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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마음 속의 교묘한 죄
프롤로그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요 8:7). 누구라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이 유명한 구절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죄인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가슴 한가운데를 찌르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이 같은 표현은 이제 우리 문화에서 하나의 관용구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비슷한 의미로 "너희가 심판받지 않으려거든 심판하지 말라"는 말씀도 있다(마 7:1).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죄에 대해 다루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죄란 우리 시대 문화의 자명한 죄가 아니라 이 책의 주독자층인 크리스천들의 교묘한 죄다. 나 역시도 여기서 언급하는 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탓에 우리가 알게 모르게 짓는 이러한 죄의 실례로 나 자신의 서글픈 경험을 인용하기도 했다.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내 안에서 어떤 자각이 점점 커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흔히 보수 복음주의자라고 불리는 크리스천들이 사회 표면 위로 극명하게 드러나는 보다 큰 죄악들에만 깊이 신경쓰느라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세련된' 혹은 '교묘한' 죄에 대해 심각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스스로 깨닫고 돌이키기가 쉽지 않은 '점잖은' 죄에 대해 이야기하겠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책이 우리에게 희망을 보여주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희망이 보이지않을 정도로 죄에 파묻혀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이미 복음을 통해 우리의 죄책과 우리를 지배하는 죄의 세력을 해결해 주셨으므로 우리는 그 복음을 믿어야 한다.
복음은 오로지 죄인들만을, 복음의 필요성을 깨닫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다. 크리스천들 가운데는 복음을 불신자들만을 위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일단 예수님을 믿으면 더 이상 복음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복음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로 단지 구원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하루하루 삶 속에서 끊임없이 활동하는 죄를 처리할 수 있는 힘을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복음이 필요하다.
생활 속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모든 교묘한 죄들을 다 다룰 수는 없었지만, 동역하는 많은 친구들이 내가 작성한 기나긴 죄의 목록을 검토한 뒤 그 가운데 좀더 일반적인 것들만 추려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유익한 제안으로 도움을 준 친구들에게 깊은 감사를 표한다.
또 다른 세 분에게도 특별한 감사를 드리고 싶다. 이 책의 편집인이자 개인적으로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돈 심슨이 아주 큰 도움을 주었다. 다른 저서에서도 함께 일한 적이 있는 밥 베빙튼 박사는 원고를 읽고 유익한 제안을 해주었으며, 제시 뉴턴 부인은 원고를 컴퓨터에 입력해주는 일을 맡아주었다. 마지막으로, 기도로 이 프로젝트를 후원해준 여러 이름 모를 분들이 있다. 그분들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이제부터 영원히 영광을 돌려드린다.
평범한 성도 - 하나님께 구별된 사람
성경에 '성도답지 않은 행동'을 나타내는 단어 하나가 있다. 바로 '죄'다.
누가 성도인가?
고린도 교회는 신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교인들은 교만하고 까다롭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들은 심각한 부도덕 행위를 묵인했으며, 서로 법정 다툼을 일삼았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업신여겼고, 주의 만찬을 욕보였으며, 영적 은사의 목적을 오해했다. 그리고 장차 있을 신자의 부활에 대해서도 혼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지만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들을 '성도들'(고후 1:1), 또는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불렀다(고전 1:2).
사람들 사이에 통용되는 단어의 의미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주 변한다. 성도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요즘 같으면 고린도 교인들처럼 행실이 엉망인 사람들을 성도로 여길 수는 없을 것이다. 세속적이고, 육적이고, 성숙치 못한 사람들이라고는 할 수 있어도 분명 성도라고는 부를 수 없다. 로마 카톨릭의 전통에서는 생전의 성품이 보기 드물게 훌륭하고 업적이 뛰어난 크리스천들에게 사후에 '성인 자격'을 부여했다. 이 글을 쓰기 몇 달 전, 전세계적으로 칭송받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세상을 떠났는데, 대중들 사이에서는 벌써 그를 성인으로 시성해야 한다는 정서가 널리 확산되고 있다.
교회사의 흐름을 보면, 바울을 포함해 초기 사도들은 대개 다 성인으로 불렸던 것이 분명하다. 예를 들어 내 할아버지가 다니시던 교회는 성(St.) 바울 감리교회였다. 예전에 살던 도시에는 성 요한 침례교회가 있었고, 장로교회 목사인 내 친구는 지금 성 안드레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전에 나는 영국 국교회인 성 도마 교회에서 설교한 적도 있다. 심지어 나중에 유다를 대신해 사도로 뽑힌 맛디아도 호주 시드니에 있는 성 맛디아 교회로 한 몫 낀다. 물론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바티칸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이다.
오늘날에는 로마 카톨릭과 정교회를 제외하면 '성인'이라는 말이 거의 쓰이지 않는다. 쓰인다 해도 대개는 나이가 지긋하고 성품이 대단히 경건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 성인이 있다면 우리 할머니가 바로 성인일 겁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기도와 성경 읽기를 하루도 거르지 않으며 선한 행실로 사람들 사이에 칭찬이 자자한, 친절하고 자애로운 한 여성의 이미지가 퍼뜩 떠오른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어떻게 그 엉망진창인 고린도 교회 신자들을 성도라고 부를 수 있었을까? 사실 바울은 상대를 이런 식으로 부르기를 좋아했던 것 같다. 그는 다른 몇몇 서신에서도 이 같은 호칭을 쓰고 있고, 신자들을 성도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았다(롬 1:7, 롬 16:15, 고전 1:2, 고후 1:1, 엡 1:1, 빌 1:1, 빌 4:21-22, 골 1:2).
바울은 어떻게 평범한 신자들, 심지어 문제투성이인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성도라고 부를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은 성경에서 이 단어가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성도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하기오스'(hagios)다. 이 단어는 사람의 성품이 아니라 존재 상태를 뜻하는 말이며, 그 문자적 의미는 '하나님께 구별된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신자는 다 성도인 것이다. 가장 평범하고 지극히 성숙치 못한 신자일지라도 말이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게 돼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을 향해 말한다(고전 1:2). 바울이 '거룩하게 된다'는 말을 사용한 것에 우리는 또 한 번 놀랄 수도 있다. 우리는 흔히 이 단어를 거룩한 삶과 연관지어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룩하게 된다'(sanctified)는 말과 '성도'(saint)라는 말 모두 똑같은 헬라어 어군에서 나온 말이다. 성도란 간단히 말해 거룩하게 된 사람이다. 바울의 말을 문자적 의미 그대로 옮겨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구별되어, 구별된 사람들로 부름받은 이들"에게 편지를 쓴다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 구별된 것일까? 좀더 자세하게 묻는다면, 누구를 위해 구별된 것일까? 대답은 '하나님을 위해서'다. 모든 참된 신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위해 구별하신, 혹은 따로 떼어놓으신 이들이다.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자기를 내주사 우리를 모든 불법에서 구속하시고 정결하게 하셔서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신 분'으로 묘사했다(딛 2:14). 그리고 고린도전서 6장 19-20절에서는 "여러분은 자신의 몸이 자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까?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여러분을 사셨습니다"라고 말한다. 이 두 군데 말씀을 보면 성경에서 성도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쓰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성도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로 값주고 사서 자신에게로 구별하여 자기 백성이 되게 하신 사람이다.
'구별된다', '따로 놓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우리집 근처에 있는 미 공군 사관학교에서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사관학교 1학년 생도들의 생활은 일반 대학교 신입생들과는 아주 다르다. 버스에서 내려 사관학교 운동장에 첫발을 딛는 순간부터 일 년 내내 그들은 매우 엄격한 훈련을 받게 된다. 태평스럽게 살아온 미국인 청소년들을 장차 장교가 될, 규율 바른 사관생도로 변모시키기 위한 훈련이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이 규율이 조금씩 느슨해지기는 해도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는다. 4학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과중한 학업에 시달려야 하며 행동상 요구사항 또한 적지 않다.
사관학교와 일반 대학교는 왜 이렇게 다른가? 공군 사관학교 남녀 생도는 공군 장교가 되기 위해 실제적 의미에서 미 정부에 의해 '따로 구별'된다. 미 정부가 생도 한 명을 4년 동안 교육시키고 훈련시키는 데는 30만 달러가 넘는 돈이 든다. 사관학교는 교사나 월스트리트 은행가가 되려는 젊은이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공군 사관학교는 한 가지 목적, 즉 미 공군 장교가 될 사람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사관생도들은 그 목적을 위해 '따로 구별'된다.
공군 사관학교에 입학하는 젊은이들과 비슷하게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따로 떼어놓으시고, 하나님께 구별되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모된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신자는 다 성도다. 하나님께서 죄 많은 옛 생활에서 따로 떼어놓으시고 구별하셔서, 그 삶이 변모됨에 따라 점점 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 말이다.
"성도답게 행동하십시오!"
성경적 의미에서 볼 때 '성도됨'이란 얼마나 큰 업적을 남기고 얼마나 훌륭한 성품을 지녔느냐가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존재 상태에 있느냐를 말한다. 즉, 성령의 역사에 의해 완전히 새로운 삶의 상황에 있게 되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이것을 일컬어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며(행 26:18),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내셔서 그분이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시는 것"이라고 했다(골 1:13).
우리는 우리 행위로 성도가 되는 게 아니다. 오직 성령의 초자연적이며 직접적인 역사에 의해 성도가 된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이런 깊은 변화를 일으키셔서 우리가 실제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신다(고후 5:17). 존재 상태의 이 변화는 에스겔서 36장 26절에 예언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로운 영을 줄 것이다. 내가 너희 육신으로부터 돌과 같이 굳은 마음(하나님의 은혜에 아무 반응이 없는 죽은 마음)을 없애고 너희에게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은혜에 반응을 보이는 살아 있는 마음)을 줄 것이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위에서 살펴본 에스겔서 말씀의 맨 마지막 문장을 보면, 성도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솔직하게 말해서 우리는 잠자는 시간 빼고는 거의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생각이나 말로나 행동으로 죄를 짓는다. 스스로 최선이라고 행한 행동조차도 불순한 동기로 얼룩져 있을 때가 허다하며 그 행위 자체도 불완전하기 짝이 없다. 우리 중에 누가 "나는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엉망진창이었던 고린도 교회는 성도들도 태도와 행동에서 수없이 많은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물 제 1호다.
왜 그런가? 하나님의 약속은 그게 아닌 것 같은데, 우리 일상생활의 현실은 왜 이 모양인가? 그 답은 갈라디아서 5장 17절과 같은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욕망은 육체를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상반되기 때문에 여러분이 원하는 것들을 할 수 없게 합니다."
이 말씀은 육체와 성령 간의 게릴라전에 대해 설명한다. 그리고 이 싸움은 모든 크리스천들의 마음에서 날마다 벌어지고 있다. 그런 까닭에 베드로는 영혼을 대적해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멀리할 것을 권면한다(벧전 2:11). 고린도후서 5장 17절과 에스겔서 36장 26절은 모든 새신자들의 마음에서 반드시 일어나는 결정적 변화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그 변화의 역사는 즉각적이고 절대적인 게 아니다. 이 변화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며, 이생에서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자신이 저지르는 죄에 대한 변명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삶으로 부름받은 성도들이라는 사실을 늘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첫 번째 편지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게 돼(하나님에 의해 구별되어) 성도(구별된 자들)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호칭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고나서 그는 성도답게 행동할 것을 편지를 끝마칠 때까지 강력하게 권면한다. 어떤 의미에서 바울의 편지는 이 말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여러분은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성도들답게 행동하십시오!"
즉, 존재 상태에 걸맞게 처신하라는 것이다. '성도'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우리의 새로운 존재 상태를 설명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일상생활에서 성도답게 살아야 할 책임의 개념이 담겨 있다.
50여 년 전 미 해군 장교로 복무했던 시절, 우리가 지켜야 할 규율 가운데는 '장교답지 못한 행위'라는 표현이 있었다. 한 번의 질책으로 끝나는 사소한 잘못에서부터 군법회의에 회부되어야 할 중대한 범죄에 이르기까지 장교답지 못한 행위는 다양했다. 하지만 이 말은 단순히 정도에서 벗어난 행동만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그 행실이 우리가 흔히 장교에게 기대하는 행동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장교답지 못한 장교란, 장교가 마땅히 이행해야 할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사람을 말한다.
크리스천에게도 이와 비슷한 표현을 쓸 수 있다. '성도답지 못한 행위'라고 말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그 즉시 행동을 중지해야 하지 않겠는가? 남의 험담을 하거나 참을성 없이 행동하거나 화가 날 때, 우리는 그것이 성도답지 못한 행동이라는 사실을 떠올려야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우리는 고린도 교인들처럼 행동하고 있다. 부르심과 일치하지 않는 삶이다.
성경에 성도답지 않은 행동을 나타내는 단어 하나가 있다. 바로 '죄'다. '장교답지 않은 행도'이 이런 저런 불량한 행위를 폭넓게 아우르는 것처럼, '죄'라는 말도 나쁜 짓을 널리 포괄하는 말이다. 험담에서부터 간음에 이르기까지, 참을성 없는 것에서부터 살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다 죄다. 물론 죄에도 심각성의 차이는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따져볼 때 큰 죄든 작은 죄든, 죄는 죄일 뿐이다. 죄는 성도답지 못한 행동이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성도로 생각하지도 않을 뿐더러 험담하는 것이나 참을성 없는 것을 죄로 여기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스스로 성도로 여기지 않으므로 이 새로운 존재 상태에 성도답게 살아야 할 책임이 수반된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이다. 죄는 크리스천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다. 세상 사람들의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행동에서는 죄를 금방 알아보지만, 소위 '성도의 용인할만한 죄'에 대해서는 너무도 무감하다. 그 결과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자기 죄를 부인하며 살아간다.
죄가 사라지다 - 죄의 개념조차 없는 시대
하나님은 이런 죄는 되고 저런 죄는 안 된다는 기준을 주신 적이 없다. 모든 죄는 다 불법이다.
울타리 밖에만 존재하는 죄
정신과 의사 칼 메닝거는 1973년에 펴낸 저서 『죄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Whatever Became of Sin』에서 이렇게 말했다.
'죄'라는 바로 그 단어, 지금은 사라져버린 듯한 이 단어는 한때 당당한 말이 었다. 그 의미는 분명 강하게 다가왔으며 불길하고 심각했다… 하지만 이제 아니다. 단어 자체는 물론 그 개념까지도 거의 사라져버렸다. 이유가 무엇인 가? 이제는 누구도 죄를 짓지 않기 때문인가? 아니면 누구도 죄를 믿지 않기 때문인가?
