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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1주_회개와 용서를 간구하다!
이사야 64:4-11
4. 정의를 실천하고 당신의 길을 잊지 않는 사람이 당신 눈에 띄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당신께서 이렇듯이 화를 내신 것은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고 처음부터 당신께 반역하였기 때문입니다.
5. 우리는 모두 부정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기껏 잘했다는 것도 개짐처럼 더럽습니다. 우리는 모두 나뭇잎처럼 시들었고 우리의 죄가 바람이 되어 우리를 휩쓸어갔습니다.
6. 당신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는 자도 없고 당신께 의지하려고 마음을 쓰는 자도 없습니다. 당신께서 우리를 외면하시므로 우리는 각자 자기의 죄에 깔려 스러져가고 있습니다.
7. 그래도 야훼여, 당신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진흙, 당신은 우리를 빚으신 이, 우리는 모두 당신의 작품입니다.
8. 야훼여, 너무 노여워 마십시오. 우리 죄를 영원히 기억하지는 마십시오. 굽어살펴 주십시오. 우리는 모두 당신의 백성입니다.
9. 당신의 거룩한 성읍들은 폐허가 되었습니다. 시온은 무인지경이 되었고 예루살렘은 쑥밭이 되었습니다.
10. 우리 선조들이 모여 당신을 찬양하던 곳, 그 웅대하던 우리의 성전이 불에 타버렸고 귀중하게 여기던 모든 것이 망그러졌습니다.
11. 야훼여, 이렇게 되었는데도 당신께서는 무심하십니까? 우리가 이렇듯이 말못하게 고생하는데도 보고만 계시렵니까?
대림절(待臨節, 영어: Advent)이 시작되었습니다. 대림절은 기독교에서 크리스마스 전 4주간을 예수의 탄생과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력 절기입니다. 대강절, 강림절로도 불리는데 이 절기의 어원은 오다(Adventus)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그런데 대림절(Advent)은 원래 로마 제국의 의식을 본뜬 것으로 보입니다. 즉, 신적 존재였던 황제가 새로 즉위하면 항상 여러 지역과 도시를 방문하는 의례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를 ‘His Advent’라고 불렀는데, 이를 보면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유일한 임금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적용하였다는 것이죠.
대림절의 예전(禮典) 색깔이 보라색인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고대 로마시대의 보라색은 황제의 상징으로 권위, 명성, 존엄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래서 욕심 많은 독재자 네로 황제는 보라색을 자신 외에는 아무도 쓸 수 없도록 법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부유한 귀족들이 보라색 옷을 입는 것을 견딜 수 없어 그 색을 쓰는 자를 사형에 처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보라색을 내는 염료는 레바논 바다에 서식하는 무렉스 브란다리스(Murex branddaris)라는 소라고둥의 점액에서 추출했는데, 1g의 염료를 만드는데 1만 마리의 고둥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제조과정도 쉽지 않았기 때문에 값이 매우 비싸 이 염료로 염색한 최상품 옷감 1파운드에로마 은화 1만 데나리온이었다고 합니다. 옷 무게가 금 무게와 같은 값이었다고 하네요.
오늘날 대림절의 보라색은 회개, 속죄의 상징으로 쓰이고 있는 데 그 이유는 확실하지 않지만 종교 개혁의 영향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가톨릭의 부패상을 공격하면서 검은 사제복을 입었습니다. 그 이후 교황이나 고위 사제가 입던 보라색 의상이 부패의 상징으로 여겨진 것이 아닌가 합니다.
유대인들의 달력이 유월절을 기점으로 시작되듯이 모든 교회력은 대림절로부터 시작됩니다. 오늘날의 대림절은 6세기 중엽 그레고리우스 1세(540~604) 때 정착되었습니다. 대림절을 철저하게 지켰던 동방교회는 이 기간에 그리스도의 신부(고후 11:2, 계 19:7)인 성도들의 결혼을 허가하지 않았으며 사제들은 결혼예식을 집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림절은 단순히 2천 년 전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대림절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렸던 그 마음 그대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성탄절이 가까워질수록 교회보다 오색찬란한 백화점과 쇼핑몰들에 많은 사람이 몰려들고 성탄절이 마치 산타클로스의 생일인 것처럼 변질되고 있는 이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고대하며 기대하는 대림절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대림절 첫 주에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철저한 자기 점검을 통한 회개입니다.
