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현산 배수지공원 찾기
◇ 대현산 배수지 공원 : 성동구 금호로 172-1
- 조선말에 서울의 상수도 보급을 위해 대현산에 시설한 배수지
대현산은 성동구에 있는 해발 123m의 산이다. 예전에는 응봉(鷹峯)으로 불렀으나 지금은 매봉산, 금호산, 대현산 등으로 불리고 있다.
조선 초에 무학대사가 무학봉 뒤에 큰물이 고이면 이곳이 번창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전해 온다. 조선말 1908년에 서울의 상수도 보급을 위하여 대현산에 약 6만 톤의 저장 용량의 배수지를 만들었다.
대현산 배수지 공원은 성동구 금호동1가와 중구 신당동에 걸쳐 있는 근린공원으로, 옛 이름은 금호동(金湖洞)과 인접한 행당동(杏堂洞)의 뒷글자에서 따와 ‘호당공원(湖堂公園)’이라고 칭했다.
서울시가 금호천의 발원지가 되는 구릉지 위에 대현산 배수지를 확장, 정비하고, 이 일대를 공원으로 조성한 것이다. 이 공원은 응봉근린공원의 일부로, 서울시 푸른도시국 동부공원 여가 센터 서울숲관리사무소에서 관리하고 있다. 동네 공원으로는 규모가 꽤 큰 편이다.
이 공원은 남쪽 절반은 성동구 금호동1가에 속하고, 북쪽 절반은 중구 신당동에 속한다. 이 일대는 금호동, 신당동, 하왕십리동, 행당동의 경계가 만나는 지역이라 인근 동민들이 많이 찾는다.
1997년에 서울시가 배수지 용량을 확장 정비하면서 지상 구간에 공원을 조성하여 2002년 10월에 완공하였다. 이에 따라 배수지 용량은 약 6만 톤에서 약 20만 톤 가까이 늘어났고, 이 배수지에서 마포구, 성동구, 성북구, 용산구, 종로구, 중구 6개 구의 총 272,000 가구에 수돗물을 공급하게 되었다.
이 공원은 75,576㎡(22,000평) 규모로 크게 녹지와 생활체육, 휴식 공간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공원 산책길 둘레는 1.2km가 넘는다.
◇ 대현산 배수지 공원 모노레일 : 중구 신당동 837-14
- 고도 120여m의 대현산 배수지공원에 시설한 모노레일
대현산은 비록 120여 m의 낮은 산이지만 중구 쪽의 신당 현대아파트나 푸르지오 아파트에서 대현산 배수지 공원에 오르려면 110m가 넘는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비나 눈이 오면 계단에서 미끄러지는 사고도 빈번하게 발생해 주민들의 진입로 개선 요구가 잦았다.
2020년에 서울시의 이동 편의 공모사업에 대현산 배수지 공원 모노레일이 선정되어 2024년 2월에 개통하였다. 승강장은 총 3곳이 있고, 모노레일의 좌석은 총 6개이며, 최대 15명까지 승차할 수 있다. 궤도와 모노레일 차량은 한국모노레일에서 제작한 것이다.
각 승강장의 안전문 옆에 부착된 버튼을 누르면 모노레일이 자동으로 승강장에 온다. 모노레일 내부에서는 행선지가 적힌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문이 닫힌 후 출발한다. 110m 전 구간을 오고 가는데, 편도는 약 3~4분, 왕복으로는 6~7분가량 소요된다. 이용 요금은 무료이다
참고로 서울의 모노레일은 잠실 롯데월드에 월드 모노레일이 설치되어 있고, 또 하나는 대현산배수지공원 모노레일이다.
◇ 서울 안정사(安定寺) 터 마애불 명문 약사불 : 성동구 하왕십리동 998번지, 왕십리 KCC스위첸아파트(성동구 향토유적 제2호)
- 조선 초에 무학대사가 정해준 절터에 세워졌던 청련사(안정사)
안정사는 827년(신라 흥덕왕 2)에 서울시 성동구 하왕십리동 종남산에 창건되었다. 창건 당시는 ‘안정사(安靜寺 혹은 安定寺)’로 불렸으며, 백성을 편안히 하여 나라를 굳건히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절(태고종)은 1395년(태조 4), 왕사(王師)였던 무학대사가 무학봉에 올라가 지형을 살핀 끝에 이 절은 ‘병화불침지(兵禍不侵地)’ 즉 전쟁 피해가 없는 곳이라 하여 절터를 정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무학대사가 중창을 위한 기도 회향 때에 법당 앞 연못에서 푸른 연꽃이 피어나 그 서기방광(瑞氣放光)함을 보고 ‘청련사’란 절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무학대사의 중창(重創) 이후, 청련사에서는 여러 차례의 건물 중건(重建)과 경전 판각 및 불화 조성이 있었으며, 1950년 한국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청련사를 덕봉화상이 가람을 재정비하고, 호국사찰로서 그 역할을 다하였다.