자신이 말하는 바에 힘을 싣기 위해 메닝거 박사가 특별히 주목하는 사실이 있다. 해마다 발표되는 미국의 전국 기도의 날 기념 대통령 선언문에서 '죄'라는 말이 언급된 것은 1953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선언문이 마지막이라는 것이다. 그것조차도1863년 에이브러험 링컨 대통령이 전국민에게 기도를 요청한 말에서 인용한 것이었다. 메닝거 박사가 주목하고 있다시피,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우리는 한 이십 년 전쯤에 '죄짓기'를 공식적으로 끝냈다."
이는 칼 메닝거만의 생각이 아니다. 작가 피터 반즈는 "뭐라고! 내가 죄인이라고?"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썼다.
20세기 영국에서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만난 장벽은, 독자들 의 마음에 죄에 대한 개념이 거의 완전히 부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2001 년, 신약학자 D. A. 카슨은 대학에서 복음을 전할 때 가장 기운빠지는 일은 학생들이 전반적으로 죄에 대한 개념이 없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학생들 은 죄짓는 법은 잘 알고 있지만, 무엇이 죄인지는 전혀 모르고 있다."
몇몇 사람들만 유별나게 이런 평가를 하는 게 아니다. 다른 많은 이들의 말을 들어봐도 그 생각이 틀리지 않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우리 문화에서 죄라는 개념은 사실상 통째로 사라졌다.
불행히도 죄의 개념은 교회에서조차 사라져가고 있다. 사회학자 마샤 위튼은 침례교와 장로교 목회자들의 탕자 비유(눅15:11-32) 설교 47편을 분석했는데, 이후 자신의 저서 『모두가 사함받다 All is Forgiven』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설교들에서 죄의 개념은 어떻게 된 것인가? 놀라지 말라. 죄의 개념을 설명하기 힘들어서 쩔쩔매는 목회자들이 많다… 이들의 설교를 면밀히 검토해 보면 죄의 개념이 여러 면에서 세상의 감수성에 맞게 조절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통적인 죄의 개념이 담겨 있는 설교라 할지라도 그 용어는 청중들 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최대한 순화되는 경우가 많다.
위튼은 목회자들이 죄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이런 상황에서, 죄에 관한 이야기는 인간 본성의 타락을 신학적으로 통찰할 수 있도록 분명한 설명을 해주기보다는 단순히 신자와 불신자를 구분하는 맹목적인 경계를 긋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죄의 개념은 우리 문화 전반에서 사실상 사라졌으며, 교회에서조차 현대인들의 감수성에 맞게 그 개념이 순화되었다. 실제로, 죄에 해당하는 성경 용어들은 우리가 쓰는 어휘에서 삭제되었다. 이 시대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간음이란 게 없다. 대신 정사가 있을 뿐이다. 기업체 간부들은 절대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 다만 사기 행위를 할 뿐이다.
한편, 우리가 속해 있는 보수 복음주의 교회의 형편은 어떠한가? 우리에게도 죄의 개념이 다 사라졌는가? 아니다. 사라지지는 않았다. 다만 교회 울타리 밖에 있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낙태와 동성애, 살인, 기업체 고위 간부들의 화이트 컬러 범죄만을 죄로 여길 뿐이다. 그런 명백한 죄에 대해서는 쉽게 정죄를 하면서 남을 험담하거나 시기하고, 누구에겐가 원한을 품으며, 교만하고 정욕에 끌리는 우리 자신의 죄, 그리고 바울이 성령의 열매라고 일컬은 자질들(갈 5:22-23)이 부족한 것 등은 사실상 무시해버린다.
어떤 목사님이 교인들과 함께 기도 모임을 가졌다. 그런데 교인들은 목사님의 바람처럼 교회의 영적 필요에 대해 기도하는 게 아니라 하나같이 이 시대 문화의 죄악들, 주로 낙태와 동성애 등에 대해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닌가. 교인들의 독선에 당황한 목사님은 결국 그 유명한 세리의 기도로 기도 모임을 마쳤다.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눅 18:13).
이 교인들의 기도에 드러난 그대로다. 이것이 우리 보수 복음주의에 만연한 죄에 대한 태도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도 많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우리는 성도들의 죄보다는 사회의 죄에 더 관심이 많은 듯 하다. 실제로 우리는 아무 생각없이 소위'보기 흉하지 않은' 죄 혹은 '용인할 만한' 죄에 빠져드는 경우가 많다. 형제자매에 대해 험담을 하고 불친절한 말을 내뱉을 때, 우리는 스스로 지금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다는 아무런 의식도 없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용서해주려는 노력은 하지 않은 채 오래도록 그 상처를 마음속에 담고 살아간다. 세상의 죄인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나도 저렇게 되었을 텐데' 하는 겸손한 마음 없이 혼자 고고한 척 멸시하는 눈초리를 보낸다. 주요 교파에서 동성애자를 성직자로 안수했다는 소식에는 크게 분노한다. 물론 그런 소식에는 격노하는 게 당연하지만, 왜 우리 자신의 이기심과 비판적 태도, 참을성 없음과 분노에 대해서는 애통해하지 않는가?
그런 죄는 세상의 극악무도한 죄에 비하면 별 것 아니라고 말하면서 책임을 모면하려 하기 쉽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죄는 되고 저런 죄는 안 된다는 가치 기준을 정할 권위를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다. 그보다 하나님은 야고보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율법 전체를 지키다가 어느 하나를 범하면 율법 전체를 범하는 셈이다"(약 2:10). 우리로서는 이 말씀을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는 율법은 물론 그에 따른 처벌도 하나하나 따로 떼어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율법은 온전한 하나다. 성경은 하나님의 율법이 여러 개라도 되는 양 '율법들'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단일한 전체인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말한다. 살인을 저지른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것이다. 또한 크리스천이 그 입으로 더러운 말, 곧 다른 사람을 헐뜯는 말을 쏟아낸다면 그 사람 역시 똑같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것이다(엡 4:29).
사소한 죄는 없다
물론 다른 죄보다 상대적으로 더 심각한 죄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간음을 한 적은 없지만 정욕이 담긴 시선으로 이성을 바라본 적은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정욕이 담긴 눈길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사실상 마음속으로 간음을 한 것이라고 하셨다. 나는 살인을 하기보다는 그 사람에게 화를 내는 편을 택하겠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번에도 누구든 사람을 죽인 자와 형제에게 화를 낸 자는 심판을 받을 만하다고 하셨다(마 5:21-22). 사실을 말하자면, 모든 죄는 다 심각하다. 모든 죄는 다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죄는 곧 불법이다"라고 말했다(요일 3:4). 모든 죄, 우리가 보기에 사소해 보이는 죄일지라도 죄는 곧 불법이다. 이는 단순히 한 가지 명령을 어기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요, 자기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도덕적 뜻을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인간의 가치관이 담긴 시민법에서는, 이따금씩 교통 위반 딱지를 떼는 게 고작인 '준법 시민'과 모든 법률을 경멸하고 극도로 무시하는 '무법자' 사이에 분명한 경계를 긋는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구분을 하지 않는 듯하다. 큰 죄, 작은 죄 할 것 없이 모든 죄는 다 불법이라고 말한다.
헬라 문화에서 '죄'는 원래 '표적을 놓치다', 즉 과녁의 중심에서 벗어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죄는 무언가를 잘못 계산하는 것, 혹은 이루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지금 생각해봐도 이런 개념에는 일리가 있다. 예를 들어, 죄 많은 행실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그 과오를 극복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자꾸 실패할 경우가 있다. 과녁의 중심을 맞히고 싶어하지만, 번번이 과녁을 벗어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죄를 짓는 행동은 무언가를 성취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채우고자 하는 내적 충동에서 시작된다. 야고보가 말했듯이, "각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유혹에 빠지기 때문이다"(약 1:14). 우리가 남을 험담하거나 정욕을 품는 것은 죄짓는 가운데 거기서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 순간에는, 일시적 즐거움이 주는 유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욕구보다 더 강하다.
죄는 죄다. 삶 속에서 우리가 쉽게 묵인하는 죄도 하나님의 눈에는 심각한 죄다. 우리의 신앙적 교만, 비판적 태도, 불친절한 말, 참을성없이 쏟아내는 화, 심지어 걱정까지(빌 4:6),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심각한 죄다.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 받기를 구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구약성경 말씀을 인용했다.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항상 지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다 저주를 받는다"(갈 3:10). 이 말씀이야말로 순종의 완벽한 기준이다. 공부에 빗대어 말하자면, 기말 시험에서 99점을 받는 건 낙제점이라는 것이다. 학기말 리포트를 멋지게 작성해놓고도 콤마 하나 잘못 찍으면 F학점을 받는다는 뜻이다. 다행히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시고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그리스도를 구속자로 믿는 모든 사람들을) 구속해주셨다"고 안심시킨다(갈 3:13). 하지만 우리가 생활 속에서 묵인하는, 사소해 보이는 죄도 사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마땅한 죄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지금 우리 문화에서는 죄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지고 말았다. 교회에서조차 청중들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죄의 개념을 많이 순화시켰다. 슬픈 이야기지만, 보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죄의 개념은 우리 사회의 명백한 중대 죄악만을 가리키는 말로 본질상 재규정되었다. 그 결과, 도덕적으로 별다른 결함이 없는 크리스천들의 경우 자신이 저지르는 '사소한' 죄에 대한 자각이 그들의 의식 속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그렇지 않다. 우리가 묵인하곤 하는 이른 바 성도의 점잖은 죄든, 우리가 지체없이 정죄하곤 하는 세상의 극악무도한 죄든, 모든 죄는 다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질책을 받을 만하다. 모든 죄는 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
물론 예외적으로 경건하고 겸손한 사람들도 많다. 사실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사는 사람들은 오히려 이런 '사소한' 죄를 매우 예민하게 자각하고 괴로워한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심각한 죄에 대해서는 아주 비판적인 반면, 교만하게도 자기 자신의 죄는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 얼마나 큰 모순인가. 우리들도 그 양 극단 사이 어디쯤에서 살고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모든 죄는 하나님 보시기에 다 징계를 받을 만하고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대해서나 우리 보수 복음주의에 대해서나 내가 좀 어두운 면만 부각시켰다는 것을 인정하겠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다. 참된 신자들에게 하나님은 여전히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며, 지금도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며 회개하여 새롭게 되라고 부르고 계신다. 삶 속에서 우리가 용인하는 죄를 확인할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하셔서 회개하여 새롭게 됨을 체험하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부르심의 일부분이다. 하나님께서 그 목적을 이루는 도구로 흔쾌히 이 책을 들어 써주시기를 기도한다.
죄의 흉악성 - 우리 죄 때문에 예수님이 고통당하시다
죄는 영적·도덕적 종양이다. 그대로 두면 우리의 내면 전체로 퍼져나가 삶의 모든 영역을 감염시킨다.
죄의 본성을 직시하라
'암'이라는 말은 듣기만 해도 겁나고, 절망과 좌절감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암이 남의 집 일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1987년, 우리집에도 그 일이 닥쳤다. 아내가 비호지킨 임파종 진단을 받은 것이다. 그때 내가 보인 첫 반응은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며 현실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났고, 아내는 일 년 남짓 후 병세가 악화되어 힘겨운 모습으로 세상을 떠났다.
암은 악성 종양이라고도 한다. 의학적으로 '악성'이라는 말은 무한히 자라날 가능성이 있는 종양, 처음에는 인접한 세포로 퍼졌다가 곧 전신의 다른 부분으로 전이되는 종양을 뜻한다. 악성 종양은 그냥 두면 온몸으로 침투하여 전이되는 경향이 있어서, 결국에는 죽음을 초래한다. 이러니 '암'이나 '악성'이라는 말을 들으면 겁이 날 만도 하다.
죄는 영적·도덕적 악성 종양이다. 제재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 우리의 내면 전체로 퍼져나가 삶의 모든 영역을 감염시킨다. 더 심각한 경우, 주변에 있는 다른 신자들에게까지 '전이'될 수도 있다. 사람은 영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고립되어 살 수 없다. 우리의 말과 태도, 행동, 심지어 마음속 생각까지도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바울은 바로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더러운 말은 어떠한 것도 여러분의 입 밖에 내지 말고 오직 성도를 세워주는데 필요한 대로 선한 말을 해서 듣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도록 하십시오"(엡 4:29).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이든, 누구에 관한 말이든 우리가 하는 말은 상대방을 세워주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한다. 말은 그 말을 듣는 사람의 마음을 오염시키기도 하고 은혜를 끼치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말의 위력이다. 내가 누군가의 험담을 할 경우, 나는 그 사람을 헐뜯을 뿐만 아니라 내 앞에서 그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오염시킨다. 힘든 일 앞에서 불평을 할 경우,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선하심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불평을 듣고 있는 사람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유혹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내 죄는 상대방의 마음에 '전이'된다.
하지만 죄란 단순히 그릇된 행동이나 불친절한 말, 혹은 입 밖에 내지 않은 악한 생각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죄란 우리 마음에 내재된 어떤 본성, 혹은 정신적 힘을 말한다. 우리의 죄악된 말과 행동, 생각은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 죄의 본성이 겉으로 표현된 것일 뿐이다. 마음이 새롭게 된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사도 바울은 이 본성을 일컬어 '육체'라고 했다. 육체라고 불리는 이 본성은 워낙 현실적이어서 바울은 때로 이것을 의인화하여 표현하기도 한다(롬 7:8-11, 갈 5:17).
여기에 우리가 늘 마음에 새기고 있어야 할,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 있다. 비록 마음이 새로워졌더라도, 죄의 절대 지배에서 자유롭게 되었더라도,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신다 할지라도, 이 죄의 본성이 여전히 우리 안에 잠복하여 우리 영혼과 싸움을 벌인다는 것이다. 이 진리의 끔찍한 현실을 깨닫지 못하면 이른 바 '보기 흉하지 않은' 혹은 '용인할 만한' 죄가 자라서 번성할 토양을 만들어주는 셈이다.