대림절 첫 주, 우리가 택한 본문은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그중에서도 제2이사야서의 기록 중 한 부분입니다. 제2이사야서라는 말은 이사야서를 이사야 선지자의 단일 저작이 아닌 복수의 저자로 보는 견해에서 나온 것입니다.
즉 이사야서 전반부인 1장~39장의 저자를 이사야로, 후반부인 40~66장을 포로기 이후의 다른 사람(제2이사야)으로 보는 견해이죠. 어떤 학자들은 제2이사야서를 또 나누어 제3이사야서(56-66장)를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구분 근거는 전반부와 후반부의 연대나 신학적 관점,나 문체의 통일성이 부족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전반부(1장~39장)는 불의하고 범죄하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선언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유다는 물론 이방과 주변 열강도 예외가 없죠. 배경이 되는 연대도 B.C. 8세기,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게 멸망하는 시기입니다. 이시기 남유다에서 활동하던 이사야는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보면서 남유다의 불안한 운명을 감지합니다. 특히 아하스 왕 때 발생했던 수리아와 에브라임 간의 전쟁(사 7:1-9)과 히스기야 왕 때 발생했던 앗수르의 유다 침공 사건을 경험하며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을 전하죠.
하지만 후반부(40~66장)에서는 하나님은 심판 가운데서도 회개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신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것이 바로 '남은 자' 사상입니다. 제2이사야는 고레스(Cyrus II)왕의 칙령으로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과 위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연대로는 제1이사야의 시대와 200년 차를 두고 있죠.
오늘 본문은 제2이사야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바벨론에 의해 패망한 민족의 고통을 바라보며 그 아픔을 부둥켜안고 탄식하며 드렸던 기도인 것입니다.
이 기도의 배경이 되는 시대 상황을 살펴 볼까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남유다는 3번의 침공을 받고 그때마다 포로로 잡혀갑니다. 남유다의 여호야김왕(B.C. 609-598년경) 제3년(B.C. 605년)에는 다니엘과 많은 귀족들이 끌려갔습니다(단 1:1-6). 여호야긴왕 때(B.C. 597년경)는 왕을 비롯한 지도자와 기술자들이 끌려갔죠(왕하 24:14). 세 번째는 남유다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 때(B.C. 598-586년경)입니다. 이때는 예루살렘 성이 완전히 파괴되었고, 성전 성물이 모조리 약탈당했습니다. 왕족이나 귀족, 학자 등 식자층은 모두 포로로 끌려가고 예루살렘에는 미천한 신분만 남게 되어 예루살렘 공동화 현상이 생길 정도였습니다(왕하 24:10-16; 렘 25:9-11).
바벨론 사람들은 유다인들을 향해서 "너희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비웃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말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죠.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는데도 하나님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셨고 하나님의 백성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 그토록 모진 고난을 당하는데도 하나님은 아무런 대답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에게는 전혀 미래가 보이지 않았고 희망이 없었습니다. 남겨진 유대 땅에도 희망은 없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이미 예루살렘을 차지해 버렸고 국토 대부분은 파괴되었습니다. 남아있는 유대인들은 대부분 소작농 신세였고 겨우 수확한 농산물도 바벨론에 빼앗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총체적인 위기가 다가온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만 바라보고 있던 이사야 선지자가 민족을 위한 중보의 기도를 간절히 드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기도에 담겨 있는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먼저 남유다의 멸망은 유다의 죄 때문이라는 고백입니다. 선지자는 유다 백성 모두가 부정한 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반역하고 죄를 지었다는 것이죠. 정의를 실천하고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죄가 바람이 되어 유다를 휩쓸어갔다는 고백입니다(4-5절).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끌려가 비참한 상황인데도 유다 백성들은 돌이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는 자도 없고 하나님께 의지하려고 마음을 쓰는 자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외면하셨고,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에 깔려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죠(6절).
이런 죄책 고백과 회개를 전제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구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 자신과 유대 민족이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임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진흙, 당신은 우리를 빚으신 이, 우리는 모두 당신의 작품”(7절)이라는 것이죠. 개역성경에는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반했으며 온갖 죄를 저지르며 창조주 하나님처럼 높아지려는 교만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어서 도시를 세우고 그 가운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날려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창 11:4)며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처럼 말이죠. 그 죄악의 결과가 지금 유다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입니다.
