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회자 모임]
십자가로 가는 길 - (9) 내 나라는 여기에 있지 않고
(요18장)
2020. 6. 12. 이현래 목사
지금은 요한복음 마지막으로 가는 길이다. 17장에서는 “그들도(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17:11)가 주제였다. 그런데 거기서 어려운 것이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요17:21)라는 말이 있었다. 신학적으로 생각하면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 같이’ 이 말은 동일 본질이 안 되겠는가? 삼위일체로 생각하면 쉬운 일이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 같이 저들도 우리 안에 있어서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하면 곤란해진다. 신으로서 예수와 인간으로서 내가 어떻게 연합해서 하나가 되겠는가? 이것을 생각해 보면 대단히 어려운 문제다. 어쩌면 불가능한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 같은 것은 본성에 신성이 있어서 그렇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사람을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서 사람을 지었다. 만일 사람이 이탈되지 않았더라면 누구나 다 똑 같다.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자신의 모양대로 만들었으니까 만일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된다면 당연하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14:9) 이렇게 해야 맞는 게 아니겠는가? 예수님의 신성, 선재적인 신성 때문에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이해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사람을 지을 때 형상으로 지었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 안에서 생명이 된다면 형상은 생명이 없다는 말이다. 형상이라는 말은 우상이라는 말도 된다. 우상은 무엇인가? 생명이 없는 모양이다. 사람도 하나님이 자기를 나타내기 위해서 형상으로 만들었다. 그 형상은 반드시 영이요 생명이신 그분이 있어야만 된다. 없으면 빈껍데기다.
불교에는 사람 자체가 불성을 가지고 있다. 그게 업에 가려서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는 어찌하든지 그것을 벗겨내서 속에 들어 있는 불성을 찾아내면 된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람은 그렇게 만들어졌는가? 성서는 절대로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하지 않는다. 사람은 그분의 형상을 따라 그분의 모양대로 만들어졌다고 했지 그분의 신성을 따라 만든 게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니까 너무 쉬워진다. 맞는지 안 맞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받아들이기에 너무 쉽다. 마땅히 우리가 동산에 살았다면 하나님과 깊은 관계가 있는 삶을 살았다면 누구라도 그래야 되지 않겠는가? 만물이 볼 때 사람 따로 하나님 따로 볼 수가 없게 되어 있다. 하나님은 아예 보이지 않는 분이다. 보이지 않는 분을 보이게 하려니까 형상이 필요했다.
그러면 보이는 분과 보이지 않는 분을 어떻게 우리가 구분해 보겠는가? 보려면 형상을 통해서 볼 게 아니겠는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 “본래(자고로)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고 했을 때, 그분이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같은 신성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겠으며, 우리와 어떻게 연합이 가능하겠는가? 이론적으로는 그렇게 해야만 예수님의 어떠함을 보존할 수 있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실제적으로는 받아들이기 불가능하다. 그래서 삼위일체론은 미완성된 교리다. 완성된 게 아니다. 불완전한 교리다.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게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쉽게 이해하려면 성경에 있는 대로 그냥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은 사람으로 오신 것이다. 신으로 오신 게 아니고 사람으로 왔다. 사람으로 왔는데 우리가 보기에 하나님 같았다. 형상이니까 그렇다. 완전한 형상이라면 그 생명을 완전하게 드러내는 것이 완전한 형상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후에 심히 보기 좋았다는 말은 바로 자신을 완전하게 표현할 수 있는 형상으로서 심히 좋다는 그 말이지 자기와 비슷하기 때문에 좋다는 것은 아니다. 자기와 비슷하면 우리가 생각할 때는 좋을 것 같다. 그렇지 않다. 사람이 하나님과 비슷하면 절대로 안 된다. 사람은 사람다워야 하고, 하나님은 하나님다워야 한다. 여자가 남자 비슷하면 불합격이다. 쓸모없는 여자다. 남자 비슷한 여자, 잘 하면 남자도 될 수 있는 여자, 이런 것은 세상에 없다.
사람도 비슷하다면 열심히 노력하면 같아지겠다는 게 나온다. 그래서 종교 안에 이런 것들이 많이 나오게 된다. 율법주의나 수도원, 이런 것들이 수도를 하면 어느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자기들이 어떤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반야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은 하나님 경지라는 것이다. 아무데도 제한받지 않는 유아독존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이 불교의 지론이다.
기독교인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수양을 잘하고 열심히 잘 믿으면 성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가톨릭 사상이다. 그 사람들은 성자숭배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성자를 숭배해야 그렇게 따라갈 게 아니겠는가? 나도 저런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기독교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저런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이런 것이 팽배하게 일어난다.
그러면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과는 관계가 없어진다. 형상으로서 지어진 인간은 형상으로서 완전해야 한다. 여자는 여자로서 완전해야 되고, 남자는 남자로서 완전해야 된다. 개는 개로 완전해야 되고, 소는 소로 완전해야 되지, 개도 아니고 소도 아니고 당나귀 같은 것이다. 말도 아니고 소도 아닌 당나귀 같은 것이다. 인간이 결국 수양을 하고 신앙을 가져서 당나귀 되는 것이다. 당나귀는 새끼를 못 낳는다. 씨가 없다. 말 같기도 하고 소 같기도 해서 써 먹기는 편리하고 좋은 데 후손이 안 나온다. 삼배체 수박처럼 우선 먹기는 좋은데 해마다 그것을 다시 만들어야 해서 삼배체 수박은 없어졌다. 육종학에 큰 기여를 했다고 하지만 식물로서는 완전히 쓸모가 없는 것이 되었다.