크리스천들은 이 시대의 도덕 문화에 비추어 우리의 성품과 행동을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세상 사람들에 비해 전반적으로 좀더 높은 도덕 기준에 따라 살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이정도면 괜찮지'라고 생각하기 쉬우며, 하나님 또한 그렇게 생각해주실 것으로 짐작해버리고만다. 우리 안에 여전히 똬리를 틀고 있는 죄의 현실과 마주하지 못하는 것이다.
암 환자는 대개 자기 몸 속에 암 세포가 자라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위급한 단계, 혹은 말기에 이르러야 알게 된다. 1987년 병원을 찾을 당시, 아내 역시 자기 배에 악성 종양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알지 못했다. 아내를 검진했던 의사는 유능한 종양 전문의였지만 종양이 임파선까지 전이됐다는 사실을 알아내지 못했다. 암은 이렇듯 우리를 기만한다. 완치가 된 줄 알았다가도 어느 날 뜻하지 않게 몸 속 어디에선가 또다시 등장하는 것이 암이다.
암이 작용하는 방식은 죄, 특히 별 생각없이 저지르는 죄나 세련된 죄가 우리 삶 속에서 작용하는 방식을 잘 비유해 보여준다. 이런 죄를 나타내는 또 하나의 적절한 표현은 '교묘한 죄'다. '교묘하다'는 말은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는데, 대개 긍정적이기보다는 약삭빠르고, 교활하고, 음흉하고, 믿을 수 없다는 아주 강한 부정적 의미를 나타낼 때가 많다. 일상에서 쉽게 지나치고 마는 죄를 교묘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 사소해 보이는 죄가 우리를 기만하기 때문이다. '이건 별로 나쁜 행동이 아니야'라고 생각해버리거나, 혹은 죄인데도 불구하고 죄로 여기지 않거나 심지어 자기 행동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게 만든다. 그렇다. 우리가 저지르는 세련된 죄 중에는 너무 교묘한 나머지 아무 생각없이 저지르게 되는 것도 있다. 죄를 저지를 당시는 물론 그 뒤로도 영원히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알게 모르게 저지르는 죄를 무의식적으로 부인하면서 살 때가 많다.
이 시대에는 너도 나도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풍조가 뚜렷하다. 크리스천들 역시 이런 인생관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17세기 청교도 시대의 신자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전혀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 안에 자리잡고 있는 죄의 현실을 두려워했다. 내 서재에는 그 시대 목회자들이 쓴 책이 네 권 있는데, 제목은 다음과 같다.
『죄의 죄악성 The Sinfulness of Sin』
『죄의 해악 The Mischief of Sin』
『은밀한 죄를 해부하다 The Anatomy of Secret Sins』
『죄악의 사악함 혹은 죄의 넘치는 죄성 The Evil of Evils or The Exceeding Sinfulness of Sin』
이 책을 쓴 목회자들은 죄의 실체를 파악하고 있었다. 죄란 우리 안에 있는 악마적 힘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죄의 죄악성』을 쓴 랠프 베닝은 특별히 다양한 표현으로 죄를 설명한다. 몇 페이지 안 되는 지면 가득히 그는 말한다. 죄는 비열하고, 추하고, 불쾌하고, 악의적이고, 해롭고, 파괴적이고, 가증스럽고, 짓궂고, 전염성 강하고, 사악하고, 혐오스럽고, 치명적이라고.
이 단어들이 주는 충격을 곰곰이 생각해보자. 이는 세상 사람들의 추악한 죄뿐만 아니라 우리 크리스천들이 별 의식없이 빠져드는 죄까지도 설명하고 있다. 조급함과 교만, 분노와 좌절, 자기 연민 같은, 우리가 쉽게 넘기는 죄들을 떠올려보라. 불쾌하고 해롭게 느껴지는가? 실제로 이 죄들은 매우 불쾌하고 해롭다. 영적인 삶에서 이런 죄들을 그냥 넘긴다는 것은 몸 속에 암세포를 키우는 것만큼이나 위험하다. 보기에는 별 것 아닌 죄가 그보다 훨씬 심각한 죄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정욕이 담긴 시선이 포르노 중독이나 어쩌면 간음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살인은 분노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분노가 원한으로 자라다가 증오로 이어지고, 급기야 살인에 이르기 때문이다.
이쯤해서 책을 그만 덮어버리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건 정죄를 당하기 위해서도, 교묘한 죄를 들춰내고 싶어서도 아닐 테니 말이다. 어둡고 우울한 심정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당신은 지금 격려를 받고 싶지 정죄를 당하고 싶은 게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끝까지 이 책을 놓지 말기 바란다. 기쁜 소식은 조금 뒤에 전해주겠다. 지금은 별로 달갑지 않은 소식을 계속 살펴볼 수밖에 없다. 아니, 달갑지 않다 못해 점점 더 불쾌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불쾌한 소식이 정말 얼마나 나쁜 소식인지 깨닫게 되면, 이후에 알게 될 기쁜 소식이 얼마나 더없이 좋은 소식인지 더 알아보고 감사하게 될 것이다.
모든 죄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다
죄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그리고 우리 삶 속에 얼마나 악한 죄의 성향이 있는지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 죄가 하나님께 어떤 영향을 끼치느냐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죄는 중대한 반역이라고 했다. 과장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면 성경에 나오는 '반역'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보라. 예를 들어 레위기 16장 21절에서 이 말은 권위에 대한 반항을 뜻한다. 이는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반항이다. 그러므로 내가 만약 험담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이다. 누군가에 대해 적개심을 품은 채 그 사람을 마음으로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하나님께 대한 반항이다.
이사야서 6장 1-8절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절대 위엄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이상을 본다. 그는 천사들이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분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시다"고 외치는 소리를 듣는다(3절). '거룩하다'는 말을 세 번 반복하는 것은 최고의 거룩함을 표현하는 의미다. 하나님은 무한히 거룩하시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무한히 거룩하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덕적 정결성을 말하는 게 분명하지만, 여기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뜻이 담겨 있다. '거룩하다'는 말이 하나님과 관련하여 쓰일 때는 그분의 무한하시고 초월적인 위엄을 나타낸다. 온 우주 위에 임하는 그분의 주권적인 다스리심을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짓는다는 것,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다는 것은 비록 우리가 보기에는 아주 사소해 보일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권위와 초월적 위엄에 반항하는 것이다. 좀 거칠게 말하자면, 우리의 죄는 하나님의 위엄과 주권적 통치에 대한 공격이다. 그것은 정말로 중대한 반역이다.
다윗이 밧세바와 더불어 간음한 뒤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죽음으로 몰아넣어 자신의 죄를 덮으려 했던 사건을 기억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상한 마음으로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 그 죄를 지적하셨다. 나단의 말을 들어보자.
그런데 네가 어떻게 여호와의 말씀을 무시하고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짓을 했느냐? 네가 헷 사람 우리아를 칼로 쓰러뜨리고 그 아내를 네 것으로 만들지 않았느냐? 너는 그를 암몬 사람의 칼에 맞아서 죽게 했다. 그러니 그 칼이 네 집에서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네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삼하 12:9-10
'무시하다', '업신여기다'라는 말이 9절과 10절에 연이어 쓰인 것에 주목하라. 먼저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무시했다. 그리고 나단을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업신여겼다. 이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죄란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얼마나 큰 죄를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만 알 뿐, 나단의 질책이 바로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쉽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 크든 작든, 모든 죄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다. 만약 스스로 사소하게 여기는 죄에 빠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에 하나님 자체를 업신여기는 것이다. 다음 번에 누군가에 대해 비판적인 말이나 불친절한 말을 하고 싶은 유혹이 들 때는 반드시 이 사실을 떠올리라. 죄에 대한 설명이 점점 더 불쾌해질 것이라고 말한 이유를 이제 알겠는가?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다. 더 나쁜 소식이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짓는 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엡 4:25-32)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성령 안에서 구속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습니다"(30절). 우리의 죄를 하나님의 주권적 권위에 대한 반역이요 하나님의 율법과 그분의 인격을 무시하는 행동으로 여긴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우리의 통치자요 심판자로 보는 것이다. 한편 우리의 죄를 성령을 슬프게 하는(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행동으로 보는 것은 하나님을 우리의 구속자요 아버지로 여긴다는 뜻이다. 우리의 죄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슬프게 한다. 누군가에게 불친절하게 대하거나 혹은 나에게 불친절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 아버지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행동이다.
죄를 지을 때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슬프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악용하기도 한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신다고 말했다(엡 1:7). 그건 정말 복된 진리인 것이 분명하지만, 죄는 그 교묘한 기만성으로 우리에게 속삭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용서해주셨으므로 우리의 불친절한 말이나 분노는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죄를 용서해주신다는 것은 죄를 간과하거나 묵인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반드시 죄를 심판하신다. 하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자신의 아들 안에서 그 죄를 심판하셨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제각각 자기 길로 흩어져 가버렸지만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사 53:6).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바로 그 죄를 아무런 의식없이 반복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남용해야 할 것인가?
우리가 행하는 모든 죄된 생각, 죄된 말, 죄된 행동은 다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이다. 다윗은 이렇게 말했다.
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니 나를 아실 것입니다. 내가 앉고 서는 것을 아시고 멀리에서도 내 생각을 아십니다. 주께서는 내가 길을 다니는 것과 내가 눕는 것을 아시니 내가 하는 모든 일을 샅샅이 알고 계십니다. 오 여호와여, 내가 말을 혀에 담기도 전에 주께서는 그것마저 다 아십니다. 시139:1-4
하나님은 우리 모든 생각을 아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말을 입 밖에 내기도 전에 그 말을 들으시며, 우리의 모든 행동을 보신다. 심지어 우리의 행동 동기까지 다 파악하신다. 그래서 바울은 주께서 오실 때 "마음의 동기를 드러내실 것"이라고 말했다(고전 4:5).
이 말은 우리의 모든 반역, 하나님과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는 모든 행위, 성령을 슬프게 하는 모든 행동, 하나님의 은혜를 남용하는 모든 행위, 우리의 모든 죄가 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데서 공개적으로 저질러지는 행동이라는 뜻이다. 보좌에 앉아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런 모든 죄를 저지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앞서 청교도 목사 랠프 베닝의 책 『죄의 죄악성』을 이야기했다. 책 제목에서 같은 말이 불필요하게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베닝은 이 제목에서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하려 하고 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전적으로 거룩하시고, 오로지 거룩하시고, 완전히 거룩하시고, 늘 거룩하신 반면, 죄는 죄되고, 전적으로 죄되고, 오로지 죄되고, 완전히 죄되고, 늘 죄된다." 우리의 죄가 추악한 죄든 그다지 보기 흉하지 않은 죄든 관계없다. 모든 죄는 다 죄되고, 오로지 죄되고, 전적으로 죄된다. 우리가 보기에 큰 죄든, 작은 죄든 하나님 보시기에는 다 가증스럽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흘리신 피로 우리 죄를 용서해주시지만, 결코 죄를 묵인하시지는 않는다. 예수님은 우리가 저지르는 모든 죄, 우리가 죄라고도 생각하지 않는 교묘한 죄를 다 지시고 우리 대신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셨다. 바로 여기에 죄의 흉악성이 있다. 우리 죄 때문에 예수님이 고통당하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죄에 관한 나쁜 소식이다. 우리는 이 소식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죄인이라고 생각되는 다른 사람들에게 책임의 화살을 돌리겠는가? 어떤 특정 인물이 이 부분을 꼭 읽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지금까지 삶 속에서 무심코 지나친 죄에 대해 회개하고 뉘우치는가? 그럴 마음이 든다면 이제 당신은 좋은 소식을 들을 준비가 된 것이다. 정말, 정말, 좋은 소식 말이다.
죄를 치료하는 약 - 복음, 유일한 치료제
자기 죄를 시인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나를 나쁘게 생각하시지 않는다는 확신이 필요하다. 복음은 우리에게 그런 확신을 준다.
죄인들을 위한 복음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찬송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의 가사를 쓴 존 뉴턴은 젊은 시절 노예 상인으로 일했다. 그리고 심지어는 아프리카에서 사로잡은 흑인들을 아메리카 대륙으로 실어나르는 노예선 선장 노릇까지 했다. 그후 건강에 이상이 생겨 선원 생활을 그만둔 그는 세관원을 하다가 신학을 공부해서 마침내 목회자가 되었다. 하지만 목회자가 된 후에도 노예 상인 시절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죄를 결코 잊지 않았다. 말년에 뉴턴은 한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옛기억은 거의 다 사라졌지만, 지금도 두 가지만은 또렷이 기억한다네. 내가 엄청난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님은 위대한 구주시라는 것 말일세."
수 세기 전, 나중에 사도 바울로 불린 다소의 사울 역시 심각한 죄를 안고 있었다. 사도행전 7장 54절-8장 1절에 보면 그가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일에 연루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사도행전 9장 1-2절에서는 신자들을 핍박하는 일에도 직접 참여했던 것을 보게 된다. 생애 막바지에 이르러 바울은 그 시절의 자신을 일컬어 "훼방꾼이요, 핍박자요, 폭행자"였다고 고백한다(딤전 1:13). 그러나 똑같은 정황에서 그는 또 이런 말도 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다. 죄인 가운데 내가 가장 악한 사람이다"(딤전 1:15).
존 뉴턴이나 사도 바울 모두 자기 자신을 큰 죄인으로 여겼지만, 그들은 또한 죄인인 자신에게는 위대하신 구주가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크리스천들 가운데 젊은 시절의 존 뉴턴이나 사도 바울처럼 심각한 죄를 저지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은 간음을 범한 적도 없고, 누구를 죽이지도 않았으며, 마약을 판매한 적도 없고, 회사 돈을 횡령하지도 않았다. 나 자신의 경우를 봐도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 말씀 잘 듣는 온순한 아이였고, 청소년 시절에는 모범생이었고, 성년이 되어서도 믿을 만한 직원이었으며, 성실한 남편이자 아버지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비록 추악하다고 할 만한 중대 범죄를 저지른 적은 없어도 나는 남의 험담을 했고, 다른 사람을 비판했고, 적개심을 품기도 했고, 조급하게 굴기도 했고, 이기적으로 행동했으며, 살다가 힘든 일을 만났을 때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적도 있고, 물질주의에 굴복한 적도 있고, 내가 좋아하는 축구 팀을 우상으로 삼은 적도 있다. 바울과 마찬가지로 나도 죄인 중에 가장 악한 자라고 할 만하다. 혹은 존 뉴턴의 말을 빌려 "나는 큰 죄인이지만 나에게는 위대하신 구세주가 계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것만이 내 유일한 소망이다. 이것만이 내 죄악의 유일한 치료제며, 당신에게도 역시 마찬가지다.
