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매단상 23. 우리는 과연 정의로운 민족인가
학창시절 수업 중에 들은 이야기 중엔 이런 것이 있었다.
세계적인 석학 아놀드 토인비가 ‘도전과 응전’이란 공식으로 세계사를 섭렵한 <역사의 연구>라는 책을 쓰면서 중국이란 거대한 제국과 러시아 일본이란 만만찮은 나라들과 수 천 년 국경을 접하고 살아오면서 그들에게 편입되지 않고 자기들만의 고유한 언어와 복장, 삶의 방식 등 민족의식을 지켜온 한국이라는 나라의 역사를 발견하고 벌떡 일어나, ‘이건 세계사의 기적이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으나 매사 시큰둥한 만년 중2병 환자인 나에게도 그리 듣기 나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진시황에게 위대함이 있다면 그것은 거대한 대륙인 중국의 여러 나라들이 하나로 통일되어야 평화도 오고 발전도 한다는 변치 않는 메시지를 남겼다는 것일 것이다.
만약 중국이 유럽처럼 여러 개의 작은 나라들로 분리 독립되었다면 상대하기가 훨씬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하나를 지향했고 그래서 늘 거대한 제국의 모습을 지녔다.
이런 강자 앞에서 토인비가 말한 살아남는 기적을 행하는 방법은 싸워서 중국을 이기거나 아니면 타협해서 중국에 사대(事大)하는 방법밖에 없었을 것이다.
몽골족 여진(만주)족 거란족이 전자를 통해 한때 중국대륙을 지배했으나 결국 그들의 속국이 되거나 멸족의 길을 걸은 데 비해, 우리 한반도는 후자인 사대의 길을 선택해 살아남았다는 것이 기존의 정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 민족 고유의 문화와 언어는 그런 상처받은 자존심 뒤에서 지켜진 고귀한 유산일 것이다.
학자들은 흔히 ‘민족’을 상상적 공동체라고 정의한다.
실재하지는 않지만 그 민족이 공통적으로 믿고 있는 ‘그 무엇’이 그 민족됨을 충족한다는 말일 것이다.
나는 그 중의 하나로 ‘민족 신화’를 꼽고 싶다.
단군신화가, 곰이 굴 속에서 쑥과 마늘을 먹는다고 갑자기 형질변경이 되어 여인이 된다는 그 내용의 과학성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 신화를 적당히 믿고 넘어가면서 우리는 ‘곰의 자손’이라는 ‘멍청한 믿음을 공유한 인간들의 집단’이 바로 한국인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거 말도 안돼’라고 한다면 그는 우리의 이민족(異民族)이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일본의 ‘천조(天照)신화’를 신봉하면 그 사람은 일본인의 정체성을 가진 자이고 ‘반고(盤古)신화’를 두둔한다면
그는 중국인의 정체성을 가진 자일 것이다.
나아가 동정녀(童貞女) 마리아가 수태하여 예수를 낳았다는 비과학적인 신화를 믿으면 기독교인일 것이고,
부처님이 보리수 나무 아래 7년을 가만히 앉아 먹지도 죽지도 않고 기도했다는 신화를 믿으면 불교도의 자격이
주어질 것이고, 김일성이 나뭇잎으로 배를 만들고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었다는 황당한 얘기를 듣고 ‘그 분이라면 그러고도 남지’라고 생각한다면 북한 소년단원의 자격이 있을 것이다.
요즘 말로 바꾸면 월드컵이나 올림픽에서 어느 나라를 응원하는 가를 보면 그 사람의 정체성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민족이란 개념은 신화와 전설을 공유하고 같은 언어와 같은 복장 같은 생활습관을 공유한 존재들로 진화해 나가고, 그러다가 자기들과 무언가 다른 ‘타민족’의 공격이나 침략으로 인해 더욱 공고한 결속력을 다지게 될 것이다.
일제 침략기 단재 선생이 ‘아(我)와 타(他)’의 대결이 독립운동이라고 말했을 때 그리했고, 태극기를 본 적도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3.1운동 때 일장기 위에 밥사발을 엎어 놓고 태극기를 급조하여 들고 나가 독립만세를 외쳤을 때 우리의 민족 개념은 더욱 단단해졌을 것이다.