사람도 하나님 비슷하면 절대로 안 된다. 사람인데, 연합을 하면 하나님으로 나타난다. 나는 여기서 이런 해방을 얻었다. 어떻게 하면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까? 이게 모두의 과제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노력도 많이 못하지만 조금 해보면 안 된다. 불가능해서 일찍 포기를 했다. 성인이라는 사람들을 보면 열등감만 생긴다. 저런 사람처럼 되어야 하는데 안 되는구나. 심지어 우리는 예수처럼 되어야 되는데 안 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예수 닮기 원하네. 예수 닮기 원하네.’ 하는 노래도 다 있다. 닮아 보려고 노력하는데 닮아지겠는가?
하나님은 자신이 지으신 세계를 연합해서 완성하도록 지어놓았다. 이것은 틀림이 없다. 창세기 2장 마지막에 “합하여(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라고 했다. 이것은 변할 수 없는 진리다. 이것은 이론적인 것이 아니고 현실을 보면 다 똑 같다. 개도 그렇고, 소도 그렇고, 나무도 그렇고, 사람도 다 똑 같다. 둘이 합해서 완전해지는 세계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는 절대로 홀로 완전해지는 세계가 아니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저들도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되어’라고 하면 불가능할 것 같은데 형상이라고 생각하면 당연하게 가능한 것이다. 또 당연히 그래야 된다. 예수님과 아버지가 하나인 것처럼 우리도 당연하게 예수 안에서 아버지와 하나이어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 안에 신성이 있는가? 아니다. 없는 신성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창세기 2장에서는 숨을 불어넣었다고 하는 것을 영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혼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혼이 된 것이다. 산 혼이 되었다. 혼을 가졌다는 것은 기능을 가진 존재가 된 것이지 결코 생명체가 아니다. 그래서 사람이 뭘 만들어도 절대로 생명이 있는 것은 만들어 낼 수가 없다. 스스로 움직이는 것은 만들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자기 형상을 따라 자기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말은 하나님 자신도 그렇다는 말이다. 자기대로 만든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나대로 만든다. 사람이 만든 것 중에서 완전자동인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뭔가 있어야 되지 자기 혼자 완전한 것은 절대로 없다. 앞으로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절대로 이것은 안 될 것이다. 아무리 천재라도 이것은 안 된다. 더 좋은 기계를 만들수록 더 감독이 필요하고, 더 좋은 기계를 만들수록 더 좋은 운전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기름이 없이는 못 간다. 아무리 좋은 차라고 해도 기름이나 전기 없이 움직일 수 있는 차는 없다. 이 세계 어디를 가도 스스로 움직이는 것은 없다. 스스로 완성되는 것은 절대로 없다. 다 연합을 해서 완성된다.
예수님의 마지막 소원은 연합이다. 칼빈의 구원론에서도 마지막은 연합이다. 그리스도와 연합, 그 안에서 그리스도에게 준 모든 축복을 우리가 공유하게 된다고 했다. 아주 맞는 말이다. 한 치도 틀림이 없는 말이다. 아무리 뭘 잘해도 결과적으로 연합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연애만 하다 마는 것이지 결혼을 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나 홀로는 아무 것도 안 된다. 내가 하나님과 연합한다면 내 형제와 연합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왜 우리는 예수처럼 안 되는가?’ 그것을 걱정할 필요는 하나도 없다. 나는 거기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하나님이 쓰시고 싶은 대로 쓰신 것이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사람으로 쓰실 수도 있고, 나 같이 감기 하나도 못 고치는 사람으로 쓸 수도 있다. 하나님이 그렇게 쓰셨는데, 무슨 불만이 있겠는가. 이 사람은 이렇게 쓰고, 저 사람은 저렇게 쓴다. 다 똑 같이 예수처럼 만들겠는가?
옛날에는 나도 방언도 해보고 싶고, 입신도 해보고 싶고, 신비한 세계를 다른 사람은 보는데 나는 왜 못 보는가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을 볼 사람은 그것을 보고, 그렇게 나타날 사람은 그렇게 나타난다. 하나님이 써먹는 데도 어떤 사람은 평생을 병 고치는 일에만 쓰신다. 그 이상 발전하지 않는다. 그것 밖에 안 되는 것 같은데, 그것도 중요한 게 아닌가? 그것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니까 중요하다. 나도 그렇게 해 보고 싶었는데 안 되었다. 그게 열등감이 되었는데, 지금은 전혀 열등감이 되지 않는다. 그 사람들을 내가 무시한 것도 아니다. 그 사람은 그렇게 썼으니까 그렇게 표현되면 되고, 나는 나대로 쓰시면 되는 것이다.
여기 오신 여러분들도 다 다르다. 다 다르기 때문에 다 다르게 쓴다. 그릇대로 쓴다. 하나님은 자기 형상을 따라 자기 모양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을 자기 모양대로 쓸 수가 있는 것이다. 자기 형상을 따라 자기 모양대로 사람을 쓸 수가 있다.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 나만큼 쓰시면 나는 만족한다.
인생이 왜 불만족스러운가? 무엇이라도 자기만큼 안 되니까 불만이 되었다. 아무리 신앙을 해보라. 뭐가 되는가? 안 된다. 마지막에 가면 애매모호하고 안 된다. 뭔지 확실치 못하다. 신학이 이렇게 발전해도 대답은 없다. 좋은 말도 많은데 답이 없다.
