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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공 따님의 묘표문
Ⅰ. 고령신씨가의 광주정씨 시조공 기록
금년 1월 14일 및 2월 21일, 고령신씨 병암 신경식 선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다음카페 ‘광주정씨 파이팅’에 게재된 ‘신응모공의 금서축’과 관련하여 원본 서책에 관한 문의였다. 신응모공은 신숙주공의 아우이며 대사간을 지내신 귀래정 신말주공의 후손이 되시며 그 아들이 예조판서를 지내신 백파 신헌구공이다. 여러 번 연락 끝에 병암선생님으로부터 고령신씨 문중 등에서 발간한 5권의 책자을 받게 되었다. 대단히 감사한 일이다. 그 목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영천세승(靈川世乘)」, 2013년 9월 고령신씨 귀래정 안협공 도사공파종중회
- 원저자 백파 신헌구
「혜원 신윤복」, 2015년 10월 고령신씨 안협공파종중회
제6회 양평의 명가전 「수대 고령신씨」, 2016년 12월 양평 친환경농업박물관
「저암만고(樗庵漫稿)」 상하, 2016년 1월 양평문화원
- 저암 신택권(申宅權) :1722~1801, 동지중추부사, 시 1,600수, 잡문 30편
「1388년 고려 산수도를 그린 신덕린 선생은 누구인가?」, 2020년 2월 사단법인 송헌문화재단(고령신씨)
고령신씨 가문에서는 선조의 시문집 등을 활발하게 번역 간행하고 있는데, 이들 발간책자는 극히 일부이다. 이 책자 중 시조공의 사위이신 신덕린공과 배위이신 광주정씨의 묘표문 등에 광주정씨의 시조공에 대한 관직명 등 귀중한 사료가 포함되어 있어 이를 소개드리고자 한다.
광주정씨 시조 휘 신호(臣扈)공은 2남 2녀를 두셨는데 둘째 따님이 고령신씨 5세 되시는 순은 신덕린공에게 출가하셨다.
이 광주정씨 할머님을 주목하는 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고령신씨가의 족보 및 묘표문에 시조공의 관직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빠른 것은 1522년~1530년경(숙인 졸년 추정)의 기록이다. 보한재(保閑齋) 신숙주(1417~1475) 공의 손자이신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 1484~1555) 공은 대제학(大提學)을 지내셨는데, 그 장인이 금산군수 임만근(林萬根, 1459~1522) 공이다. 임공의 배위 즉 장모님이 광주정씨(6세 정절 鄭晣공의 따님)이신데 기재공이 쓴 광주정씨의 묘비문에 “정씨는 대족이다 옛 부터 현저하다. 고려조에 삼중대광 문하찬성사를 지내신 신호공이 계신데 ~~ ”라는 기록이 있었고, 아울러 1716년에 건립된 신덕린공의 묘표문에도 배위이신 광주정씨의 아버지 시조공의 관직명이 봉은사 진전직이다 라는 기록이 보이는 등 귀중한 사료가 되기 때문이다.
둘째 순은공과 배위 광주정씨의 아들 6세 신포시(申包翅)는 참의이며, 손자 7세 암헌(巖軒) 신장(申檣, 1382~1433)공은 공조참판이시고 증손자 중 영의정 신숙주공, 대사간 신말주(1429~1503)공 등 그 여경(餘慶)이 이어져 조선시대 내내 크게 문명을 떨쳤기 때문이다.
* 1648년 1월 5일자 후손 신유(申濡)공과 1652년 1월 신혼(申混)공의 순은 신덕린공의 묘제문(墓祭文)이 있으나 배위 광주정씨의 기록은 없고, 1716년의 신덕린공의 묘표문과 1731년의 배위 광주정씨의 묘표문에 기록이 남아있다.
