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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카페지기 신문연재글 등 한국생활사 9 - 칠(漆) (네이버캐스트 12월 7일자에 올린 글)
김용만 추천 0 조회 218 11.12.07 13:46 댓글 11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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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12.07 15:34

    첫댓글 남당유고 미추이사금 10년(A.D.334) 기사 발췌
    七月 (중략) 置螺人典 阿后好珍奇 多造佩物及宝案 用螺花蝶甚多 乃設螺人典 養其才
    나인전(螺人典)을 설치하였다. 아후(阿后)가 진기(珍奇, 희귀하고 기이함)한 것을 좋아하여, 패물(佩物, 몸에 차는 장식물, 노리개)과 보안(宝案, 임금의 보물을 올려놓는 받침)을 만듦에 소라껍질로 만든 꽃과 나비문양을 사용함이 심히 많았다. 이에 나인전을 세워 그 재주를 가진 자를 길렀다.

  • 11.12.07 15:37

    남당유고 미추이사금 25년(A.D.349) 기사 발췌
    是時京都 人物甚繁 戶至十二萬九千 黃屋大宮三十 金入大宅九十 小宅五百余 京外大宅亦百余 皆有奴婢庄園 百工興物貨豊

  • 11.12.07 15:37

    당시 경도(京都)에는 인력과 물자가 심히 번성하였다. 호(戶)가 129,000여 호에 이르고, 황옥대궁(黃屋大宮, 황금색 도료로 화려하게 치장한, 우리나라 남쪽의 섬지역인 해남이나 완도 등에서 자생하는 황칠나무에서 얻을 수 있다고 한다.)이 30개, 금입대택(金入大宅, 황금색 도료를 칠한)이 90개, (금입)소택이 500여개, 경도의 밖에는 (금입)대택이 100여개 있었다. 모두 노비와 장원(庄園)을 가지고 있었으며, 백공(百工, 온갖 장인)이 일어나고, 물화(物貨, 물품과 재화)가 풍성하였다.

  • 11.12.07 15:48

    삼국유사에는 금입택이 35개 있다고 하였는데, 남당유고에는 한 술 더 떴다. 일연도 이해할 수 없었는지 금입택을 부유한 집으로 주석을 달아놓았다.

  • 11.12.07 19:14

    금입택은 금으로(또는 금색의 도료로) 치장한 집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금(재물)이 들어가는' 집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즉, 금입택의 '택' 이 부동산인 건물을 의미한다기보다는 그 건물 안에 살고 있는 '가문' 의 의미일 수 있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삼국유사> 에서 금입택을 쭉 열거하고 있는데 그 중 일부는 그 명칭에서 보듯 신라 6부의 수장 가문의 거처로 보이는 곳들입니다.(본피택(本彼宅), 양택(梁宅), 사량택(沙梁宅), 한기택(漢岐宅)) 그 외에도 김유신의 신김씨의 집(재매정택(財買井宅))과 같이 새로이 신라 지배층에 편입된 세력의 집도 있지요.

  • 11.12.08 09:25

    신라의 황칠은 황칠의 주산지가 주로 전라도쪽 해안이나 섬(도서)지역에서 자생하는 나무에서 수확되는 황칠이기 때문에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 신라에 황칠이 수입된 것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통설입니다. 황칠나무는 다른 지역에서도 자랄 수는 있으나 옮겨가면 황칠이 수확되지 않습니다. 또한 한그루의 황칠나무에서 수확되는 양이 소주 한잔 분량도 되지 않으며, 중국으로 수출되는 양이 1년에 한 드럼도 안되는 양이라고 어디서 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신라가 전라남도의 남부 지역을 점령하였다 가정하더라도 남당유고에 나오는 기사는 지나치게 많은 부분이 있습니다.

  • 11.12.08 09:40

    중국 북경의 자금성은 황금기와를 얹었는데, 중국정사조선전을 보면 신라의 출자를 秦韓, 진지망인이라고 합니다. 秦韓은 중국 연,제,조의 망명인이고 지금의 북경을 과거엔 연경이라고도 불렀는데, 당시 신라의 왕비들은 秦韓(召文國)의 후예들입니다. 화려한 장식을 좋아하는 것은 여성들의 문화입니다. 미추왕이 왕비와 불화했던 부분은 왕비의 사치스러움 때문이라고 합니다. 결혼을 하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백만원짜리 옷이 있는데 마음에 든다면 지갑을 여는 사람은 남편인가요. 남당유고는 여성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 11.12.08 12:24

    당연히 통일신라에서 황칠을 사용했겠지요. 하지만 통일신라에서 황칠을 사용했다고 하여 '금입택' 이 당연히 황칠을 바른 집이라는 의미가 되는 건 아닙니다. 금입택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이야기인데, 통일신라에서 (백제 영역에서 나는) 황칠을 사용했으리라는 이야기는 조금 뜬금없는 말씀이 아닌가 합니다.

  • 11.12.07 18:44

    황칠은 정말이지.... 보기만 해도 황홀합니다. 염료, 물감이 많은 오늘날에도 이런데 고대에는 어땠을까요?

  • 11.12.08 22:03

    時百濟上金髹鎧,又以玄金爲文鎧,士被以從。帝與勣會,甲光炫日。
    이것은 고구려본기 보장왕 4년조의 기록이다. 신당서에도 동일한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신당서를 참조하여 쓴 것으로 보인다. "금칠을 한 갑옷인 명광개"라고 따옴표를 써서 번역할 수 있는 표현은 두 사서 중 어느 쪽에도 나오지 않는다.
    일전에도 쓴 적이 있지만 명광개에 대해 쓴 글들을 종합해 보고, 고구려의 하급 장교도 명광개를 입었다고 볼 수 있는 기록이 있음을 생각하면, 명광개를 "황칠을 한 갑옷"이라고 볼 여지도 없다. 백제 지역의 토산물인 황칠을 한 갑옷을 고구려의 하급 장교가 입고 있을 정도로 황칠이 흔한 재료도 아니기 때문이다.

  • 12.01.26 02:48

    제가 칠쟁이인데..순 화학칠을 현장에서 사용하다가..요즘은 친환경칠들이 많이 만들어지지만..여전히 화학성분이 안들어가면 산업현장에서 칠의 기능이 없어지고, 친환경칠은 내부인테리어나 가구에 많이 사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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