존 뉴턴과 바울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시점은 바로 현재다. 과거에 '죄인이었다'가 아니라 현재 '죄인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앞뒤 문맥으로 볼 때 바울은 예수님을 핍박했던 죄를 반성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뉴턴 역시 과거에 자신이 노예 상인이었다는 사실을 결코 떨쳐내지 못했다. 세월이 지날수록 오히려 자신의 지난 삶이 더 끔찍하게 여겨졌다.
그렇다면 이들은 자기 자신이 현재 죄인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오로지 핍박자요 노예 상인이었던 과거의 죄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는 볼 수 없다. 예를 들어, 디모데전서를 쓰기 몇 년 전 바울은 스스로 모든 성도들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보다 더 작은 자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의 일꾼이 된 자로 묘사했다(엡 3:7-8). 사실 바울의 자기 인식은 시간이 갈수록 아래로 치닫는 것 같다. 처음에는 사도들 중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했다가(고전 15:9, 주후 55년에 기록), 나중에는 성도들 중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했으며(엡 3:8, 주후 60년에 기록), 급기야는 죄인들 중에 가장 악한 자라고 말한다(딤전 1:15, 주후 63년이나 64년에 기록).
존 뉴턴이나 바울 두 사람 모두 회심한 뒤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더 예수님을 닮은 성품으로 자라갔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모두 회심하면서 성도가 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성도답게 행동했다. 그리고 그렇게 성숙해져가는 과정에서 여전히 자기 안에 있는 육체의 죄성을 더 예민하게 자각했다. 그래서 존 뉴턴은 "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크나큰 죄인이지만, 나에게는 위대하신 구세주가 계시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역시 삶 가운데서 쉽게 지나치기 쉬운 죄 문제를 처리하는 데 조금이라도 발전을 보이려면 뉴턴처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추악한 죄든 용인할 만한 죄든, 우리 죄에 대한 치료제는 바로 가장 넓은 범위의 복음이다. 복음은 사실상 하나의 메시지인데, 여기서 말하는 복음은 예수님이 이땅에 나시고,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시고, 그리고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서 현재 역사하시는 것 등 예수님의 전체 사역을 약식으로 일컫는 표현이다. 그리고 가장 넓은 범위의 복음이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역사를 통해 우리를 죄의 형벌에서만 구하시는 게 아니라 죄의 지배 혹은 삶 가운데 있는 죄의 권세에서도 구하신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대 사역의 이 이중 측면은 어거스투스 토플레이디의 멋진 찬송, '만세 반석 열리니'(Rock of Ages)에 아름답게 설명되어 있다.
찢긴 허리에서 흘러나오는 물과 피, 죄를 이중으로 치료하사 죄책과 죄의 권세에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우리말 찬송에는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다-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린 것 내게 효험 되어서 정결하게 하소서-역자 주)
하나님이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
죄에 대한 전체적인 맥락을 짚어본 후에는 우리 삶 속에 있는 '흉하지 않은' 죄들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그 죄의 모양이 어떤지, 어떤 피해를 끼치는지, 그 죄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런데 그 전에 먼저 복음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해야 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복음은 온전히 죄인들을 위한 것이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딤전 1:15). 그런데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복음을 '구원받을' 필요가 있는 불신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일단 예수님을 믿으면 복음은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으며, 단지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해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구별된 존재들이라는 의미에서 성도이기는 하나, 그래도 여전히 죄인이다. 신약성경에서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모든 윤리적 명령과 권면들은 우리 안에 여전히 죄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보면, 성경이 주는 네 가지 유익 가운데 책망과 바르게 하는 것이 있다. 성경의 이러한 쓰임새는 우리에게 여전히 죄가 있고, 그래서 책망받고 교정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죄의 치료제로서 복음의 첫 번째 역할은 우리의 마음 밭을 갈아엎어 죄를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가 날마다 복음을 필요로 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교만한 마음을 찢고 우리 안에 여전히 존재하는 죄의 현실과 마주하여 그 현실을 인정할 준비를 하게 된다.
둘째, 복음은 죄와 마주할 준비를 하게 할 뿐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우리를 자유롭게 해준다. 죄와 마주하면 죄책감이 든다. 그것은 물론 우리에게 죄가 있기 때문이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하나님께서 여전히 내 죄를 헤아리고 계신다고 생각하면, 자기 보호 본능으로 내 죄와 죄책을 인정하지 않거나 가능한 한 그것을 최소화하려고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삶 속에 있는 어떤 특정한 죄, 예를 들어 분노나 자기연민 같은 죄가 살아서 활동한다는 것을 먼저 솔직히 인정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 죄가 나타나는 것을 어떻게 처리할 수가 없다. 죄를 처리하는 것은 차치하고 나에게 그런 죄가 있다는 것을 인정이라도 할 수 있으려면 먼저 내 죄가 용서받는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죄를 인정한다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 내가 이기적으로 행동했다는 것을 마지못해 시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고, 그 특정한 행위는 내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이기심이 겉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라고 전심으로, 변명하지 않고 인정한다는 의미다. 그렇게 자기 죄를 시인하기 위해서는 내 이기심이 용서받는다는, 즉 하나님께서 더 이상 나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으신다는 확신이 필요하다. 복음은 우리에게 그런 확신을 준다. 사도 바울의 이 말을 생각해보라. "주께서 불법을 용서하시고 죄를 덮어주시는 사람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않으실 사람은 복이 있다"(롬 4:7-8).
하나님은 왜 우리 죄를 인정하지 않으시는 것일까? 이미 그 죄를 예수님께 돌리셨기 때문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제각각 자기 길로 흩어져 가버렸지만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시고 그를 공격하셨다"(사 53:6).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내 죄를 용서하셨다는 이 진리를 존재 깊이 붙잡을 때, 비로소 삶 속에서 특정한 죄가 나타나는 것에 거리낌없이 솔직하고 겸손하게 직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존 뉴턴처럼 날마다 "나는 큰 죄인이지만, 나에게는 위대하신 구세주가 계시다"라고 단언하는 것은 아주 유익하다.
셋째, 복음은 죄를 처리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힘을 부어준다. 솔직하게 죄와 직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예수님을 닮은 성품을 키워가기 위해서는 죄를 처리해야 한다. 성경의 표현을 빌리자면, 죄를 "죽여야" 한다(롬 8:13, 골3:5). 하지만 이미 말했다시피 우리가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는 죄는 용서받은 죄뿐이다. 먼저 죄책을 해결하지 않고는 우리 삶 가운데서 활개치는 죄의 활동을 처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 죄책을 해결해주셨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내 죄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확신은 두 가지 일을 한다. 먼저 하나님께서 나를 대적하시는 게 아니라 내 편이 되어 주신다는 걸 확신하게 한다(롬 8:31). 나는 혼자서 죄와의 싸움터에 나가는 게 아니다.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 앉아 나를 지켜보시면서 "언제 제대로 할래? 그 죄를 언제 해결할래?"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다. 늘 그러셨던 것처럼 나와 함께하시면서 "우리 함께 그 죄를 처리하자. 다만 내가 더 이상 네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만 알아두기 바란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내게 더 이상 심판자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이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로서, 무한한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심지어 내 죄 앞에서도 말이다. 그런 확신은 죄를 처리할 수 있도록 나를 크게 고무시키고 동기를 부여해준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더 이상 내 죄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확신, 그리고 죄와의 싸움에서 내 편이 되어주신다는 확신이 생기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 그리고 지금도 하고 계신 일에 대해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된다.
'격려'와 '감사'라는 이 이중의 효과는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처리하고자 하는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착각하지 말라. 죄를 처리하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죄를 죽이라는 명령이 주어진다. 죄를 죽이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하고자 하는 마음 없이 의무적으로 하다보면 고역이 되고 말겠지만, 우리 마음속에서 날마다 다시 확신하는 복음의 진리가 우리의 의무에 욕구를 불러넣어줄 것이다. 복음은 우리가 저지르는 보기 흉하지 않은 죄와 교묘한 죄를 처리하고자 하는 동기에 불을 붙여준다. 일상생활에서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어떤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 찾고 구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해주는 것은 바로 복음이다.
날마다 복음을 선포하라
이렇듯 하루하루 생활 속에 복음을 새롭게 적용해서 죄사함을 확신하는 것이 우리 삶 속에 있는 죄를 처리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물론 이것만으로 죄가 처리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는 의도적으로 날마다 새롭게 복음을 붙잡는 데 전념하라고 말하고 싶다.
몇 년 전,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날마다 자기 자신에게 복음을 선포하라." 복음을 날마다 새롭게 붙들기 위해서는 바로 그렇게 해야 한다. 자기 자신에게 날마다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말할 때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던 바울처럼 복음을 온전히 내 것으로 삼아야 한다(갈 2:20). 아버지의 사랑 또한 바로 나를 향한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요한일서 4장 10절 말씀을 이렇게 한 번 바꿔보자. "사랑은 여기에 있습니다. 곧 우리(내)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나)를 사랑하셔서 우리(내) 죄를 위해 그분의 아들을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할) 화목제물로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내 죄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상 내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는 좋은 소식은 너무 극단적인 데다가 또 우리의 보편적인 사고방식과는 아주 다르기 때문에, 솔직히 사실로 믿기가 어렵다. 특히 모든 상황이 하나같이 내 이기심과 조급함, 분노를 생생하게 자각시키는 날에는 그와 같은 사실이 다 허황되어 보인다. 이 원고를 쓰고 있는 동안에도 나에게는 그런 날이 있었고, 그래서 성경을 펼쳐서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부분을 다시 읽고 나 자신에게 그 말씀을 '선포'해야 했다. 그러나 우리의 하루가 '좋은' 날인지 '나쁜' 날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심지어 최고로 여겨지는 날에도 우리는 여전히 자신에게 복음을 선포할 필요가 있다. 사실 우리 인생에 복음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좋은 날은 단 하루도 없다.
이 부분에서 이런 궁금증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나 자신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말이다. 정해진 방법은 없으므로 내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다. 나는 천성적으로 모든 것을 질서정연하게 처리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 방식이 모든 이들에게 다 들어맞지는 않을 테지만,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이 한 개인의 삶에서 어떤 모양으로 드러나는지 대강 감은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내 방식은 이렇다.
복음은 온전히 죄인들만을 위한 것이기에 나는 이런 자각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비록 성도이기는 하지만 나는 생각으로나 말로나 행동으로, 혹은 마음속 동기로 여전히 날마다 죄를 짓는다고 말이다. 교묘한 죄든 교묘하지 않은 죄든 내 생활 속에 어떤 죄가 있음을 자각하면 지체없이 그것을 하나님 앞에 시인한다. 자각한 죄에 대해 양심의 찔림을 받지 않더라도 여전히 나는 하나님 앞에 시인한다. 내 존재를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려면 아직도 멀었다고 말이다. 나는 그 죄들을 뉘우치고, 그런 다음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확인시켜주는 성경 말씀을 떠올리며 방금 고백한 그 죄에 적용시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신다는 성경의 약속을 삶 전체에 보편적으로 적용시키고, 오늘 내가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설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은 내 죄를 위해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과 나를 위해 사신 그분의 의로운 삶뿐이라고 고백한다. 나를 위한 예수님의 이 이중 사역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에드워드 모트가 쓴 찬송 '이 몸의 소망 무엔가'(The Soild Rock) 가사에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내 소망은 오로지 예수님의 보혈과 의 위에 서 있나니(우리말 찬송에는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거의 날마다 나는 이 가사와 더불어 죄사함을 약속하는 성경 말씀을 거듭 묵상하곤 한다.
성경 어느 부분의 말씀으로 나 자신에게 복음을 선포하는지 궁금한가? 내가 날마다 펼쳐보는 말씀을 몇 가지 소개하겠다.
동쪽이 서쪽에서 먼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악을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다. 시 103:12
나, 나는 나를 위해 네 죄를 닦아 없애는 자니 네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 사 43:25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제각각 자기 길로 흩어져 가버렸지만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시고 그를 공격하셨다. 사 53:6
주께서 불법을 용서하시고 죄를 덮어주시는 사람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않으실 사람은 복이 있다. 롬 4:7-8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롬 8:1
이외에도 시편 130편 3-4절, 이사야서 1장 18절, 이사야서 38장 17절, 미가서 7장 19절, 에베소서 1장 7절, 골로새서2장 13-14절, 히브리서 8장 12절, 히브리서 10장 17-18절 등이 있다.
하나님의 죄사함을 확신하기 위해 성경의 어떤 부분을 읽든,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피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성경 구절에 그 사실이 명시적으로 나와 있든 나와 있지 않든 말이다. 히브리서 기자의 말처럼 "참으로 피 흘림이 없으면 죄사함도 없다"(히 9:22). 이 말씀의 문맥으로 볼 때 예수님의 보혈이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해주시는 객관적 근거가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복음이 전하는 좋은 소식의 첫 부분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은 그 아들의 죽음을 통해 우리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이다. 토플레이디의 찬송가 가사를 다시 언급하자면, 이것이 바로 이중 치료의 한 부분이다. 즉, 죄책에서 정결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죄의 권세에서 정결케 되는 것이다.
성령의 권능 - 죄의 권세에서 깨끗케 하시는 능력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한 가지 방법은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성령을 따라 행하십시오"
앞서 살펴본 어거스투스 토플레이디의 찬송은 '이중 치료'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것은 곧 죄책에서뿐만 아니라 죄의 권세에서도 정결케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아들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죄책에서 정결케 해주셨다. 우리를 너그럽게 대해주고 싶으셔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은 그분의 공의가 충족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죄가 절대적으로 용서받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역사적 사실만큼이나 견고한 사실이다. 복음의 이 놀라운 진리를 확실히 붙잡아야 한다. 삶 속에서 묵인하며 지나치는 우리 죄가 용서받는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만 그 죄와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토플레이디의 찬송은 이렇게 죄책에서 정결케 되는 것뿐만 아니라 죄의 권세에서 정결케 되는 것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살면서 어떤 특정한 죄와 지치도록 씨름할 때는 복음이 정말 우리 삶 속에 있는 죄의 권세와 관련이 있는 것인지 의아해지기도 한다. 반복적으로 씨름하고 있는 어떤 고질적인 죄의 패턴을 '죽이는' 데 과연 어떤 발전이 있기는 한 건지 궁금할 때도 있다. 토플레이디처럼 '만세 반석'이신 예수님께서 정말로 우리를 죄책은 물론 죄의 권세에서도 정결케 해주신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죄의 권세에서 정결케 되는 데는 두 가지 단계가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첫 단계는 죄의 주권 혹은 죄의 지배력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으로, 이는 어떤 크리스천에게나 의심할 여지없이 완전하게 일어난다. 두 번째 단계는 아직 남아 있는 죄의 존재와 그 활동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으로,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계속해서 점진적으로 진행된다.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이 이중적 구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로마서 6장 2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죄에 대해 죽었다"고 말하며, 8절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게 죽었다"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함으로써 우리는 죄책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우리 삶 가운데 있는 죄의 지배력에 대해서도 죽었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해당되는 사실이며, 우리가 구원받는 순간,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그분이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시는 때 성취된다(골 1:13).