Ⅱ. 숙인 광주정씨묘지명(企齋集 淑人 光州鄭氏墓誌銘)
- 6세 정절(鄭晣)공 따님
고령 신광한 高靈申光漢
鄭大族也 系出光州著於古 高麗之季有三重大匡門下贊成事臣扈生麟振(주1)仕我尹開城府麟振生存 司憲府監察存生以忠雲峯縣尉 是生 高城郡守晣 實淑人之考也 母南氏 南氏者大臣元翰之孫 繼明之女生淑人而賢南氏敎之善 極尊女範未笄而織造成功獻之 高城目曰 異日必爲人賢婦福之所綏其在玆乎 及長歸林氏今錦山郡守諱萬根爲配 ~~中略~~ 嘉靖二年(주2)十月十三日疾終于錦之衙享壽六十五矣 有子三女二 男長曰參奉毗早逝有子曰仁壽是嗣祀 次曰畡中文官爲靈光郡守 次曰畯中武科爲扶安縣監 皆在官遭憂 女一適李君希雍今刺富平府於畡爲同年 光漢其季壻也於畯同年而文~~~後略
企齋集
정씨는 대족이다. 광주가 본관이고 옛 부터 현저하다. 고려조 삼중대광문하찬성사로 계시던 신호공이 계신데 인진을 낳으니 개성부윤이요 인진은 존을 낳으니 사헌부감찰이요 존은 이충을 낳으니 운봉현위요 이분이 고성군수 절을 낳았으니 바로 숙인의 아버지이시다. 어머니는 남씨이신데 남씨는 대신 원한의 손녀이며 계명의 따님이시다. 숙인은 어려서 현명하고 남씨께서 잘 교육하시니 여자의 모범을 이루었다. 출가전에 길쌈을 잘 지어 올리니, 고성군수 말씀이 “언젠가 반드시 현부가 되어 복을 받아 편안히 살 것이고 자애로움이 있다.”하였다. 커서 임씨에게 출가하니 오늘의 금산군수인 휘 만근의 아내가 되었다. ~~~ 중략 ~~~ 가정 2년(1522년) 10월 13일에 병환으로 임공이 금산관아에서 돌아가시니 향수 65세이다. 아들 셋 딸 둘을 두었다 장남 참봉 비는 일찍 죽고 차남 해는 문과에 올라 영광군수가 되었고 둘째 해는 무과에 급제하여 부안현감이며 셋째 준은 무고에 급제하여 부안현감이 되었다. 모두 벼슬자리에 있을 때 상을 당하였다. 큰딸은 이희옹(후일 강원 황해관찰사)에게 출가하였는데 부평부의 원이며 해와 동갑이고, 광한은 막내 사위인데 준과 동년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 이하 생략
주1) 현 족보가 맞다면 “生允浮仕我尹開城府生麟桭 麟桭生存司憲府監察”이 바르다
주2) 1522년에 임만근 공이 졸하셨는데 1459년생이시고, 이 비문은 광주정씨가 돌아가시고 쓴 것이므로 1522년 이후에 지은 것이다. 조선 건국 후 130여년 시점이다. 이 시점에서 시조공의 상계가 없다는 것이 아쉽고 현재 광주정씨 족보의 시조공 관직명의 유래는 이 기록에 따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출전 : 고령 신광한의 기재집에 실렸는데 2001년 광주정씨 족보 신사보에서 재인용
Ⅲ. 1716년 8월 예의상서 신공 묘표(高麗禮儀尙書申公墓墓標)
□ 비양(碑陽) : 비석 앞면
諫議奉翊大夫禮儀判書兼寶文閣大提學 贈正憲大夫吏曹判書申公之墓
간의 봉익대부 예의판서 겸 보문각대제학 증정헌대부 이조판서 신공지묘
