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유대인, 아르메니아인, 조지아인 들이 고대 중동 민족들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규칙을 증명하는 예외에 불과할 따름이며, 이런 주장조차 어느정도 과장되어 있다
예컨대 현대 유대인이 지진 정치, 경제, 사회적 관습은 고대 유대 왕국에서 유래한 부분이 크지 않다.
그보다는 지난 2천 년간 자신들이 그 휘하에서 살았던 제국들에서 유래한 부분이 더 크다.
만일 다윗 왕이 오늘날 예루살렘의 초정통포 시나고그에 모습을 드러낸다면,
동유럽복장에 게르만 방언(이디시어)으로 말하며 바빌로니아 문서(탄무드)의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논쟁을 벌리는 사람들을 보고 그는 크게 당활할 것이다.
고대 유대 왕국에는 시나고그, 탈무드 경전, 심지어 토라 율럽 두루마리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제국을 건설하고 유지하려면 수많은 사람을 악랄하게 살해하고 나머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억압할 필요가 있었다.
전쟁, 노예화, 국외추방, 대량학살은 제국의 일반적 수단으로 꼽힌다.
기원후 83년 로마가 스코틀랜드를 침략하여 현지 칼레도니아 종족의 격력한 저항에 부딪혔을 때
로마의 대응은 이 지역을 초토화하는 것이었다.
로마의 평화 제의에 대해 칼가쿠스 족장은 로마인들을 '세상으 악당들'이라고 비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약탈과 학살과 강도질을 두고 제국이라는 허튼 이름을 붙이고 , 사막을 만들어놓은 뒤 이를 평화라고 부른다."
그렇다고 해서 제국이 그 뒤에 가치 있는 것을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모든 제국을 검게 지워버리고 제국의 유산을 모두 거부한다는 것은 인류문화의 대부분을 거부하는 것이다.
제국의 엘리트들은 정복에 따른 이익을 군대와 성채에만 쓰지 않았다.
철학, 예술, 사법제도, 자선에도 썼다.
아직 남아 있는 인류의 문화적 성취 중 상당한 몫은 제국이 피정복민을 착취한 덕분에 생겨날 수 있었다.
로마 제국주의가 제공한 이익과 번영 덕분에
키케로와 세네카,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사색과 집필을 할 여유를 누릴 수 있었다.
타지마할은 무굴 제국이 인도 신민을 착취해서 축적한 부가 없었다면 건설될 수 없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슬라브어, 헝가리어, 루마니아어를 사용하느 지역을 지배하면서 얻는 이익으로
하이든에게 월급을 주고 모차르트에게 작곡을 의뢰했다.
후손을 위해 칼가쿠스의 연설을 적어둔 칼레도니아 작가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은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 덕분이다.
사실 타키투스는 아마 이 이야기를 지어냈을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가는 타키투스가 문제의 연설을 지어냈을 뿐 아니라
자신으 비롯한 로마 상류계층이 자신들의 국가에 대해 생각하는 바를 대변하도록 하기 위해서
칼레도니아의 족장인 칼가쿠스의 캐랙터까지 창조했을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
엘리트 문화와 고급 예술을 넘어서 보통 사람들의 세상에 초점을 맞추더라도,
대부분의 현대 문화들에서 우리는 제국의 유산을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네 조상들이 칼로써 강요당했던 제국의 언어로 말하고 생각하고 꿈꾼다.
대부분의 동아시아 사람들은 한(漢)나라의 언어로 말하고 꿈꾼다.
원래 기원이 무엇이었든, 알래스카 배로 반도에서 마젤란 해협에 이르는 두 아메리카 대륙의 거의 모든 거주자는
네 개의 제국언어 ㅡ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영어 ㅡ 중 하나로 의사소통을 한다.
오늘날 이집트인은 아랍어로 말하고, 스스로를 아랍인이라고 생각하며, 아랍 제국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7세기에 이집트를 정복했으며 자신들이 대항하여 일어난 여러 차례의 반란을 철권으로 진압했던 제국을 말이다.
남아프리카에 있는 약 1천만 명의 줄루족은 19세기에 있었던 줄루족의 영광의 시대를 들먹이지만,
사실 그들 대부분은 줄루 제국에 대항해서 싸웠으며 유혈 군사작전을 통해서 강제로 제국에 편입된 종족들의 후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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