선지자는 “당신의 거룩한 성읍들은 폐허가 되었습니다. 시온은 무인지경이 되었고 예루살렘은 쑥밭이 되었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모여 당신을 찬양하던 곳, 그 웅대하던 우리의 성전이 불에 타버렸고 귀중하게 여기던 모든 것이 망그러졌습니다(9-10절)”라고 탄식합니다.
그러면서도 이사야는 야훼의 용서를 간구합니다. “야훼여, 이렇게 되었는데도 당신께서는 무심하십니까? 우리가 이렇듯이 말 못하게 고생하는데도 보고만 계시렵니까(11절)”, “야훼여, 너무 노여워 마십시오. 우리 죄를 영원히 기억하지는 마십시오. 굽어살펴 주십시오. 우리는 모두 당신의 백성입니다(8절)”라고 말이죠.
오늘 우리가 살고있는 대한민국의 현실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해방 이후 이처럼 정부가 나서 노골적인 친일행동을 한 적이 없습니다. 이 정부와 여당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헌법에 명시된 국민적 합의를 정면으로 거스르고 있습니다. 이승만 동상을 세운다며 4.19의거의 발단이 된 독재자를 찬양하고 미화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민족의 독립을 위해 자신을 내던졌던 항일무장 독립전쟁의 역사를 지우려 하고 있습니다. 홍범도, 안중근, 김좌진의 동상을 꼭 철거해야겠다는 것이 그들이 새로 쓰고 싶은 대한민국의 역사인가 봅니다.
일제의 성노예 범죄,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문제, 한일 군사협력의 등을 보면 양마치 우리 정부가 그 옛날 일제 총독부가 된 것은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언론 탄압도 도를 넘고 있습니다. 노골적인 방송장악 음모도 군사 작전하듯 착착 진행하고 있죠. 반민족 반민주적인 인사들을 국회 동의 없이 국자 요직인 국방, 통일, 문회체육, 방통위, 감사원, 국정원, 권익위 등에 밀어 넣습니다. 공영 언론사를 팔아넘기려고도 하죠.
정부 여당을 비판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악랄한 탄압을 자행합니다. 폭력적인 압수수색과 무리한 기소 등 검찰 권력을 마구 휘두르며, 없는 죄도 기우제식 수사로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시행령 개정이라는 꼼수로 법체제를 무력화 시키려고도 하죠.
경제가 엉망이 되어도 무역 적자가 사상 최고에 달하고, 세수가 70조 펑크가 나도, 무역 수지가 세계 5위에서 200위로 떨어져도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않고 있네요. 그럼에도 종부세 완화 등 부자 감세는 계속 진행 중입니다.
지난 11월 9일 방송3법과 노조법 2,3조(일명 노란봉투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의결되었습니다. 그런데 적법한 절차에 따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지 22일 만에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윤 대통령이 방송장악과 노동자 적대시 정책을 노골화 한 것입니다. 이전 농민과 간호사들이 요구한 양곡관리법과 간호법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까지 합치면 총 6번의 법 개정을 가로막은 것입니다. 노동자와 농민을 적으로 대하는 정부는 결코 경제를 살리지도 성공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지난 28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박람회기구(BIE) 총회에서 한국은 29표를 얻어 탈락했습니다. 165개 회원국 투표 결과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119표, 이탈리아 로마 17표를 얻었죠. 외교의 제1목표로 한 달에 한번 꼴로 외국을 나가 유치 총력전을 펼쳤다던 대통령실의 주장이 말짱 헛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우리 정부가 2030 세계박람회 유치를 위해 올해 편성한 예산은 3,228억 원입니다. 지난해 2,516억원을 더하면 5,744억원을 어디에 썼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정부 여당은 이것마저도 전 정부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어떤 미친 기자는 이 사실을 보도하며 석패했다고 썼으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이 외에도 온갖 차별과 부정의, 불평등 문제들이 우리 사회를 짓누르고 있지만 다 열거하기에는 시간상 생략합니다. 다만 하나 한반도에 드리운 전쟁의 위기에 대해서는 한 말씀 해야 하겠습니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후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은 점점 심해졌습니다. 지난 4월까지 윤석열 정권 1년 동안 미국의 전략무기는 무려 23차례나 한반도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전략무기를 동원해 한미연합훈련을 진행한 것이 15차례나 됩니다. 이에 대응한 북한의 미사일 발사, 위성 발사 등도 유래 없이 자주 일어났죠. 윤석열 정권 1년간 북한은 74발의 미사일을 발사했습니다.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발사한 67발보다도 7발이나 많은 숫자입니다.