□ 비음(碑陰) : 비석 뒷면, 음기(陰記)
公諱德隣字不孤號醇隱高靈人也 麗朝文科至右官 我朝贈今官 公書隷眞草俱妙人得隻字爭寶畜之曰申某三昧筆 公與李文靖檣從往于艱始終不渝棄官南歸于居光州片坊里 甁栗屢罄怡然自處 忠勤行篤名重當世 卒于家 葬于玉果南柯寺洞丑坐之原 公夫人光州鄭氏奉恩寺眞殿直贈大匡門下贊成事諱臣扈之女 墓在光州南瓮井里壬坐 公之子參議公諱包翅 墓在公墓地東北間欝子坐有碣 參議夫人慶州金氏奉翊大夫禮儀判書諱冲漢之女墓與公墓東岡上下俱無表碣 後孫參判湛宰是邦欲竪石莫的某位爲公墓乃止 四時香火先下而後上皆據古來相傳之語也 後孫必淸守龍城改封築與察訪善泳及諸宗相議曰 今去公纔十餘世尙如此若復後百千年安保其並與墓所而不其莫如立石以表其岡 乃欲樹碣俄解歸未果 歲己丑十二代孫幼學標經理伐石未及運 適必淸之姪택(雨+澤)爲檢田債丁輸來 又宰扶風損廩相役石頑字缺亦未竪焉 標乃槪然而完役爲任改他石立于墓下 噫! 我朝醇隱公류慶裕後子孫昌大省掃墓庭冠蓋相屬凡所修治之道無不備至獨恨其未表也 乃至今日斯碑乃成蓋亦有待而然其敢曰 余效微勞將以示後書梗槪如右
崇禎紀元後九十年丙申八月日 後孫 標 謹記
十二代孫 㵢 謹書
공의 휘는 덕린(德隣) 자는 불고(不孤) 호는 순은(醇隱)이니 고령인(高靈人)이시다. 고려조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은 우관(右官)에 이르렀고, 조선에 들어 지금의 관직에 추증되셨다. 공은 글씨를 잘 써 예서·진서(해서)·초서에 모두 오묘하여 사람들은 한 글자라도 얻으면 다투어 보배로 삼으며 말하기를, “신 아무개는 삼매(三昧)의 필적이다.”라고 하였다. 공은 문정공(文靖公) 이색(李檣)과 어려움에 처해 왕과 함께하며 시종일관 달라지지 않았으며, 벼슬을 버리고 남쪽으로 돌아가 광주(光州) 편방리(片坊里)에 우거하였다. 쌀독의 곡식이 자주 비었으나 태연히 자처하였다. 충근(忠勤)하며 행실이 도타워 당시에 이름이 높았다.
집에서 돌아가심에 옥과(玉果) 남쪽 가사동(柯寺洞) 축좌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의 부인은 광주정씨(光州鄭氏) 봉은사진전직(奉恩寺眞殿直)을 지내고 대광문하찬성사(大匡門下贊成事)에 추증된 신호(臣扈)의 따님으로 묘는 광주 남쪽 옹정리(瓮井里) 임좌에 있다.
공의 아들 참의공(參議公) 휘 포시(包翅)의 묘는 공의 묘 동북방향 언덕의 자좌에 있으며 갈(碣)이 있다. 참의공의 부인은 경주김씨 봉익대부 예의판서 휘 충한(冲漢)의 따님이다. 묘는 공의 묘와 함께 같은 언덕의 위아래에 있으며 모두 표갈(表碣)이 없다.
후손 참판 담(湛, 1519~1595)이 이 고을(옥과현)의 수령(1557~1560)이 되어 비석을 세우려 하였으나 어떤 자리가 공(德隣)의 묘인지 알지 못하여 그만두었다. 사철에 제사를 지낼 때에 먼저 아래부터 한 단계 위로 올라갔는데 모두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말씀에 근거한 것이다.
