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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한국산서회와 함께 하는 인문산행
청평산 품 안에 펼쳐진 고려의 선원
춘천 청평사와 이자현의 식암을 찾아서
글/심산(한국산서회)
사진/류백현(한국산서회)
올해의 첫 인문산행이 시작된 2019년 3월 2일(토) 아침, 청량리역으로 속속 집결한 참가자들의 얼굴에는 어쩔 수 없이 미소와 설렘이 피어난다. 인문산행 사상 처음으로 강원도 땅을 밟는 날이다. 이따금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도 하지만 햇살과 공기 중에는 이미 봄기운이 완연하다. 등산과 더불어 인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떠나는 즐거운 봄 소풍인 것이다.
춘천의 ‘오봉산’은 70-80년대의 대표적인 데이트 코스였다. 덜컹거리는 경춘선 기차를 타고 가는 낭만이 있었고, 배를 타고 소양호를 건너는 멋이 있었으며, 애인을 동반한 사람이라면 막배를 놓치기 위하여(?) 산에서 최대한 시간을 끌며 짜릿한 설렘을 느껴봤던 곳이다. 참가자들의 고백을 들어보니 과연 이곳에 얽힌 추억 하나쯤 품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드물다.
당시에는 그렇게도 아스라했던 춘천이 이제는 지척의 거리로 다가왔다. 2012년에 개통한 itx 청춘열차가 서울-춘천 간의 소요시간을 불과 1시간으로 줄여버린 것이다. 춘천역에 내려 버스로 갈아타고 소양댐 선착장으로 향한다. 시원한 강바람을 만끽하다가 청평사 나루에 가닿은 시간이 오전 11시 정도. 빨라도 너무 빨라졌다. 우리 앞에 남아 있는 긴 하루는 이제 온전히 인문산행의 몫이다.
구송폭포 앞 반석은 만남과 이별의 장소
청평사 나룻길이 끝나는 길목에서 오늘의 강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춘천을 근거지로 하여 주로 강원도 일대의 역사문화유적들을 탐사하고 있는 강원한문고전연구소의 권혁진 소장. 조장빈 이사가 “춘천으로 인문산행을 오면서 권 소장님께 신고도 안할 수는 없어서” 연락을 취했더니 뜻밖에도 선뜻 오늘의 강사로 나서주었다. 우리로서야 감지덕지할 일이지만 예산이 충분치 못하여 속으로만 끙끙 앓고 있었는데, 사후에 쥐꼬리만 한 강사료조차 극구 사양하시니 어찌해야 될 바를 모르겠다. 이 자리를 빌어 진심 어린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청평산 전체를 손바닥 꿰듯 알고 있는 권 소장이 우리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본격적인 강의를 시작한 곳은 구송폭포 앞 반석. 예로부터 청평사에 오고 가는 손님들을 맞아들이고 배웅하던 장소가 바로 이곳이라 한다. 이를테면 자연적으로 형성된 일주문 역할을 했던 장소인 셈이다. 최초로 청평팔영을 남긴 보우가 이곳의 <반석송객>(반석에서 손님을 배웅하다)을 제1경으로 꼽았을 만큼 유서 깊고 아름다운 곳이다. 옛 기록에 따르면 이 근처에 구송정이라는 정자도 세워져 있었다.
반석에서 구송폭포를 바라볼 때 왼쪽으로 나 있는 신작로가 현재의 등산로 혹은 차량진입로다. 우리는 그 길을 버리고 반대편의 오른쪽으로 나 있는 희미한 오솔길을 택한다. 대부분의 청평산 유산기에 등장하는 원래의 옛길이다. 작지만 가파른 둔덕을 슬쩍 치고 오르니 숱한 바위글씨들이 눈앞을 가로막는다. 그 위에 세워져 있는 것이 청평사 삼층석탑이다. 대부분의 석탑은 경내에 있기 마련인데 이 탑은 이렇게 동떨어진 산기슭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보면 일종의 비보풍수가 아닌가 한다. 김시습의 시에도 등장하는 이 탑은 고려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
다시 작은 물줄기를 건너 청평사를 향하여 나아간다. 신축된 전통찻집 세향다원 바로 옆에 ‘진락공 이자현 부도’가 있다. 참가자들 중의 한분이 이 부도의 양식을 문제 삼아 이자현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을 피력한다. 겸허하고 자상한 성품의 권 소장이 친절하고 진솔한 답변을 돌려준다. “이곳 청평사 인근에는 모두 세 곳에 부도가 서 있는데, 이자현의 성품 및 고려시대 부도의 제작 양식을 염두에 두면,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선동부도가 그의 것일 가능성이 많다고 봅니다.”