2000년대 초, 당시 주지인 백우스님은 안정사를 옮겨 세우기로 하고, 절터를 물색한 끝에 지금의 자리인 양주시 장흥면 개명산 자락에 터를 잡고 2010년에 완공하였다.
이 절에는 일제강점기 때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김상옥(金相玉) 의사가 일시 은신했던 적이 있다. 일본 강점기에 종로 경찰서는 독립운동가들을 마구 체포, 고문을 하던 악명 높은 곳으로 유명하여 우리 민족의 원한이 사무친 곳이었다.
그 당시 종로 경찰서는 현재 SC제일은행 본점 뒤쪽 대한제국 때의 경무청(警務廳) 건물을 차지하고 있었다.
때는 삭풍이 매섭게 몰아치는 1923년 1월 12일 밤 8시경, 갑자기 ‘쾅’하는 폭음과 함께 종로 경찰서에 폭탄이 터졌다. 놀란 일본 경찰은 즉시 거미줄처럼 수사망을 펴고 범인을 체포하려고 했으나 김상옥 의사는 무사히 후암동에 있는 매부의 집으로 은신할 수 있었다.
원래 김 의사는 서울 태생으로 항일 정신이 투철했다. 그는 3․1운동 이후 혁신단(革新團)을 만들어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지령을 받아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김 의사는 다시 의열단에 가담한 뒤 일제 침략에서 독립하려면 과감한 행동을 보이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고 느껴 은밀히 서울에 들어왔다.
한편, 후암동에 피신해 있던 김 의사는 사이토오 총독이 경성역을 통해 일본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동지들과 총독 암살 계획을 세워 이를 추진하다가 그의 은신처가 일본 경찰에 탐지되고 말았다.
1923년 1월 17일 새벽, 수백 명의 일본 경찰은 김 의사가 머무는 후암동 집을 포위하고 그가 자는 방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언제나 깊은 잠을 자지 않던 김 의사는 재빨리 양손에 권총을 잡고 뛰어드는 일본 경찰을 향해 발사했다.
이때 마에 무라(前村) 형사부장과 3명의 경찰이 쓰러지자, 김 의사는 뛰쳐나와 지붕 위로 올라가서 총을 발사하자 일본 경찰들은 모두 흩어져 덤비지를 못했다. 이 틈을 타서 김 의사는 남산을 향해 피신하니 경찰은 어두운 탓인지 추격을 하지 못했다.
동이 트자 일본 경찰과 군인들은 남산을 겹겹이 포위하고 수색에 나섰지만 계속 눈이 내려 김 의사를 찾지 못했다.
후암동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김 의사는 남산 동쪽 기슭을 지나 안정사에 도착했다. 절에 들어선 김 의사는 김봉암(金峰岩) 주지 스님에게,
“내가 도박을 하다가 그만 경찰에게 쫓겨 이곳까지 왔으니 살려 주십시오.”
하였다. 그러자 스님은 그의 딱한 사정을 보고 그곳에 머물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이곳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었다. 그래서 김 의사는 여기를 떠나기로 작정하고 스님으로부터 짚신과 장삼을 빌렸다. 그리고는 짚신을 거꾸로 신고, 눈길을 걸어 문 안으로 들어왔다. 물론 이것은 일본 경찰의 눈을 속이기 위한 것이었다.
주지 스님에게서 맨발에 신을 양말과 짚신 한 켤레와 승복을 얻어 승려로 위장한 김 의사는 왕십리-마장동 개천-청량리-영도사(永道寺) 뒷고개-수유리 이모집-동소문-혜화동-동숭동-이화동-충신동-효제동에 있는 동지 이혜수(李惠受)의 집에 도착해 몸을 숨겼다.
그런데 일본 경찰은 어떻게 김 의사의 종적을 찾아냈는지 1월 22일 새벽, 바노(馬野) 경찰부장과 보안과장 지휘 하의 400여 명 경찰이 이 집 일대를 포위했다.
이를 눈치챈 김 의사는 근처의 김학수 집으로 급히 피신했으나 다시 일본 경찰이 찾아내자 김 의사는 이들과 총격전을 벌여 이 일대는 마치 시가전을 방불케 했다. 3시간이나 버틴 김 의사는 탄환마저 떨어져 어찌할 도리가 없을 때 항복 권유를 받자,
“내가 자결을 할지언정 살아서 너희들 손에 잡히지는 않는다.”
하고 외친 다음 남은 총알로 장렬하게 자결하였다.
김상옥 의사의 위기를 모면하게 해 주었던 안정사. 그 안정사 터에는 지금은 절은 간데없고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2000년대 초에 아파트 건설 과정에서 안정사는 다른 이름이었던 청련사(靑蓮寺)로 이름을 바꾸어 경기도 양주시 장흥 개명산기슭으로 이전했다.
현재 KCC스위첸 아파트 단지 안에는 안정사 대웅전 철거 과정에서 발견된 가로 1m, 세로 40cm, 깊이 30cm 크기의 감실(龕室)과 부조(浮彫)로 새겨진 ‘마애불 명문 약사불’이 있다. 이 약사불은 성동구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