요즘에 신학적으로는 그렇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답이 없어도 신학은 신학이다. 하지만 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답이 없는 설교를 하고 있으면 사람이 오겠는가? 오면 어떻게 하겠는가? 사람은 모아 놓고 어디로 데려가겠는가? 내가 답을 가지고 있어야 다른 사람에게 답이 된다. 내가 길이 되어야 다른 사람에게 길이 된다. 내가 길이 안 되었는데 어떻게 길을 가르쳐 주겠는가?
이것은 길을 가르쳐 줄 수 있는 길이 아니다. “내가 곧 길이요.”(요14:6) 예수님이 그랬으면 우리에게 예수님이 길이지 예수님이 우리에게 길을 가르쳐 준 게 아니다. 그것은 가르쳐 줄 수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예수님의 길을 배워서 남에게 가르쳐 줄 수는 절대로 없다. 그것은 길이 아니다.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 했으면 나도 나만큼 어떤 사람에게 ‘길이요.’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예수님과 우리가 비교가 될 수 없을 만큼 차이가 많을 수 있다. 차이가 많아도 할 수 없다. 나는 다섯 사람의 길일 수 있는데, 어떤 사람은 열 사람의 길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은 만민의 길이 된다. 그 차이다. 어떻게 우리가 똑 같이 할 수가 있는가?
그런데 똑 같지 않다고 해서 부끄러운 것도 아니고 잘못된 것도 아니다. 부잣집에 가면 금 그릇도 있고 은 그릇도 있다. 또 큰 그릇도 있고 작은 그릇도 있을 것이다. 요즘 냉면 그릇 같은 것은 굉장히 크다. 냉면을 담을 때는 좋지만 그 큰 그릇에다 김치 몇 조각을 넣어 두면 보기에 얼마나 이상하겠는가? 김치 몇 조각을 담으려면 조그만 접시가 좋다.
각자 자기대로 만족하게 쓴다. 하나님께서 쓰시면 절대로 불완전한 게 없고, 나도 불만족스러울 수도 없다. 접시 아니면 안 될 때도 있고, 냉면 그릇이 아니면 안 될 자리도 따로따로 있다. 냉면 그릇은 냉면집으로 가는 것이고, 접시는 접시 쓰는 집으로 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뭐가 불공평하시겠는가? 그릇을 사놓고 후회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릇 집에 가서 보기 좋다고 막 사놓았다. 집에 오니까 몇 년을 가도 안 쓰는 그릇도 있다. 그런데 어떤 그릇은 시시한 그릇인데 매일 쓰는 것도 있다.
우리 집에 컵이 하나 있는데 별 게 아니다. 그냥 두리뭉실한 그런 컵이다. 그런데 물이 데워질 때는 빨리 아주 잘 데워진다. 생기기는 둔하게 생겼는데 열전도율이 굉장히 빠르다. 나는 물을 항상 데워 먹어야 하기 때문에 늘 그 컵을 쓴다. 왜냐하면 나는 비싼 컵이 필요한 게 아니고, 내게 필요할 때 필요한 것이 좋은 컵이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요17:21) 이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다.
17장에 가면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17:1)라는 말이 나온다. ‘내가 세상에서 아버지 이름을 나타냈습니다.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아버지 이름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십시오.’ 이렇게 주고받는데 너무나 행복한 일이 아니겠는가. 아버지는 아들을 영화롭게 하고, 아들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고, 이것이 최종적인 문제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어 놓고 ‘심히 좋다.’고 하셨다. 그러면 사람도 하나님께 ‘심히 감사합니다.’라고 하면 된다. 그런데 동산을 나온, 사탄의 말을 들은 아담은 ‘심히 감사합니다.’가 안 나왔다. 그래서 동산을 나왔다. 밖에 나와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해야 구원이 되는가? ‘심히 감사합니다.’라고 하면 구원이 된다.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한 것이다.
하나님은 만족하셔서 안식하셨다. 그래서 너희도 안식하라는 말이다. 우리도 하나님만큼 안식하면 그것이 구원의 완성이다. 하나님은 안식 하시는데 나는 안식이 안 되니까 안식일을 백날 지켜도 안 된다. 내가 안식이 안 되니까. 왜 안식이 안 되는가? 만족이 안 되니까. 왜 만족하지 않는가? 그것은 내가 나만큼 쓰이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만큼 쓰이는 줄 알면 만족이 된다. 나만큼 쓰였구나. 나만큼 쓰이는구나. 우리만큼 쓰이면 된다. 우리만큼 잘 쓰이면 그것이 안식이고 복이다.
18장에 가면 예수님이 붙잡혀 가는 슬픈 역사가 시작된다. 거기서 잡혀서 가야바에게 가고, 거기서 빌라도에게도 보내어지고, 마지막에는 빌라도에게서 심판을 받아서 결국은 십자가로 내몰리게 되는 사건이다.
빌라도와 대면에서 중요한 말이 나왔다. ‘너는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 사람은 왕이라고 했다고 고발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왕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시저 밖에 없습니다. 가이샤 외에는 왕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놈이 자기가 왕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반역죄입니다.’ 하고 고발한 것이다. 그래서 빌라도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물으니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18:36)고 대답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이 나라는 내 나라가 아니다.’
오늘 이것이 중요한 것이 우리는 지금 같은 나라에 살고 있다. 같은 지구 위에 살고 있다. 그런데 나라는 다른 나라이어야 한다. 나라라는 말은 지배라는 뜻이고 통치라는 뜻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도 지배는 다르게 받아야 한다. 다른 지배를 받아야 되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어려움이기도 하고 영광이기도 하다.