후손 필청(必淸, 1647~1710)이 용성(龍城, 남원)의 수령이 되어 찰방 선영(善泳, 1638~1700) 및 여러 종친들과 고쳐 세우려 함에 서로 논의하여 말하기를 “지금 공과의 거리가 겨우 십여 세(世)이지만 오히려 이와 같으니, 만약 다시 백년 천년이 흐른다면 어찌 그 모든 것을 보존하겠는가? 묘소와 더불어 잃지 않게 함은 비석을 세워서 그 언덕을 표시하는 것 만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곧 갈(碣)을 세우려고 하였으나 얼마 있다가 해임되어 돌아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기축 년(1709년)에 12대손 유학 표(標, 1649~1722)가 자금을 마련하고 돌을 다듬었으나 운반하지는 못하였다. 마침 필청(必淸)의 조카 택(1622~1729)이 검전(檢田, 토지를 검사함)을 할 때에 장정들의 힘을 빌려 운반하여 오도록 하였다. 또 부풍(扶風, 전북 부안)의 수령이 되어 자신의 창고를 덜어 부역을 도왔으나 돌이 강하고 글씨가 이지러져 또한 세우지 못하였다. 표(標)가 슬퍼하여 일을 마치는 것을 임무로 삼고 다른 돌을 고쳐서 묘 아래에 세웠다. 아! 우리 조상 순은공(醇隱公)이 경사를 길러 넉넉해진 이후에 자손이 창대(昌大)해지고 묘역을 정비한 이후에 높은 벼슬아치가 계속 이어졌으니 모든 수양하는 도가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구나! 홀로 그 표석이 없음을 한스러워하다가 오늘 이 비를 세움에 이름은 모두 기다림이 있어서 그러한 것이니 감히 내 작은 노력으로 후손들에게 보이며 대강을 쓰기를 오른쪽과 같이 한다.
숭정기원후 구십년 병신(1716년) 팔월 일 후손 표(標)가 삼가 기문을 짓고 십이대 손 뢰(㵢)는 삼가 글씨를 쓰다
* 출전 : 「1388년 고려 산수도를 그린 신덕린선생은 누구인가?, 2020.2월 사단법인 송헌문화재단」에 실린 글과 사진을 재인용
Ⅳ. 1731년 고려 예의상서 신공 부인 정씨묘(高麗禮儀尙書申公夫人鄭氏墓)
高麗禮儀尙書奉翊大夫寶文閣提學申公德隣 夫人光州鄭氏墓在光州軍盆里負亥之原 與曾孫仲舟墓相距十數步 而舊無標識 於是本道兵使趙虎臣 與道內守宰之爲夫人後裔者 及姓孫之散處諸邑者 同力治石 謀樹短表以識其地且禁樵牧 徵文於余(주3) 夫人之沒殆近四百年矣 其嘉言懿行無從而徵唯申公事 畧見於麗史 史云忠定王遜于江華 舊臣從者唯典校令申德隣等數人而己 夫申公臨危 不失臣節如此 則夫人之媲德齊美亦可知也 夫人之子曰包翅 擢茅麗朝及麗亡 退居南原之壺村 本朝以大司諫屢徵不起卒全節而卒 夫人之敎於家者又可知也 包翅有三子 長曰檣文科參判 次曰枰文科正言 次曰梯監察 孫孟舟庶尹 仲舟軍事 叔舟文科領議政贈諡文忠 松舟文科府使, 末舟文科大司諫 內外諸孫至不可勝計 夫人餘慶之所及又如此 嗚呼盛矣 夫人考諱臣扈 官殿直 申公字不孤 號醇隱高靈人 墓在玉果介寺洞與夫人別葬云
고려 예의상서 봉익대부 보문각 제학 신공덕린의 부인 광주정씨 묘는 광주 군분리 해좌 언덕에 있는데, 증손인 중주(仲舟)의 묘와 수십 보 거리에 있다. 옛 부터 아무런 표식이 없기에 본도 병마절도사인 조호신(趙虎臣)은 부인의 후손 중 전라도내에 수령을 하는 사람과 여러 고장에 흩어져 사는 후손들과 같이 힘을 모아 이 땅에 짧은 표석을 세우고 나무꾼과 목동출입을 금하도록 하였는데, 나에게 비문을 부탁하였다.
