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5백 미터쯤 걷자, 「춘포문학마당」이 시작됩니다.
이곳 춘포가 근대역사박물관으로 각광받는 것에 보조를 맞춘 시설인 듯.
익산 출신의 문인들을 기리기 위해 조성했다며 6백여 미터의 둑길에 아홉 개의 문학비를 세워두었군요. 안내문에, ‘시인 안도현도 이곳 출신’이랍니다. 경상도 억양이 매우 심한 예천 출신인데… 아마도 원광대를 다녔고 우석대에서 강의하고 있어서 그렇게 보기로 하는 것 같아요.
문학비 중 하나를 소개합니다.
소라단의 본디 이름은 송전내(松田內)였다. 그걸 우리말로 풀어쓴 이름이 솔밭안이고, 세월에 따라 소리나는 대로 바뀐 이름이 곧 지금의 소라단이라고 고명하신 향토사학자께서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소리나는 대로 부르자면 솔바단이 옳은디 어째 소라단이라냐?”
“만근이 너는 작년에도 멍청허드니만 금년에도 여전히 멍청허구나. 텃밭을 터앝이라고도 부르딧기 밭허고 앝은 똑같은 뜻이여.”
“오냐, 김교장 너 참말로 잘났다!”
“오냐, 니 똥 굵은지 다 안다! 칠십 미리 총천연색 씨네마스코프다!”
-윤흥길, <소라단 가는 길> 중에서
솔밭안이 소라단이 된 연유를 이야기하면서 나이 지긋한 친구끼리 씩둑깍둑하는 재미있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향토색이 물씬 풍기는 소설이군요.
‘솔밭→소랕’ 말이 나왔으니 저도 한 마디 하렵니다.
‘마름’ 있지요? 볼록빵빵하게 생겨가지고 두 귀가 삐죽삐죽 튀어나온 검은 보라색의 수생식물 열매. 주로 못에서 자라는. 핵과(核果)라고 하나요? 딱딱한 껍질을 깨고 보면 밤 같은 속이 있어 파내먹는 그것 말입니다.
저희 경상도에서는 그걸 ‘말밤’이라고 하는데요, 이곳에서는 ‘마람, 마름’으로 발음하더군요.
즉, “ㄹ받침 다음에 오는 첫소리 ㅂ은 흔히 생략된다”는 것이 제가 발견한 전라도 발음습관이더라는 것. 그러니까, 소설 속의 ‘김교장’은 반쯤만 맞은 것이지요. 저도 반쯤만 맞았습니다. 「ㄹ받침 다음의 ㅂ탈락」 현상만 알았지, 텃밭을 터앝이라고 하는 줄은 몰랐으니까요.
물론 표준어는 ‘마름’입니다. ‘마름모꼴(흔히 다이아몬드형이라고 하는)’을 한자로 어떻게 쓰게요? 능형(菱形). 보병훈련소 갔다 온 사람은 다 아는 분대전투에서 “능형으로 벌려!” 할 때 그 능형. 菱이 ‘마름 릉’이거든요. 마름(말밤)의 열매가 꼭 그렇게 생겼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주절주절 하는 저도 ‘똥이 굵은’가요?
그 소라단은 이곳 문학비 있는 곳에서 9킬로미터 떨어진 오산면 송내(松內)마을을 말하는 걸까요?
그런데 이 문학마당은 망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처럼 만경강둑을 걸어서 춘포면을 찾아온다면 모르겠거니와, 차를 몰고 도로로 와서 면소재지 구경하고, 춘포 구 역사(驛舍) 구경하고, 호소카와 가옥 보고, 옛강둑 보고, 그러고는 돌아가 버릴테니 이곳을 들를 기회는 잘 없겠지요. 흙길에 깐 매트도 거의 썩어가고 풀이 무성한 것이 아무도 찾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다시 이어지는 강둑길.