나 역시 그를 만나면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의 저서 대부분을 밑줄까지 그어가며 탐독해온 나는 특히 최근에 출간된 ⟪김시습 호탕하게 유람하다⟫(산책, 2018)를 읽고, 김시습이 이곳에 세웠다는 세향원(細香院)이 궁금했었다. 권 소장은 친절하게 그 위치를 알려주었다. 이곳 이자현 부도 뒤편으로 작은 계곡이 두 개 이어지는데, 그 사이의 능선을 따라 약 300미터 정도 올라가면 나온다는 것이다. 당장에라도 달려 올라가보고 싶었으나, 공식행사 도중 일행들을 버리고 나 홀로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일행들을 모두 이끌고 저 ‘길 없는 길’을 함께 올라가자고하기도 민망하여, 그냥 그 진입로에 눈도장만 찍고 돌아선다.
우매한 나의 질문은 계속된다.
“김시습은 평생 가난한 걸승(乞僧)의 행색을 벗지 못한 사람인데, 과연 주춧돌까지 놓고 원(院)을 세울만한 재력이 있었을까요?”
박식한 권 소장은 간명하게 의문을 해소해준다.
“김시습은 젊은 시절부터 이미 고승(高僧)의 대우를 받았습니다. 가는 절집마다 그를 우러러 보는 스님들이 많았습니다. 그가 발원하면 기꺼이 도우려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기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고 봅니다.”
고려 영지의 발굴과 그 의미
강의가 너무나 흥미진진하고 질문과 답변 또한 그치질 않으니,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대신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그래서 본래 점심식사 자리로 점찍어 놓았던 ‘공주탕’까지 가지 말고 그냥 이곳에 퍼질러 앉을까 하고 요령을 피우려는데 이 또한 쉽지 않다. 영지(影池)가 바로 코앞에 있고, 그것을 제대로 설명해주기 위하여 머나먼 길을 달려와 주신 특별강사가 와 계신 것이다. 바로 인문산행팀의 자문을 맡고 계신 심우경 고려대 명예교수다.
한국정원문화연구회가 창립한 것은 1980년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첫 번째 사업으로 진행한 것이 바로 이곳 영지의 발굴조사였다. 그들은 1981년 여름부터 이듬해 봄까지 무려 9번의 발굴조사를 통하여 이곳 영지의 전모를 밝혀냈는데, 당시 이 연구 활동을 주도한 이가 바로 심 교수였다. 영지에 대한 최초의 학문적 접근이다. 이후 그는 전국 선종(禪宗) 사찰의 입구에 조성된 영지들에 대한 연구에 10여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쏟아 붓는다. 간단히 말하여 영지에 관한 한 그가 국내 최고의 권위자인 것이다.
얼마 전에 정년퇴직한 심 교수는 현재 전남 곡성으로 낙향하여 살고 있다. 그런 그에게 이번 인문산행은 청평산으로 간다고 말씀 올리니 대번에 “그렇다면 내가 올라가야지!”하며 단숨에 달려오신 것이다. 우리로서는 그저 황송할 따름이다. 덕분에 이번 인문산행은 국내 최강의 강사 두 분을 모시고 진행할 수 있었다. 주최 측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양수겸장 혹은 “저 놀부 두 손에 떡 들고”의 심정이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심 교수에 따르면 영지란 수행을 위하여 만들어놓은 ‘잔잔한 거울’과 같은 것이다. 이 거울에 비추어보는 대상은 크게 세 종류로 나뉜다. 부처와 탑과 산이다. 이 셋은 그 본질상 서로 다르지 않다. 불교적 이상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이 중에서 부처를 비추는 것을 불영지(佛影池), 탑을 비추는 것을 탑영지(塔影池), 산을 비추는 것을 산영지(山影池)라고 한다. 이곳 청평사의 영지는 전형적인 산영지다. 그러므로 현재의 영지 앞에 있는 나무들은 베어내야 한다. 그래야 영지에 비친 산(芙蓉峰)의 모습을 제대로 감상하며 수도와 명상에 들 수 있다. 나옹화상과 김시습이 주석하였다는 복희암 혹은 서향암도 이곳 영지를 통하여 바라볼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 당시 연세대 건축학과 교수들의 도움을 받아 측량한 영지는 둥근 타원형(卵形)이었다. 옆으로 흐르는 계곡물을 땅 밑으로 끌고 와 영지를 고요히 채우는 잠복수(潛伏水) 기법을 확인했다. 영지에는 본래 수석을 배치하거나 수초 따위를 키우지 않는다. 오직 파랑이 일지 않는 맑은 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발굴 당시의 영지는 상지와 하지로 나뉘어져 있었다. 상지를 채운 물이 매우 부드럽게 하지로 넘쳐흐르며 물결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 모두가 고려시대 정원조성 기법의 놀라운 증거요 현장이었다.