세상을 들여다보면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로 다 바벨론이다. 벽돌을 찍어서 불에 구워서 성을 쌓는 세계가 우리가 보는 세계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벽돌을 찍어서 만들 수가 없다. 왜냐하면 생명의 나라이기 때문에 벽돌을 찍어서 구워버리면 쓸모가 없다. 그것은 멸망이다. 완전 멸망이다. 흙이 안 되기 때문이다.
창세기 5장에서만 보더라도 태어나서 먹고 자라서 시집가고 장가가서 자식 낳고 죽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마지막에는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고 했다. 그게 하나의 희망이다. 흙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은 희망이다.
그런데 벽돌이 되어 버렸다는 것은 희망이 전혀 없다. 거기서는 연합이 불가능하다. 벽돌끼리는 연합이 불가능하니까 성이 견뎌내겠는가? 그렇게 높이 오르니까 견뎌내겠는가? 결국 흩어지고 만다. 그게 세상이다. 세상은 구워진 벽돌끼리 모인 곳이다. 뜨거운 불에 구워져 다시는 흙이 될 수 없는 물건이 되어서 성을 쌓고 있는 것이 세상이다.
내가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이유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인간의 계획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잘 될지 못 될지 떠나서 잘 된다고 하더라도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벽돌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계획이다. 사람의 계획으로 만든 것이다. 자본주의가 그래도 여유가 있는 것이 무엇인가? 인간의 본성에 호소하고 있다. 그래서 부익부 빈익빈의 모순이 생기지만 자기가 살기 위해서 사회보장제도를 만들게 되어있다. 부자가 자기를 지키고 보존하려면 남에게도 나누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안 그러면 자기 것을 지킬 수가 없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당연히 수정자본주의로 가게 되어 있다. 나 혼자 못 먹는다. 나 혼자 먹으려 하면 도둑맞아 버린다. 그리고 나 혼자 돈을 가지고 있으면 내 목이 달아나 버린다. 내가 돈을 지키려니까 병력이 필요하고 국가가 필요하다.
내가 나이가 많은 변호사를 만났는데, 그분이 하는 이야기가 법은 있는 자를 위해서 있는 것이지 없는 자에게는 법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돈이 있는 것을 지켜주려니까 법이 필요한 것이지 돈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에게는 법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지켜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듣는데 처음에는 띵 했다. 법은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강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자본주의 내에서 법이라는 것은 가진 사람을 보호하는 것이다. 여러분도 한 번 생각해 보시라. 내가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 법이 나를 보호해 주어야 한다.
혁명을 일으켜 집권을 하면 당연히 법을 만든다. 왜냐하면 그 법이 나를 지켜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부자는 결국 망할 것이다. 부익부빈익빈이라고 해서 자본주의는 망할 것이라고 칼막스는 예언했지만 안 망하고 산다. 왜? 미국 같은 나라는 제일 많이 기부를 하는 나라다. 부자들이 돈을 낸다. 부자들이 국가에 세금을 더 내자고 한다. 왜냐하면 국가가 있어야 자기들이 보존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그런 단계가 못 되기 때문에 진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진짜로 돈이 많아 보라. 돈 많은 사람이 한 사람 있고, 없는 사람이 백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살 수 있는가? 못 산다. 6.25 때 그런 일이 있었다. 노화도 옆에 녹도라는 섬이 있는데, 그 섬은 붉은 돔이 주산지다. 거기에 부자가 한 사람이 살았다. 봄에는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돈을 받는다. 그때 이자가 얼마나 비싼가 하면 봄에 쌀 한 가마니를 빌려 가면 가을에는 두 가마를 줘야 한다. 장리쌀이라고 한다. 한번 집이 기울어서 빌리기 시작하면 절대로 일어날 수가 없다. 농사를 지어서 어떻게 그것을 갚겠는가? 그 섬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 가난하고 이 사람만 특별히 부자였으니까 거기서 왕 노릇하고 있었다.
그런데 6.25 사변이 났다. 어찌 되었는가? 사람들이 그 사람을 배로 싣고 가서 발에 돌을 달아서 깊은 바다에 빠트렸는데, 요행이 발에서 돌이 빠져나가서 살아났다. 그런 다음에 이 사람은 개과천선했다. 봄이 돌아오면 쌀이 없을 때니까 무이자로 양식을 빌려준다. 다만 돔을 잡거든 기왕 다른 사람을 주느니 나에게 달라는 조건을 달았다. 돔 잡이 하던 어민들이 살판이 났다. 도미 잡이 하던 어민들이 해마다 잡아도 빚을 져야 하는데, 그때부터 빚을 지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자를 주지 않고, 기왕 도미 파는 것을 그 사람에게 팔면 더 좋다. 우리 옆의 섬에서 그런 예가 있었다. 그 사람이 그 다음부터는 성인군자가 되었다. 한번 물에 빠지고 와서 완전히 사람이 다른 사람이 되었다. 이제는 그 섬 사람들이 그 사람이 없으면 안 되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돈의 원리는 돈이 많으면 혼자 가지고 있으면 안 되고 나눠먹어야 한다. 돈이 있는 사람은 쓸 줄도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 기업인들이 쓸 줄을 모르다가 지금 당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혼자 쌓아놓고 있으면 잘 사는 것 같지만 그것이 못 사는 것이다. 혁명이 일어나면 다 뺏긴다.
