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일 : 2008년 10월 12일
본 문 : 마가복음9:14-29
설교자 : 조재진목사
요즘 한국 교회는 여러 부분에서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 중이 하나가 바로 교인들의 감소현상입니다. 지난 몇 년 동안 많은 숫자의 교인들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교인이 감소하는 현상은 사회가 발달하기 때문이라든지, 혹은 종교에 관심이 없어서 오는 현상은 아닙니다. 오히려 한국사회의 전체적인 종교 인구는 증가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개신교의 숫자는 감소한 반면 천주교인과 불교인들의 숫자는 늘었다는 것입니다.
교인이 감소하는 현상도 문제지만 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교회의 영적인 영향력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늘 사회변화를 추구해 왔습니다. 이 땅 한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 우리의 기도요 비전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이 시대를 변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한국교회가 세상 사람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인터넷에서는 안티 기독교 사이트가 늘어가면서 교회의 어두운 면을 폭로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욕설을 퍼붓고 있습니다. 어쩌다가 교회가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보면, 교인감소나 교회의 영향력을 잃어버린 것도 문제이지만 보다 더 심각한 것은 많은 교인들이 방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습니다. 교회는 나오지만 왜 예수님을 꼭 믿어야 하는지, 예수님 안에 있는 어마어마한 구원의 축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이곳, 저곳으로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교회 다니면서도 점을 치고 굿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교회가 병들고 성도들의 믿음이 희미해지면서 교회는 급격하게 그 영향력을 잃어가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교회가 교회됨을 회복하고 성도들이 믿음의 능력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교회는 세상을 살리고 불신자들에게 삶을 답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입니다. 만약에 교회가 세상에 빛을 비추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한다면 그 교회는 마치 생명을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답이 없는 제자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말씀은 이런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 전반부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세 명이 제자들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신 사건이 나옵니다. 여기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무슨 말씀을 나누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영광스러운 광경에 놀란 제자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 짓겠습니다.” 그 순간에 구름이 저희를 덮어버렸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희 말만 들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제자들은 산위에서 이런 놀라운 경험, 종교적인 언어로 말하자면 황홀경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변화산 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동안 산 아래에서는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한 아버지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와서 보니까 예수님은 계시지 않고 제자들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산 아래에 남아있는 제자들에게 “내 아들의 병을 고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벙어리 귀신들린 아이를 고쳐줄 수 없었습니다. 그 아이를 사로잡고 있는 더러운 귀신을 쫓아 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귀신을 내어 쫓지 못하고 무엇을 했습니까? 14절을 같이 읽어보십시다. “이에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 여기에 보면 제자들은 서기관들과 토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아이의 병을 치료해야 하는데, 그것은 못하고 변론만 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신학적으로 귀신들림의 현상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정신병과 귀신들린 현상의 차이는 무엇인가? 어쩌면 그런 토론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변론을 했지만 세미나도 열고 발제도 하고 강의도 했지만... 실제로는 귀신들이 이 아이를 치료하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말은 많이 했지만 아무 능력이 없었습니다.
이 일을 요즘 우리 시대의 이야기로 표현하자면, 삶의 고통과 문제가 너무 많은 한 사람이 어떻게, 어떻게 해서 겨우 교회까지는 왔는데, 교회에서는 이 사람에게 아무런 삶의 답을 주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제가 90년대 중반에 감리교 신학대학에서 신학생들과 제자훈련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감리교 신학대학 주변을 조사했더니, 냉천동에 무당집이 10군데가 있었습니다. 신학생들을 보내어 조사를 해보게 했습니다. 신학생들이 일곱 군데를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일곱 명의 무당들이 다 교회에 다닌 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는 집사출신도 있고, 여선교회 회장 출신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알다시피 무당이 그냥 무당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무당이 되기 전에 심각한 삶의 문제를 당합니다. 신병을 앓기도 하고 집안에 우환과 질고가 닥쳐옵니다.