하지만 기껏 밝혀놓은 학문적 성과들을 공무원들이 복구 혹은 재단장 한답시고 모두 망쳐놓았다며 심 교수는 장탄식한다. 현재의 영지는 둥근 타원형이 아니라 마름모꼴이다. 잠복수 대신 물이 위로 흘러들게 만드는 바람에 잔물결이 일어 일렁거린다. 상지와 하지로 나뉘었던 공간은 그 경계를 없애 하나로 뭉뚱그려버렸다. 바위를 들여놓고 수초를 키워 한낱 일본식 연못으로 격하(格下)시켰다. 영지 앞의 나무들을 손보지 않아 그 물에 산을 비춰볼 수가 없다. 한 마디로 영지 본래의 모든 기능과 의미를 상실해버린 것이다.
서천의 물과 바위 예로부터 들었는데
일행들은 청평사로 들어가지 않고 그 왼편에 위치한 계곡의 바위 앞에서 배낭을 내린다. 오늘 점심식사를 할 곳이다. 현재의 개념도에는 ‘공주탕’이라 표기된 곳이다. 새로운 작명을 할 때는 제발 좀 신중해졌으면 한다. 구송폭포 오기 전에 만나게 되는 ‘공주와 상사뱀’ 동상이나 이곳의 ‘공주탕’이라는 지명이나 모두 한때 청평사가 원나라 황실의 원찰(願刹)이었다는 사실과 거기에서 연유한 전설에 기초한다는 것은 알겠는데 지나치게 천박한 작명이다.
소박하나 즐거운 점심식사를 하면서도 권 소장의 강의는 계속된다. 이곳 ‘공주탕’ 일원의 본래 이름은 서천(西川)이었다. 세향원에 머물던 김시습은 이곳 서천의 너른 바위(臺) 위에도 정자를 지었다. 이곳 서천 계곡이 승경을 이루었다는 소문은 널리 퍼져 조선 후기의 주요 유상처 중의 하나로 떠올랐다. 김상협 역시 이곳 서천에 와서 김시습의 자취를 살피며 유산시를 남겼다. “서천의 물과 바위 예로부터 들었는데, 직접 보니 참으로 그윽하고 뛰어나네. (중략) 이내 불현 듯 떠오르는 동봉자, 고사리 캐던 곳이 또한 이 산 속이었네(국역 권혁진).”
이야기의 불똥은 ‘오봉산’이라는 산명으로 튄다. 이 산에는 여러 가지 이명(異名)이 있지만 가장 걸맞는 것은 청평산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고서에는 청평산이라 표기되어 있다. 그러다가 ‘오봉산’이라는 이름이 슬슬 부각된 것은 1970년대 즈음의 일이다. 당시에는 관광버스를 대절해놓고 등산객들을 끌어 모아 돈을 받고 산행을 안내하는 이른바 ‘가이드 산행’이 유행하였다. 그때의 가이드들이 아무 생각 없이 “이 산은 봉우리가 다섯 개 있어서 오봉산”이라고 한 것이 마치 공식 산명처럼 굳어진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의식적으로 청평산이라 부르는 것이 옳다.
청평산을 청평산으로 만든 것은 이자현(李資玄, 1061-1125)이다. 이자현이야말로 청평산의 터줏대감이며, 명실 공히 오늘 인문산행의 주인공이라 할만하다. 우리는 오늘 그가 조성한 고려시대의 선원(禪苑)을 둘러보기 위하여 이곳에 왔다. 점심 이전에 둘러본 구송폭포는 그가 주변에 아홉 그루의 소나무를 심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며, 영지 역시 그가 심혈을 기울여 조성한 선원의 일부일 뿐이다. 청평산과 이자현을 이해하려면 청평사의 연혁을 간단히 짚고 넘어가는 것이 필수적일 듯하다.