부인께서 돌아가신지 근 사백년이 흘러, 부인의 훌륭한 말씀과 아름다운 행적(懿行)은 알려진 바 없고, 오로지 신공의 업적만 고려사에 여러 차례 언급되어 알려졌다. 고려사에 언급하기를 충정왕(忠定王)이 왕위를 양위하고 강화도로 가실 때, 그를 따르는 옛 신하는 전교령(典校令) 신덕린 등 불과 몇 명에 지나지 않았다. 신공이 위험에 처해 신하의 절의를 잃지 않은 것이 이와 같은즉 부인이 아내로써 지켜야할 덕행이 단정하고 아름다웠음은 불문가지이다.
부인의 아들은 신포시(申包翅)이고 고려조에 발탁되었는데 고려가 망하자 남원의 호촌(壺村)으로 물러나 살았다. 조선에 들어 여러 차례 대사간으로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죽었다. 절의를 지키고 죽은 것이니 부인의 자녀교육도 알만하다. 포시공은 아들을 셋 두었는데, 장자는 ‘장(檣)’인데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에 올랐으며, 차남은 ‘평(枰)’으로데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이고, 삼남은 ‘체(梯)’인데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손자로는 ‘맹주(孟舟)’는 한성부 서윤이며, ‘중주(仲舟)’는 군사(軍事)이고, ‘숙주(叔舟)’는 문과에 급제하여 영의정에 오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송주(松舟)’는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이고, ‘말주(末舟)’는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을 지냈다. 내외 후손들은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다. 부인의 후손이 복된 여경이 이와 같으니 오호! 번성하였도다!
부인의 부친의 휘는 신호(臣扈)공이시고 관직은 전직(殿直)을 지내셨다. 신공의 자는 불고(不孤)이고 호는 순은(醇隱)이시며 고령인(高靈人)이시다. 묘는 옥과(玉果) 개사동(介寺洞)에 있으며 부인과는 다른 곳에 모셔졌다.
주3) 묘표문을 지은 분은 서당(西堂) 이덕수(李德壽)공이다. 「서당사재(西堂私載)」에 수록된 내용을 후손이신 예조판서 백파(白波) 신헌구(申獻求 : 신응모공의 아들)공이 지으신 「영천세승(靈川世乘)」에 옮긴 것이다.
* 출전 : 「영천세승(靈川世乘), 2013.9월 고령신씨 귀래정 안협공파 종중회」 (병암 신경식 선생이 보내주심)
□ 고령신씨 선대(先代)
이 비문이 써진 것은 사후 약 사백년 가까이 지난시점으로 광주정씨 할머니에 대한 기록과 구전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고령신씨 「영천세승」에 의하면,
시조이신 신성용(申成用)공은 관직이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으로 정4품이다.
2세이신 신강승(申康升) 공은 문과(文科) 정3품 정순대부좌우위상호군(正順大夫左右衛上護軍)이시고,
3세이신 신인재(신인재)공은 문과(文科) 정2품 광정대부첨의평리상호군(匡靖大夫僉議平理上護軍)이시고,
4세 신사경(申思敬)공은 시조공과 동년배이신데 문과(文科) 종3품 중현대부감문위대호군(中顯大夫監門衛大護軍)을 지내셨다. 2세~4세 선대의 묘소는 실전(失傳)하여 찾지 못한 미심(未尋) 상태이다.
이로서 고령신씨 상대(上代)는 문과급제자이시면서 장군의 관직을 가지셨으므로, 혼맥(婚脈)이 비슷한 신분끼리 맺어지는 관행으로 볼 때, 광주정씨 시조공이 ‘상호군운(上護軍云)이라는 추측이 있게 된 것이다. 전직이란 당시 국찰(國刹)인 봉은사의 직책인데, 족보에 ‘봉은사진전직운(奉恩寺殿直云)’이라는 것도 고령신씨가의 묘표문과 연관된 것이다.
□ 비문의 작성 시기는 1731년(이덕수 찬)
이 비석은 지금부터 389년 전인 1731년(영조7년)경에 세워진 것이다. 당초 이 자리에 묘표 등이 없었는데, 전라병사 조호신공이 묘소의 내력을 알고 한탄하며, 우선 표식을 세워 나무하거나 가축 방목하는 행위를 금지시킨 후, 이덕수 공에게 묘표(비문)을 부탁드리고 후손을 찾아 협력하여 이를 새겨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전라병사 조호신공이 전라병사를 재임한 기간을 승정원일기에서 확인해보니 1730년 10월 13일 ~ 1732년 7월 19일 간인데, 부임기간 등을 감안할 때 1731년경으로 보는 것이다.