"우리가 죄에 대해 죽었다"는 바울의 말은 하나의 선언문이다. 우리가 구원받는 순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셨다. 우리는 그 결정적 사건에 무엇을 더할 수도 없고, 우리가 죄책과 죄의 지배에 대해 죽었다는 사실에서 무엇을 뺄 수도 없다.
그러면서 바울은 또 이렇게 권면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죽을 몸에서 죄가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해 몸의 정욕에 순종하지 말고"(롬 6:12). 우리가 죄에 대해 죽었는데, 어떻게 죄가 우리에게 왕 노릇을 할 수 있다는 것일까?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죄란, 비록 우리 삶을 지배하는 권세는 잃었어도 여전히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 주도적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는 죄의 존재와 그 활동을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죄는 우리 마음속에서 영적 게릴라전을 계속 펼치고 있는 것이다. 이 전투에 대해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이 바라시는 것은 육체를 거스릅니다. 이 둘이 서로 적대 관계에 있으므로,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육체의 욕망과 성령의 욕망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 싸움을 날마다 겪는다. 둘 사이의 이 긴장 관계 때문에 복음이 정말 이 죄의 권세에 대해서도 효력이 있는 것인지 의아해하기도 한다. 복음이 과연 우리를 원하는 방향으로 끌어당길 능력이 있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 삶 속에 모습을 드러내는 비교적 '보기 흉하지 않은' 죄를 생각하면 특히 더 그런 의문이 든다. 이런 교묘한 죄 가운데는 아주 집요한 것도 있는데,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그 죄들과 싸움을 벌여야 한다. 이제 그 죄에 대해서는 한 고비 넘겼다고 생각했다가도 며칠 지나지 않아 또다시 그 죄와 마주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렇게 죄와 싸움을 벌일 때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한다. '이제 죄가 나를 지배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난 왜 아직도 이 모양이지? 복음이 정말로 죄에서 나를 정결케 한 걸까? 내 일상에서 여전히 활개치는 이 교묘한 죄를 죽이는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이 집요한 의문에 대한 바울의 답변이 갈라디아서 5장 16절에 나온다. "내가 또 말합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따라 행하십시오. 그러면 결코 육체의 욕망을 채우려고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성령의 지배적 영향력 아래 살면서 성령께 의지하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가 그렇게 하면 육체의 욕망을 채우려 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실제 생활에서 성령의 지배적 영향력 아래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바로 우리 마음을 계속 성령께 드러내보이면서 성경에 나타난 성령의 도덕적 뜻에 순종하려 애쓰는 것이다. 기도를 통해 성령께 의지하면서 그 뜻에 순종할 수 있게 해주는 성령의 능력을 계속 소리쳐 구해야 한다.
크리스천의 삶에는 내가 '의존적 책임'이라고 이름붙인 기본 원칙이 있다.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할 책임과, 이른 바 '용인할 만한' 죄든 용인할 수 없는 죄든, 우리 삶 속에 있는 모든 죄를 죽여야 할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에게는 이 책임을 이행할 만한 능력이 없다. 사실 우리는 우리에게 힘 주시는 성령의 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책임있는 존재기도 하고 의존적인 존재기도 하다.
성령을 따라 행하고자 애쓸 때 성령이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 역사하셔서 삶 속에 남아 있는 죄의 권세에서 우리를 깨끗케 해주시는 것을 점점 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이생에서는 완전해질 수 없다. 하지만 발전할 수는 있다. 이것은 분명 점진적인 발전이며, 때로는 아무 발전도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진심으로 우리 삶 속의 교묘한 죄를 처리하기를 원한다면 성령이 우리를 도우시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여러분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성취하실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져 있다(빌 1:6).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시작하신 일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실 것이다.
실제로 신약성경의 서신서들을 주의깊게 읽어보면, 서신서 기자들, 특히 바울 같은 이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이 일을 성부 하나님의 역사로 돌리기도 하고, 성자 예수님의 역사로 돌리기도 하며, 또 때로는 성령의 역사로 돌리기도 한다. 사실 우리가 영적으로 변화되는 역사에는 성삼위 하나님 모두가 개입하시지만, 성부와 성자께서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통해 일하신다(고전 6:19). 바울은 성령을 통해 우리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다(엡 3:16). 그리고 누군가가 기막히게 표현한 것처럼,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을 전달한다." 그러므로 내가 성령의 능력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성부, 성자, 성령의 능력이 성령에 의해 우리에게 전달되어 우리 안에서 역사한다는 뜻이다.
성령이 역사하시는 방법
성령이 어떤 식으로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는지는 우리가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신비다. 우리는 그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역사하셔서 예수님을 닮은 형상으로 우리를 점점 더 변화시키신다는 성경의 증거를 믿고 받아들일 뿐이다(고후 3:18). 성령에 관한 이 위대한 진리를 적극적으로 믿을 필요가 있다. 우리 안에 있는 교묘한 죄를 우리 혼자 힘으로 해결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며, 성령을 따라 행할 때 비로소 이 죄가 점진적으로 해결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한 가지 방법은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이기심과 조급함, 비판적 태도 등이 사실은 죄라는 것을 알게 해주신다. 성령께서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쓰인 성경을 통해 우리를 꾸짖으시고 바로잡아주신다(딤후 3:16). 또한 말씀을 접할 때 우리 양심이 밝아지고 죄에 민감해지게 해주신다. 내가 알기로 심지어 성령께서는 나의 교묘한 죄가 어떤 구체적인 행위로 나타났는지 기억나게 해주시고, 그 행위를 출발점 삼아 내 삶 속에 있는 죄의 패턴을 지적해주기 시작하신다.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은 성령의 중요 사역 가운데 하나다.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의 어떤 특정 패턴이 죄라는 사실을 먼저 깨달아야만 죄를, 특히 우리 크리스천 문화에서 보편적으로 용인되는 죄를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또 한 가지 방법은 우리가 죄를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것이다. 로마서 8장 13절에서 바울은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라"고 권면한다. 또한 빌립보서 2장 12-13절에서는 "여러분의 구원을 이루십시오. 여러분 안에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결단하게 하시고 행동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고 행하라고 촉구한다. 바울은 하나님, 추측컨대 성부 하나님을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분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사실 하나님은 우리 삶 속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대행자인 성령을 통해 역사하신다.
빌립보서 4장 13절을 보면,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우리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성령을 의지하면 교만과 조급함, 비판적 태도 등을 처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된다. 발전이 아무리 더디게 보이더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신다. 때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을 숨기시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오히려 그 덕분에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깨닫게 될 수도 있다.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역사에 더하여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단독적으로 역사하시기도 한다. 즉, 우리의 의식적인 개입 없이 홀로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13장 20-21절의 축복의 말에서 하나님을 "그분에게 기쁨이 되는 것을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특별한 진리가 우리에게 큰 격려가 되어야 한다. 죄와의 싸움에서 아무런 진전이 없어 보이는, 더할 수 없이 참담한 날들 가운데서도 우리는 성령께서 여전히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우리 죄 때문에 성령께서 슬퍼하실 수도 있지만(엡 4:30), 그분은 그 죄조차도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데 들어 쓰셔서 더욱 간절히 성령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부르짖게 만드신다.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한 성령의 또 한 가지 역사는, 우리를 영적으로 성숙시키는 환경을 조성하시는 것이다. 우리 몸의 근육이 운동하지 않고는 힘을 쓸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영적 생명도 힘든 도전을 주는 상황이 아니면 성장하지 않는다.
걸핏하면 화를 내는 사람에게는 화를 내게 하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남을 비판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에게는 비판적 태도를 취하게 만드는 많은 계기들이 생길 것이다. 쉽게 걱정에 빠지는 사람에게는 걱정이라는 죄를 접하게 되는 많은 기회들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여 범죄하게 만드시는 분이 아니지만(약 1:13-14), 우리 삶에 어떤 특정한 상황을 조성하시거나 허용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있는 특징적 죄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내가 가진 교묘한 죄가 드러날 때 비로소 그 죄의 활동을 처리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환경을 주권적으로 통제하신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성경에 이 사실을 확증하는 말씀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이 진리를 가장 명시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부분은 예레미야애가 3장 37-38절이다. "주께서 그것을 명령하지 않으셨다면 누가 그것을 말할 수 있고 일어나게 할 수 있는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입에서 나오지 않는가?"
이 말씀은 여러 가지로 적용할 수 있지만, 여기서 지금 우리가 깨달아야 할 진리는 하나님이 우리 삶의 모든 상황과 모든 사건을 주관하시며, 그 상황과 사건들을 다소 신비로운 방식으로 이용하셔서 우리를 예수님의 형상으로 점점 더 변화시키신다는 것이다.
로마서 8장 28절은 많은 크리스천들이 힘들 때 찾아가 위로를 받는 말씀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그분의 뜻을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해 선을 이루는 줄을 압니다." 이 말씀이 여러 상황에서 우리에게 격려가 되기는 하지만, 바울은 사실 우리의 영적 변화에 대해 말하고 있는 중이다. 여기서 말하는 '선'은 바로 다음 절에서 설명되기를,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닮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갖가지 환경을 통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은 우리를 더욱 예수님을 닮은 자들로 만들기 위해서라는 뜻이 된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교묘한 죄를 깨닫고 자각하게 만드신다. 그리고 그 죄를 죽일 수 있게 하신다. 또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 그리고 삶의 여러 가지 환경을 이용하여 우리에게 죄를 처리하는 연습을 시키신다.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몫이 있다. 우리에게는 삶 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교묘한 죄를 죽여야 할 책임이 있다. 이 책임을 하나님께 맡겨놓고 뒷짐지고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절대 그럴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영적으로 단 한 치도 발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은 단순히 우리를 돕기만 하시는 게 아니라 영적 변화의 방향까지 지도하신다. 성령은 여러 가지 수단을 사용하시며, 이 책 또한 성령의 도구가 되어 우리의 교묘한 죄를 드러내고 처리하는 데 쓰임받기를 기도한다. 하지만 성령은 우리 안목에만 의지하여 죄를 볼 수 있게 하시지 않으며, 우리 능력으로만 그 죄를 처리하게 두시지도 않는다.
어거스투스 토플레이디의 찬송가 가사가 맞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과 성령의 신비롭고도 아주 현실적인 역사를 통해 우리를 죄책과 죄의 권세에서 건져내신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 삶 속에 있는 교묘한 죄를 상세히 살펴볼 때 공연히 위축되지 말기를 바란다. 기억하라.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 죗값을 치르시고 그 죄에 대한 용서를 얻었다는 것을. 그리고 성령을 보내사 우리 안에서 거하시면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죄를 처리할 수 있게 해주셨다는 것을.
그리고 성령께서 내게 능력을 주셔서 삶 속에 숨겨 있는 은밀한 죄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죄는 속임수에 능하다(엡 4:22 참조). 죄는 나에게 특정한 죄가 있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부인하거나 혹은 죄가 있어도 별로 심각한 죄는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게 만든다. 오직 성령만이 죄를 있는 모습 그대로 드러내 보이실 수 있다.
이제 겸손해질 준비를 하라. 성령께서 나에게 이기심의 죄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 보여주시던 때가 기억난다. 그전까지는 남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명백하고도 지나친 이기심만이 이기심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데 나 역시도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 사람들에 비해 훨씬 더 교묘하게 이기적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건 참 굴욕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자, 곧 자기 죄를 마주하고 그 죄로 인해 애동해하는 자에게 복이 있으리라고 약속하셨다. 또한 의에 주리고 갈급한 자들, 곧 자기 삶 속의 죄가 죽고 그 대신 성령의 열매가 맺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들에게도 복이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마 5:4, 6, 갈 5:22-23).
죄를 처리하기 위한 지침 - 꼭 기억해야 할 일곱 가지 조언
어떤 특정한 죄를 죽이려는 목표를 세웠는데 상황이 좋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나빠질 수도 있다. 그럴 때는 이것을 명심하라. 그래야 정상이라고 말이다. 성령께서는 이런 불순종과 좌절의 시기를 이용하여 내 교묘한 죄가 얼마나 뿌리 깊은지, 내가 성령의 도우시는 능력에 얼마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지 볼 수 있게 해주실 것이다.
죄는 결코 혼자 해결할 수 없다
앞서 죄의 치료제가 무엇인지, 우리를 위해 역사하시는 성령이 권능이 어떠한지 살펴보았다. 그리고 죄를 처리할 때 우리가 능동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실 또한 짚어보았다. 사도 바울은 삶에서 다양하게 표현되는 죄를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롬 8:13, 골 3:5). 이 죄에는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명백한 죄뿐만 아니라 우리가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교묘한 죄들까지도 포함된다. 그러나 그런 교묘한 죄들을 묵인한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아주 독선적인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다 그렇게 인정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 아마 우리의 입장일 것이다. 하지만 그 죄들과 솔직하게 마주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자기 죄와 마주한다는 것은 아주 굴욕적인 일이며, 그 죄에 대해 이제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일단 죄와 마주하면 전처럼 그 죄를 무시하며 살 수는 없다.
크리스천들 사이에 용인되는 죄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전에 먼저 그 죄들을 처리할 때 주의해야 할 몇 가지 사항을 살펴보자. 어떤 죄에 대해서는 특별한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지만, 모든 교묘한 죄들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일반적 지침이 있다.