11월 21일 북한이 군사정찰위성을 발사하자 정부는 공언한 대로 9.19 남북군사합의 일부 조항을 효력 정지했습니다.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한 1조3항 효력이 정지하고, 과거에 시행하던 군사분계선(MLD) 일대의 대북 정찰·감시활동을 복원하겠다는 것입니다. 22일 오전 윤석열 대통령은 순방 중임에도 국무회의에서 의결한 9·19 합의 효력 일부 정지 안건을 재가했죠. 그러자 다음날인 23일 북한은 9.19합의 전면 파기를 선언했습니다. 이로써 남북 간 무력충돌을 방지하는 안전판인 9.19합의가 5년 만에 파기 되면서 한반도는 전시 상태로 돌아갔습니다.
한반도에서 국지전이라도 발생한다면 이는 걷잡을 수 없는 세계대전으로 비화 될 것입니다. 한반도의 전쟁은 대만 전쟁을 불러일으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죠. 그리고 이 전쟁은 미국과 중국을 포함하는 핵전쟁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매우 큽니다. 윤석열 정부의 어리석음과 무식함이 자칫 민족의 운명을 파멸로 끌고 갈 수도 있다는 것이죠.
우리나라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서 1위를 하는 것이 지금 현재도 압도적입니다.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적인 것들이 대부분이죠.
자살율 1위(1천명 당 26명), 가계부채 증가 1위(3,000조원), 노인빈곤율 1위(40.4%), 고령화 속도 1위(연평균 4.4%씩 증가), 성별 임금 격차 26년째 1위, 청년 실업자 7년째 1위, 최저임금 1위, 산업재해 사망률 1위, 노동시간 1위, 출산율 하위 1위, 사회안전망 하위 1위, 교통사고 사망률 1위, 온실가스 배출 1위, 행복지수 하위 1위 등등입니다.
이런 현실이 청년들로 하여금 헬조선을 말하게 하는 것입니다. 2021년까지 지난 16년간 우리 정부가 저출산 대책으로 쓴 돈이 280조 원 이라고 합니다. 그 결과가 2022년 출산율 0.78명, 서울은 0.59명입니다. 도대체 어디에 돈을 쓴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서울의 출산율이 적은 것에 대해 인구 밀집도와 출산율이 반비례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인구 밀집도가 높으면 생존을 위한 경쟁이 치열해지고 심리적으로 자신의 생존을 저해하는 아이를 낳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출산연령 통계를 보면 상위 10위가 모두 서울시에 있고 강남구가 평균 35세로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합계 출산율 상위 10위까지는 강원도 인제군을 비롯한 행안부가 지정한 인구감소지역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수도권 인구집중은 농·산·어촌 등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먹고 살 것을 위해 도시로 올라왔다는 이야기인 거죠. 최근 국민의힘에서 주장하는 ‘메가시티 서울론’은 인구절벽으로 내몰리는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주장입니다. 지역균형발전을 통해 경제와 인구를 분산시키지 않는 한 출산율은 오르지 못할 것입니다.
OECD 38개 회원국의 합계 출산율 평균은 1.58입니다. 현재의 인구를 그대로 유지하는 데 필요한 합계 출산율이 최소 2.1명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OECD 가입 국가는 경제선진국들이죠. 자본주의가 발달한 나라들입니다. 이 결과는 돈으로 생명을 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돈이 모든 것을 장악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정치도 언론도 종교도 모두 돈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돈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용인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국민들 중 다수도 이에 가담하고 있습니다. 바햐흐로 인간의 탈을 쓴 동물 농장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 하나님께서 어찌 이 나라를 그대로 두시겠습니까? 외세에 기대어 백성들을 개·돼지로 여기는 기득권 카르텔, 그 밑에서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겠다고 아부하는 집단들을 우리 스스로 몰아내지 않는 다면 우리 역시 남유다와 같은 운명을 맞게 될 수도 있는 겁니다.
오늘 대림절 첫 주를 맞이하여 제2이사야 선지자의 간절한 중보기도가 큰 울림이 되어 우리의 가슴을 치기 바랍니다. 민족을 위한 뜨거운 사랑으로 회개와 용서를 간구하는 그의 심정을 가지게 되길 바랍니다.
정의와 평등을 가슴에 품고 사랑과 평화로 오실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모든 이들에게 성탄의 축복이 함께 하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