성에 정확하게 명중시킬 정도로 천체의 다이내
믹스는 잘 밝혀져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점점 예측이 어려워지는 이유는 자연과 사회․경제 분야의 현상들이 갈수록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복잡함의 기원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현상에 관여하는 개체의 종류와 수가 많다는 점이다. 소득수준이 낮았던 과거 경제성장기와
비교할 때, 오늘날 한국시장은 훨씬 복잡한 모습을 보여준다. 구매력 향상과 함께 소비자의 다양한
욕구가 표출되고 있으며, 소득․연령․학력․지역 등에 대한 다양한 소비자군(consumer group)이
분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과거의 공급자는 획일화된 소비성향에 맞추어 가격경쟁만 하면 되었지만,
오늘날의 공급자는 어떤 소비자의 기호에 맞는 제품을 공급하느냐를 결정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
여야 한다. 다양한 고객들의 기호를 맞추지 못한 기업들은 줄줄이 쇠퇴의 길로 들어서세 마련이다.
둘째, 현상에 관여하는 개체들 각각의 행동을 지배하는 법칙을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회․
경제현상에서 개체는 인간이다. 인간 개개인의 행동의 다이내믹스에는 만유인력의 법칙과 같은
일률적이고 명쾌한 법칙이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게다가 사회분위기가 자유로워지고 소득수준이
높아지면서 사회구성원들이 분출해내는 기호와 욕구, 소비성향은 더욱더 다양해지고 빠르게 변화
하고 있다.
셋째, 현상에 관여하는 개체들이 서로 다양한 영향을 주고받으며 적응해 나간다는 점이다.
모든 개체들을 똑같이 생각하는 결정론적 세계관과 모든 개체들이 무작위적으로 운동한다고 생각하는 확률론적 세계관으로는 복잡한 세상에서 질서를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복잡계에서는 다양한 구성요소들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다이내믹한 현상이 나타나며, 복잡함 속에 질서가 존재한다.
복잡한 현상을 가로지르는 거시적 질서
복잡계에서 관찰되는 대표적인 질서현상으로는 자연계뿐만 아니라 사회계에서도 다양하게 나타나는 거듭제곱법칙(power law)을 생각해볼 수 있다.
거듭제곱법칙 : x, y의 두 양이
의 관계로 주어지면 거듭제곱법칙의 관계라고 한다. 이때 k를 거듭제곱지수라고 한다. 거듭제곱법칙의 관계를 갖는 변수의 그래프를 로그-로그 좌표에서 그리면 직선으로 나타난다.
거듭제곱법칙은 구텐베르크 -리히터의 법칙에서 연간지진발생도와 지진 에너지의 크기 그래프에서 면화의 가격변동 분포, 전쟁강도에 따른 전쟁 빈도 그래프 등에서 발견할 수 있다.
복잡계와 복잡성이란 무엇인가?
복잡계는 우선 수많은 구성요소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 구성요소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다양한 상호작용(interaction)을 주고받는다. 그 결과 구성요소를 따로따로 놓고 봤을 때의 특성과는 사뭇 다른 거시적인 새로운 현상과 질서가 나타난다. 이 새로운 질서의 출현을 ‘창발(emergence)'이라고 하며, 이로 인해 나타나는 질서적인 현상을 ‘창발현상(emergent behavior)'이라고 한다. 거듭제곱법칙으로 드러나는 통계적인 질서도 이에 포함된다.