세종대왕이 창제하셨으나 그 쓰임새가 넓지 않았던 한글이 널리 보급된 것도 임병 양란이라는 외침(外侵)과 관계 깊을 것이다. 의병을 모집하거나 정보를 주고 받을 때, 침략자들도 공유하는 한자어 대신에 한글을 암호처럼 사용하였고 그런 과정에서 우리의 문자로, 의로운 조선인으로서의 의무가 강조되었을 것이고 아울러 민중들 사이에 한글이 보급되는데 기여했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조선왕조 끝자락의 망국의 역사만 기억하고 500년의 빛나는 역사 전체를 매도하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그들에게 교육받은 샤이 친일사학자들과 그들이 편찬한 교과서와 그들이 길러낸 교사 등에 의해 그런 바이러스가 퍼졌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그 반대편의 소위 재야 사학자들도 믿음직스럽지 못하긴 마찬가지이다.
하긴 서양사 중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로마의 역사도 그 오랜 통치 기간은 다 잊어버리고 이래서 망했느니 저래서 망했느니 따지는 판이니 이해가 가기도 한다.
영원한 제국은 상상의 세계 속에만 존재하지 현실에는 없다.
어느 나라나 일어서고 쓰러진다.
근대 이후 세계사를 살펴보아도 스페인 영국 미국 등으로 주도권이 이행하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은가.
흥망성쇠를 따지려면 흥한 이유도 망한 이유만큼이나 따져보고 배워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근대 이전 세계의 모든 왕조국가들은 무장(武將) 출신이 전국을 통일하면서 초대 왕이 되고 그런 과정에서 통치의 이념을 점차 확립해 나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조선(朝鮮)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성리학이라는 철학적 모토를 가지고 건국한 나라이다.
그리고 그 철학적 태도는 원조인 중국의 왕조들이 부침을 거듭하는 가운데서도 500년 동안 지켜졌고, 때론 동방예의지국이란 긍정적 대우도 받았지만, 그런 소중화(小中華)주의는 교조화되어 결국은 망국의 한 원인으로 작동한 것도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예의범절”을 따지며 살아온 우리의 역사가 비록 조공(朝貢)국이나 부마국의 형태일망정 우리 민족성과 국가적 정체성을 지켜온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요즘도 유튜브 등에 외국인 여행자들에 의해 자주 소개되고 칭찬받는 한국의 치안 상태나, 지하철이나 카페에서 자리를 비울 때 가방이나 노트북 핸드폰을 놓고 나갔다 와도 전혀 걱정이 없다는 내용도 단순히 CCTV가 곳곳에 있다는 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우리 민족의 개인적 자존심, 타인의 평판에 기대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습성이나 혹은 소속단체나 가족에게 부끄럽지 않은 존재가 되겠다는 눈치 심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물론 그런 것이 소위 ‘국뽕’으로 이어지는 것은 ‘조선 놈은 그저 맞아야 일해’라는 ‘엽전’ 의식이나 노예근성만큼이나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미국이 외교무대에서 중국이나 러시아를 공격할 때 ‘민주주의’란 명분을 앞장 세운다.
군사력에서는 많이 부족한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대통령이 다만 한 가지 푸틴에게 앞서는 것이 민주주의 수호와 평화라는 명분일 것이다.
사실상 푸틴의 최대의 적은 우크라이나나 NATO가 아니라 침공이라는 군사적 방법에 기댄 까닭에 짊어지게 된 악평과 기울어진 여론일 것이다.
연예인 출신의 젤렌스키대통령이 벌이고 있는 매스미디어를 이용한 “연약하고 착하기만한 우리를 저 흉악한 북극곰같은 러시아놈들이 공격하고 있어요. 도와 주세요”하는 여론전이나 언론플레이도 푸틴은 갖지 못한 요소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소위 K-자가 붙은 각종 문화상품이 세계 시장에서 히트상품이 되고 있는 것도 한국이 경제성장과 함께 민주주의를 이룩한 나라이기 때문에 갖게 된 호감의 결과일 것이다.
만약 과거 동유럽 국가들의 올림픽 선수 양성이 그러했듯 음습한 독재체제에서 국가홍보를 위해 아이돌그룹이 집단적 조직적으로 길러진 것이라면 그런 호응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와 거기에 기반한 자유와 평화를 수호한다는 명분은 매우 중요하고 그것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국이 영국이라는 거대한 세계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좋은 생산력을 가진 땅덩어리의 힘보다는 미국이 추구한 정신적 가치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한 줌도 안되는 청교도 이민들이 Mayflower호 위에서 맺은 맹약이 미국 사회의 정신적 기틀이 되었다거나 그 후 독립선언서에 명시된 “이 땅에서는 누구나 평등한 상태로 생명을 유지하고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갖다.”는 선언이 미국을 만들어낸 근본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런 정신이 없었을까?
