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선 경
살구꽃 피면 한 잔하고 복숭아꽃 피면 한 잔 하고 애잔하기가
첫사랑 옷자락 같은 진달래 피면 한 잔 하고 명자꽃 피면 이사
간 옆집 명자 생각 난다고 한 잔 하고 세모시 적삼에 연적 같
은 저 젖 봐라 목련이 핀다고 한 잔 하고 진다고 한 잔 하고 삼
백 예순날의 기다림 끝에 영랑의 모란이 진다고 한 잔 하고 남
도(南道)의 뱃사공 입맛에 도다리 맛들면 한 잔 하고 봄 다 갔
다고 한 잔 하고 여름 온다 한 잔 하고 초복 다름 한다고 한 잔
하고 삼복 지난다고 한 잔 하고 국화꽃 피면 한 잔 하고 기울고
스러짐이 제 마음 같다고 한가위 달 보고 한 잔 하고 단풍 보러
간다고 한 잔 하고 개천(開天)은 개벽(開闢)이라 하늘 열린다고
한 잔 하고 입동(立冬) 소설(小雪)에 첫눈 온다고 한 잔 하고 아
직도 나는 젊다고 한 잔 하고 아랫목에 뒹굴다 옛시(詩)를 읽으
며 한 잔 하고 신명(神明)대접 한다고 한 잔 하고 나이 한 살 더
먹었다고 한 잔 하고 또 한 잔 하고 그런데
그런데
우리 이렇게 상갓집에서나 만나야 쓰겠냐고
선배님께 꾸중 들으며 한 잔 하고
아직도 꽃 보면 반갑고
잔 잡으니 웃음 난다고
반 너머 기울어진 절름발이 하현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