복잡한 것은 단순히 뒤엉켜 있는 것과 다르다고 이야기했다. 이것은 창발의 여부를 가지고 명확하게 구분된다. 많은 구성요소를 가지고 있다 해도 거시적인 새로운 질서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것은 뒤엉킨 시스템에 불과하다. 창발이 일어날 때 비로소 ‘복잡계(complex system)'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창발현상은 전체적인 의도를 가지고 세세하게 조직된 현상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거듭제곱법칙을 나타내는 수많은 현상은 시스템 전체를 관장하는 중앙권력이나 초자연적인 존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복잡계는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창발현상을 보이는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복잡계의 개념과 이론은 학문의 다양한 분야에서 함께 발전해 왔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통일된 정의는 없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복잡계로서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복잡계는 상호작용하는 많은 구성요소를 가지고 있다. 인체나 기업을 예로 들 수 있다. 둘째, 복잡계의 구성요소들의 상호작용은 비선형적(nonlinear)1)이다. 상호작용의 비선형성은 혼돈과 관계된 놀라운 변화를 일으킨다. 극히 작은 요동도 구성요소들 사이를 전파해나가며 증폭되어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독감이나 컴퓨터 바이러스의 전파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셋째, 복잡계 구성요소들의 상호작용은 흔히 되먹임 고리(feedback loop)를 형성한다. 구성요소들 사이의 상호작용은 한쪽 방향으로만 이뤄지지 않고 다양한 경로를 거쳐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이 되먹임은 변화를 진정시키기도 하지만(음의 되먹임)2), 거꾸로 변화를 증폭시키기도 한다(양의 되먹임)3). 넷째, 복잡계는 열린 시스템(open system)이며, 그 경계가 불분명하다. 시스템이 열려 있다는 이야기는 외부환경과 차단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는 다는 것이다. 이 영향은 추상적인 에너지와 정보, 무형자산 같은 것일 수 도 있고, 구체적인 물질과 사람, 유형자산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이 때문에 복잡계는 그 경계가 종종 불분명하며 자연적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의 의도에 따라 달라진다. 다섯째, 복잡계의 구성요소는 또 다른 복잡계이며 종종 끊임없이 적응해나간다. 시장을 구성하는 기업, 그 다시 기업을 구성하는 부서, 부서를 구성하는 인간, 인간을 구성하는 세포는 모두 하나의 복잡계이다. 이들은 서로 다양한 영향을 주는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환경을 변화시키며 끊임없이 적응해 나간다. 사회․경제계에서 흔히 관찰되는, 적응하는 구성요소들로 이루어진 복잡계를 특히 복잡적응계(CAS, complex adaptive system)라고 한다. 복잡계는 위와 같은 특징을 지님으로써 창발현상을 보이는 시스템이라고 정리 할 수 있다.
복잡성은 다분히 추상적인 ‘정보의 양’의 많고 적음에 대한 성질이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이 복잡성의 정도를 재는 척도를 복잡도(complexity measure)라고 한다. 복잡성에는 주요한 특징이 있다. 똑같은 대상에 대해 이야기 하더라도 이를 바라보는 축적(scale)에 따라 복잡성의 정도가 달라진다는 점이다. 복잡성은 축적의 증가에 반비례하며 축적의 증가에 따른 복잡성의 감소는 질서를 출현한다. 여기서 질서의 출현을 창발이라고 일컫는다.
2장 복잡계 이론의 배경
복잡계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분야에서 어떻게 복잡성을 인식해왔으며, 이를 과학적 체계로 끌어들이기 위해 어떠한 노력이 이뤄져 왔는지 그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닌다. 복잡계 이론은 물리학, 화학, 생물학, 생태학, 사회학, 경제학 등 다양한 학문의 조류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이들은 아래 그림과 같이 다양한 계층 구조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인간은 다양한 계층구조를 하나하나 밝혀가며 호기심의 대상을 점점 넓혀왔으며, 복잡한 현상을 단순화하여 공통된 특징을 찾아내고 법칙으로 정식화하면서 서양 근대과학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환원주의 과학방법론의 정립
근대 서구의 과학철학을 꿰뚫는 유명한 명제가 있다. 바로 “본질은 필요이상으로 부풀려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14세기 영국의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도사였던 오컴 지방의 윌리엄(William of Ockham)이 남긴 말로서, ‘오컴의 면도날(Occam's razor)이라고 불린다. 여러 가지 다양한 변종이 있는 이 명제는 현상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가장 간명한 이론이 가장 바람직한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즉 “단순한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그의 시대에는 과학이 하나의 학문으로서 정립되어 있지 않았지만, 신이 창조한 세계에는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오묘한 질서가 숨어 있다는 믿음이 확고했다. 그러한 신의 뜻을 헤아려가는 인간에게 이 ’오컴의 면도날‘은 하나의 명쾌한 지침으로서 계승 되었으며, 곧 인과적 결정론(causal determinism)4)과 방법론적 환원주의(methodological reductionism)의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프롤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은 당시까지 알려진 여러 천문현상을 아주 정교하게 기술 했고, 설명의 정밀도 또한 매우 높은 이론이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제시한 지동설은 예측의 정밀도 면에서는 천동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지동설은 바로 ‘간단한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었다. 천동설은 당시 속속 드러나던 새로운 관측사실들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개의 주전원(epicycle)을 도입해서 매우 복잡했다. 반면에 지동설은 천구의 중심에 태양이 놓여 있다는 꺼침칙한 사실을 받아 들인다면 모든 천체는 훨씬 적은 수의 원운동만으로도 그럴듯한 설명이 가능했다. 코페르니쿠스에 이론에 사람들이 호응할 수 있었던 점은 바로 이러한 간명한 질서에 대한 믿음이었다.
