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경우에도 523년에 죽은 무령왕의 무덤에서 옻칠을 한 왕과 왕비의 목관과 두침, 발 받침대가 발견된 바 있다. 백제에서는 검은 칠과 붉은 칠을 고루 사용했고, 여러 가지 문양을 그려 넣기도 했다.
신라의 경우에는 천마총, 황남대총, 금관총, 금령총, 서봉총, 식리총, 호우총, 은령총, 안압지 등에서 옻칠을 한 잔(盞), 고배(高杯)형 그릇, 합(盒-둥근 그릇), 원반(圓盤), 빗(梳), 함(函) 등 다양한 종류의 칠기가 출토된 바 있다. 특히 신라에서는 ‘칠전(漆典)’이란 관청이 있어, 옻칠의 생산과 관리를 감독했던 것으로 보인다. 칠전은 경덕왕(742〜765)때 식기방(飾器房)으로 고쳤다가 다시 칠전이 되었다. 칠전이 식기방이란 이름을 한때 사용했던 이유는, 궁중에서 칠을 가장 많이 사용한 것이 식기류였기 때문일 것이다.
834년 신라 흥덕왕은 사치를 금하는 칙령을 내렸는데, 4두품에서 일반 백성까지는 금ㆍ은ㆍ놋쇠로 만든 제품의 사용과 주리평문(朱裏平文- 문양이 새겨진 붉은 색 칠기 그릇)의 사용을 금지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당시에 칠기는 일반 백성들이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귀족들의 사용품이었다.
고려의 나전칠기
고려는 상감청자, 청동은입사정병, 나전칠기(螺鈿漆器) 등을 만든 공예 수준이 높은 나라였다. 청자에 쓰인 상감기법, 청동은입사 기법, 그리고 나전칠기 기법은 모두 그릇에 이색 물질을 박아 넣어 문양을 나타내는 장식 기법인 상감(象嵌)이란 공통된 방법을 사용한다. 나전칠기는 기물 위에 굵은 헝겊을 바르고 그 위에 오려낸 자개(螺)를 붙여 꾸민(鈿) 후 옻칠을 덧입히는 방법 등이 사용된다. 1123년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람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에는 고려 기병의 안장은 나전으로 만들며, 그릇에 옻칠하는 일은 그리 잘하지 못하지만 나전 일은 세밀하여 귀하다고 할 만하다고 칭찬한 바 있다.
고려의 나전 기술이 뛰어나자, 원나라의 세조(쿠빌라이, 재위:1260〜1294)의 황후가 대장경을 넣어 둘 함(函)으로 고려의 나전함을 요구했다. 이에 고려는 1272년 전함조성도감(鈿函造成都監)을 설치하고, 나전으로 장식된 경전을 넣는 함(螺鈿經箱)을 만들어 원나라에 보기도 했다.
고려는 중상서(中尙署)와 군기감(軍器監)에 칠기 장인들을 배치하여 나라의 수요를 충당하게 했다. 조선시대에도 경공장(京工匠)과 외공장(外工匠)에 칠기 장인들이 있어, 칠기 공예품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사용해왔다.
금은 그릇 대신 칠기를 사용한 조선
1407년 1월 19일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성석린(成石璘)은 시무(時務) 20조를 태종에게 올렸다. 이 가운데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은 궁궐과 국가 행사에서 쓰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국에 명령을 내려 일체 사용을 금지하고, 나라 안이 모두 사기(沙器)와 칠기를 쓰게 하자.”는 주장이 들어있다. 사치를 방지하자는 것인데, 태종은 이를 받아들여 의정부에서 논하여 시행하라고 지시했다. 조선은 금과 은의 채굴을 극히 억제했던 나라였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금, 은 그릇의 사용이 크게 줄고, 대신 사기, 칠기, 그리고 놋그릇이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
칠을 하면 기물의 색은 검거나 갈색이 된다. 그런데 붉은 빛과 황금빛을 내는 고급 칠도 있다.
1425년 공조(工曹)에서는 앞으로 각사(各司- 조선시대 서울에 있던 관청을 통틀어 이르던 말)에서 만드는 그릇에 진상하는 붉은 칠기 그릇(朱漆器) 이외는 모두 주홍색을 없애고 검은 옻칠을 사용하라고 지시했었다. 1516년 중종은 팔도 관찰사에 사치를 숭상하는 풍습을 개혁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때 언급된 사치품 가운데는 붉은 칠기 그릇이 들어있을 정도였다. 주칠을 만들 때 들어가는 주석가루는 수입품이기 때문에, 민간인의 사용을 억제했던 것이다. 주칠보다 더 귀한 칠기도 있었다. 그것은 [대명일통지], [청일통지] 등 중국의 여러 서적에 조선의 대표적인 특산품으로 기록된 황칠(黃漆)이다.
중국에서 탐낸 황칠
황칠은 옻칠의 한 종류로 황금빛이 나는 천연도료다. 황칠을 나무와 쇠에 칠하면 좀과 녹이 슬지 않고 열에도 강해 “옻칠 천년, 황칠 만년”이란 말이 있을 정도다. 또한 안식향(安息香)이라는 향기가 있어 사람의 신경을 안정시키는데도 큰 역할을 한다. 황칠은 황칠나무에서 채취한다. 황칠은 말레이반도, 중남미 아메리카에 약 75종, 우리나라에는 1종이 분포하는 한국의 특산 식물이다. 이 나무는 완도, 강진, 해남, 장흥, 해남, 제주도 등 전남 서해안 지역에서 자라며 높이가 15m에 달한다. 6월에 즙을 채취해서 기물에다 칠을 하면, 색이 마치 황금과 같아서 사람들의 눈을 부시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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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남당유고 미추이사금 10년(A.D.334) 기사 발췌
七月 (중략) 置螺人典 阿后好珍奇 多造佩物及宝案 用螺花蝶甚多 乃設螺人典 養其才
나인전(螺人典)을 설치하였다. 아후(阿后)가 진기(珍奇, 희귀하고 기이함)한 것을 좋아하여, 패물(佩物, 몸에 차는 장식물, 노리개)과 보안(宝案, 임금의 보물을 올려놓는 받침)을 만듦에 소라껍질로 만든 꽃과 나비문양을 사용함이 심히 많았다. 이에 나인전을 세워 그 재주를 가진 자를 길렀다.