이 선산부지가 후일 도시개발지구로 고지되어 아파트가 들어서고, 고령신씨 후손들은 선조의 뜻을 기리고자 만대학원을 설립하고 이 자리의 일부부지에 광덕중학교와 광덕고등학교를 세워 운영하게 되었다. 만대학원이라 정한 것은 고령신씨 시조공이 경남 고령의 만대산에 모셔졌기 때문에 이 곳 지명을 사용하신 듯하다. 한편 광주정씨 할머니의 묘소는 부군이신 순은공이 계신 선영으로 천장하였다.
이 비문의 원문은 이덕수(李德壽, 1673 현종 14년 ~ 1744 영조 20년)공의 문집인 「서당사재(西堂私載)」에 수록되었다. 후손 중 금서(錦西, 또는 병산(屛山)) 신응모(申應模)공의 삼남으로 고종 때 예조판서를 지내신 백파(白波) 신헌구(申獻求)공이 선대의 사적을 모아 「영천세승(靈川世乘)」을 발간하셨는데 이 책에서 서당사재에 실린 광주정씨 할머니의 묘표(墓表)문을 인용해 실고 있다.
▪ 광주 옹정리(광주 서구 화정동 만대학원 내 - 광덕중고등학교)에 모셨던 신덕린공 배위 광주정씨 묘소
- 1982년 4.24일 옥과현 개사동(전남 곡성군 오산면 가곡리)으로 이장하여 신덕린공과 합폄하였다.
▪ 전남 곡성군 오산면 가곡리의 순은공과 광주정씨 내외분 합폄묘소
▪ 1982년 이장사진 : 파묘, 운구, 안치, 합장 (생략 - 사진 있음)
Ⅴ. 엄판서 숙(嚴判書璹(주4))이 말하기를(「영천세승」 신덕린공 행력 기록)
嚴判書璹曰 樹隱金公(주5)於天文地理無不精通 嘗見暳見于氐於同志醇隱申公德隣曰 乾文示災時事可知及其運訖 太學生林先味等七十餘人(주6)携手同歸萬壽山南 翩然遠去南原之南頭流山下 得一林樾中因樹爲屋以杜名谷鏟跡晦光世之人以壺村一區 匹美於金烏雉岳者盖有以也 配貞夫人光州鄭氏 父殿直臣扈 外祖判官咸陽朴淳 有一男一女 男申包翅參議 女李光景淸安人父漢蕃郡守 墓在玉果介寺洞 一名柯谷在縣南十里丑坐之原 夫人墓在公墓後以俱在表碣 參判湛(주7)守玉果時 治碣欲爲判書公墓表 而猶以上下墳爲疑 埋在瑩域近地 今失其埋處
엄판서 숙이 말하기를, 수은 김공은 천문과 지리에 정통하지 않음이 없었다. 일찍이 혜성이 저성에서 보이므로 동지인 순은 신덕린에게 말하기를 “건문에 재앙이 보이니 시사를 알게다”라고 하더니 그의 운이 다함에 미쳤다.
태학생(성균관 학생) 임선미 등 70여인이 손을 잡고 만수산(개성 송악산) 남쪽으로 가더니 훌쩍 멀리 남원의 남쪽에 있는 두류산 아래에 가서 하나의 숲 그늘 가운데 나무를 인연하여 집을 삼고 두곡이라 이름을 삼았는데 자취를 감추고 영광도 감추니 세상 사람들이 호촌 한구석이 아름답기로 금오산과 치악산에 짝한다고 했던 것은 대개 이런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배는 정부인 광주정씨로 부는 전직 신호이다. 외조는 판관 함양박순이니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 포시는 참의이고 여식은 이광경인데 청안인으로 부는 군수 한번이다.