5.16 군사혁명이 일어난 후에도 부정축적으로 몰수하는 부정축적 몰수법이 있었다. 이*철씨는 자기 재산의 반 이상을 국가에 내놓았다. 대구역 뒤에 가면 제일모직 자리가 있다. 지금은 금싸라기 땅인데, 그 제일모직 땅의 주식의 반이 국가 것이다. 그때 그것을 다 내놓았다. 내놓고 나서 하는 말이 ‘재산은 일정수준을 넘어가면 개인의 것이 아니다.’라는 이 유명한 말을 했었다.
그리고 삼*문화재단을 만들고 좋은 책들을 번역해 내는 사회사업의 일을 했다. 또 성*관대학교에 돈을 대었다. 그때 성*관대학이 가장 좋을 때였다. 왜냐하면 고시 공부하는 학생들이 있으면 무조건 합숙하여 장학금을 주어서 많이 합격했다. 황*안 전 총리도 그때 사법고시에 합격한 사람이다. 서울대학교를 갈수 있었는데, 돈이 없어서 장학금을 주는 곳으로 갔다. 성*관대학을 나와서 고시 합격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에 데모가 생기고 만날 데모를 하니까 이*철씨가 돈 주고 욕 얻어먹고 하고 싶겠는가? 그래서 손을 떼고 말아서 성*관대는 도로 성*관대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희사를 하면 칭찬을 받아야 하는데, 칭찬은 커녕 맨날 데모나 하고 욕이나 하는데 하고 싶겠는가? 그 이후로 아무도 기업이 대학에 투자하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서로 망할 수를 스스로 쓴 것이다. 그때 잘했으면 성*관대학이 굉장히 좋아졌을 것이다. 이*철씨가 도와주는데, 돈 많은 기업이 대들어서 학생들을 키우면 서울대학교가 문제겠는가? 교수도 제일 좋은 교수를 모셔오고, 학생도 제일 좋은 학생을 뽑아 와서 하는데 어떻게 안 되겠는가?
이*철씨는 재산은 몰수당한 후에 큰 깨달음을 가졌다. 그런데 그것을 실천해도 안 먹혀들어가는 사회라서 도로 들어가고 지금 그 손자가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돈을 벌면 써야 한다. 자기가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 자본주의 사회라고 해서 무조건 내가 가지고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언제 빼앗길지 모른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유지된다. 돈을 쓰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부자들이 돈을 안 쓰다가 이런 모양이 되었다.
아주 심각한 문제가 우리나라에 발생하고 있다. 완전히 원수 져서 싸운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심화된 때는 내 일생에 처음 보았다. 해방이후로 쭉 봐왔는데 갈등이 없는 사회가 있겠는가? 지금이 아주 심각하다. 이렇게 까지 이견이 된 것은 상방간의 이유가 다 있다.
돈이 있는 사람은 돈을 쓸 줄 알아야 한다. 이번에 누가 무슨 일로 왔길래, 이때 네가 돈을 좀 써라. 그러면 너희 집안이 편해진다. 왜? 그 사람은 그 돈이 없어도 된다. 그런데 그것을 쓰지 않으려고 하면 그 집안이 콩가루 집안이 되고 만다. 어느 집도 가보면 다 그렇다. 다 돈이 없으면 괜찮다. 다 가난하면 괜찮다. 그중에 한 사람은 돈이 많고, 다른 형제들은 돈이 없으면 그 집안은 콩가루 집안 된다. 그때 돈이 있는 한 사람이 돈을 써야 된다. 그래야 가정이 화목하고, 또 자기가 존경받고 한다. 돈이 있는 사람은 써야 한다.
복음도 그렇다. 복음이 많은 사람은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불가불 화를 당할 것이라고 한다. 내가 복된 것을 가지고 있는데, 복된 것을 주지 않고 있으면 내가 화를 당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전도를 하지 않고 있으면 편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 주변 사람들이 다 나와 같은 복을 누리도록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래야 나도 편하다. 나 혼자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영화롭게 하고 아들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고, 얼마나 좋은 세계인가! 가난한 사람과 부한 사람이 연합을 하면 얼마나 좋은 세계가 되겠는가. 그런데 연합이 안 되고 서로 대립관계를 가지고 있다. 잘못하면 싸움이 일어난다. 내 돈 주고 내가 맞는 결과를 가져온다. 하나님 나라는 연합을 통해서 주고받는 나라다. 연합이 없으면 아무것도 안되고 모든 것이 다 안 된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이 나라는 내 나라가 아니다. 나는 여기에 속하여 있지 않다.’ 우리가 세상 속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 사람들과 관계를 가지고 살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내 나라가 아니라는 것은 알아야 한다. 우리들의 나라는 아니다. 우리들의 나라로 생각하고 들어갔다가는 애급에 들어간 이스라엘 사람처럼 그렇게 되고 만다.
한때 우리나라에 사회 복음주의 운동이 일어났을 때다. 그때 예배당만 있을 일이 아니고 세상으로 나가자고 하여, 젊은 사람들이 비키니 차림으로 여름에는 해수욕장으로 나갔다. 또 어떤 사람은 밤에 술집에 나가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창녀촌에 나갔다. 이렇게 한때가 있었다. 그런데 다 실패하고 말았다. 이상은 참 좋다. 우리가 예배당에서 주여, 주여 하고 있으면 뭐 하냐? 현장에 나가서 우리가 같이 뒹굴어 보자 했는데, 다 실패하고 돌아왔다. 그 후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한때 그랬다. 크리스마스카드를 만드는데 서양사람 카드를 만들 필요가 없지 않느냐? 핫바지 입고 갓 쓴 영감을 그려 놓자고 한때도 있었다. 여러 가지를 아이디어를 냈는데 구별이 안 되면 안 된다. 구별 속에 공존해야 한다.