첫째, 죄를 이야기할 때는 항상 복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생활 속 죄의 영역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흔히 복음은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 죄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이 골로새서 2장 13-14절에서 한 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심으로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스려 대적하는 조문들이 담긴 채무 증서를 제거하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 가운데서 없애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완전한 의를 우리의 의로 여겨주신다. 우리가 불순종하는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은 완벽하게 순종하셨다. 우리는 걱정하고 불안해할 때가 많지 않은가? 하지만 예수님은 언제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완전히 신뢰하셨다. 우리는 이기심 때문에 늘 부딪히지 않는가? 예수님은 언제나 철저하게 자신을 내주셨다. 우리는 불친절한 말과 험담, 비꼬는 말 등으로 죄를 짓지 않는가? 예수님은 적절할 경우에만 그런 말을 하셨다. 예수님은 혀로 죄를 지으신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삼십삼 년 동안 예수님은 하나님의 도덕적 뜻에 완벽히 순종하는 삶을 사셨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을 향한 아버지의 특별한 뜻에 따름으로써 그 순종에 마침표를 찍으셨다.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당하는 죽음에 순종하신 것이다. 죄 없는 삶을 사시고, 우리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신 예수님은 완벽히 순종적이셨고, 완벽히 의로우셨다. 바로 이 의가 모든 믿는 자들에게 돌려진다(롬 3:21-22, 빌 3:9).
교묘한 죄를 죽이려고 애쓸 때 우리는 이 두 가지 진리를 늘 마음에 새겨야 한다. 우리 죄는 용서받았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죄 없는 삶과 또 우리 죄를 대신하는 죽음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께 의로운 자로 인정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삶 속에 있는 죄를 처리하고자 할 때, 복음의 이 두 가지 영광스러운 진리를 깨달아야만 무엇보다 확실하게 동기가 부여된다.
둘째,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성령의 권능에 의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삶 속에 있는 죄를 죽인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롬 8:13). 우리는 복음을 잊어버린 채 우리 자신의 의지력만 믿으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제아무리 영적으로 성장한다해도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성령의 권능이 필요없을 만큼 성장할 수는 없다. 우리의 영적인 삶은 가전제품의 모터에 비교할 수 있다. 모터가 실제적으로 작동을 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작동을 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전력 공급원에 줄곧 의지해야 한다. 이처럼 우리도 성령께 쉼없이 의지하는 자세를 키워가야 한다.
셋째, 성령께 이지하는 한편 죄를 처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할 책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 두 가지 진리, 즉 성령께 의지해야 하며 그와 동시에 우리의 책임도 이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똑같은 비중으로 마음에 새긴다는 건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어느 하나를 강조하고 다른 하나는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옛 사람들의 지혜가 담긴 다음의 말이 조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다 내게 달린 양 노력하라. 그러면서도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믿으라."
넷째, 이른 바 '용인할 만한 죄'의 구체적 영역을 규정해야 한다. 우리 삶 속의 교묘한 죄들을 하나하나 짚어보려고 하는 목적이 바로 그것이다. 그 죄의 패턴이 내 삶 속에도 있지 않은지 깨닫게 해달라고 성령께 도움을 청하라.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하며, 그 죄와 기꺼이 마주하려는 자세도 필요하다. 특정 죄를 규명할 때는 주로 어떤 상황에서 그런 죄를 짓게 되는지 생각해보라. 죄를 유발시키는 상황이나 사건을 미리 예측해보는 것도 그 죄를 죽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다섯째, 교묘한 죄가 하나씩 밝혀질 때마다 거기에 적용할 수 있는 성경 말씀을 집중적으로 묵상해야 한다. 그 말씀을 외우고,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이용해 우리로 하여금 그 죄를 처리할 수 있게 해주실 것을 구해야 한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주께 죄짓지 않으려고 주의 말씀을 마음에 품었습니다"(시 119:11). '품는다'(store up)는 것은 장차 필요할 때를 대비해 한쪽으로 모아둔다는 뜻이다.
1999년, 세상 모든 컴퓨터들의 시계가 2000년 1월 1일로 넘어가는 순간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두고 온 세상 사람들이 전전긍긍하며 불안해했다. 컴퓨터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세계 통상 업무가 완전히 마비 상태에 빠질 것이라는 등 온갖 불길한 예측들이 난무했고, 많은 사람들은 여분의 식량과 비상용품들을 비축해두었다. 흔히 Y2K라고 알려진 이 사건은 결국 일어나지 않았다. 컴퓨터는 마비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일은 '품었다'는 말의 의미를 힘있게 예시해준다. 사람들은 앞으로 필요할 때를 대비해 무언가를 품어두고 있었다.
성경 본문을 우리 마음에 새겨두는 게 바로 그런 것이다. 장차 필요할 때를 대비해 성경 말씀을 품는 것이다. 그 말씀이 필요한 때는 교묘한, 혹은 그다지 교묘하지 않은 어떤 죄에 마음을 빼앗기려고 하는 순간이다.
물론 특정 성경 구절을 외워 두는 게 무슨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외우기만 할 게 아니라 실생활에 적용을 해야 한다. 하지만 평소에 교묘한 죄의 문제에 적용할 수 있는 성경 구절을 외우고, 그 말씀을 두고 기도를 하면 특정 상황에 그 말씀이 떠올라 하나님의 뜻을 다시 생각하게 되어 주의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교묘한 죄의 유혹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지침을 얻게 된다. 성도들이 쉽게 용인하는 죄를 하나하나 살펴볼 때, 이런 각각의 죄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성경 구절들도 함께 소개하겠다.
여섯째, 우리가 묵인하는 죄들에 대해 기도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이는 성령을 의지해야 한다는 두 번째 지침과 외워둔 성경 구절을 두고 기도해야 한다는 다섯 번째 지침에 이미 전제되어 있다. 하지만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기도를 죄 문제 처리의 주요 지침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성령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시인하게 되고, 또 기도를 통해서 우리 삶 속에 그 집요한 죄의 패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계속 인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교묘한 죄에 관해 기도할 때는 두 가지 단계를 밟아야 한다. 먼저 계획을 세워놓고 일관성있게 기도해야 한다. 매일 갖는 경건의 시간이 아마 이런 기도를 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일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교묘한 죄를 유발시키는 상황을 만날 때마다 짧고 자연스럽게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
일곱째, 교묘한 죄에 대항하는 이 싸움을 다른 크리스천 한두 명과 더불어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은 서로 권고하고, 격려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상호 관계를 맺어야 한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보다 둘이 더 낫다. 둘이 함께 노력하면 더 좋은 결과를 얻기 때문이다. 넘어지게 되면 하나가 다른 하나를 일으켜줄 수 있다"(전 4:9-10). 우리는 서로 약점을 드러내 보여줄 수 있어야 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져주어야 하며, 그와 동시에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힘을 북돋아주어야 한다. 그래야 죄 문제를 해결하는 데 발전을 이룰 수 있다.
이 모든 지침들을 다 따르기가 힘들 것 같은가? 그렇다면 다음과 같이 짧게 정리하면 훨씬 쉬워 보일 것이다.
● 복음을 적용하라
● 성령께 의지하라
● 자기 책임을 인식하라
● 삶 속에서 용인하고 있는 죄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분별하라
● 관련 성경 구절을 외워두었다가 적용하라
● 기도하는 훈련을 하라
● 동료 크리스천 한두 사람과 협력하라
이 지침을 활용할 때 기억해야 할 것은, 내 마음은 육체와 성령이 싸우는 전쟁터라는 사실이다.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욕망은 육체를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상반되기 때문에 여러분이 원하는 것들을 할 수 없게 합니다"(갈 5:17). 이 게릴라전에서 때로는 육체가 우세할 때도 있다. 어떤 특정한 죄를 죽이려는 목표를 세웠는데 상황이 좋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나빠질 수도 있다. 그럴 때는 이것을 명심하라. 그것이 정상이다. 성령께서는 이런 불순종과 좌절의 시기를 이용하여 내 교묘한 죄가 얼마나 뿌리 깊은지, 내가 성령의 도우시는 능력에 얼마나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는지 볼 수 있게 해주실 것이다.
이제 우리가 흔히 묵인하고 지나가는 구체적 죄들을 하나씩 살펴볼텐데, 각 죄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실제적 제안도 함께 해나갈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알아본 일곱 가지 지침들을 기본적으로 적용할 것이므로 그 내용을 철저하게 소화해두는 것이 도움이 된다.
교만 - 자기만 높이는 죄
왜 잘난 체하는가? 우리에게는 자랑할 만한 근거가 없다. 자랑을 하는 것은 성공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눈을 돌려 자신의 교만을 보라
성경에 등장하는 혐오스러운 인물 가운데 특히 그 정도가 심한 사람은 "하나님, 저는 다른 사람들, 곧 남의 것을 빼앗는 사람이나 불의한 사람이나 간음하는 사람과 같지 않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던, 자기 의에 빠진 바리새인일 것이다(눅 18:11). 그러나 그 사람을 정죄하는 우리 역시 그와 똑같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태도에 빠져들기 쉽다.
지금부터 다루게 될 교만이라는 죄는 일반적인 의미의 교만이 아니라 특별히 크리스천들에게 유혹거리가 되는 그런 교만이다. 구체적으로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교만, 내가 신봉하는 교리만 옳다는 교만, 성공은 내것이라는 교만, 영적 권위에 반항하는 교만에 대해 살펴보게 될 것이다. 이런 교묘한 죄에 대해 설명하면서 나 자신이 무슨 검열관이라도 된 듯한 교만에 빠지지 않기를 기도한다. 그래서 아예 시작부터 고백하는데, 나 또한 교만이라는 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남을 가르친다는 구실 뒤에 모습을 감추고 있는 교만 말이다. 교만의 문제점 한 가지는, 다른 사람의 교만은 잘 보면서 자기 자신의 교만은 잘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의 이 말이 아주 마음에 와닿는다. "그렇다면 남을 가르치는 그대가 왜 자신은 가르치지 않습니까?"(롬 2:21) 우리 함께 하나님께 청하자. 하나님 눈에 보이는 우리의 교만을 똑똑히 보여달라고 말이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문제라는 사실은 야고보와 베드로가 입을 모아 경고하는 말에서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사람을 물리치시고"(약 4:6, 벧전 5:5).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교만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의 교만은 '도덕적 자기 의'라고 이름붙일 수 있다. 이는 자기가 남들에 비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의식이다. 이런 유형의 교만은 비단 크리스천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정치인들과 문화계 인사들 사이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진보주의자든 보수자의자든 예외는 없다. 예를 들어 정치, 경제, 혹은 환경 정책 같은 분야에서 자기가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도덕적 자기 의에 빠질 위험이 크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보수 복음주의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 도덕적 자기 의는 아주 흔하게 나타난다.
오늘날 크리스천들은 도덕적 우월감과 자기 의라는 죄에 빠지기가 쉽다. 사회가 전반적으로 이혼이나 동성애, 낙태, 술취함, 약물 남용, 탐욕 등 여러 가지 명백하고 추악한 죄를 공공연히 저지르거나 묵과하는 데 비해 크리스천들은 그런 죄를 거의 짓지 않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도덕적으로 우월감을 느끼면서 그런 죄를 짓는 사람들을 어느 정도 경멸과 멸시가 담긴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죄들이 우리 사회의 도덕 구조를 다 무너뜨릴 만큼 심각한 죄가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이것은 정말 심각한 죄며, 이런 죄에 대해 예언자적 목소리를 높이는 우리 사회의 기독교 지도자들을 존경한다. 하지만 우리 역시 도덕적 자기 의라는 죄에 빠져들고 있으며, 그 결과 그런 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을 멸시하는 죄까지 짓고 있다. 사실 바리새인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는 "자기가 의롭다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은 업신여기는 몇몇 사람들"에 관한 비유였다(눅 18:9).
이 책에서 다루게 될 모든 교묘한 죄 가운데 도덕적 우월감이라는 교만은 크리스천들에게서 아주 흔히 볼 수 있는 죄로, 아마 불경건함 다음으로 많이 짓는 죄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죄를 알아차리기가 힘든 것은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이 죄를 어느 정도는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주변 세상이 날이 갈수록 타락하고 있는 것에 대해 갑론을박하면서 그런 논쟁을 은근히 즐기는 것 같다. 그런 대화를 할 때 우리는 도덕적 우월감이라는 교만의 죄를 짓는다.
그렇다면, 자기 의라는 죄를 경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하나님 은혜가 아니었다면 나도 저 사람들과 똑같을 것"이라는 진리에 근거하여 늘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비록 이 말이 뭔가 좀 진부한 표현이 되어가고 있기는 하지만, 이는 크리스천이라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사실이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정직하다면, 특히 도덕적으로 정직한 삶을 살려고 애쓰는 크리스천이라면, 그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효력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날 때부터 도덕적으로 정직한 사람은 없다. 사람은 누구나 다윗처럼 "나는 분명히 죄 가운데 태어났습니다. 내 어머니가 죄 가운데 나를 잉태한 것입니다"라고 말해야 한다(시 51:5). 우리가 정죄하는 명백한 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에게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런 삶에서 벗어난 것에 대해 깊은 감사를 느껴야 한다.
자기 의에 빠지는 교만을 경계하는 또 한 가지 방법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죄악된 세상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바벨론 포로 시대가 끝나고 많은 유대인들이 유다 땅으로 돌아왔을 때, 모세 율법에 정통한 서기관 에스라는 백성들에게 하나님 율법을 다시 가르치기 시작했다. 성경은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고 지키며 이스라엘에게 율례와 규례를 가르치겠다고 마음을 정했다"고 말한다(스7:10). 에스라는 모범적인 생활을 하는 경건한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어느 날 백성들 가운데 심각한 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자기도 그들과 똑같은 죄인으로 여겼다. 그 자신은 아무 죄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에스라서 9장 6절에 기록된 그의 기도를 보라. "하나님이여, 제가 주께, 하나님께 얼굴을 들기가 너무 부끄럽고 망신스럽습니다. 우리가 죄가 우리 머리보다 높고 우리의 죄악이 하늘까지 닿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어떤 말로 자기를 죄인의 무리에 포함시켰는지 주목하라. 그는 '우리의 죄', '우리의 죄악'이라고 말했다. 주변 세상의 도덕적 타락이 날로 그 도를 더해가고 있는 것을 지켜보면서 우리도 에스라 같은 태도를 지닐 필요가 있다. 그런 태도가 자기 의에 빠지는 교만에서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
내 교리만 옳다는 교만
도덕적 교만과 아주 가까운 사이가 바로 교리적 교만이다. 교리적 교만이다. 교리적 교만이란, 나의 교리적 믿음이 어떠하든 내 믿음만 옳고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신학적으로 열등하다는 억측이다. 교리에 유난히 관심이 많은 사람이 이런 교만에 빠지기 쉽다. 자기가 아르미니우스파 신자든지, 칼빈주의자든지, 세대주의 신학을 신봉하든지, 언약 신학을 신봉하는지, 혹은 일종의 절충주의를 포용하든지 상관없이 우리는 자기의 교리적 믿음만이 옳다고 생각하면서 나와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은 다소 멸시하는 경향이 있다. 또 한편에서는 교리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교리를 중시하는 이들을 경멸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형태의 교만은 우리의 특정 신앙 체계 속에 있는 교만으로서, 그 신앙 체계가 무엇이든지 내 믿음 안에서 나는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 비해 영적으로 우월하다고 여기는 태도다.
