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양업 신부님 탄생 200주년 기념] 1. 최양업 신부의 부친 성 최경환(프란치스코)
최양업 신부님은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님에게 보낸 1851년 10월 15일자 서한에서 부모님의 순교 행적을 보고하였고, 박해 후 『기해병오박해순교자증언록』에 나타난 신자들의 증언을 통해서 성인의 삶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인은 천성적으로 진정한 신앙의 실천자이며 정직과 순박을 애호하면서도 강력한 성품을 타고났습니다. 1801년 박해 후 가산의 부유함과 친척들의 번성으로 가족들이 냉담하게 되자, 1827년경 고향과 친척과 재산 등을 떠나 서울 낙동(駱洞, 현 회현동 2가 일대)에 거처하다가 다시 이곳을 떠나 여러 산골로 이사를 다녔습니다. 과거에는 부자였으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진하여 가시덤불과 돌 자갈밭을 개간하는 등 극도의 궁핍과 재난을 기쁘게 받아들였고, 자주 깊이 묵상하고 신심 독서를 함으로써 열렬한 애덕과 하느님 신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얻었습니다.
성인은 세상 이야기는 도무지 듣기를 싫어하여 고개를 숙이고, 교리 이야기를 하면 즐거운 마음과 기쁜 빛이 드러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모범을 더욱 철저하게 따르는 것을 유일한 희망으로 삼고 만족해 하며 살았습니다. 얼마나 꾸밈없이 순박하게 그리고 몸짓을 해 가면서 말하는지, 듣는 사람은 누구나 탄복했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그의 열정은 이웃에 대한 애틋한 동정심과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즉 과일을 추수할 때면 가장 좋은 것을 골라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물건을 살 때면 항상 제일 나쁜 것이나 흠 있는 것을 골랐습니다. “왜 그러냐?”라고 나무라자, “제일 나쁜 물건을 사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 않겠소? 그런 사람이 없으면 이 불쌍한 장사꾼들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단 말이오”라고 하였습니다.
홍주에 있던 땅을 팔아 돈을 마련해 돌아오는 길에 빚을 갚지 못한 이웃 사람이 돈을 꿔 준 사람에게 봉변을 당하는 것을 보자, 기꺼이 돈을 내주어 그의 빚을 갚아주었습니다. 체포하러 온 포졸에게 아침밥을 지어 대접하고 남루한 차림의 포졸에게 옷을 내어 주자, 그들은 “이 사람과 이 가족이야말로 진짜 천주학쟁이”라고 하였습니다. 수리산 교우촌 40여 명이 포도청으로 끌려갈 때, “형제들이여, 힘을 냅시다. 이 정도의 여행을 힘겨운 고난으로 여기지 맙시다. 주님의 천사가 황금으로 만든 자를 갖고 우리의 발걸음을 재고 계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장서서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아 산으로 올라가시는 것을 생각합시다.”라고 격려하였습니다.
포도청 감옥에 갇혔을 때, 옥살이하던 도둑이 형벌로 상한 데를 발로 찼으나, 성인은 아프다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신자들에게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참으로 성교(聖敎)하는 사람이라, 너희도 성교를 하려거든 프란치스코 같이 하라.”고 하였습니다. 포도대장이 예수님을 배반하라고 하자, “밥을 먹지 말라 하면 극히 어려운 일이라 하나, 혹 가히 좇으려니와 배주(背主)는 만만코 못하겠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포졸도 “최경환은 신통하다. 형벌 받을 때는 죽은 사람 같다가도 책을 보거나 교리를 말할 때에는 상처 아픈 생각도 없고, 죽기 무서운 마음도 없이 즐거운 빛만 드러난다.”라고 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함께 갇혔던 교우들이 치도곤 10대를 맞고 배교하였습니다. 성인은 “수리산 모든 교우가 이렇게 다 배주하니 참혹하지 아니하냐?”라고 하면서, 아무말 없이 머리를 숙이고 묵묵히 앉아 오래도록 슬퍼하였습니다.