묘소는 옥과 개사동으로 일면 가곡이니 현의 남쪽 십리 축좌 언덕에 있다, 부인의 묘소는 광주 옹정리로 읍의 남쪽 7리 해좌의 언덕에 있다, 공의 자부인 참의공부인의 묘소는 공의 묘지 뒤에 있고 모두 표석이 있다. 참판 담이 옥과의 수령으로 있을 때 비갈을 다스려 판서공의 묘표로 삼으려 했는데 오히려 상하의 무덤이 의심되는 점이 있어 무덤의 가까운 곳에 묻었다. 오늘날에는 묻은 곳이 어디인지 모른다.
주4) 엄숙(嚴璹) : 1716~1786, 본관 영월(寧越). 초명 인(璘). 자 유문(孺文). 호 오서(梧西). 시호 숙헌(肅憲). 1753년(영조 29) 생원시(生員試)를 거쳐, 1757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 검열에 등용되었다. 이어 교리 ·승지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고, 1771년 형조참판에 올랐다. 1773년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여 그 동안의 일기(日記)를 간행하였고, 말년에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저서에 《연행록(燕行錄)》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엄숙 [嚴璹] (두산백과)
주5) 김충한(金沖漢) : 생졸년 미상. 고려 후기 문신
자는 통경(通卿), 호는 수은당(樹隱堂)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전라북도 남원(南原) 출신이다. 증조부는 김궤(金軌)이며, 조부는 김영(金瑩)이고, 부친은 김서인(金瑞仁)이명 모친은 형군소(邢君紹)의 딸 진주형씨(晉州邢氏)이다.
고려말 봉익대부(奉翊大夫) 예의판서(禮儀判書)로 있었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목은(牧隱) 이색(李穡)‧야은(冶隱) 길재(吉再)‧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농은(農隱) 민안부(閔安富) 등 6은(六隱) 중 한 명이다. 고려가 운(運)이 다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그를 위시한 임선미(林先味) 등 70여 명이 벼슬을 버리고 송경(松京) 만수산(萬壽山)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는데, 세인은 이들을 두문동(杜門洞) 72현(七十二賢)이라 하였다. 1822년(순조 22) 개성유수(開城留守) 오한원(吳翰源)이 요청하여, 고려 조의 예의판서(禮儀判書) 민안부(閔安富)‧김충한(金沖漢) 두 사람을 송경(松京)의 두문동(杜門洞) 표절사(表節祠)에 추가로 배향하였다.
부인 서흥김씨(瑞興金氏) 사이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현령(縣令) 김자(金磁)‧부사(府使) 김승(金繩)‧직제학(直提學) 김작(金綽)이며, 딸은 좌찬성(左贊成) 신포시(申包翅)와 혼인하였다. 남원군(南原郡) 송동면(松洞面) 두신리(杜新里)에 신도비(神道碑)와 세거비(世居碑)가 있으며, 송동면 두곡리(杜谷里) 두남사(杜南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주6) 두문동칠십이현(杜門洞七十二賢)
72명의 이름은 현재 모두 밝혀지지는 않았고, 신규(申珪)·신혼(申琿)·신우(申祐)·조의생(曺義生)·임선미(林先味)·이경(李瓊)·맹호성(孟好誠)·고천상(高天祥)·서중보(徐仲輔)·성사제(成思齊)·박문수(朴門壽)·민안부(閔安富)·김충한(金沖漢)·이의(李倚)·배문우(裵文祐) 등의 이름이 밝혀져 있다.