고린도전서 8장에서 바울은 우상에게 바쳤던 음식을 먹는 문제와 관련하여 이런 형태의 교만에 대해 이야기한다. 고린도 교회의 일부 크리스천들은 우상에게 바쳤던 음식을 먹는 문제는 크리스천의 자유영역에 속하는 일이라고 결론내렸다. 바울도 그와 같은 결론에 동의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그들의 그런 믿음에서 비롯되는 교리적 교만에 대해서는 엄히 꾸짖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지식이 있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모두를 이롭게 합니다." 바울은 그들의 '지식'에는 동의했다. 즉, 우상에게 바쳤던 음식을 먹는 문제에 관한 그들의 교리적 믿음에는 동의했다. 하지만 그들의 교리적 교만에 대해서는 책망했다. '지식'이 그들을 우쭐대게 만들었던 것이다.
자기 신앙이 칼빈주의 신앙이든, 아르미니안 신앙이든, 혹은 세대주의적 신앙이든, 종말에 관해 어떤 견해를 지녔든, 아니면 교리적 믿음을 아예 경멸하는 입장이든 그 신앙 때문에 혹여 나와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교리적 우월감을 느낀다면, 그것이 바로 교리적 교만의 죄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진리를 알려고 애쓰지 말라거나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는지에 대해 교리적 신념을 키워가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내 말은, 신념을 갖되 겸손하게 가져야 하며, 신학적으로 유능하며 경건한 사람들 중에 나와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도 많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언젠가 어떤 책에 대해 논평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이 있다. 그 책은 내가 강력하게 반대하는 성화 교리를 주제로 쓰인 책이었다. 답변지에 나는 이렇게 썼다. "나는 '내가 동의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할 뿐이지 이 책의 저자가 틀렸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천국에 가면, 틀린 건 바로 나였다는 걸 알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내 신념이 전보다 더 약해졌는가? 전혀 아니다. 그 책을 읽고나서 오히려 내 신념은 더 강해졌다. 하지만 그렇게 쓴 것은 내 신념을 겸손하게 유지하기를 원하며, 성화 교리에 대해 나와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대할 때와 똑같은 존경심으로 그 책의 저자를 대하고 싶다는 의미다(나 자신을 우리가 실천해야 할 겸손의 본보기로 제시하자니 오히려 그것을 자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구나 싶다. 실상 나는 그렇게 겸손하지 않으며,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너그럽게 대하지 못하거나 존중하지 못할 때도 있다).
이 부분에서 중요한 것은 교리적 교만이 얼마나 위험한 죄인지 깨닫고, 무심코 지나치는 죄 가운데 혹시 이 죄가 있지는 않은지 기도하는 마음으로 고민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자신에게 그런 죄가 있다고 생각된다면, 고린도전서 8장 1절에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한다"는 말씀을 외워서 그 말씀을 두고 기도할 것을 권한다. 그런 다음 내가 어떤 부분에서 교리적으로 교만한 경향이 있는지 좀더 정확히 집어내서, 진실로 겸손한 자세로 내 확신을 유지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구하라.
성공은 내것이라는 교만
성경은 공부든, 운동이든, 사업이든, 혹은 직장 일이든 일반적으로 노력과 성공 사이에 인과 관계가 있다고 가르친다. 예를 들어 잠언 13장 4절에서는 "게으름뱅이의 영혼은 아무리 원하는 것이 있어도 얻는 것이 없지만 부지런한 사람의 영혼은 원하는 것을 넉넉하게 얻는다"고 말한다. 바울은 사역에 관해 디모데에게 권고하기를,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를 힘써라"라고 했으며(딤후 2:15), 바울 자신 역시 전력을 다해 사역했다(고전 9:26-27, 빌 3:12-14).
하지만 또 성경은 어떤 분야에서든 성공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제 아래 있다고도 가르친다(삼상 2:7, 시 75:6-7, 학 1:5-6). 사무엘상 본문을 보면 "여호와께서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십니다"라고 가르친다. 똑같은 학문을 전공하는 두 학생이 있는데, 둘 다 열심히 공부하지만 한 학생은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며 최고 점수를 받는 반면, 다른 한 학생은 평균에도 못 미칠 수 있다. 무엇 때문에 이런 차이가 생기는가? 하나님께서 둘 중 한 사람에게 지적 능력을 좀더 많이 주셨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전과 자극을 주는 가정에 태어나게 하셨기 때문일 수도 있다. 원인이 무엇이든, 어떤 분야에서 업적을 이루거나 성공을 할 수 있는 능력은 궁극적으로 다 하나님에게서 온다.
앞서 감사의 문제를 다루면서 신명기 8장 17-18절을 살펴보았다. 우리가 성공에 대해 감사를 드리는 이유는, 성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세상에 자력으로 성공하는 사람 즉, 혼자 힘으로 입신출세하는 사람은 없다.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사람은 순전히 불굴의 의지와 노력으로 성공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성공을 가능하게 했던 그 사업가 기질과 사업 수완은 누가 준 것인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교만한 고린도 교인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누가 당신을 구별합니까? 당신이 가진 것 가운데 받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 당신이 받은 것이라면 왜 그렇지 않은 것처럼 자랑합니까?"(고전 4:7) 내가 가진 것 가운데 하나님께 받지 않은 게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다. 지적 능력과 타고난 솜씨와 재능, 건강과 성공의 기회 등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성공을 이룰 수 있게 하는 것 중 하나님께 받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왜 잘난 체하는가? 누구라도 알 수 있을 만큼 교만한 태도로 자랑하든 자랑하고는 싶지만 자랑하는 것으로 보이기 싫어 교묘히 자랑하든 자랑하고는 싶지만 자랑하는 것으로 보이기 싫어 교묘히 자랑하든 우리에게는 자랑할 만한 근거가 없다. 어떤 식으로 자랑하든 자랑을 한다는 것은 성공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열심히 노력한 것도 성공의 원인에 포함될 수 있다. 하지만 성공할 수 있는 능력과 성공하고자 하는 욕구는 누가 주었는가? 그 노력에 축복한 분이 누구인가?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내가 보기에 유난히 더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은, 사업이 됐든 뭐가 됐든 엄청난 노력이 자기의 성공 비결이라고 사방팔방에 떠들어대며 허세부리는 사람이다. 불신자들만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니다. 크리스천들 중에도 그런 이들이 있다. 그런 경우에는 정말로 불쾌하다. 비교적 점잖게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만약 자기의 성공이나 자녀의 성공에 대해 하나님께서 축복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역시 하나님께 무례를 범하는 것이다.
매년 성탄절 무렵이면 우리 부부는 오랜 세우러 동안 알고 지내온 친구와 지인들로부터 많은 편지를 받는데, 거기에는 가끔 이런 내용의 편지도 있다. "저희 아들 존이 하버드 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이런 좋은 소식을 알리는 건 잘못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우리 아들 정말 똑똑하지 않아요?"라는 의미가 담겨 있을 뿐, 아들의 지적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하는 말은 단 한 마디도 없다.
자녀들이 이룬 일에 대해 우쭐해하는 교묘한 죄를 피하려면 이렇게 말해야 한다. "저희 아들 존이 하버드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저희는 하나님께서 존에게 그런 지적 능력을 주신 것을 인정하고 깊이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능력을 모든 아이들에게 다 주시지는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존에게도 이런 감사의 태도를 심어주려 애썼고, 네가 가진 이 능력은 다른 사람을 섬기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쓰라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청지기 직분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누구든 친구에게서 이런 편지를 받으면 하나님께 복을 받은 그 친구와 더불어 기뻐할 것이다. 원칙을 설명하기 위해 공부를 잘하는 것을 예로 들었지만, 존이 축구 명문대학의 주전 공격수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혹은 학교를 졸업하고 사업체로 뛰어들어 잘 나가는 기업체의 부사장으로 승진했다고 해도 다르지 않다.
우리 자신의 성공이든 자녀의 성공이든, 그리고 분야가 무엇이든, 성공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면 그 업적에 대해 교만한 마음이 생겨나며 이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다. 이런 형태의 교만은 죄다. 교묘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죄인 것은 분명하다.
자기 자신이나 자녀의 성취에 대한 교만은 또 지나칠 정도로 남에게 인정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도 표현된다. 어떤 일을 잘 해냈을 때, 혹은 직장이나 교회에서 오랜 세월 동안 성실하게 일한 것에 대해 칭찬을 받으면 누구나 다 감사해한다. 하지만 어떤 특정한 일을 잘 해냈는데 누구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하면, 그때 우리의 태도는 어떠한가? 아무도 몰라줘도 모든 일을 주께 하듯 그저 묵묵히 수고하려고 하는가, 아니면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품는가?
인정받고 싶은 죄된 욕구를 경계하는 데는 성경에서 얻을 수 있는 두 가지 원칙이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 누가복음 17장 10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대로 다 마치고 나서 '우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어떤 일을 잘 해냈거나 혹은 직장이나 교회를 많은 세월 동안 성실히 섬겼을 때, 우리는 "저는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둘째, 인정은 그것을 직접 표현한 사람이 누구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은 높이고 어떤 사람은 낮추기도 하는 분이시다(시 75:6-7). 이 두 가지 원칙을 종합하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모든 것이 다 은혜다." 나는 아무 자격도 없고, 사람들의 인정을 비롯해 내가 받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다. 그러므로 설령 인정을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초조해하지 말아야 한다.
영적 권위에 반항하는 교만
독립심은 주로 두 가지 영역에서 나타난다. 하나는 권위, 특히 영적인 권위에 대한 반항이고, 또 하나는 도무지 가르침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태도다.
흔히 이 두 가지 태도는 동사에 나타난다. 유달리 젊은 사람들은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내 친구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자기가 얼마나 무식한지 잘 모른다." 결혼 전에 나는 어린아이가 있는 집에서 하숙 생활을 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그 집 부모가 아이를 키우는 모습을 보고 마음속으로 얼마나 비판을 했는지 모른다. 얼마나 교만했는지! 한 번도 자녀를 키워본 적이 없으면서도 자녀 교육에 대해 내가 그 부모들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햇다.
네비케이토에서 사역하던 시절, 경험 없는 신참 감사들에게도 이와 비슷한 태도를 자주목경했다. 이 간사들에게는 흔히 인턴 역할이 주어지는데, 경험 많은 고참 간사의 지도를 받으며 섬기는 것이 주된 일이다. 그런데 이들은 자기를 훈련시키는 고참 간사보다 자기가 사역에 대해 더 잘 안다는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좀처럼 윗사람에게 순복하려 하지 않고, 자기보다 성숙한 간사의 지시에 따르려하지 않는다.
하지만 성경은 윗사람에게 순복하는 문제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가르친다. 이에 대해 가장 분명한 가르침을 주는 말씀은 히브리서 13장 17절이다.
여러분을 인도하는 사람들을 신뢰하고 순종하십시오. 이는 그들이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께 아뢰야 할 사람들인 것처럼 깨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로 기쁨으로 이 일을 행하게 하고 근심함으로 행하지 않게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에게 유익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마 지교회의 영적 어른인 장로들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윗사람에게 순복하며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원칙은 자기보다 성숙한 크리스천에게서 지도나 훈련을 받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적용이 된다. 도무지 남의 가르침을 받으려 하지 않거나 순복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바로 독립심이라는 교만이다.
히브리서 13장 17절의 가르침을 처음 접하던 날 밤을 나는 또렷이 기억한다. 당시 나는 신출내기 해군 장교였다. 나는 선상에서 상관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개념을 잘 알고 있었고, 학교에 다닐 때도 선생님의 권위를 철저히 존중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영적인 권위에 순복해야 한다는 것은 정말 낯설고 혁명적인 개념이었다. 나는 이 원칙을 접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했다. 마침 바로 그 다음 날 밤 네비게이토 선교회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이 선교회는 일대 일 제자 훈련과 멘토링을 강조하는 단체였다. 영적 권위에 대한 순복이라는 이 새로운 개념을 깨달았기에 나는 윗사람이 가르쳐주는 것을 쉽게 받아들였고, 또 다른 사람으로부터 제자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이 도전에 지체없이 응할 수 있었다.
영적인 권위에 반항하고 가르침을 받지 않으려 하는 태도는 학생이나 젊은이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장년층을 상대로 성경을 가르칠 때도 이런 태도를 지닌 사람을 가끔 만나게 된다. 이들은 내가 무언가를 가르치려고 하면 "글쎄요, 제 생각은 어쩌구 저쩌구…"하는 반응을 보인다. 성경을 근거로 한 주장은 거의 없다. 그저 자기 의견일 뿐이다. 하지만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그 의견이 권위를 지닌다. 성경의 가르침과 씨름하여 그 뜻을 알고자 하는 마음은 없다.
성경은 기꺼이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하고 있다. 특히 잠언에는 이 문제와 관련된 말씀들이 아주 많다. 예를 들어 잠언 처음 몇 장의 구절들을 생각해보자.