성인은 치도곤을 맞고 그 후유증으로 옥사하게 되었는데, “내가 예수님의 표양을 따라 사형장으로 나가 칼 아래 죽자 하였더니, 옥에서 죽게 되니 막비주명(莫非主命, 주님의 명령이 아님이 없음)이라.”고 하시면서 1839년 9월 12일 순교하였습니다. [2021년 6월 13일 연중 제11주일 원주주보 들빛 3면,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최양업 신부님 탄생 200주년 기념] 2. 최양업 신부의 모친 복자 이성례(마리아)
이성례(마리아)는 18세에 최경환(프란치스코)과 결혼하여 남편을 공경하면서 한마음 한뜻이 되어 집안일을 지혜롭게 꾸려 나가고, 식구들 간에 불화 없이 지냈습니다. 평소에 “이 세상에서 남편을 여의고 살아남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남편 못지않은 극기와 신심을 지니고 있었고, 신앙생활에도 충실하였습니다. 아들들이 먼 길을 걸으며 굶주리고 지쳐 칭얼거리면 요셉과 마리아가 이집트로 피난 가는 이야기나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른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신앙을 위한 인내심과 참을성을 가르쳤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어머니가 “아들들에게 구원에 유익한 말과 모범으로 천주교 교리와 기도문을 가르쳤다.”라고 하였습니다.
1839년 박해 때에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갈 때, 자식들을 위해 물건을 챙기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이에 포졸 하나가 점잖지 못하게 치근거리면서 “다른 이들은 다 떠났는데, 왜 꾸물거리고 서 있느냐? 가기 싫은 것 아니냐?”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당신은 누구를 망측한 사람으로 여기십니까? 내 남편과 내 자식들이 갔는데, 내가 왜 안 간단 말입니까? 당신은 상관 말고, 당신 갈 길이나 가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포도청에 갇혔을 때, 예수님을 증거하느라 온갖 고문을 받아 살이 너덜너덜 찢어지고, 팔과 다리가 부러져 유혈이 낭자하였습니다. 가장 큰마음의 고통은 갓난 아기에 대한 애정이었습니다. 젖을 달라고 하는데 젖은 안 나오고, 먹을 것을 달라는데 먹일 것이 없었습니다. 자식들이 굶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남편이 살아있을 때는 버텼습니다. 남편이 순교한 후에는 자식에 대한 애정에 의해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곤장과 칼에는 용맹했으나, 자식에 대한 애정에는 약했습니다. 결국 모성애 때문에 배교하고 풀려났습니다. 이는 하느님이 주신 모성애를 따르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큰 아들 최양업이 유학 간 사실이 드러나서 형조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때 형조 감옥에 갇힌 신자들이 배교를 취소하고 영광스럽게 순교하자고 권하였습니다. 이에 감동하여 뉘우친 후 배교를 취소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모든 유혹을 용감히 이겨내고 모정에서 오는 생각을 물리쳤습니다. 막내아들 스테파노(2살)가 기아와 비참으로 눈앞에서 죽는 모습을 보아야 했습니다. 이때 두 아들(큰 아들 최양업과 막내아들 스테파노)을 하느님께 바친 것을 기뻐했습니다. 더 큰 믿음에서 살아남게 될 자식들을 하느님께 맡기고 순교의 길을 걷고자 한 것입니다. 다른 아들들에게는 구원에 유익한 말과 모범으로 교리, 기도문을 가르쳤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둘째 아들 야고보(12살)에게 “하느님의 계명을 부지런히 지키고, 형제들 간에 서로 화목하고 사랑하라.”라고 하면서 사형장에 따라오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고아로 남겨질 아들들을 보면서 그 순간 모정에 끌려 나약해지고 마음이 흔들려 준비 안 된 모습을 보여줄까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야고보는 눈물짓는 어머니와 작별 인사를 드리고, 형장에 있어야 할 감옥의 사람들에게 어머니를 보살펴드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조심스럽게 지켜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이성례(마리아)는 1839년 12월 27일 안온하고 평화스러운 얼굴로 당고개 형장에 도착했고, 6명의 신자들과 함께 순교하였습니다. 야고보는 먼 곳에서 순교하는 모습을 보고 돌아왔는데, 동생들이 “어머니가 언제 오시냐?”라고 묻습니다. [2021년 6월 20일 연중 제12주일 원주주보 들빛 3면,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최양업 신부님 탄생 200주년 기념] 3. 스승들이 본 최양업 신부님 I