내 나라는 여기 속하여 있지 않다. 예수님의 나라는 세상에 와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 구별이 있어야 한다. 없으면 안 된다. 개와 소는 구별이 있어야 된다. 없으면 안 된다. 말과 소는 구별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노새가 나온다. 그러면 그것은 멸종되는 것이다. 다 없어져버린다.
모세는 애굽에 내려가서 내 백성을 내놓으라고 했다. 왜 내놓으라 하느냐고 하니까 대답이 바로가 들었을 때 맹랑한 대답이다. 우리는 여호와께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제사 드리기 위해 한 사흘 길 쯤 나가야 된다는 것이다. 애굽에는 제사 드릴 데가 없느냐? 내가 여기서 허락을 할 테니 얼마든지 제사를 드리라고 했다. 모세가 거기서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 아니다. 나가야 된다. 나가지 않고는 제사를 못 드린다. 그래서 열 가지 재앙의 전쟁을 한 것이다. 왜 그랬겠는가? 애굽에서 제사를 지내봐야 소용이 없다. 왕이 따로 있는데 되겠는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릴 자리가 따로 있으니까 안 되었던 것이다.
그 뒤로 성막을 지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사람과 함께 거하려면 땅에 와야 하는데,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거하는 장막에 같이 거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따로 있어야 한다. 그래서 여호와의 거룩하심을 보존하기 위해서 성막을 지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성막으로 오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 그 말은 성막이 되었다는 뜻이다. 우리와 똑같았는데도 구별이 되어 있었다. 같으면서도 구별이 되어 있다. 같으면서도 구별이 되어 있는 그분이 우리의 구속자가 된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구원하려면 세상과 똑같아서는 세상을 구원할 수 없다.
한때 사회복음주의는 그것을 주장했다. 그런데 자기도 안됐는데 세상을 어떻게 구원하겠는가? 자기도 지금 구별이 안 된 사람인데, 어떻게 세상을 구별해 내겠는가? 우리가 구원을 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구별하는 것이다. 거기 속한 사람을 구별하는 것이다. 애굽에 사는 사람을 구별해 내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무엇인가? 바벨로 가는 대열에서 아브라함을 구별한 것이다. 구별이 안 된 것은 자기도 안 되고, 남도 안 되고 아무것도 안 된다. 구별이 되어야만 구원할 수 있다. 우리가 지금 생명 안에서 연합되어 구별이 되어야 그것을 통해서 세상이 구원을 받게 된다. 우리가 안 되면 세상이 구원 받을 리가 없다. 교회부터 안 되는데 세상이 뭐가 되겠는가? 그래놓고 복음을 아무리 전해봐야 되겠는가?
세상이 볼 때 교회는 달라야 한다. 여기 오니까 다르네, 다른 세계라고 해야 한다. 세상에 있을 때나 교회 있을 때나 매한가지이면 뭣 하러 교회를 오겠는가? 우리가 배타적이고 배격한다는 말이 절대로 아니다. 우리가 분명해야 세상이 살수가 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이 나왔다. 한국적인 것이 아니면서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없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가장 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천국이 될 수 있다.
나부터 구별이 되어야 된다. 구별이 되어서 남을 구원해야지 내가 구별이 안 된 사람으로 누구를 어떻게 구원하겠는가?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친구를 만들면 뭐를 만들겠는가? 술 좋아하는 사람을 만든다. 우리 교회는 다양하다. 술 친구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는데, 술 친구로서 사람을 데리고 온 사람은 없다. 자기들끼리는 잘 산다. 심심하면 술 먹고 하는데 그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냐 하면 못 한다. 쉽게 생각하면 그렇게 해서 친구를 사귀어서 데려오면 좋지 않겠나 하는데, 그렇게 해서 교회로 데려오지 못한다.
구별되어야 한다. 구별된 것이 살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구별된 것이 독선주의가 되는 것이 아니고 살리는 것이 될 수 있다. 살릴 수 있는 쪽으로 구별이 되어야 한다. 교리적으로 구별이 되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내 생명이 구별이 되어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안에 연합이 된다면 세상과 구별되지만 세상을 구원할 수가 있다.
내가 교리적으로 다른 사람과 구별이 되면 남을 구원할 수 있는가? 전혀 불가능하다. 십자가 안에서 내가 구별되면 그렇지 않은 많은 사람을 구원하게 된다. 구원의 목표가 어디인가? 십자가 안에 예수와 내가 연합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내가 먼저 십자가 안에 있는 예수 안에 있어야 한다. 나를 보고 오는 것은 그곳을 보고 와야지 다른 것을 보고 교회로 오면 맨날 와도 소용이 없다. 내가 설교 잘한다고 오고, 내가 뭐한다고 오면 될 것 같은데 그것은 안 된다. 내 구원을 보고 와야 된다.
예수께서는 가시면서 이 나라는 내 나라가 아니라고 말했다. 나는 이 나라에 속하지 않는다. 빌라도가 그것을 다시 묻지 않았다. 빌라도대로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 사람은 천당이 있는가보다 이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는데, 그 다음에 묻는 말이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진리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는 자리이기 때문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분 자신이 진리였다. 하나님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십자가에서 완전하게 사람으로 드러났다. 그것이 진리다. 그것이 우리가 갈 길이다. 우리가 가야할 길이고, 우리가 있어야 할 참이고, 우리가 얻어야 할 생명이다. 그것을 대답을 해줄 수가 없다. 희랍인들 같으면 진리가 무엇이라고 대답을 하겠지만 이 진리는 희랍인들이 대답하는 그런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대답할 수가 없다. 참이다.