그러자 이 사람들이 삶의 답을 얻으려고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교회 다녔습니다. 열심히 하니까 교회에서 집사도 되고 여선교회 회장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닥친 우환과 질고, 삶의 고통은 여전히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무당을 만나서 내림굿을 했는데 병이 낫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래서 무당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말하는 똑같은 life story입니다. 아니 그렇다면 여러분, 교회가 굿당보다 영적인 힘이 없다는 말입니까? 아니 예수님이 귀신보다 힘이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분명히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수 많은 교회가 삶의 고통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복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삶의 해답을 제대로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도 비교적 하나님을 일찍 만난 사람입니다. 은사도 체험 하고 구원의 확신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저는 이 제자들과 비슷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답을 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원주제일교회에서 교육목사로 있었을 때 한 귀신들린 자매를 데리고 어느 집사님이 찾아 왔었습니다. 기도 좀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때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귀신들린 사람을 치료하려면 제대로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그렇게 해주지 못하니까 기도원으로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치악산 기도원’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 때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정말로 그들에게 아무런 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병든 사람이 찾아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좋은 기도원을 소개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철원에 있는 대한 수도원에 가 봐라. 태백 기도원에 가 봐라. 오산리 기도원에 가 봐라...” 제가 마치 복덕방을 차린 것 같았습니다. 그게 바로 저의 솔직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목사님들, 장로님들, 권사님들, 집사님들을 보니까 저와 똑같았습니다. 저보다 더한 사람들도 있었어요. 교회와 점집을 왔다 갔다 하는 집사님들도 많이 있습니다. 삶의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고 응답받아야 하는데, 확신이 없으니까 이곳, 저곳으로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웃을 일이 아닙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모습이 어쩌면 답을 주지 못하고 변론에 빠진 제자들의 모습과 너무 흡사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두 종류의 제자들을 소개합니다. 한 종류의 제자들은 산 위에서 황홀한 종교적인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에 초막 셋을 짓되...’라고 말했습니다. 그저 종교적인 체험, 가슴이 뜨거워지고, 환상을 보고, ‘불 받아라’ 소리 지르고... 그런데 문제는 그들에겐 역사의식은 없습니다. 산 아래의 안타까운 삶의 현실을 외면하는 제자들입니다. 그저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다가 신비주의에 빠져 가정도 버리고, 직장도 버리고 이상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한 종류의 제자들은 귀신들린 아이를 데리고 왔더니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무기력한 제자들입니다. 말만 합니다. 토론하고 세미나 열고, 그러나 정작 삶의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답을 주지 못합니다. 성경은 이 두 제자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면서 지금 한국교회와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하지 않느냐고 도전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영적인 능력을 회복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믿음의 제자들이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가 무기력한 믿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많은 문제들을 뛰어넘을 수 있는 영적인 비밀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 아이를 내게로 데려오라
첫 번째 우리가 영적인 능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들을 예수님 앞으로 가지고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보면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셔서 이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묻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변론하느냐?” 이 때 이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 앞에 나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리고 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집니다.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 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9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하시매” 여기에 보면, 예수님은 그 아이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에게로 오는 것이 답입니다. 영적인 능력을 회복하려면 무엇보다 예수님을 깊이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 앞에 이 아이가 왔을 때 아이에게 붙은 귀신은 꼼짝도 할 수 없었습니다. 두려워 벌벌 떨었습니다. 아이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넘어뜨리고 거품을 흘리게 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귀신을 꾸짖었습니다.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그러자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에게서 떠나갔습니다. 왜 귀신이 예수님을 두려워하고 예수님의 명령 앞에 꼼짝하지 못하고 떠나갑니까?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고 믿는 것,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예수님 안에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능력입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얼마나 깊이 아십니까?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에서 성공하는 비결, 많은 지식이나 기술, 어떤 노하우를 전수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셨지만 그 중에 오직 하나를 아주 분명하게 가르치기를 원했습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인 십자가와 부활의 비밀을 알려주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했을 때 주님은 만족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아는 것,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고 고백하는 것, 그리고 성령으로 지금 우리 안에 함께 계시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성도들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책입니다. 구약성경은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실 것이라고 예언한 책입니다. 약속이지요. 신약성경, 복음서는 나사렛 예수님이 바로 구약에서 예언했던 그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하는 책이고, 사도행전은 이것을 믿는 사람들이 삶의 현장에 나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증거했더니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지를 말하는 책이고, 서신서는 복음이 각 지역으로 퍼져가면서 나타난 열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 예수님이 심판의 주로 다시 오실 것이라는 것을 기록한 책이 계시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떤 것보다 예수님을 알고 그 분께로 나아와야 합니다. 힘드십니까? 예수님께로 나오십시오. 병들고, 문제 많은 인생입니까? 그렇다면 더욱 예수님께로 오셔야 합니다. 주님을 피하지 마십시오 외면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과 마주쳐서 그 분을 만나야 합니다. 그것이 답입니다. 적어도 성도들은 돈이나 지식으로 세상과 승부하는 자가 아닙니다. 성도들은 오직 예수님으로, 그의 십자가로 세상과 승부하는 사람들 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두 번째 우리가 능력있는 사람이 되려면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귀신들인 아들을 데리고 온 아버지에게 예수님이 묻습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아이의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텁니다.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슬쩍 이렇게 말하지요.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여기에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이라는 말은 참 묘합니다. 이 말은 이 아이의 아버지도 확신이 없다는 말입니다.
