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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취산 지명 해설
◆[중치(중재)]
서쪽으로 장계와 번암면을 연결하는 2차선 포장도로가 남북으로 진행한다. 백운산의 남쪽 사면과 중치 부근은 목장이 여러 군데 여서 목초를 나르기 위한 임도가 어지럽게 흩어져있다. 중치와 중기마을은 임도로 연결되어 있다.
‘가운데에 있는 고개’라는 뜻인데 이곳에서는 ‘백운산과 월경산의 가운데’라는 의미다. 운산리에 이 고개 이름을 딴 중재마을이 있다.
◆[중고개재]
고개의 동쪽 백운산 자락은 신라 영은조사(靈隱祖師)가 창건한 영은사지를 비롯해 많은 암자가 있는데. 특히 선농일치(禪農一致)에 의한 선농불교를 제창한 용성스님이 평소 선사의 지론인 선농일치를 몸소 실천하기 위해 스스로 호미를 들고 세운 농장인 화과원이 이곳에 있다. 그래서 화과원 동쪽 백운산을 넘는 고개는 절고개이며, 중들이 많이 넘나들었다는 이 고개는 중(衆)고개라는 이름이다. 용성스님은 기미독립선언서 대표 33인중 한 분이다.
◆[백운산]1278m
백운산은 전북 장수군 번암면 지지리와 경남 함양군 서상면, 백전면에 경계를 하고 있다. 백운산의 이름은 흰백(白), 구름운(雲)을 써서, 산이 높아서 산봉우리에 항상 흰 구름을 감싸 안고 있는 산이라 뜻이다. 백운산의 물줄기는 서쪽은 백운천을 통하여 섬진강으로 흘러들고, 동쪽은 옥산천을 통하여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백운산 정상에서 바라보면 서쪽으로는 장안산과 괘관산, 북쪽에는 깃대봉과 남덕유산, 남쪽으로는 월경산과 봉화산 등이 보인다.
백운산을 만산홍엽의 가을 단풍과 금상첨화로 산허리마다 흐드러진 갈대와 싸리나무, 그리고 산죽이 한데 어우러져 비경의 극치를 이루는 산으로 유명하다.
◆[선바위고개] 해발 1040m
백운산에서 영취산을 가다보면 만나게 되는 작은 고개. 고개 위에 큰 바위 하나 있음.
◆[영취산]1075.5m
장수 영취산((靈鷲山)은 백두대간에서 금남호남정맥 분기점으로 함양 진산인 백운산에서 백두대간이 육십령으로 북상하는 도중에 거치는 산이다. 정상에서 서쪽으로 금남호남정맥줄기가 갈라져 나간다. 바로 무령고개를 지나 장안산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또한 영취산의 물줄기는 동으로는 낙동강, 남으로는 섬진강, 북으로는 금강을 가른다. 북으로 남덕유산이, 서쪽으로 장안산이, 남으로 백운산이 조망된다.
장수영취산은 신령령(靈), 독수리취(鷲)를 쓰는데, 그뜻은 산세가 '빼어나다'. '신묘하다'. 신령스럽다는 뜻으로 산줄기와 물줄기의 요충지인 이름에 걸맞은 이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옛 지도상에는 영취산의 이름이 없었다. 혹자들은 장안산을 영취산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는 장안산이 주변의 산줄기 중에서 주산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영취산은 13개 정맥 중 3개의 정맥을 가지 친 중요한 지점이다. 장안산-팔공산을 뛰어넘어 진안의 명산 마이산의 금남호남정맥, 대둔산을 경유 부여 부소산으로 빠지는 금남정맥, 내장산을 경유 광주무등산-순천조계산-광양백운산으로 떨어지는 호남정맥이다. 동으로 낙동강 서남으로 섬진강, 서북으로 금강을 발원하는 삼강 분수령이다. 영험한 수리취는 무엇을 의미할지 아마도 호남3대정맥 발원지(發源地)영취산(靈鷲山) 영험한 독수리 산으로 당당함을 표현함이 아닐까?
장수군, 함양군 도 군계의 백운산-영취산은 이 지역 정신적 지주의 산이다.
- 영취산 기슭의 의암 주논개
충절의 여신 주논개는 1574년 영취산 북쪽의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왜장을 껴안은 채로 죽은 논개의 묘는 백두대간 육십령 동남쪽으로 십리쯤 떨어진 함양 서상면 금당리 방지마을 뒷산에 있다. 대간에서 나고 대간에 묻힌 것.
논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보통 경상우도의 병마 절도사인 최경회(崔慶會)의 후처로, 임진왜란 때 최경회가 전사하자 촉석루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본군의 잔치에 참석하여 일본 장수인 게야무라 로구스케(毛谷村六助)를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한 정도까지만 알고 있다.