청평사는 973년(고려 광종 24년) 백암선원이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이후 1068년 보현원이라는 이름으로 중건되었는데, 바로 이자현의 아버지인 이의가 세운 것이다. 이자현은 29세가 되던 1089년부터 입적할 때까지 무려 37년 동안 이곳에 은거하며 도를 닦았다. 그가 들어온 이후 도적떼와 맹수들이 자취를 감춰 “맑고 평화로운(淸平)” 곳이 되었다 하여 산 이름이 청평산이다. 당시 그는 이곳을 문수원(文殊院)이라 불렀다. 조선의 보우는 1555년 이곳의 이름을 청평사로 바꾸고 크게 중창하였다. 청평사가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보우 때의 일이다.
하지만 청평사는 조선 후기에 완전히 쇠락했으며 한국전쟁 등을 거친 다음에는 거의 남아있는 건물이 없었다. 실제로 1970년대까지 청평사는 폐사지나 다름없었다. 현재의 청평사는 1977년 이후 복원한 것이다. 그러므로 청평사는 오창(五創)의 연혁을 가지고 있다. 백암선원(1창), 보현원(2창), 문수원(3창), 청평사(4창), 현대(1977년 이후 5창). 1창과 2창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3창인 이자현의 문수원 선원이다. 청평산의 인문학적 가치는 문수원에서 찾아야 한다. 다행히 숱한 문건에 그 기록들이 남아있다.
“문수원의 자취는 청평사 경내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다시 배낭을 짊어지고 일어서며 권 소장이 무심결에 툭 던진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현재의 청평사만 보고 발길을 돌리지요. 그게 참 안타까웠는데, 오늘은 인문산행팀이 왔으니 더 깊숙이 들어가 봅시다.” 이제 우리는 이자현이 조성한 문수원의 핵심지역이라 할 만한 선동(仙洞)을 향하여 나아간다.
그는 세속을 벗어나 신선이 되고자 했다
흔히들 이자현이라 하면 ‘현재의 청평사라는 절을 세운 사람’ 정도로 기억한다. 여러 모로 사실과 다르다. 그가 조성한 문수원은 현재의 청평사와 사뭇 달랐다. 그를 불교도라고 규정하기도 어렵다. 불교와 무관한 것은 아니되, 불교에 올인한 사람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차라리 도교 혹은 신선사상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이자현이 살았던 시대는 유교가 도입되기 훨씬 이전이었다. 그러므로 그를 ‘유불선을 통합한 사람’이라 부를 수는 없다. 그는 선(禪)을 중심으로 도불(道佛)을 융합하고자 했다. 김시습이 이곳을 사랑한 것도 그런 맥락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문수원의 영역은 매우 넓었다. 평지에서 산정에 이르는 약 45,000평방미터가 모두 선원에 포함되었다(심 교수 논문). 그는 이 드넓은 공간 안에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한도 내에서 참선을 위한 암당정헌(庵堂亭軒)을 무수히 건립하였다. 그가 현재의 청평사 경외(境外)에 지은 암자만도 무려 8개에 이른다. 이들 중 현재에도 그 터를 확인해볼 수 있는 곳이 식암·견성암·양신암 등이다. 강원대 조경학과 윤영활 교수의 논문 <청평사 선원의 시대적 형성과 변천상>은 이 문제를 상세하게 고찰하고 있다.
선동(仙洞)이란 ‘신선이 사는 계곡’이라는 뜻의 일반명사다. 하지만 청평산의 경우 그것은 고유명사가 된다. 서천의 본류를 향하여 거슬러 올라가다가 보면 오른쪽에서 합류하는 작은 계곡을 만난다. 이곳이 선동의 하류로서 숱한 한시들 속에 등장하는 곳이다. 그 시작점에 이정표 혹은 문패처럼 ‘청평선동’이라는 바위글씨가 새겨져 있다. 작지만 가파른 절벽 밑에 있고 길이 워낙 비좁은 탓에 단체사진을 찍어 남기느라 일행들의 고생이 크다.
계속 선동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다양한 안내판들을 만난다. 가까운 곳에서부터 나열해보자면 척번대, 선동부도, 청평식암, 진락공 세수터, 적멸보궁, 오층석탑, 소요대, 천단 등이다. 흡사 시루떡을 첩첩이 쌓아놓은 것 같은 척번대를 지나 선동부도로 나아간다. 권 소장이 혹시 이자현의 진짜 부도가 아닐까 비정하고 있다는 바로 그곳이다. 심 교수와 권 소장이 번갈아가며 알짜배기 강의를 펼치니 참가자들은 경청하고 받아 적느라 정신을 차리기 어렵다.