희랍인들과 차이는 그것이다. 희랍인들은 무엇이든지 객관화한다. 진리도 객관화하고, 생명도 객관화고, 다 객관하다. 그래서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도록 객관화 하는 것이다. 그것은 진리도 아니고 생명도 아니다. 그 세계에서는 가도 가도 불완전하다. 불완전이라는 말이 거기서 나왔다. 절대 진리를 찾으니 있겠는가?
둘이 연합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는데 뭘 찾겠는가? 어디 가서 아기를 만들겠는가? 하늘에 가면 아기가 있겠는가? 결혼하면 아기를 낳지만 하늘 어디 가서 아기를 낳겠는가? 희랍 철학은 점점 갈수록 오리무중이다. 옛날 희랍 철학은 그래도 좀 대상이 있는 것 같은데, 지금은 대상이 인간 자신의 이성 속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갈수록 애매하고 모호하고 혼란스럽다. 기독교 신학이 여기와 같이 맞물려 돌아가니까 연구하면 할수록 더 혼란스러워진다.
단순하게 하나님의 계시 안에 들어와서 내가 피조물이라는 것을 알고 고백을 하고 굴복을 해야 되지 자기가 그것을 만들려고 생각을 하니까 안 된다.
내가 옛날에 경험한 것인데, 유명한 분들이 토론회를 한다고 해서 가보았다. 사람이 많이 왔는데, 신학자 세분이 왔다. 총신 측에서 김*환 박사가 왔는데, 그때 한참 미국에서 와서 날리던 때다. 장신대에서 조직신학 김 교수, 연세대에서 서*동 교수가 왔다. 세분이 골고루 왔다. 토론을 하게 됐는데 서*동 교수 이야기를 들으면 무슨 말을 하는지를 모르겠는 것이다. 하나님이 있다는 것인지 없다는 것인지 무슨 말을 하는지를 모르겠다. 그 사람은 그때 무엇으로 유명했는가하면 새로운 신학 사상이나 책이 나오면 제일 먼저 번역해서 소개한 사람이다. 아주 첨단을 걸어가는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토론을 하고 나서 서로 질문을 하는데, 그때 장신대에서 오신 조직신학 교수가 서 교수에게 서 박사님은 오늘은 이곳에 있다가 내일은 저곳으로 가고 저기 갔는가 하고 찾아갔더니 모레는 다른 곳으로 가고 어디가 주소지냐고 물으니까 서 교수가 대답하기를 원래 신학은 그런 것이 아니냐, 나그네 아니냐고 대답했다. 거기는 대답이 되었다.
그런데 청중들에게 질문지를 돌려 질문을 하라고 했다. 나는 서 교수에게 질문했다. 서 교수님은 하나님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 질문을 했다. 그랬더니 다른 사람 질문은 대답을 다 했는데, 내 질문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질문 같지 않아서 대답을 하지 않은 것인지, 대답하기 곤란해서 안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대답을 하지 않아서 못 들었다. 하나님이 있다는 것인지 없다는 것인지 아마 그런 쪽에서는 어떤 신을 만드는 것 같았다.
요즘도 그런 사람이 있다. 자기 하나님을 만든다. 왜냐하면 계시를 무시하고 나면 하나님이 어디 있는가? 없으니까 만들어야 한다. 과학은 처음에 어떤 꽃에서 향기를 맡는다. 그것을 채취해서 분자 구조를 만들어 다음에 그 향을 만들어내는 것이 과학이다. 천연향과 인공향은 다르다. 그런데 아주 비슷하게 만든다. 이것을 사람은 모르고 쓸 수 있는데 벌은 가지 않는다. 나비도 안 간다.
짐승들은 본능이 발달하고 직관력이 발달했기 때문에 아무리 잘 만들어도 속지 않는다. 사람은 잘 만들어 놓으면 천연향인지 인공향인지 구별이 안 된다. 만일 천연향을 여자들이 얼굴에 바르고 다니면 그것도 곤란하다. 벌들이 달라붙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인공향을 바르니까 달라붙지 않는다. 개도 라면을 잘 먹지 않는다. 왜냐하면 방부제 들은 것이라 먹지 않는다. 사람이 만든 것이 다 그렇다.
우리는 생명의 세계로 간다. 벽돌공장으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니고, 농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작년에 엉겅퀴가 났을 지라도 금년은 또 포도를 심을 수 있다는 그리로 가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흙을 가지고 돈이 되는가? 돈이 안 된다. 농사 지어봐야 돈이 되는가? 안 된다. 하지만 돈이 안 되는 농사를 지으러 가야 한다.
이번에 코로나 문제가 나오니까 당장 식량전쟁이 논의 되었다. 식량을 주지 않으면 공업이 아무리 발달되어도 무슨 소용이 있는가? 식량은 생명산업이다. 각 나라마다 최소한 자기 국민이 먹을 수 있는 식량은 보존하고 보호해야 한다. 지금은 수입해 먹는 것이 싸지만 그러다가 못 주겠다고 막아버리면 공장에서 쌀을 만들어 내겠는가?
마지막 승리자는 결국 생명을 가진 자가 승리하게 될 것이다. 벽돌은 한번 구워지면 쓸모가 없다. 다시는 거기서 생명이 나올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 현재 문명은 점점 인간을 벽돌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위대해지기도 하고 놀라워지기도 하는데 생명력은 없다. 알고 보면 이 문화가 벽돌문화다.
