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정이 잠들어있는 곳은 보령화력발전소로 가는 길목인 충남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 산27-3에 부모의 묘를 중심으로,
토정 삼 형제 내외, 토정의 아들 내외, 조카 등, 가족묘로 조성된 14기의 묘가 밀집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천리내룡(千里來龍)에 일석지지(一席之地)라 하여,
아무리 좋은 혈장에도 혈(穴)은 한 곳 밖에 없다는 말이 있는데,
이곳 묘역에는 4대가 한 장소에 몰려있다.
주산을 출발한 주룡(主龍)은 힘차고, 기운차게 육중한 몸뚱이를 흔들며 내려와 바닷가 앞에서 그 몸통을 우뚝 세웠다.
양쪽으론 좌청룡과 우백호가 혈을 호위해주고, 혈장 앞으론 바닷물이 가두어져 호수처럼 보이는데,
그 건너로, 약 5백여m 쯤 떨어진 안산은 세 개의 봉우리가 연이어지면서 좌우 균형을 이루어,
거문고를 옆으로 놓은 것 같은 횡금형(橫琴形)의 형상이 퍽 인상적이다.
이곳 묘역은 토정 선생이 부모와 형님들의 묘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후지지(身後之地)로 미리 잡아 놓았다고 전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을 살펴볼 때에 신빙성은 없다.
* 토정선생의 생애
토정 이지함(李之函 1517-1578)선생은 호는 수산(水山)이고, 그의 조상은 고려 말 삼은(三隱)중 한 분인,
한산(韓山) 이씨의 시조 이색(李穡)의 후손이다.
충남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 복병이 마을(생가 터)에서 아버지 이치(李穉)와 어머니 광주 김씨 사이에서 출생을 한다.
막내아들로 태어난 토정은 14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16세 때는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난다.
이지함은 형 지번(之蕃)과 함께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는데, 이때부터 큰형 지번은 토정의 아버지요,
글을 가르친 스승이다. 시묘살이를 마치고 큰 형을 따라 한양으로 올라온 토정은 왕족(王族)인
이성랑(李星琅)의 딸과 결혼을 한다.
이지함은 결혼을 하고, 광릉농장에서 독학하여 사서삼경에 통달한다.
이 때 공부를 하면서 일화 하나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어느 날 토정이 하인에게 밤에 쓸 등유를 가져오도록 지시를 한다.
그런데 그의 장인이 사위의 건강을 염려하여 등유를 보내지 않자, 토정이 직접 도끼를 들고 산으로 올라가
관솔을 따서 불을 밝히고, 공부에만 전념했다고 한다.
이처럼 열심히 노력한 결과 그의 학문은 눈부신 발전을 보았는데, 영의정을 지낸 조카 산해가 지은
묘비명에 1년 사이에 문장이 물이 솟구치듯 하고 산이 자태를 뽐내는 것 같았다고 그의 호(號)를 응용하여 묘사하였다.
학문에만 심취했던 이지함은 송도에 살던 서경덕(화담)의 문하로 들어간다.
평생 벼슬을 하지 않은 처사로 잘 알려진 화담에게서 주기론 중심의 이기일원론과 수많은 학문을 배운다.
이지함이 천문(天文), 지리(地理), 역학(易學), 의학(醫學), 수학(數學) 복서(卜筮)에 해박한 것은
이때 서경덕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스승의 영향을 받았는지 토정도 벼슬에는 별로 뜻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과거시험에 응시를 해놓고도 시험장에 가지 않거나, 답안을 쓰지 않기도 하고,
또 는 답안을 제출하지 않고 그냥 들고 나오기도 하였다.
이지함의 나이 33세 때다. 죽마고우로 지내던 안명세(安名世)가 처형을 당하는 사건이 터진다.
유능한 사관(史官)이었던 안명세는 그의 소임을 다하고자,
을사사화(1545)때 윤원형의 소윤 일파가 윤임 등, 대윤을 모함하였다고 기록을 하게된다.
그런데 윤원형 일파가 절대 볼 수 없는 사초(史草)를 보게 되었고, 자신들에게 불리한
내용의 사실을 쓴 안명세를 처형하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벼슬길을 바라보지 않게 된다.
그러나 그의 학문에 대하여는 19살이 연하였던 율곡(栗谷)이며,
남명 조식(趙植)은 물론 백사 이항복까지도 그를 경외(敬畏)하였다고 한다.
그는 평생동안을 천민이나 상민들이 쓴 패랭이 갓을 썼는데, 발에는 짚신을 신고,
옷은 누더기처럼 다 떨어진 도포자락을 걸치고 다녔다고 한다. 또한 마포에 살 때는 쇠붙이를 두들겨서
만든 쇠갓(鐵冠)을 쓰고 다녔고, 솥에 구멍이 났을 때는 갓을 뒤집어 놓고 솥으로 대용하였다고 하며,
신발도 짚신이 자주 떨어져 귀찮자 아예 나무로 만든 나막신을 신고 다녔다고 한다.