내 아들아, 네가 내 말을 받아들이고 내 명령을 마음속 깊이 간직해… 잠 2:1
내 아들아, 내 가르침을 잊지 말고 내 명령을 네 마음에 잘 간직하여라. 잠 3:1
자녀들아, 아버지의 가르침을 잘 듣고 주의해 깨달음을 얻으라. 잠 4:1
내 아들아, 내 지혜에 주의하고 내가 깨달은 것에 귀를 기울여라. 잠 5:1
내 아들아, 내 말을 지키고 내 계명을 네 속에 간직하여라. 잠 7:1
이 말씀들은 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훈계하는 말이지만, 여기서 한결같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기꺼이 가르침을 받으려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나보다 신앙이 성숙한 사람에게서 기꺼이 배우고자 해야 하며, 배우기를 열망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영적인 권위자가 "너는 누구와 결혼해라" 혹은 "어느 직장에서 일해라"라고 지시할 권위가 있다는 뜻은 아니다. 나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성경에 근거한 지혜로운 조언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나보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으로서 나 또한 성숙한 크리스천으로 자라서 남을 돕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이제 우리 삶 속에 있는 교묘한 죄들이 점점 밝히 보이는가? 진심으로 그렇기를 바란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서 죄라고 말하는 것들을 전혀 죄로 여기지 않는다. 너무도 흔히 볼 수 있고, 또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죄들을 죄로 생각하지 않는다. 설령 그 교묘한 행동들이 죄라는 데 동의할지라도, 다른 사람에게서만 그 죄를 볼 뿐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죄는 보지 못한다.
혹시 나에게 그런 교만이 있지 않은지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그런 다음 그것이 죄인 것을 고백하라. 그리고 이사야서 66장 2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라. "내가 굽어보는 사람은 학대를 받아서 괴로워하는 사람, 마음이 찢어지고 깨진 사람, 내 말이라면 벌벌 떠는 사람이다."
자제력 부족 - 욕구에 지배당하는 죄
자제력이란 자신의 욕구와 갈망, 충동과 감정, 열정을 제어하는 것, 혹은 신중하게 통제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안 돼"라고 해야 할 때 행동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정당한 욕구와 정당한 행동일지라도 절제하고, 명백히 죄악된 일은 절대적으로 제한하는 것을 말한다.
자제력 부족은 심각한 죄를 부른다
"자제력이 없는 사람은 성벽이 무너져내린 성과 같다"(잠 25:28). 성경 시대에는 성벽이 도성을 방어하는 주요 수단이었다. 성벽이 뚫리면 침략군이 도성 안으로 쏟아져들어와 성은 곧 정복당하고 만다. 여리고성이 무너진 성경 기사를 생각해보면 잘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의 성벽이 무너지게 하시자 이스라엘 군대가 쉽게 성 안으로 들어가 성을 접수할 수 있었다(수 6:1-5, 20).
성벽 없는 성이 침략군에게 취약한 것과 마찬가지로, 자제력이 없는 사람은 온갖 유혹에 넘어가기 쉽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잠언 25장 28절 말씀을 기록한 장본인인 솔로몬이 이 사실에 대한 서글프고도 생생한 본보기다. 성경은 솔로몬에게 칠백 명의 아내와 삼백 명의 첩이 있었다고 기록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 여인을 아내로 삼아서는 안된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건만 그는 이방 나라 여기저기에서 아내와 첩을 맞아들였다(왕상 11:1-3). 솔로몬은 이리저리 열정에 휘둘려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철저하게 무시했다. 그 시대에 가장 부유한 군주였던 솔로몬은 자기가 바라는 것은 뭐든지 다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자제력을 발휘하기보다는 자기 입에서 나온 지혜의 말들을 다 무시하고 열정의 지배를 받았다. 솔로몬은 자제력이 부족했던 것에 대해 엄중한 대가를 치렀다. 이방인 아내들로 인해 그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돌아섰고,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시대에 왕국을 둘로 분열시키셨다. 그때부터 다윗 왕조는 힘을 잃고 말았다.
잠언이나 신약성경에서 많이 보아왔듯이, 성경은 자제력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하고 있다. 바울은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가 자제력이라고 했으며(갈 5:22-23), 자제력이 부족한 것을 말세의 악한 징표 중 하나로 여겼다(딤후 3:3). 그는 크레타에서의 사역과 관련하여 디도에게 교훈하면서 자제력에 관해 몇 가지 권면을 하며(딛 2:2, 5-6),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은혜가 자제력 있는 삶을 살도록 우리를 훈련시키기도 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딛 2:11-12). 베드로 또한 두 서신에서 정신을 차리라, 혹은 절제하라고 몇 차례나 반복해서 말한다(벧전 1:13, 4:7, 5:8, 벧후 1:5).
자제력에 관한 성경의 많은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자제력이라는 덕목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 같다. 크리스천 문화에는 명백한 죄를 짓는 것을 제한하는 일정한 경계가 있지만, 그 경계 안에서 우리는 마음 가는 대로 살아간다. 자신의 욕구나 감정에 대해 좀처럼 '안 돼'라고 말하는 법이 없다. 자제력 부족은 비교적 '점잖은' 죄에 속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제력이 부족한 것을 묵인하다보면 우리는 다른 '용인할 만한' 죄에 더욱 취약해진다. 예를 들어 말의 자제력이 부족하면, 남을 비꼬고 헐뜯고 비방하고 조롱하는 등의 온갖 더러운 말을 향해 문을 열어주는 셈이 된다.
자제력이란 무엇인가? 이는 자신의 욕구와 갈망, 충동과 감정, 열정을 제어하는 것, 혹은 신중하게 통제하는 것을 말한다. 자제력이란 "안 돼"라고 해야 할 때 행동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정당한 욕구와 정당한 행동일지라도 절제하고, 명백히 죄악된 일은 절대적으로 제한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텔레비전 시청을 절제하는 것, 인터넷으로 음란물 보는 것을 절대 제한하는 것 등을 생각할 수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자제력은 사람이 본디 타고난 의지력이 아니다. 불신자들 중에도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 특정 영역에서 자제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 영역을 제외한 다른 영역에서는 절제력이 거의 없이 살아간다. 운동 선수는 체중 조절을 위해 음식물 섭취를 철저히 제한하는 것은 잘하지만, 성격 면에서는 자제력이 아주 부족한 경우도 많다.
성경에서 말하는 자제력은 삶의 모든 영역을 다 포괄하며, 우리 영혼을 대적해 싸우는 육체의 정욕과 쉼없이 갈등을 벌일 것을 요구한다(벧전 2:11). 이 자제력은 성령의 영향력과 우리에게 힘 주시는 그 능력에 의존한다. 자제력을 발휘하려면 우리의 생각이 쉼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접해야 하며, 자제력을 발휘하려는 욕구와 능력을 주시도록 성령충만을 구하는 기도를 계속해야 한다. 자제력은 자기 의지력을 통해 혼자 힘으로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통제하는 것이다.
음식의 유혹이 있을 때
자제력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발휘되어야 하지만, 여기서는 크리스천들이 특히 취약함을 보이는 세 가지 영역에 대해서만 알아보려고 한다. 첫 번째는 먹고 마시는 영역이다.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나도 소위 '체중 문제'에서 예외가 아니다. 체중 문제는 자제력 부족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자제력이 정말 강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줄곧 체중과 씨름해야 했다. 한편, 먹고 싶은 대로 다 먹는데도 살이 안 찌는 사람은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오히려 먹고 마시는 문제에서 자제력을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다.
지금 나는 특정 음식에 대한 욕구에 번번이 무릎을 꿇는 경향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아주 신실한 크리스천인 내 친구 한 명은 하루에 탄산음료를 열두 캔이나 마신다. 오래 전에는 나도 아이스크림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저녁 식사 때 한 통을 먹고, 잠자리에서 한 통을 또 먹을 정도였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겉보기에 별 문제없어 보이는 이 습관 때문에 좀더 중요한 다른 영역에서 내 자제력이 크게 약화되었다는 것을 깨우쳐주셨다. 그 일을 통해 우리가 삶의 어느 영역에서 자제력을 발휘할지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자제력을 발휘하는 한 가지 방법은, 욕구를 이기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다 치워버리는 것이다. 아이스크림을 예로 들자면, 나는 냉장고에 아이스크림을 사다놓지 말라고 아내에게 부탁했다. 지금은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아이스크림을 산다. 그 결정을 한 게 벌써 삼십 년 전의 일이지만, 나는 지금도 여전히 아이스크림에 대해서 자제력을 발휘해야 한다. 얼마 전에 소포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는데, 공교롭게도 우체국이 아이스크림 가게와 한 건물에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은 강렬한 욕구와 씨름하면서 나는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생각했다. 욕구를 자제하기 위해서 나 자신에게 "안 돼!"라고 말해야 하는 때 말이다.
아이스크림이나 탄산음료를 즐기는 사람,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날마다 스타벅스에 가는 사람들을 죄책감으로 옭아매려는 말이 아니다. 내 말은, 자제력 부족이란 우리가 욕구를 지배하는 게 아니라 욕구에 굴복해서 욕구가 우리를 지배하게 만드는 걸 뜻한다는 것이다.
화나는 일이 생길 때
크리스천들이 자제력 부족을 보이는 두 번째 영역은 성격의 영역이다. 크리스천들 중에도 성격이 불 같은 사람, 성질이 급한 사람이 있다. 또 성격이 불 같은 사람은 화를 버럭 냈다가 곧 언제 그랬느냐는듯이 유순해진다. 또 성질이 급한 사람은 쉽게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는 사람, 자기 감정을 잘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성격이 불 같은 사람 중에 성질 급한 사람이 많다. 그런 사람더러 우리는 "걸핏하면 이성을 잃는다"고 말한다.
분노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살펴볼 것이므로 여기서는 자제력을 잃고 화를 내는 행동에 대해서만 생각해보자. 대개의 경우 분노는 죄다. 하지만 성질 급한 사람에게는 자제력 부족이라는 죄가 하나 더 추가된다. 우리는 보통 나를 불쾌하게 만드는 사람에게 화를 낸다. 그 사람은 도로에서 내 차 앞에 끼어드는 운전자일 수도 있고, 교인들끼리 발야구 시합을 할 때 부당하게 휘슬을 부는 심판일 수도 있다. 불행한 일이지만, 사랑하는 가족에게 화를 내는 경우도 자주 있다.
잠언에는 급한 성격을 경고하는 말씀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쉽게 화내는 사람은 어리석게 행동하고"(잠 14:17), "화내는 데 더딘 사람은 용사보다 낫고 마음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은 성을 빼앗는 사람보다 낫다"는 말씀이 있다(잠 16:32). 신약성경에서는 야고보가 "노하기도 천천히 하십시오"라고 훈계한다(약 1:19). 우리는 주께 죄짓지 않기 위해 주의 말씀을 마음에 품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잠 119:11). 잠언과 야고보서의 이 말씀을 마음에 품는다면 화가 날 때 자제력을 발휘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갖고 싶은 것이 있을 때
크리스천인들이 자제력 부족을 보이는 세 번째 영역은 개인 재정의 영역이다. 최근에 한 라디오 방송을 들으니 평범한 미국인 가정의 신용카드 빚이 평균 7천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긴급 상황에서는 개인이나 가정에 그 정도 빚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평균 부채가 7천 달러라는 사실은 미국인들이 분수에 넘치는 소비 생활을 하고 있다는 증거다.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우리는 재정적인 면에서 자제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새 옷, 최신 전자제품이나 디지털 기기, 호화스러운 휴가, 그밖에 우리의 욕구를 자극하는 갖가지 상품 등…. 우리는 갖고 싶은 것에 대한 욕구에 굴복하고 있다.
크리스천들 사이에서도 이것이 문제라는 사실은 몇몇 기독교 사역 단체가 크리스천들의 재정 운영을 돕는 일에 전념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한 마디로 만해 이 단체들은 크리스천들이 자제력 발휘하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돕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소비 문제에서 자제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은 비단 빚을 지고 사는 사람들만이 아니다. 크리스천을 포함해 여유있는 사람들 중에도 자기 마음의 욕구에 무릎을 꿇는 이들이 많다. 이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 전도서 기자와 똑같은 사람들이다. "나는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은 멀리하지 않았고"(전 2:10), 마음이 무엇을 원하든 그때마다 굴복하는 것은 설령 재정적으로 그럴 만한 여유가 있다 할지라도 성령의 열매인 자제력을 얻는 방법이 아니다.
우리가 자제력을 배워야 할 영역은 이밖에도 많다. 컴퓨터에 너무 많은 시간을 쏟아붓는 사람도 있다. 설령 음란물을 보지 않는다 할지라도 말이다. 텔레비전을 너무 많이 보는 것, 충동 구매나 취미 생활에 몰입하는 것, 스포츠 경기를 하거나 관람하는 것 등도 자제력이 발휘되어야 할 영역이다. 남성의 경우, 여성들의 옷차림이 점점 더 대담해지는 시대를 살고 있는 만큼 눈으로 보고 머리로 생각하는 것에 대해 자제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자제력 부족이 드러나는 영역이 비단 이것들 뿐이겠는가. 자기 삶을 한 번 되돌아보라. 내 삶 속에 통제되지 않는 욕구와 갈망, 감정 등이 있지는 않은가? 이 책은 비교적 '보기 흉하지 않은' 죄, 혹은 '용인할 만한' 죄, 우리가 삶 속에서 묵인하고 있는 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크리스천조차도 자제력이라는 미덕을 별로 강조하지 않는 시대에 살면서 어쩌면 삶의 어떤 특정 영역에서 자신이 자제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아예 모르고 있었을 수도 있다. 이제 자제력이 부족한 영역을 발견했는가? 그에 대한 자제력을 키우고자 노력할 것인가? 그렇다면 자제력이 성령의 열매라는 것을 늘 기억하라(갈 5:22-23). 오로지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하나님의 권능으로써만 우리는 많은 적든 발전을 이룰 수 있다.
<(크리스천이 꼭 이겨야 할) 마음의 죄(Respectable Sins)>(두란노)
- 제리 브리지스(Jerry Bridges) 지음 오현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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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도 없고 반찬거리도 못사고 있습니다
병원 치료약도 다 못사고 먹을것도
없습니다 먹거리를 사도록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후원은 카페지기에게 큰힘과 용기가 됩니다
이달에도 치료약값이 필요합니다 많이 힘이드네요...
카페지기는 지병.때문에 매달 치료비가 많이듭니다
매월 공과금과 LH.주거임대 임대료 관리비 마련이 어렵습니다
먹을것 반찬거리도 사야 살아가는데 지병과 장애 나이도
들다보니 수입이 전혀 없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카페지기 전화입니다 010.2261~9301
국민은행 229101-04-170848 예금주.황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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