성은 주씨(朱氏)이고, 본관은 신안(新安:중국)이며, 전북 장수(長水)에서 태어났다. 원래 양반가의 딸이었으나 아버지가 사망하고 집안에 어려움이 겹쳐 가산을 탕진하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의 후처가 되었다고 전한다. 그 밖의 자세한 성장과정은 알 수가 없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5월 4일에 이미 서울을 빼앗기고 진주성만이 남았을 때 왜병을 맞아 싸우던 수많은 군관민이 전사 또는 자결하고 마침내 성이 함락되고 최경회는 일본군에 의해 전사한다(제2차 진주성 싸움). 일본군 왜장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矗石樓)에서 주연을 벌이는데 논개는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생으로 위장하여 참석하게 된다.
이 자리에 있던 그녀는 계획대로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반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毛谷村六助]를 꾀어 벽류(碧流) 속에 있는 바위에 올라 껴안고 남강(南江)에 떨어져 적장과 함께 죽었다. 훗날 이 바위를 의암(義岩)이라 불렀으며, 사당(祠堂)을 세워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 1846년(헌종 12) 당시의 현감 정주석(鄭胄錫)이 장수군 장수면(長水面) 장수리에 논개가 자라난 고장임을 기념하기 위하여 논개생향비(論介生鄕碑)를 건립하였다. 그가 비문을 짓고 그의 아들이 글씨를 썼다. 1956년 '논개사당(論介祠堂)'을 건립할 때 땅 속에 파묻혀 있던 것을 현 위치에 옮겨놓았다. 비문에는 "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名碑"라고 씌어 있다.
- 산이 물을 가르는 상징적인 곳, 장수 수분재(水分峙)
호남정맥의 시발점인 영취산에서 서진(西進)하여 완주의 주화산까지가 섬진강과 금강을 가르는 산줄기이다. 19번 국도가 호남정맥을 관통하는 곳이 수분치(水分峙)인데 이곳이 산이 물을 가르는 상징적인 곳이다. 금강의 발원지는 장수군 장수읍 수분리, 금남호남정맥의 산줄기인 신무산(896.8m) 북동계곡의 ‘뜬봉샘’으로 알려져 있다. 장수는 산고수장(山高水長), 즉, 산이 높고 물이 긴 고장이다. 이 때문에 이름도 긴장(長), 물수(水)를 쓴다.
수분치(水分峙)는 섬진강과 금강의 분수령(分水嶺)이라는 뜻이다. 이 때문에 이름이 수분재이며, 지명도 물을 나눈다는 뜻으로 장수읍 수분리(水分里)이다. 특히, 수분치에서 서쪽으로 0.5km 위치에 있는 원수분마을 뒤산인 신무산 기슭에는 금강의 발원샘인 ‘뜬봉샘’이 위치하고 있다.
실제로 옛전에 이 수분재에 집이 있었는데, 이집의 지붕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천수(天水)가 남쪽가면 섬진강, 북쪽으로 가면 금강의 물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수분재는 주유소와 휴게소 등이 들어서서 분수령을 구분하기가 어렵다. 다만, 분수재 위에 있는 소나무를 정맥꾼들이 ‘수분송(水分松)이라고 부르면서 이를 분수령으로 삼고 있을 뿐, 농경지 개간으로 정맥의 능선이 뭉개져 능선 구분도 어렵게 되어 있다.
- 팔공산에서 만나는 네 줄기의 강줄기
영취산에서 서진하던 정맥(正脈)은 수분재에서 서북(西北)으로 급히 방향을 틀어 신무산을 거쳐 국도 13번과 만나는 차고개을 건너 팔공산에 이르게 된다.
팔공산은 섬진강 발원지 데미샘을 품고 있는 산이다. 팔공산은 전북의 장수군과 진안군의 경계를 이루는 산인데 팔공산을 중심으로 오른쪽인 동쪽으로 흐르면 금강의 물줄기가 된다. 호남정맥이 금강과 섬진강을 가르는 산줄기라 했으니 왼쪽으로 흐르면 당연히 섬진강의 물줄기가 된다.
그런데 팔공산에서 서진하여 분기하는 지맥이 있다. 마령치를 건너 구름재에 이르면 이 지맥은 다시 스스로 분기하는데 오른쪽으로 분기해간 지맥이 성수지맥이요, 왼쪽으로 분기해간 지맥이 개통지맥이다. 이 지맥은 장수-진안-임실군의 경계이기도 하다. 이리하여 팔공산에서 보면 네 개의 유역을 만나게 된다. 팔공산의 오른쪽을 흐르는 금강유역이 그 하나요, 성수지맥과 팔공산의 앞으로 진행하는 호남정맥 사이의 섬진강이 그 둘이며, 영취산에서 팔공산을 돌아 개통지맥으로 갈리는 요천이 그 셋이며, 마지막 넷은 성수지맥과 개통지맥으로 갈리는 오수천이다.