우리가 벽돌 문화가 아닌 생명 문화 안에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한 일이다. 교회도 벽돌화시키면 안 된다. 벽돌로 교회를 지어버리면 그것은 안 된다. 새 예루살렘은 벽돌이 아니고 보석이다. 보석은 천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은 그 안에 있는 성의 영광을 빛내기 위한 것이니까 다르다.
수정과 유리가 뭐가 다른가? 안경점에 가서 배웠다. 유리는 수정과 원료가 같은데 결국 끓여서 식힌 것이다. 아무리 천천히 식혀도 유리 결이 불규칙하게 된다. 수정은 수 만년을 거쳐 응고가 되기 때문에 일정한 결이 있다. 블라인드 같은 결이 있다. 그래서 블라인드처럼 이렇게 보면 캄캄해지고, 이렇게 보면 열린다. 그래서 수정 알이 좋다고 한다. 결 때문에 직사광선이 바로 안 들어온다. 천연적으로 만들어진 것과 사람이 인공적으로 만든 것은 차이가 나지 않을 수가 도저히 없다.
교회도 천연재료를 사용해야 된다.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진 그것으로 교회가 건축되어야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교회를 건축하면 안 된다. 그러면 교역자와 교인이 아무 관계가 없다. 벽돌과 벽돌 사이가 되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부딪히면 서로 깨질 수밖에 없고, 생명이 나올 수 없고, 씨를 심어도 나지 않는다.
내 나라는 여기 속하여 있지 않다. 나라가 구별되어야 한다. 믿는 사람도 이것이 구별되어야 한다. 왜 거듭나야 된다는 말을 했는가? 구별이다. 내 나라는 여기 속하여 있지 않다. 우리들의 나라는 여기 속하여 있지 않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만나고 있는데, 다른 세계에 가면 다르다. 여러분이 다른 것을 느꼈는지 못 느꼈는지 모르는데 알고 보면 다르다. 그렇다고 표 나게 다른 것도 아니다. 보이지 않지만 다른 것이다. 왜? 하나는 벽돌이고, 하나는 흙이고, 이 차이다.
벽돌은 훨씬 더 위대하다. 견고하다. 하지만 생명력이 없다. 생명을 기를 수 있는 능력이 없다. 흙은 값이 가치도 없고,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지만 생명을 살려 낸다. 생명을 키워내게 된다. 우리들의 교회가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또 우리들의 만남도 그렇게 되어야 되지 벽돌공장에서 만나면, 만난 것 같은데 만난 것이 아니다. 생명 안에서 만나면 영원한 친구가 되게 되고, 벽돌 공장에서 만나면 친구가 아니다. 이해관계로 만나진 것이니까 끝나면 그만이다.
나는 이런 세계로 들어오게 된 것이 너무 감사하다. 내 스스로가 너무 감사하다. 나도 벽돌공장 공장장이 될지 몰랐는데, 내가 벽돌공장으로 가지 않고 농장으로 왔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지금도 나는 흙이니까 나만큼 뭐가 생산이 된다. 그런데 벽돌공장은 생산이 안 된다. 늙은 목사들이 할 일이 없다고 한다. 벽돌이 되면 할 일이 없고 쓸모가 없어진. 좋은 벽돌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유학 갔다 온 벽돌이 많으니까 구닥다리를 써 먹겠는가? 생명 안에서는 계속 생산이 된다. 신기하다. 살아있기 때문에, 흙이기 때문에 그렇다. 위대해서가 아니고 흙이기 때문에 잡초가 나오던지 하여간 뭐가 나온다. 그런데 벽돌에서는 아무것도 안 나온다.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요17:37)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요18:38)하고 묻고 마쳤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여러분도 이것은 다음에 생각해봐라. 교회 예배에서 사용하는 사도신경이라는 것이 있는데, 거기 참 묘한 말이 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는 이 말이 나온다. 분명히 성경에는 본디오 빌라도가 죽였던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이 위탁을 해서 죽인 것이다.
빌라도는 여기서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고 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정치가니까 정치적인 죄가 있냐? 없냐? 이것을 판단하는 사람이지 종교적인 죄를 판단할 수 없다. 알지도 못한다. 조사해 봐도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주고 석방하려고 했는데 기어코 예수를 죽이고 바나바를 살려달라고 해서 죽인 것이다. 그런데 왜 사도신경에는 그렇게 말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지금 전 세계 교회가 사도신경을 교독문이라고 읽고 있다. 역사적인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연구해보면 재미있는 답이 나올 것 같다. 그 다음에 마지막에 가면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이런 것이 나오는데 거룩한 공회는 무엇인가? 거룩한 공회는 천주교의 공회다. 성도의 교통과 이것은 교회다. 그러면 교회는 무엇이고, 공회는 무엇인가? 식사 하시면서 토론을 해보라. 내가 연구해 볼 시간이 없으니까 여러분도 한번 알고 있을 필요가 있다.
미국에 갔을 때, 유대인 회당에 갔는데 여자가 지키고 있었다. 우리 중 영어를 잘하는 형제가 당신들이 예수를 죽인 사람들이 아니냐고 질문을 했더니 놀라듯이 아니라고 했다. 우리가 예수를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성경에는 그 사람들이 죽였는데 자기들은 예수 죽인 일이 없다고 한다. 이상한 일이다. 기독교 역사가 흐르면서 어떻게 변천했기에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 궁금하니까 연구를 해보기를 바란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