분명히 처음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자기 아들이 나음을 받을 것이라고, 악한 귀신에게서 해방 받을 것이라고 확신했었습니다. 거라사인의 귀신들린 자를 고치고, 죽은 자도 살리고, 귀머거리도 듣게 하셨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막상 와서 보니까 아닙니다. 제자들이 아무 것도 못합니다. 그러자 아이의 아버지에는 예수님을 의심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귀신을 내어 쫓지 못하고 변론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제자들의 불신앙이 아이의 아버지에게 전염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의 눈치를 살피면서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말을 듣고는 너무나 분명하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3절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이 말을 듣자 아이의 아버지가 깜짝 놀랍니다. 그리고 이렇게 소리 지르면서 말합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문제는 불신앙입니다. 왜 영적인 능력을 잃어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가 체험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언제나 믿음을 먼저 확인했습니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그리고는 놀라운 기적을 나타냈습니다. 기적이후에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을 두레박에 비유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퍼 담을 수 있는 두레박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축복받은 사람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반대로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은 안 믿어지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잘 안믿어진다고 말합니다. 십자가 사건이 안 믿어지니까 죄사함의 기쁨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저는 너무 잘 믿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죄사함의 감격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부활이 안믿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죽음의 두려움이 그 가슴속에 있습니다. 늘 불안합니다. 늘 염려합니다. 안믿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예수님의 부활이 믿어집니다. 주님이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불안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위협에도 저는 끄떡없습니다. 부활이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적어도 두 가지를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긍정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지금도 살아계시고 온 땅을 통치하십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여전히 건재합니다. 금융위기를 당하고 불황이라고 해도 그래도 하나님의 보좌는 건재합니다. 맞습니까? 우리는 그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긍정을 우리는 회복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 자신의 영적인 신분에 대한 긍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는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적어도 이 두 가지가 분명하다면 세상을 이기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아이의 아버지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세 번째,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기도로 문제를 이기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삶의 문제를 예수님 앞으로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난 다음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신뢰합니까?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방법은 바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드는 방편입니다. 기도할수록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을수록 자기 생각, 자기 계획, 자기의 잔꾀를 의지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모든 사건이 종료되고 난 후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진지하게 묻습니다. “선생님, 왜 우리는 귀신을 못 쫓아냈습니까?” 이 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여기에 보면 주님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가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방법이라는 말입니다.
기도가 악한 영을 이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도는 더 이상 나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겠다는 결단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더 이상 지식이나 돈, 내 능력이 아니라 오직 예수의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하겠다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승리하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능력은 사실 기도에서 나왔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는 기도의 역사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기도행전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있을 때마다 거기에는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성도들이 모여서 기도하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회의보다 그들은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날의 교회는 기도보다 회의를 더 많이 합니다. 어쩌면 그래서 영적인 능력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 스펄전 목사님의 전기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스펄전은 교회를 방문하는 사람들을 항상 교회 본당이 아닌 아래층으로 데리고 갔다고 합니다. 그 아래층에는 기도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기도하는 성도들의 모습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면서 스펄전은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요. “제 목회의 비밀은 여기 기도하는 성도들입니다. 그들이 나의 힘입니다.
그들이 바로 우리 교회의 발전소입니다. 저들의 기도 때문에 오늘 우리 교회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스펄전의 탁월한 설교 때문이 아니라 기도하는 그 성도들을 통해서 그 교회가 황금기를 누리고 영국을 변혁시키는 초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글에는 스펄전이 떠나간 후에 교회가 비틀거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스펄전 이후 제일 먼저 기도하는 운동이 사라졌습니다. 그 기도의 불이 끄지자 영국 교회가 영적 능력을 잃어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가 사라질 때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그 교회에서 거두십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4:6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아무 것도’(anything)라는 말과 ‘모든 것’(everything)이 비교되고 있습니다. 염려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염려해 보아야 anything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모든 것, everything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염려하지 말고 그 염려거리들을 기도제목으로 바꾸어나가시기 바랍니다.
언제 우리가 능력을 체험합니까? 언제 우리가 세상을 이깁니까? 언제 우리가 모든 문제의 답을 얻습니까? 기도할 때입니다. 모세처럼 기도의 정상에 서야합니다. 산꼭대기로 올라가서 손을 들고 기도할 때 아말렉을 이겼던 것처럼 우리는 기도의 산에 올라야 합니다. 손을 들고 기도하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영적인 능력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까? 혹시 여러분들은 삶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힘겹게 겨우 교회 출석하는 정도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에게로 여러분들의 삶의 문제를 가지고 가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로 절대적으로 긍정하십시오. 잘 믿어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자신의 믿음 없음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주여 나의 믿음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하실 수 있거든’이라고 의심하지 말고,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붙잡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할 때 기적을 나타내십니다. |
첫댓글 끝까지 말씀 설교 한편을 들으신 분은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제자로써 축복받을 자입니다
영상과....좋은 말씀 잘 보고 듣었습니다..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명하노니 모두 치료 될찌어라...믿음으로 기도 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