[호남정맥]
전라북도 장수군 주화산(珠華山)에서 뻗어 내장산에 이르러 전남 지역을 동서로 가로지르며 다시 전남 광양시의 백운산에 이르는 산줄기의 옛 이름. 한반도 13정맥의 하나로,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의 종착지인 주화산에서 갈라져 남서쪽으로 내장산에 이르고, 내장산에서 남진하여 장흥 제암산(帝巖山)에 이르며, 제암산에서 다시 남해를 끼고 동북으로 상행하여 광양 백운산(白雲山)에 이르는 산줄기이다. 이 산줄기는 영산강 유역을 이루는 서쪽 해안의 평야지대와 섬진강 유역을 이루는 동쪽의 산간지대로 갈라놓았다. 이 산줄기의 산들은 대체로 곰재·만덕산·경각산(鯨角山)·오봉산·내장산·백암산·추월산(秋月山)·산성산(山城山)·설산(雪山)·무등산·천운산(天雲山)·두봉산(斗峰山)·용두산·제암산·일림산(日林山)·방장산(方丈山)·존제산(尊帝山)·백이산(伯夷山)·조계산·희아산(戱娥山)·동주리봉·백운산 등이다.
[금남호남정맥]
전북 장수의 장안산(長安山:1237m)에서 서북으로 뻗어 무주의 주화산(珠華山:600 m)까지 약 65km에 이르는 옛 산줄기의 이름. 한반도 13정맥의 하나로, 백두대간(白頭大幹)에서 갈라져 금남정맥(錦南正脈)과 호남정맥으로 이어주는 산줄기이다. 장안산에서 수분현(水分峴:530m) ·팔공산(八公山:1151m) ·성수산(聖壽山:1,059m) ·마이산(馬耳山:667m) ·부귀산(富貴山:806m)으로 이어져 주화산에서 끝난다. 또 주화산에서는 금남정맥이 시작되어 호남정맥으로 이어진다. 또 이 산줄기의 팔공산 서사면(西斜面)에서 발원하는 천천(天川)이 북류하여 금강을 이루고, 남사면(南斜面)에서 발원하는 오원천(烏院川)이 섬진강을 이룬다.
[낙동강]
영남지방 전역을 유역권으로 하여 그 중앙 저지대를 남류하여 남해로 흘러드는 하천. 길이 506.17km. 유역면적 2만 3384.21㎢. 압록강(鴨綠江) 다음가는 한국 제2의 강이다. 강원 태백 함백산(咸白山:1,573m)에서 발원하여 상류부에서는 안동을 중심으로 반변천(半邊川)을 비롯한 여러 지류를 합치면서 서쪽으로 곡류하다가 함창(咸昌) 부근에서 다시 내성천(乃城川)·영강(嶺江) 등 여러 지류를 구심상(求心狀)으로 받아들이고, 유로(流路)를 남쪽으로 돌려 상주(尙州) 남쪽에서 위천(渭川)을, 선산(善山) 부근에서 감천(甘川), 대구(大邱) 부근에서 금호강(琴湖江), 남지(南旨) 부근에서 남강(南江)을 합친 뒤 동쪽으로 유로를 바꾸어 삼랑진(三浪津) 부근에서 밀양강(密陽江)을 합치고 나서 다시 남쪽으로 흘러 남해로 들어간다. 옛날에는 내륙지방의 교통동맥이 되어 조운(漕運) 등에 크게 이용되면서 강기슭에 하단(下端)·구포·삼랑진·수산(守山)·풍산(豊山)·안동 등의 선착장이 번창하였고, 또 6·25전쟁 당시에는 유엔군의 최후 방어선이 된 바 있다. 한편, 김해삼각주 말단부에 있는 을숙도(乙淑島) 일대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철새도래지이다.
[섬진강]
길이 212.3 km. 유역면적 4,896.5 km2. 전북 진안군과 장수군의 경계인 팔공산(八公山)에서 발원하여 진안군 백운면(白雲面)과 마령면(馬靈面) 등에 충적지를 만들고, 임실군 운암면(雲岩面)에서 갈담저수지로 흘러든다. 곡성읍 북쪽에서 남원시를 지나 흘러드는 요천과 합류한 후 남동으로 흐르다가 압록 근처에서 보성강과 합류한다. 그 이후 지리산 남부의 협곡을 지나 경남 ·전남의 도계(道界)를 이루면서 광양만(光陽灣)으로 흘러들어간다. 대체로 강너비가 좁고 강바닥의 암반이 많이 노출되어 있어 항해하는 데는 불편하다.