어느 날 학자들의 천거를 받아 원치 않은 벼슬길에 오른다. 억지로 포천 현감 자리를 떠맡다시피 한 것이다.
부임한 첫날 아전이 밥상을 차려서 들고 나온다. 흰쌀밥에 생선, 그리고 나물과 젓갈이며 김치 등이
소복이 차려져 밥상은 제법 융숭했다.
그런데 상을 받은 토정이 씁쓸해한 표정을 짓는다.“
내가 먹을 게 못 되는구먼!”아전이 한참만에 다시 상을 보아 온다. 그야말로 진수성찬이었다.“
아니, 더 못 먹게구먼!”
그때서야 아전은 소문으로만 듣던 토정의 성품이 생각나 다시 상을 보았는데, 달랑,
보리밥에 김치하나가 전부인 개다리소반을 앞에 놓자 토정이 빙그레 웃으면서 숟갈을 들었다고 한다.
그는 아산현감으로 재직하면서 굶주린 서민들을 구제하고자 소금제조나 어업,
그리고 걸인청을 만드는 등, 갖가지 구휼사업을 펼친다.
또한 마지막 생애를 걸고, 문둥병 치료제를 만드는 것이 자신에게 맡겨진 하늘의 임무라 생각하고,
병의 정체를 연구하고자, 자신이 직접 문둥이가 되기로 작정하고 나병에 걸린다.
치료법의 첫 번째 시도는 당시에 가장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치유법의 하나가, 지네를 즙내어 먹은 다음
밤 한 톨을 삼켜야 하는데, 만약 환자가 일정한 시간 내에 밤을 먹지 않으면 죽게되어 있다.
토정은 지네의 집을 먹은 다음, 아전에게 밤 한 톨을 급히 가져오도록 명한다.
그런데 아전은 거액의 공금을 착복한 자였기에, 이때, 토정을 죽이기 위하여,
진짜 밤 대신에 나무로 깎아 만든 가짜 밤을 바친다. 토정이 속은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죽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결국 그는 숨을 거두기 직전, 아전의 비리를 폭로한다. 그래서 이 일이 일어난 이후로 아산 지방의
아전들은 다른 지방의 아전들 보다 훨씬 낮은 대우를 받았다고 전한다.
* 물과 인연이 많은 토정선생
선생은 생전뿐 아니라, 사후에도 물과 인연이 참 많다. 토정이 태어난 주교면 장산리는
1959년 청라저수지를 만들면서 생가 마당 앞까지 물이 넘실거리고, 또한 토정 외에 수산(水山)이란
호를 함께 사용했다는 점이다.
그의 집터와 수산이란 호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마포강변에 흙집을 짓고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 토정(土亭)도 한강 물과 관련이 많다.
또한 물을 안았다는 지명을 간직한 포천(抱川)현감을 지냈으며, 아산현감 때는 선장포(仙掌浦)에서
밀물과 썰물의 시간을 측정하여 황해도 일대의 조수시간을 쉽게 측량할 수 있는 치적을 올리기도 하였는데,
현감을 지냈던 고을 역시 수산으로 귀착된다. 즉, 포천의 물(水)과 아산의 산(山)자와 연관지어진다.
그뿐 아니라 그의 묘택(墓宅)이 자리잡은 곳도 바다가 직접 보이는 바닷가에 있다.
또, 선생을 모신 화암서원(보령시 청라면 장산리 소재)도 청천 저수지 바로 옆에 있다.
* 토정과 예언
토정은 율곡과 함께 임진란을 예견하였고,
아산관아에서 운명하면서 유언하기를 "내 무덤을 쓸 때에 입관(入棺)이 끝나면, 흙을 한자만 덮은 다음에
이 글을 돌비석에 새겨 그 위에 놓은 다음 봉분을 하라" 하였는데,
그 후 오대 손이 아산현감으로 부임하여 토정 선생의 묘소를 보고는, "
아하! 선조의 무덤이 이렇게 잘못 쓰여 있으니 우리가문이 발복을 못하는구나"
하고는 토정 선생의 묘지를 이장키로 결심하고 무덤을 파는데, 웬 비석이 나오는데, 그 위에 적힌 내용을 보니,
'훗날 내 오대 손이 이곳에 부임하여 내 무덤을 여기까지 파다가 도로 묻을 것이다.'
라는 구절을 보고는 놀래어 황급히 복원하였다는 비화가 있다.
토정비결(土亭秘訣)은 토정이 지은 저서로 알려지고 있지만 토정비결은 생년월일만을 가지고
운세를 본다는 자체에서 정확도가 떨어지고,
유치한 문구 등이 토정의 유명세를 이용하여 후세사람이 만든 졸작에 불과하다.
토정선생이 남긴 역학서는 따로 있다.