이전까지의 경험법칙을 통한 미래의 탐구가 예언의 성격이 강했다면, 지동설의 뉴턴의 성공은 서양철학에서 갈구해온 질서의 탐구와 이에 근거한 예측의 희망을 열어주었다. 이는 곧 인과적 결정론의 사조를 낳게 되었다. 인과적 결정론에 의하면 모든 자연현상의 원인을 거슬러 추적하면 일체의 초자연적 영향을 배제한 만물의 이론에 도달하게 된다.
18세기 들어 뉴턴 역학은 영국을 벗어나 전 유럽으로 확산되며 커다란 발전을 이뤘으며, 그 정점에는 프랑스의 라플라스(P. S. laplace)가 있었다. 그는 인과적 결정론의 열렬한 신봉자로서 사회현상을 포괄하는 모든 자연현상은 수학으로 기술되는 인과론적 원리에 의해 완벽하게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세기 중반까지 라플라스의 영향은 실로 엄청났다. 이 시기를 거치며 뉴턴 역학은 대단히 정교한 형식체계를 갖추게 되었으며, 경험에 입각한 실험과학의 영역에 머물러 있던 광학, 열역학, 전자기학에도 수학적 방법론이 깊이 침투하여 진정한 의미의 이론물리학 출현에 큰 밑바탕이 되었다.
자연과학의 발전은 생명현상에 대해 이해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기계론을 중심으로 한 데카르트의 인체론은 공허했으나 핏줄에 대한 시각은 비교적 정확하였다. 혈액이 심장에 소화된 영양분을 전달해준다는 관찰은 하비의 혈액순환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생리학 분야의 혁명이었다. 하비 자신은 기계론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생명현상에 대한 기계론적 사고를 확대시키는 전기를 마련했다.
18세기 이르자 기계론은 유물론과 결합하여 더욱 심화되었고 화학의 발전과 함께 현미경이 발명되자 환원론적 사고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기 시작했다. 자연현상을 물리학과 수학으로 환원하여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명현상도 화학으로 환원하여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어졌다.
전일주의 과학방법론의 등장
엔트로피를 이용하여 열역학 제 2법칙5)을 재정의하면, 모든 시스템은 외부와 고립되었을 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엔트로피(무질서의 정도)가 증가한다. 그리고 모든 에너지는 열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지만, 그 역은 불가능하다(비가역이다). 시간에 따라 변화가 한 방향으로만 진행되므로 엔트로피는 당연히 증가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원래 뉴턴 역학은 시간에 대해 특별한 방향성이 없다. 미시적인 개개 분자를 다룰 때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비가역성이 거시적인 열현상에서, 그리고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는 관찰이 되고 있다.
뉴턴역학에서 예상할 수 없었던 비가역성과 시간의 화살 문제를 통해, 개개 입자의 차원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던 특징이 수많은 입자들이 얽히면서 거시적으로 나타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진화에 대한 인식은 환원주의적 사고방식에 일침을 가하였다. 생물을 물리법칙이 지배하는 기계로 파악하는 관점으로 만으로는 열역학 제 2법칙과는 확연히 다른 진화의 문제에 접근할 수 없었다. 생물 외부환경의 영향이 생존과 변이에 궁극적인 영향을 끼치므로, 미시적인 세부기능의 탐구만으로는 생명현상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는 한계가 드러난 셈이었다.
그래서 독일의 생물학자 헤켈(E. H. Haeckel)은 독일에 진화론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생태학(Okologie)'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의 이름을 만들어낸다. 이 이름은 그리스어 ‘오이쿠(가족)’에서 따온 것으로, 말 그대로 ‘자연이라는 가족 구성원들의 관계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을 의미했다. 각 생물집단은 더 이상 고립된 존재가 아니었으며, 이들 사이의 관계, 즉 생물들 사이의 네트워크가 중요한 연구대상으로 부상했다.