간리(間里)를 지날 무렵 ‘간리양수장’이 둑 아래로 보이는군요. 특이하게도 양수장 건물이 자그마한 팔작지붕 한옥입니다. 한옥 안에 그런 시설이 있을 것 같지는 않고, 양수장 관리하는 사람의 집이거나…
돌아나가던 물길을 막은 곳이라 여전히 물은 생길테니까 계속하여 퍼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곳이 이 강둑과 대간선수로를 따라 수십, 수백 군데는 있을 겁니다.
작은 한옥양수장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았는지 조금 더 간 곳에 매우 큰 양수펌프장이 또 생겼습니다. 인공(人工)의 힘이 자연의 힘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인공은 또 인공을 낳고, 그 인공이 인재를 일으키면 다른 인공으로 또 막아야 하고… 끝없는 반복입니다.
그렇다고 경사가 거의 없어 늘 바닷물의 역류나 홍수에 쩔쩔매던 이 땅을 그냥 둘 수는 없었을테고요. 보존과 개발 사이의 합리적·미래지향적 접점이 요구되는 가장 큰 이유이겠습니다.
(위 2장 : 간리마을 앞의 옛 춘포나루 자리.)
곧 신복·용강마을. 이곳도 대표적인 옛 강에 둘러싸여 갇혀버린 마을입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철판 담장이 길게 이어지며 그 장면이 보이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일정 중에 가장 핵심인 이 볼거리를 보지 못하고 끝나는가? 걱정스럽다가 겨우 출구 부근에서야 철판담장이 끝나 그 중요한 ‘백구정첩로’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일대가 구 만경강의 곡류가 가장 심했던 곳인가 봅니다. 직선화 둑으로 막은 반원의 지름이 5백미터쯤이라면, 반타원형을 그리고 있는 곡선의 지름은 6백미터가 넘으니 매우 심하게 강 북쪽 기슭을 파고들었던 것이지요.
구 만경강의 바깥쪽, 즉 공격사면에 있는 마을은 용강마을, 안쪽 퇴적면의 모래뭍에 있던 마을은 신복마을. 옛날 같았으면 강의 남북으로 나뉘어 용강은 익산군, 신복은 김제군이었을 것이 지금은 모두 익산군입니다. 그 대신, 갇힌 강물을 사이에 두고 두 마을이 마주보며 나뉘어 있고 건너는 다리도 없으니 두 마을이 왕래를 하려면 마을 바깥길로 빠져 나갔다가 들어가는 불편을 겪어야 합니다.
이렇게 심한 곡류의 영향은 건너편 김제의 백구정 일대도 마찬가지이고,
아까 지나온 익산천 하구를 만나면서 강폭이 매우 넓어지는 김제 쪽에도 ‘완전 원형’의 마을이 있는데 고잔(古棧)마을입니다. 예전에 배를 댄 부두 또는 강둑이었다는 뜻이지요. 고잔마을도 당시에는 강 북쪽이었으므로 익산군에 속했을 겁니다.
우리가 강의 북쪽 둑길을 따라 걷는 여행을 하고 있으니 익산군 쪽만 보이는데, 시간을 따로 내어 김제 쪽 강변남로를 걷는 일도 해봐야겠습니다.
(위 : 간리마을에서 퍼낸 물을 만경강으로 흘려보내는 도수구.)
일행 중 한 여성은 “「이뜨기」 언제 나오느냐”며 지친 모습입니다. 벌써 11킬로미터나 걸었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그런데 이 여성은 이뜨기를 어떻게 알까요? 자기가 익산에 수십 년 살아봐서 이름은 들었다고 하네요. 다만, 좋은 이미지로 남아있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장화 없이는 못 사는 동네’로 알고 있다면서.
백구정첩로의 출구를 지나 다시 걷기 시작합니다. 이제 곧 유천마을, 또 하나의 옛 강 자리가 나타나려 하는데…
일행 중 최연장자 이준유 형님이 갑자기 속도가 느려졌습니다. 절뚝거리기까지 하시네요. 발목을 삐었다면서 지팡이를 찾아내어 짚기 시작합니다. 워낙 시멘트 포장길이 길어서 그럴 것 같습니다. 나도 무릎이 슬슬 아파오고 있었거든요.