강력한 힘을 가진 이웃 국가들이 때론 침략하고 때론 일시적으로 점령하기도 했지만 우리 민족과 이 강토를 결국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했던 것은 우리에게 ‘명분(名分)’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 명분은 과거는 ‘의로움’이었고 현재는 ‘민주주의’일 것이다.
이웃 국가들이 우리를 공격한 뒤 “선진적 문화를 가진 우리가 야만인 너희들을 교화하겠다”고 감히 마음을 품지 못할 정도의 지적(知的)이고 도덕적인 국가였던 것이 생존과 정체성 유지의 비결이었다는 생각을 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세계전쟁사의 유례없이 많은 일본측의 참전자들이 “우리에게 유학을 전해 준 의로운 나라 조선”을 정벌하기를 거부하고 투항하거나, 김충선처럼 오히려 조선을 위해 싸운 사람들이 생긴 것도 명분 싸움에서 우리가 앞서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이 비록 혈연이 승계하는 왕조국가였지만 적어도 성리학의 철학 위에서 기반한 국가였기 때문에 폭압적인 군주를 반정(反正)으로 쫓아낸 맹자(孟子)식 혁명(革命)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반정 세력이 내세운 기치는 언제나 ‘의로움’의 유학적 가치였던 인의예지(仁義禮智)였다.
따지고 보면 3.1운동에서 4.19, 5.18을 거쳐 87체제를 이룬 6월 시위, 촛불시위와 대통령 탄핵 등의 곳곳에서 우리는 ‘의로운 민중’이 현실정치에 직접 개입한 자랑스런 참여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왕조시대가 그러했듯 민주적인 선거에서도 이따금 대중은 수준 이하의 지도자를 선택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권력자 개인이 어쩌지 못하는 탄탄한 민주적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거나, 언제든지 지도자를 바꿀 수도 있다는 민주적 신념이나 국가적 자존심을 가진 ‘정의로운’ 국민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면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닐 것이다.
거대한 대륙의 제국 아래서 다소 부끄러운 사대주의 혹은 조공국이라는 생존의 방식 이외에 우리에게 또 다른 생존의 무기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정의로움’이었다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
그러면 과연 우리는 정말 의로운 민족인가? 나는 잘 모르겠다.
이번에 소개하고자 하는 책은 그런 점에서 제3자의 입장에서 냉정하게 바라본 우리 조선의 근현대사이다.
예일대에서 사학을 가르치고 있는 오드 아르네 베스타 교수가 쓰고 옥창준씨가 번역한 책으로 원제는 <Empire and Righteous Nation>(제국과 의로운 민족)이고 부제는 “한중관계 600년사 – 하버드대 라이샤워강연”이다. 여기서 ‘제국’은 중국을 가리킬 것이고 ‘의로운 민족’은 조선에서 이어지는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말이다.
아래 글은 책 내용에서 퍼온 것임을 밝힌다.
민족 개념을 탐구하는 과정은 ‘인민과 영토’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구성되어 왔는지와 관련된 문제를 넘어선다.
민족주의와 민족이 취하는 형태는 그들이 만들어지는 순간에 따라 다르다.
많은 경우, 특히 유럽에서 ‘민족’은 배제(排除)에 관한 것이었고, 누가 여기에 속하지 않느냐의 문제와 관련되었다.
한반도의 경우 누군가를 배제하는 문제보다도 민족의 명확한 속성이 더 중요했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한반도 정체성의 발견은 이웃 나라인 중국과 일본의 엄청난 압력 속에서 이루어졌다. 한반도인은 중국의 일부가 아니었고 일본에 복종하지 않았다.
북쪽과 서쪽에는 중국 제국이 있었고, 동쪽의 섬에는 강력한 일본의 지도자들이 있었지만 반도에는 한반도인이 있었다. 한반도는 주로 문화 언어적으로 정의되었으나, 한반도는 정치적으로 독립을 누렸고 제도적인 실체가 있었다.
한민족에게 또 하나의 개념은 ‘의로움(righteous)’이다.
유교적 사고방식에서 의로움이란 도덕적 적합성, 충성심, 원리에 대한 충실함을 의미한다.
의로움의 개념을 한반도에 적용할 때 이는 대부분의 한반도인이 특별히 더 의롭다거나, 의로움에 더 사로잡혀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나는 한국의 역사에서 의로움이 궁극적으로 좋은 가치로 선언되거나, 국내외를 막론하고 억압적인 정권에 대항하는 기치로 소환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1590년대 일본의 점령에 대항한 조선인 군대와, 한 세대 이후 만주족의 조선 침공에 대항했던 조선인 군대는 모두 ‘의병(義兵)’으로 불렀고, 이는 20세기 초의 식민지화에 대항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