1930년 피셔(R. A. Fisher)는 다윈의 진화론을 게임 이론과 결합시켜서 진화적 게임이론이라는 새로운 조류를 만들어 내며 개체들의 상호작용을 이해하는 지평을 열었다. 진화적 게임이론은 수학적 게임이론과 생물학의 만남을 통해 태동되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생물 종의 협력과 진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경제계의 협력과 진화를 설명하는 도구로 확장되었다. 진화적 게임 이론에서 다루는 진화는 종의 진화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으며, 바로 시간의 흐름에 따른 믿음, 표준, 규범, 습관 등의 변화와 같은 문화적 진화로 확장 가능하다. 진화적 게임이론은 다이내믹스를 다루는 분야이다. 기존의 게임 이론이 정적이라면 진화적 게임이론은 동적이다. 이는 액설로드(R. Axerlod)가 제안한 죄수의 딜레마(IPD) 사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반복적 죄수의 딜레마 게임은 행위자 기반 모형과 접목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복잡계의 미시적 메커니즘을 밝히는 데 영향을 주었다.
현대 복잡계 이론의 문턱
19~20세기 초에 걸쳐 축적된 자연현상과 생명현상의 탐구로 데카르트로부터 이어진 기계론적 사고방식에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구성요소들 각각의 기능 못지않게 이들 사이의 연결망이 매우 중요했으므로 더욱더 미세한 부분에 집착하지 않고 전체를 조망하는 안목이 필요해졌다. 이러한 인식이 하나의 이론체계로 발전하며 마침내 시스템 이론(system theory, systemics)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시스템 이론에서 이야기하는 시스템은 “상호작용 하는 개체 또는 개체군으로 이루어진 총체”를 의미한다.
시스템이론은 다양한 방향으로 가지를 뻗게 된다. 중요한 흐름의 하나는 자연과학 및 공학분야에서 196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4C"이론의 등장이었다. “4C"이론이란 1950~1960년대 유행한 사이버네틱스(cybermetics), 1970년대에 유행한 파국이론(catastrophetheory), 1980년대 유행한 혼돈 이론(chaos theory)을 거쳐 1990년대 이 후 유행한 복잡계 이론(complex systems theory)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이야기 한다.
한편 사회학 분야에서 자리 잡은 사회학적 체계이론(sociological systems theory)이 있다. 이것은 독일의 사회학자 루만(N. Luhmann)이 개척한 분야로, 사회 내의 소통구조에 주목하여 각종 제도와 조직의 구성과 진화를 설명했다. 또한 경영학의 조직 이론에서 시스템이론의 개념을 수용하여, 조직을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다이내믹한 유기체로 보는 관점이 발달해왔으며, 이는 시스템 사고(system thinking)라는 사조로 이어졌다.
사이버네틱스라는 용어는 ‘키잡이’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kybernetes'에서 유래했는데, 살아 있는 생물체나 복잡한 기계에서 보이는 자가규제시스템(self-regulating system)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 분야를 지칭한다. 사이버네틱스의 개념은 생명현상의 이해와도 결합하여 복잡계로 가는 중요한 기교가 만들어진다. 영국의 정신과 의사였던 애슈비는 사이버네틱스를 신경계 모형에 접목, 발전시켰다. 그는 뇌를 수많은 신경이 복잡한 그물망을 이루며 전기신호를 전달하는 회로와 같이 모형화했다. 또한 인지, 사고, 기억 등의 두뇌활동은 신경들이 다양한 되먹임 고리를 이루면서 주고받는 영향의 결과로 설명했다.
사이버네틱스가 공학 분야에서 시작된데 비해 파국이론은 추상화된 수학 분야에서 제기되었다. 프랑스의 수학자 톰(R. Thom)이 1960년대부터 진행해온 연구를 정리하여 1972년에 <구조적 안정성과 형태 발생>이라는 책을 냄으로써 파국 이론은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이것은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관찰되는 급격한 변화를 어떠한 안정상태들 사이의 급격한 전이로 바라보고, 이를 수학적으로 뒷받침하는 이론이다.
파국이론은 그동안 정성적인 분석에만 그치던 단절적인 변화를 수학적으로 설명함으로써 1970~1980년대 걸쳐 많은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파국 이론은 이러한 변화들이 항상 안정된 평형상태를 따라 나아간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1980년대에 혼돈 이론이 등장하면서 우리는 안정된 평형상태로 가지 않고서도 기이한 끌개를 형성하거나 발산해버리는 등 훨씬 다양한 다이내믹스를 가지는 상황이 도처에 존재함을 알게 되었다. 파국 이론으로는 이들을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인기는 점차 시들었고, 혼돈 이론과 복잡계 이론에 단절적 변화의 이슈를 넘겨주게 된다
[출처] 11월 30일 발제문, <복잡계 개론>, 1~2장 (한국대안교회연구소) | 작성자 마루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