보조 맞추느라 천천히 걷습니다.
그런데 왼쪽 강 본류의 물길 가운데에 우뚝 선 시멘트 구조물이 눈에 띕니다.
“형님, 발목 아픈 와중에도 경치 볼 정신 있으면 저것 좀 보세요.”
이준유 형님, 바라보더니 “배수문일세그려. 강 속에 들어가 있구만.”
매우 큰 수문인데 얼른 보기에 1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고, 모래밭을 한참 건너가야 볼 수 있습니다. 이 역시 다음에 혼자 기회를 만들어 다시 찾아오기로 합니다.
앞서 간 일행은 유천마을로 내려가는 길목의 나무그늘에 앉아 쉬고 있습니다.
“아까 간리랑 지나올 때 옛 강 보았느냐”고 물으니 못 보고 지나쳐왔답니다. 담장이 길게 쳐져 있던 곳이라고 알렸더니 박연숙씨가 아쉬워합니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유천마을에도 옛둑이 있으니 그렇게라도 보자고 달랬습니다.
유천마을을 들어서자마자 옛 강의 출구를 만납니다. 바로 그곳에 또 배수펌프장이 있어 비교적 시원한 푸른 물이 보입니다. 마을 안길은 ‘옛둑2길’이라 문패가 붙어있어, 정말 옛 강의 둑을 삶터로 삼았던 동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룻터마을, 고제길’ 등등 모두 마찬가지 뜻을 가진 이름이네요.
마을은 옛 강둑에 바짝 붙여 지은 집들이 이어지고 있어서 강물을 보기가 힘들었는데, 한 집의 마당으로 숨어들어가서야 겨우 사진 한 장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이윽고 나타나는 유천경로당과 마을회관. 엄청나게 넓은 부지 위에 선 큰 건물입니다. 예전 나루로 활약하던 당시에 잘 나가던 마을이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장터였을지도 모릅니다. 막 내려놓은 소금과 젓갈을 거래하던.
경로당 마당 맞은편의 이 집은… 혹시 「선창가 주막」이었을까요?
길고 좁은 골목을 걷는 중에 한 조각가가 주도하는 지역행사 현수막을 만났습니다. 이르되, “이띠기 마을장터.” 매월 둘째, 넷째 주말에 자기 집 마당에서 하는 모양이군요. 이런 분들이 지역을 재생할 수 있습니다.
익산시내로 통하는 다리 ‘옛뚝교’를 건널 무렵, 옛 강이 푸른 물을 다시 잠깐 보여줍니다. 이 옛 강의 바닥을 준설한 것도 아주 최근의 일이라면서요.
전라선 철도 고가교 아래에서 쉬는 모습. 패잔병? 낙오병?
‘작은옛둑마을’을 지나면서는 폐선된 옛 전라선 둑길과, 그 둑길에 심어진 가로수의 긴 행렬과, 철교가 끊어지고 남은 교각에 벽화 그려놓은 것…들을 바라보며 잠깐 감회에 젖습니다. 며칠 전에 한 번 와봤다고 그 사이에 정이 들었나?
이래서 나태주는 <풀꽃>이라는 짧은 시에서,
오래 보아야 예쁘다.
자꾸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라 했던가요.
어디 풀꽃만 그렇겠습니까,
지역이나 사람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오래 보고 자꾸 보면’ 사랑스럽겠지요.
버스정류장을 찾아가면서 며칠 전 저 혼자 대수로 답사 때 지났던 동네를 다시 통과합니다. 동산 위로 올라가는 경사진 다리를 보여주니 모두 신기해하는군요. 역시 그 사이에 애정이 생긴 게야… 보여주는 내가 다 자랑스럽습니다. 마치 내 것인 듯이.
드디어 복잡한 구 이리 시내, 버스정류소.
삼례 비비정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다음주(5월 11일) 마지막 5차에서는 자전거를 타고 옴서감서 휴게소와 옛 입석배수문을 지나 새창이다리를 건너 김제로 들어가서 만경낙조 언덕(?)을 보고 돌아오는 것으로 모든 여정을 마무리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