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에 자리 잡은 청국 공관(2)
청국 공관을 건립할 1883년 당시의 토지는 이경하의 아들 3형제 범진(範晋) 범조(範租) 범대(範大)의 소유였다. 이 당시 범조, 범대 형제는 청국 상인에게 땅을 팔았으나 가운데 땅을 소유하고 있던 범진 만은 팔지를 않았다.
그러자 통로가 궁색한 청국상인들은 범진의 청국 상인 수십 명을 동원하여 범진을 상무위원 공서로 납치하여 뭇매를 가하며, 자인서(自認書)를 강요했다. 이 사건은 이후 조선과 청의 외교문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범진은 영국영사에게 위촉하여 그 부당성을 지적하는 등 청국의 행패를 폭로하였다.
결국은 총판 진수당(陳壽棠)이 이범진에게 사과를 하고, 웅정한(熊廷漢)이 동사의 자리에서 파직되어 일단락되었다. 이는 상무공서가 순수한 외교상의 목적 이상으로 청국 상민을 지나치게 비호(庇護)하였던 데에서 야기된 사건이었다.
1885년 10월 11일, 진수당이 물러가고 대신 원세개(袁世凱)가 주찰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紮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라는 직함으로 부임하였다. 속칭 ‘원대인(袁大人)’으로 불린 그는 외교관으로서의 통상외교업무의 권한을 넘어서 조선의 내정 인사문제까지 간섭하는 등 10여 년간 조선 조정을 위압하면서 온갖 세도를 부렸고, 상무공서를 개축하여 이를 총리아문(總理衙門)이라고 칭했다. 이 당시 청국 공관의 면적은 6,400평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에 따라 공관 부근에는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었다.
그 당시 원세개가 주둔했던 본진(本陣) 앞의 충무로 입구~명동~을지로 입구까지를 ‘원대진 앞[袁大陣前]’이라고 불렀다. 이 길에서 청나라군의 횡포가 어찌나 심했던지 길 입구에서 조선 병사들이 길을 막고, 조선 사람들의 통행을 막기까지도 하였다.
이렇게 횡포를 자행하던 청국 공관도 1894년 6월에 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청국의 전세(戰勢)가 불리해지자 동년 6월 17일 원세개가 귀국함에 따라 청국 공관은 일단 철수하게 되었다. 수 년동안 서울 거리를 활보하던 청국 경찰관들도 모두 철수하자 상민(商民)들까지도 그들의 가옥 및 재산을 영국영사관에 위탁하고, 떠나버려 사실상 조선과 청국간의 외교관계는 단절된 상태였다.
원세개가 거처하던 청국공관은 1910년 경술국치에 의해 잠시 일본인이 소유하였으나 1920년대 중국과 국교가 전개되면서 다시 중국인 소유로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