남당유고 미추이사금 25년(A.D.349) 기사 발췌
是時京都 人物甚繁 戶至十二萬九千 黃屋大宮三十 金入大宅九十 小宅五百余 京外大宅亦百余 皆有奴婢庄園 百工興物貨豊
당시 경도(京都)에는 인력과 물자가 심히 번성하였다. 호(戶)가 129,000여 호에 이르고, 황옥대궁(黃屋大宮, 황금색 도료로 화려하게 치장한, 우리나라 남쪽의 섬지역인 해남이나 완도 등에서 자생하는 황칠나무에서 얻을 수 있다고 한다.)이 30개, 금입대택(金入大宅, 황금색 도료를 칠한)이 90개, (금입)소택이 500여개, 경도의 밖에는 (금입)대택이 100여개 있었다. 모두 노비와 장원(庄園)을 가지고 있었으며, 백공(百工, 온갖 장인)이 일어나고, 물화(物貨, 물품과 재화)가 풍성하였다.
삼국유사에는 금입택이 35개 있다고 하였는데, 남당유고에는 한 술 더 떴다. 일연도 이해할 수 없었는지 금입택을 부유한 집으로 주석을 달아놓았다.
금입택은 금으로(또는 금색의 도료로) 치장한 집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금(재물)이 들어가는' 집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즉, 금입택의 '택' 이 부동산인 건물을 의미한다기보다는 그 건물 안에 살고 있는 '가문' 의 의미일 수 있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삼국유사> 에서 금입택을 쭉 열거하고 있는데 그 중 일부는 그 명칭에서 보듯 신라 6부의 수장 가문의 거처로 보이는 곳들입니다.(본피택(本彼宅), 양택(梁宅), 사량택(沙梁宅), 한기택(漢岐宅)) 그 외에도 김유신의 신김씨의 집(재매정택(財買井宅))과 같이 새로이 신라 지배층에 편입된 세력의 집도 있지요.
신라의 황칠은 황칠의 주산지가 주로 전라도쪽 해안이나 섬(도서)지역에서 자생하는 나무에서 수확되는 황칠이기 때문에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 신라에 황칠이 수입된 것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통설입니다. 황칠나무는 다른 지역에서도 자랄 수는 있으나 옮겨가면 황칠이 수확되지 않습니다. 또한 한그루의 황칠나무에서 수확되는 양이 소주 한잔 분량도 되지 않으며, 중국으로 수출되는 양이 1년에 한 드럼도 안되는 양이라고 어디서 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신라가 전라남도의 남부 지역을 점령하였다 가정하더라도 남당유고에 나오는 기사는 지나치게 많은 부분이 있습니다.
중국 북경의 자금성은 황금기와를 얹었는데, 중국정사조선전을 보면 신라의 출자를 秦韓, 진지망인이라고 합니다. 秦韓은 중국 연,제,조의 망명인이고 지금의 북경을 과거엔 연경이라고도 불렀는데, 당시 신라의 왕비들은 秦韓(召文國)의 후예들입니다. 화려한 장식을 좋아하는 것은 여성들의 문화입니다. 미추왕이 왕비와 불화했던 부분은 왕비의 사치스러움 때문이라고 합니다. 결혼을 하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백만원짜리 옷이 있는데 마음에 든다면 지갑을 여는 사람은 남편인가요. 남당유고는 여성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통일신라에서 황칠을 사용했겠지요. 하지만 통일신라에서 황칠을 사용했다고 하여 '금입택' 이 당연히 황칠을 바른 집이라는 의미가 되는 건 아닙니다. 금입택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이야기인데, 통일신라에서 (백제 영역에서 나는) 황칠을 사용했으리라는 이야기는 조금 뜬금없는 말씀이 아닌가 합니다.
황칠은 정말이지.... 보기만 해도 황홀합니다. 염료, 물감이 많은 오늘날에도 이런데 고대에는 어땠을까요?
時百濟上金髹鎧,又以玄金爲文鎧,士被以從。帝與勣會,甲光炫日。
이것은 고구려본기 보장왕 4년조의 기록이다. 신당서에도 동일한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신당서를 참조하여 쓴 것으로 보인다. "금칠을 한 갑옷인 명광개"라고 따옴표를 써서 번역할 수 있는 표현은 두 사서 중 어느 쪽에도 나오지 않는다.
일전에도 쓴 적이 있지만 명광개에 대해 쓴 글들을 종합해 보고, 고구려의 하급 장교도 명광개를 입었다고 볼 수 있는 기록이 있음을 생각하면, 명광개를 "황칠을 한 갑옷"이라고 볼 여지도 없다. 백제 지역의 토산물인 황칠을 한 갑옷을 고구려의 하급 장교가 입고 있을 정도로 황칠이 흔한 재료도 아니기 때문이다.
제가 칠쟁이인데..순 화학칠을 현장에서 사용하다가..요즘은 친환경칠들이 많이 만들어지지만..여전히 화학성분이 안들어가면 산업현장에서 칠의 기능이 없어지고, 친환경칠은 내부인테리어나 가구에 많이 사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