두문동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光德面)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있던 옛 지명으로, 칠십이현이 모두 이곳에 들어와 마을의 동·서쪽에 모두 문을 세우고는 빗장을 걸어놓고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후세에 절의의 표상으로 숭앙되었고, 1783년(정조 7)에는 왕명으로 개성의 성균관(成均館)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배향하게 하였다.(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주7) 신담(申湛) : 1519~1595. 조선의 문신
자는 중경(仲卿), 호는 어성(漁城). 본관은 고령(高靈). 1552년(명종 7) 문과(文科)에 급제, 1563년 정언(正言)ㆍ지평(持平)ㆍ전적(典籍) 등을 거쳐 1565년 장령(掌令)이 되었다. 1569년(선조 2) 부수찬(副修撰)을 거쳐 다시 장령이 되었으며, 1571년 군자감정(軍資監正)으로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 1577년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사건으로. 한때 파직, 1582년 경주 부윤(慶州府尹)으로 기용되어 특히 송사(訟事)를 잘 처리하였다. 1591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에서 예조 참판에 승진, 1592년 임진왜란 때 전주 부윤(全州府尹)으로서 의병(義兵) 1천 명을 모집하여 왜적의 진격을 막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담 [申湛] (인명사전, 2002. 1. 10., 인명사전편찬위원회)
Ⅵ. 순은 신덕린공의 글씨와 그림
□ 신덕린공의 절의(節義)와 당대의 명필(덕린체라 불림)
광주정씨 시조공의 사위로서, 고려 충정왕이 양위하여 물러날 때 옛 군주에 대한 절의를 지켜 퇴위하여 강화로 물러날 때 끝 까지 시종한 신하였다. 또한 고려가 망하니 이왕조불사(二王朝不仕)하여 광주로 내려가 은둔하셨다. 고려 말에 이색, 정몽주공과 가깝게 지냈으니 망국의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신왕조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응하지 않은 것이다. 광주정씨 2세 정윤부 공이 개성부윤을 지내시고 말년에 나주에서 체찰사로 지내시면서 이곳에 안적(案籍)하셨다 하였는데, 처남이 되시니 가깝게 지내셨을 것이다. 광주정씨 부인이 돌아가시고 이곳에 묘소를 정한 것은 이러한 지역적인 영향이 있는 것이다. 순은공은 그림솜씨도 절묘하여 고려 말에 그려진 그림 두 점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 고령신씨 5세 申德隣(생몰년 미상)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불고(不孤), 호는 순은(醇隱).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성용(成用)의 4대손으로 벼슬은 예의판서(禮儀判書)를 거쳐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을 지냈다.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 등과 친교가 있었고 고려가 망한 뒤에는 광주(光州)에서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는 해서·초서·예서에 모두 능하여 당대에 이름이 높았으며, 특히 예서의 한 종류인 팔분체(八分體)로 많은 글을 썼다고 한다. 그의 필체는 독특하여 당시 사람들이 덕린체(德隣體)라고 불렀다. 그의 그림으로는 구덕수궁미술관 소장인 「산수도(山水圖)」가 있으나 양식 면으로 볼 때 조선 후기의 남종화(南宗畫)와 유사점이 많이 보이는 작품이므로 그 진위여부를 알기 힘들다. 그의 서체의 모간(模刊)은 『고금법첩(古今法帖)』에 전한다. 두문동 72현의 한사람으로 고령의 영연서원(靈淵書院)에 배향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여주이씨 옥산문중 소장 신덕린공 필적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신덕린공의 그림으로 1388년경에 그린 것이다.
- 이 그림의 사진은 병암 신경식 선생에게서 받은 것이다. 병암 선생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발견한 것으로 향후 문화재로 등록을 추진
첫댓글 650년 쯤 전의 시조공의 따님 묘소, 2세 개성부운 정윤부공의 따님(순천 박가흥공(1347~1427)의 따님) 등의 묘소가 건재하다니, 감사하고 부러운 면이 있다. 이렇게 당대의 거문벌족의 집안과 혼맥이 어어졌다. 정기호 박사님이 말씀하셨듯이, 숙인정씨의 묘표문에서 보듯, 고려조에 우리 광주정씨가 현저하고 대족이라고 한 것은 시조공 이외의 정세운 문하시증공 등 광주정씨가 여러 집안이 있었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다만 현 후손과 이어진 것이 시조공이라는 이야기다. 앞으로 시간을 두고 여러 이야기를 종합하여 시조공 이야기를 엮어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