신학생으로 선발한 모방 신부는 1836년 4월 4일 자 서한에서 “이들을 우리가 보낼 수 있을지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최양업과 최방제) 어렸을 때의 귓병으로 오른쪽 귀를 잘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오는 겨울에 보내려고 생각했었습니다만, 그들을 보낼지 아직은 확실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모방 신부는 세 신학생을 마카오로 보내면서 그해 12월 3일 자 서한에서 “이 소년들은(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온순합니다. 마음에 드시길 바랍니다. 그들은 열심과 순명으로 공부에 전념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바랑탱 신부는 1837년 6월 13일 자 서한에서 “샤스탕 신부가 보낸 2명의 밀사들이 1837년 6월 7일, 3명의 조선인 학생을 데리고 왔습니다. 17세에서 18세까지의 이 학생들은 놀랄 만큼 순박해 보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칼르리 신부는 1837년 10월 4일 자 서한에서 “나의 조선 소년들의 목소리가 매우 신 목소리이고, 완전히 음정이 맞지 않는 목소리라는 말을 하는 것을 잊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교회 노래와 성가들을 가르쳐 그것을 좀 고쳐볼까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해 10월 6일 자 서한에서 “르그레즈와 신부가 그 교육을 나에게 전적으로 맡긴 3명의 조선 소년들은 훌륭한 사제에게 바람직스러운 것, 신심, 겸손, 면학심, 선생에 대한 존경 등 모든 면에서 완전합니다. 그들은 그들을 가르치는 데 위로를 주고 그 수고를 보상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리브와 신부는 1839년 6월 23일 자 서한에서 “(최양업) 토마스는 아주 건강합니다. … 토마스는 천주 성삼의 제2위인 성자가, 아버지가 아들보다 더 능해야 한다는 단순한 이유에서 제1위인 성부보다 덜 능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며칠 전에는 그들이 어떤 것이든 소죄를 고하지 않는 사람은 통회가 없고 따라서 그러한 상태에서 사죄를 받으면 독성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대죄만은 모두 고해야 하지만 소죄를 고할 엄격한 의무가 없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내가 그들을 우롱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이 나를 믿기까지는 매우 힘이 들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해 8월 11일 자 서한에서 “최양업 토마스는 계속해서 유리한 상태에 있고 하느님께서 그의 건강을 허락해 주신다면 조선 선교지를 위해 유익한 몸이 될 것이 확실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1842년 4월 1일 자 서한에서 “브뤼니애르 신부는 남은 조선 학생(최양업)을 교육하는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그는 이 학생에게서 많은 재능, 무엇보다도 좋은 판단을 발견하였음을 말씀드립니다. 그래서 브뤼니애르 신부는 그를 가르치기에 아주 적절한 학생을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고, 브뤼니애르 신부는 1842년 10월 22일 자 서한에서 최양업에 대해 “신심과 재능이 뛰어난 저의 조선인 젊은 학생”이라고 하였습니다.
페레올 주교는 1843년 2월 20일 자 서한에서 “최양업 토마스는 북쪽에서 나와 함께 있습니다. 그는 신학을 계속하며 매우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한 살만 더 먹었더라면 금년에 서품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리브와 신부는 1843년 6월에 보낸 서한에서 “아직 성품을 받지 않았다면 곧 받게 될 것이고, 그의 덕행과 재능으로 조선에 큰 희망이 되고 있는 조선인 학생으로 이름은 최양업 토마스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2021년 6월 27일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원주주보 들빛 3면,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