식암폭포는 2단으로 되어 있는데, 아래쪽 폭포의 위가 이자현의 8암자 중 선동암 터로 여겨지는 곳이다. 폭포 위로 올라서면 이른바 ‘진락공 세수터’다. 이 역시 너무 천박한 작명이다. 반석 위에 인공적으로 홈을 내어 물이 고이는 곳 두 곳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자현이 차(茶)를 끓여먹기 위하여 물을 받던 곳이라고 한다. 차를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고려시대의 차문화’를 답사하기 위한 일종의 성지순례 코스라고 하니 그에 걸맞는 이름을 붙여줄 수도 있을 법 하다. 여기서 오늘 산행의 최종 목적지인 ‘청평식암’이 바로 코앞에 보인다.
약간 가파른 둔덕을 딛고 올라서니 이윽고 청평식암(淸平息庵)이다. 이자현이 가장 사랑했다는 수도터다. 그는 저 아래의 문수원(현재의 청평사)에는 거의 머물지 않았다. 그는 깊은 산 속임에도 시야가 탁 트인 이곳, 바로 옆으로는 폭포수의 상류가 졸졸 흘러 차 끓일 물을 길어오기 좋은 이곳, 뒤로는 다시 바위 하나가 솟았고 그 위의 소나무 아래에는 멋진 대(松臺)가 있어 솔향기 그윽한 이곳에 묵묵히 좌선하고 앉아 선정(禪定)의 삼매경에 들곤 했다. 식암(息庵)이라 할 때의 식(息)은 도교에서 가장 중요한 수련법으로 꼽히는 호흡법과 관련이 깊다.
“신선이 있어야 명산이 됩니다.” 권 소장이 오늘의 산행을 정리한다. “이자현이 있어서 청평산은 비로소 이름을 얻었습니다. 청평산과 청평사의 핵심공간은 바로 이곳 식암입니다.” 이자현은 이 청평산 자락에 이토록 아름답고 드넓은 선원을 공들여 조성해놓고 도대체 무엇을 얻고자 했던 것일까? 심 교수가 오늘의 산행을 정리한다. “신선사상은 우리 선조들 대부분의 가슴 속에 있었습니다. 불교도건 유교도건 사정은 다르지 않습니다. 이자현은 이곳에서 수양하고 참선하면서 스스로 신선이 되고자 했던 겁니다.”
월간 [사람과 산] 2019년 4월호
첫댓글 춘천과 청평산에 관한 국내 최고의 강사는 아마도 심우경 교수와 권혁진 소장일 겁니다
두분을 양수겸장으로 받아드니 산행후기 쓰기도 버겁습니다...ㅎㅎ
심교수님과 권소장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좋은 가르침 많이 받았습니다
덕분에 제가 그곳에 있네요~~~수고하셨습니다 ^^
선생님 글을 읽으니 다시 산행을 하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권혁진 올림
@두릉산인 권혁진 선생님
언제나 그렇듯 원고 매수의 제한으로 해주신 말씀 다 담지 못했습니다
글이 부족하여 죄송할 따름입니다
@두릉산인 권혁진 선생님. 많은 얘기를 전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시고 또 뵈옵길 바랍니다.
조장빈 올림
형님. 글 감사합니다.
작가님 좋은 글 감사히 읽습니다. 심우경교수님과 권혁진소장님께도 감사인사 드립니다.
심우경, 권혁진 두 선생님의 후광이 큰 답사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느때보다 후기의 열성도 깊게 느껴집니다.
청평산 계곡과 호수도 그윽했습니다.
즐겁게 감상합니다.
과찬이시고, 무료로 좋은 글 보시하시는 심 산님께 늘 감사 드립니다. 즐겁고 유익한 답사였습니다. 한국산서회 인문산행팀 조장빈 팀장을 비롯한 운영팀이 우리나라 산행문화를 계도하고 있어 고마울 뿐입니다.
심교수님이 계셔서 인문산행팀은 늘 든든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곡성에는 지금쯤 산수유며 매화 등이 활짝 피어있겠지요?ㅎ
벌써 매화는 지고 있고 산수유는 한창입니다. 건승기원합니다.
함께 못해 아쉽고 좋은후기 감사드립니다.^^
좋은 후기로 다시 배우고 깨우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