[데미샘]
데미라는 말은 더미(봉우리)의 전라도 사투리. 금남호남정맥의 산줄기인 팔공산 북서쪽의 '천상데미(하늘에 오르는 봉우리)' 서쪽 기슭, 진안군 백운면 원신암마을 북쪽 계곡 상추막이골에 위치. 천상데미에 있는 샘이라 하여 데미샘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고 수정같이 맑고 이가 시리도록 차가우며 다른 어떤 샘에서도 맛볼 수 없는 미묘한 맛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무령고개] 900m
백두대간에서 갈라진 금남호남정맥을 넘는 첫 고개로, 마치 춤추는 용과 같다 해서 무룡이라고도 불린다.
◆[민령]
싯대봉과 영취산 사이에 있는 중요한 참고점이다. 백운산은 논개의 고향이다. 생가는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이고, 무덤은 경남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 방지마을이다. 민령은 바로 논개의 생가와 무덤을 오가는 대간의 고갯길이다. ‘밋밋한 고개’라는 우리 이름인데, 소리에 따라 ‘岷’이라는 한자를 음차하였다. (신동길저/뫼따라 하늘까지 中)
◆[깃대봉(구시봉)]1014.8m
장수군 장계면과 경남 함양군 서상면의 경계에 있다. 옛날 임금님이 신하나 백성들 중에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땅을 하사했는데, 이를 사패지(賜牌地)라 했고, 이 땅에는 누구의 사패지라고 하는 깃대를 꽂아 놓은 데서 깃대봉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깃대봉은 특히 가을의 억새와 구절초 향으로 유명하다. 정상에 오르면 북으로 남덕유산, 동으로는 기백산, 남쪽으로는 장안산과 백화산이 보인다. 정상에는 구시봉으로 표지석이 되어 있다.
◆[육십령]
육십령 - 육십현(六十峴) 또는 육복치(六卜峙)라고도 하는데, 백두대간 중의 덕유산(德裕山)과 백운산(白雲山) 사이에 있으며 신라 때부터 요충지로 알려져 왔다. 오늘날 이 고개는 영남과 호남지방을 연결하는 주요교통로로 전주~대구 간 26번 국도가 지나간다. 예부터 함양-장수 주민들의 물류를 교환했던 고개라고 한다.
육십령의 유래는
첫째, 함양 감영에서 이 고개까지의 거리가 60리(24km)이고 장수 감영에서 이 고개까지도 60리(24km)라고 하여 육십령.
둘째, 이 고개를 넘으려면 크고 작은 60개의 고개를 넘어야 겨우 닿을 수 있어 육십령.
셋째, 옛날엔 이 고개에 산적들이 많아서 60명이 모였다가 올랐다는 이야기인데, 이 고개를 넘기 위해서 양쪽 산아래 마을에서 며칠씩 묵어가며 기다렸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밑에는 장정들이 모여 있던 주막이라 해서 장군동(壯群洞)이 있고, 산적을 피해서 살다가 이루어진 마을이라고 해서 피적래(避賊來)라는 마을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넷째, 박정희 정권때 군장동 사람들에게 산 속 군장동에 살지 말고 길가에 나와서 살라고 흙벽돌 집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고갯마루 연립주택식으로 지어진 하얀색 집들이 그때 지어준 집들이다. 군장동에 사람이 살지 않게 된 것이 그때부터. 육십령마을이 군장동 사람들에게 새 삶의 터전이 된 것도, 고개이름이 육십령으로 불리게 된 것도 그때부터라고 한다.
어느 것이 맞는 것인지는 확실치는 않지만 역사적으로 보면<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남아있어 세 번째 이야기가 신빙성이 높다.
육십령으로 통하는 요새지 중에서 서하면 봉전리 황석산성이 있다. 선조 30년(1597년)에 왜군의 2차 침입이 일어나자 함양국수 조종도와 안음현감 곽준은 영·호남을 잇는 육십령을 왜군이 반드시 노릴 것으로 판단하고 군민을 이끌고 의병을 일으켜 맞싸웠다. 중과부적이기도 했지만 장수인 김해부사 백사림이 ‘성 밖으로 나오면 잡지 않겠다’는 왜군의 속임수에 빠져 성문을 열고 도망치는 바람에 요새는 함락되었고, 조종도와 곽준도 그만 전사하고 말았다.
훗날 백사림은 정부에 의해 참수형에 처해지고, 왜군 사령관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요새를 함락시킨 왜장에게 포상했다고 하니 황석산성 전투가 얼마나 중요한 일전이었는가를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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