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타임스 106>
<김진수의 들꽃에세이 106>
"법당 처마 끝의 풍경처럼" - 윤판나물(石竹根)
학명: Disporum sessile ssp. flavens
외떡잎식물강 백합목 백합과 애기나리속의 다년초
『윤판나물』의 속명 디스포룸(Disporum)은 둘을 의미하는 디스(Dis)와 종자라는 뜻의 스포라(spora)가 합성된 라틴어로 자방 각 실에 밑씨(배주)가 2개씩 들어있다는 뜻이다. 종명의 세실리스(sessilis)는 ‘잎자루가 없는’, 플라벤스(flavens)는 ‘연한 황색’의 뜻으로 잎과 꽃의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다. 4~6월에 활짝 피지 않는 긴 종모양의 황금빛 꽃이 줄기 끝에 1~3송이씩 땅을 향해 핀다. 흑색으로 익는 장과는 지름이 1cm 내외로 다소 크고작은 차이가 있으며 둥근 편이다. 속명에서는 밑씨가 2개씩이라 했지만 열매 낱낱의 크기에 따라 들어있는 씨앗의 수는 작은 것은 1~2개, 큰 것은 3~4개로 각각 다르다.
윤판나물이라는 우리이름의 유래는 뚜렷이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전하는 말에, 옛날 윤씨 성을 가진 판서가 백성들의 칭송을 많이 받았는데 임금이 그 연유를 물은즉 윤판서는 그의 중정(中庭)에 자라는 어떤 꽃에서 겸손한 자세를 배워 정무를 보았다는 것. 임금이 이에 감복하여 그 꽃의 이름을 윤판나물이라 부르면서 오늘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다. 출처야 어찌되었건 염치와 겸손을 아는 듯 깊숙이 고개를 숙인 화형(花形)의 교훈이라서 친근감이 든다. 윤판나물을 이르는 다른 이름들로는, 줄기가 마치 대나무 같아 대애기나리(북한)라 하고, 애기나리나 큰애기나리 보다도 크고 가지를 치므로 큰가지애기나리라고도 부른다. 우리나라에는 애기나리, 큰애기나리, 윤판나물, 윤판나물아재비 등 4종이 자생하며 히말라야, 아시아 동남부의 산록 반그늘인 서식조건에서 10~20종이 분포한다.
한자명 중에는 또 보탁초(寶鐸草)가 있다. ‘보탁(寶鐸)’은 법당이나 탑의 네 귀에 매다는 커다란 ‘풍경(風磬)’을 말한다. 윤판나물의 고개 숙인 꽃부리가 보탁처럼 크고 맑고 예뻐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더욱이 할미꽃처럼 깊이 고개를 숙이되 허리가 굽어보이지 않고 날씬한 체형이다. ‘윤기가 있는 꽃판’의 노란 색감은 털빛 할미꽃에는 없는 청초한 맛! 저 추녀 끝을 흔드는 새벽바람에 법당으로 서서 고개를 숙인 비구니의 고요한 표정이거나 그 손사위에서 빠져나오는 맑디맑은 목탁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터, 세속에서야 소녀처럼 수줍고 새악시처럼 탐스러운 것을 감출 수가 없다. 미끈한 대나무 줄기에 주름스카프 잎으로 어깨를 덮고 모시적삼 엽초로 허리를 감싸서 한껏 단장하더니“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속삭인다. 이 사랑스런 고백은 윤판나물의 꽃말이다.
윤판나물의 생약명은 「석죽근(石竹根)」이다. 또한 죽순 군락이나 대나무 숲를 연상시키는백미순(百尾筍)이나 석죽림(石竹林), 만수죽(萬壽竹) 같은 이름도 있다. 윤판나물의 추출물은 항염증작용, 항알러지작용, 항암작용, 산화질소 생성을 저해하는 작용 등의 약물학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한방 약리적 표현으로는 윤폐(潤肺), 지해(止咳), 건비(健脾), 소적(消積)의 효능으로 폐결핵, 장염, 폐기종, 치질의 치료에 응용할 수 있는 약초이다.
윤판나물은 접은 꽃잎을 입안에 가득 물고 하늘을 향해 여기저기 솟아오르는 개화의 순간이 가장 아름답다. 자신을 창조한 천지간의 신에게 한입으로 찬양하는 어린아이들의 합창소리처럼 서툴고 귀엽고 야무지다. 그러나 곧 성숙하여 땅이 꺼져라 하고 꽃낯을 완전히 숙이면 꽃 속을 들여다보자고 애를 써도 이번엔 수줍어서 안 된다. 윤판나물을 산중에서 만나면 깜짝 탄성을 지르다가도 막상 어느 부위에 눈길이 꽂혀 이리 좋은가 되물으면 물어도 대답 없는 고집쟁이들 같다. 요리 보고 조리 보아도 꽃은 꽃인데 그러므로 윤판나물을 정원에 심을 땐 조금 높은 데를 잡아 피차에 원만하게 넘어가는 봄을 가꾸어야 한다.
첫댓글 맞네요 윤판나물 꽃을 들여다보려면 저도 같이 숙이고는 고개숙인 아가씨 얼굴 들여다보듯 서로 약간 민망하게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