국운을 납음오행(納音五行)의 세운(歲運)으로 풀이한 토정가장결(土亭家藏訣)과,
개인의 운명을 정확히 알아낸다는 월영도(月影圖)와 영귀묘산(靈龜妙算)이란 비서(秘書)가 있으나
책으로만 전해지고, 풀이 방법이 전혀 전수되지 않아 이 책을 풀이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영귀묘산과 월영도의 신통함은 점을 치는 당사자의 부인과 어머니의 성씨까지 정확히 알아 맞추고,
또한 당사자가 잊어버린 일까지 알아 맞춘다는 비서다. 이 세 권의 책은 토정이 현무발서(玄武發書)란
중국 책을 응용하여 저술하였다고 전해진다.
현무발서란 책은 중국의 장자방이나 제갈공명이 병서(兵書)로 사용한 책으로,
토정이 우리 나라의 여건에 맞추어 다시 편찬한 책이라고 한다.
《토정가장결》에 "내가 죽은 후, 40년이 되는 을사(乙巳)년 무자(戊子)일에 장남이 아들을 출산을 할 것인데,
이 아이가 우리 집안의 대를 이어갈 것이다" 라는 예언을 하였다.
선생 왈(曰) 아사후사십년을사무자일(我死後四十年乙巳戊子日)에
장남생자(長男生者)하면
즉차시오가전성지인야(則此是吾家傳姓之人也)
오수사(吾雖死)나
개불가위자손원려호(豈不可爲子孫遠慮呼)아
감설천기(敢泄天機)하고
약의년운(略議年運)하며
이교여등(以敎汝等)하노니
신물허누망전음휼지인(愼勿虛漏妄傳陰譎之人)하고
지위보가지방야(只爲保家之方也)하라
선생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죽은지 40년째 되는 을사년 무자일에 장남이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 아이가 우리집안의 대를 이어갈 것인즉, 내가 비록 죽은 후에라도 어찌 자손을 위한 일인데,
자손을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비록 천기를 누설하면서까지 앞날의 운세를 대략 너희들에게 전하나니,
삼가 음흉하고 간사한 사람에게 누설되지 않도록 하고, 오직 집안을 보존하는 데에만 힘써야 하느니라
또한 "우리 나라의 국운은 한양이 오백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며,
원숭이, 쥐, 용(申子辰)해에는 병란이 있고,
범, 원숭이, 뱀, 돼지(寅申巳亥)해에는 혼란과 함께 형살(刑殺) 등이
만연하니 피난을 해야 한다" 고 예언하였는데,
과연 그대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병자호란(丙子胡亂) 을사사화(乙巳士禍) 을사오적신(乙士五賊臣)들의
매국노(賣國奴)사건과 1926년 항일학생 시위운동사건 등, 그가 예언한 일면을 그대로 실증해 주었다.
* 토정의 가족
어느 해, 토정과 형제들이 함께, 조부(祖父)의 묘 자리를 구하러갔었다.
지관(地官)이 하는 말이 이곳에 묘를 쓰면 당대에 당상관(정 삼품 이상의 품계)에 해당하는
벼슬이 2명 정도 나올 명당이지만 막내아들인 토정에겐 좋지 못한 터라는 말을 듣는다.
토정은 근심하는 형님들에게“불길한 일은 제가 다 맡겠습니다.
이 자리로 결정하지요.”라며 안심을 시킨다. 묘 자리의 효과가 있었는지 과연 당대에 2명의 정승이 배출된다.
큰형의 아들, 산해(山海, 1539-1609)는 영의정에 오르고, 둘째형의 아들 산보(山甫, 1539-1594)는
임진왜란 때 이조판서가 되어 1품 정승의 반열에 당당히 오른다.
반면에 토정선생의 네 아들은 모두 불행하게도 젊은 나이에 요절을 하였는데,
큰아들과 셋째 아들은 돌림병(전염병)으로 죽고, 차남은 범에 물려 죽는 불행을 당한다.
* 토정의 음택
국사봉(國師峰), 주산(主山)이 목성 탐랑성(貪狼星)을 일으키고, 혈(穴)은 유두혈(乳頭穴)을 맺었다.
일반적으로 탐랑성에서 내려와 맺는 유혈은 혈장 아래쪽에서 맺는 것이 풍수의 일반적인 통설(通說)이다.
그런데 이곳 묘역은 너무 위쪽으로 묘소들이 조성되어 있고,
입수도두(入首到頭)에서 토정의 부친 묘로 들어가는 은맥(隱脈)이 과맥(過脈)으로 나가,
현재의 봉분(封墳)보다도 훨씬 아래쪽으로 결혈(結穴)을 한다는 점에 간산에 유의를 해야 한다.
주역(周易)과 천문(天文), 지리(地理)에 통달하고, 토정가장결(土亭家藏訣)의 저자로 잘 알려진
선생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다.
설(說)은 이 묘소로 들어오는 살(殺)을 모두 비꼈거나 완벽하게 탈살(脫殺)한 교과서적인 장법(葬法)을
구사한 묘소로 알려지고 있지만, '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 는 속담 한 구절이 실감나는 묘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