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치의대를 졸업한 후 로스쿨에 도전했습니다. 치과의사로 일하며 로스쿨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고, 고려대 로스쿨에선 회사법에 심취했고 동아제약에 입사하면서 비즈니스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메가젠임플란트라는 바이오기업에서 법무 및 전략기획을 담당하는 비즈니스맨 김용범(37)씨 이야기입니다.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았던 중학생 용범씨는 농구광이었습니다. 부산 지역 길거리 농구대회를 휩쓸며 오로지 노는 데만 전념했고 공부와는 담을 쌓은 소년이었습니다. 고교 진학을 앞두고 불현듯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불안감이 들었습니다. 막연하게 '응답하라 1988'의 정환(류준열 분)처럼 영화 '탑건'을 본 이후 전투기 조종사 파일럿을 꿈꿨습니다. 파일럿이 되기 위해선 공군사관학교에 들어가야 했고 국비로 엘리트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공사는 소위 명문대학보다 들어가기 어려울 만큼 성적이 전국에서도 상위권이어야 했습니다. 중학생이던 용범씨에겐 공사보다 공사에 들어갈 만한 실력을 갖추기 위해 과학고나 민사고 등 특목고 입학이 우선 과제였습니다. 하지만 과학고나 민사고에 가기엔 당시 그의 성적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었습니다.
우연히 TV를 보다 '특목고 잡는 일반고'로 소문난 충남 공주 한일고등학교를 알게 됐고, 운 좋게도 입학시험을 본 199명 중 198등으로 합격했습니다. 용범씨는 파란만장했던 그의 진로 도전사 중 공주 한일고에 입학한 일을 최고의 선택으로 꼽습니다. 10대라는 어린 나이에 외부의 유혹을 차단하고 본인의 감정을 조절하며 공부에 집중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학교 주변엔 산밖에 없었고 밤에도 가로등이 없어 시내로 나갈 수가 없었어요. 고향인 부산을 떠나 친구들과 함께 기숙사 생활을 하며 공부에도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처음엔 부모님도 걱정했지만 어린 나이인 저를 믿어주시고 제 결정을 존중해 주셨죠. 부모님은 중3때까지 성적표를 보여 달라는 말씀을 안 하셨어요. 스스로 길을 찾아가게 내버려두신 거죠."
한일고에서 기숙사 생활을 할 때 공부는 자신의 의지만큼 환경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정말 열심히 공부했고 1학년 때 중하위권을 맴돌던 성적은 2학년부터 중상위권으로 치고 올라갔습니다. 어릴 적 꿈은 열두 번도 더 변한다고 했던가 공군사관학교에 가고 싶었던 마음은 사라지고 새로운 목표가 생겼습니다. 막연하지만 사회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직업을 갖고 싶었고 군인, 법조인, 경찰 같은 직업군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경찰대를 가서 경찰간부가 돼 사회에 영향력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지리적 여건상 한일고 학생들은 과외를 받거나 학원을 다닐 수 없었습니다. 무조건 자습을 해야만 했고 복도에서 친구들끼리 토론하면서 스스로 깨쳐가는 학습 시스템이었습니다. 용범씨는 이때 공부의 재미를 느끼고 깊이 있게 공부하는 습관을 기를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고3이 됐고 수능점수 1점이 모자라 경찰대에 불합격했습니다.
"고향인 부산에 내려와 재수를 했는데 모의고사를 보면 부산 전체에서 1~2등을 했어요. 한일고에서 깊이 파고들며 공부했던 습관이 도움 됐던 것 같아요. 요즘 젊은 친구들은 공부를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다소 비효율적이더라도 깊이 파고드는 공부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공부를 지속하게끔 하는 내적 원천이 되니까요."
재수 끝에 또다시 경찰대 시험에 도전했고 1차 필기시험은 통과, 체력장, 신체검사, 면접이 남았다. 100미터 달리기에서 1등을 할 정도로 무난히 체력장을 통과했고 유난히 돋보였던 용범씨를 지켜보던 경찰 고위 간부는 그를 특별히 불러 '앞으로 경찰의 미래가 될 것'이라는 격려까지 했다. 신체검사도 통과했고 요식행위라 할 수 있는 마지막 단계인 면접이 남았다.
"어이없게도 면접에서 떨어진 거예요. 멘붕이고 충격이었죠. 면접에서 랜(LAN)이 뭐냐는 질문을 받았죠. 고등학교 시절 PC방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고 당연히 답을 못했어요.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경찰대를 향한 꿈은 허무하게 무너졌어요. 청소년들이라면 어렸을 때부터 진로탐색을 충실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조언하고 싶어요."
재수하면서 1년이라는 시간을 보냈고 특차였던 경찰대 발표 전에 아들이 대학 합격하는 걸 보고 싶다는 어머니 바람에 따라 연세대 치과대학에 원서를 넣어뒀습니다. 치과의사가 된 계기치고는 다소 어이없지만 연세대 치대에 합격했고 3수까지 하고 싶지 않아 그대로 입학했습니다. 6년간의 치과대학 과정 중 첫 2년인 예과 시절을 거칠 땐 치의학이 적성에 맞는지도 몰랐습니다. 본과에 들어가서 기초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공부에 재미를 느꼈습니다. 어쩌다 얻어걸린 전공이지만 잘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고 이왕이면 의대를 갈 걸 하는 후회마저 들었습니다. 공부는 재미있었지만 본과 2학년에 접어들면서 치과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접었습니다. 여전히 사회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고 치과의사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갈망하는 무언가가 있었지만 어떻게 길을 찾아가야 할지 헤맬 때 그는 인생의 첫 멘토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 치료로 유명한 연세대 정신과 전우택 교수를 찾아가 진로상담을 신청했습니다. 전교수는 "치의학도 서양의학에 뿌리를 두고 있고 헬스케어산업 전반으로 확장성 있는 학문이니 치과대학 공부를 충실하게 마무리할 것"을 조언하며 "다만 하고싶은 다른 일이 있다면 그것을 위한 시간을 따로 내서 미래를 준비하라"고 말했습니다. 경찰대를 목표로 했던 시절의 정의감이 결부돼 사회 변화도 이끌면서 스스로도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의 치대 동기들은 졸업 후 전문의 수련을 받거나 공중보건의로 보건소 진료를 한다. 용범씨는 군 복무를 한다면 이왕이면 정책을 다루는 곳에서 일하고 싶어 보건복지부에 지원, 26세부터 구강보건과 관련된 최종결정권을 가진 부서에서 근무할 수 있었습니다.
"보건복지부에서 1년, 한국보건산업연구원에서 2년 정도 일하며 보건정책 입안에 부분적으로 참여하기도 했어요. 국가공무원이 어떤 일을 하고 정책이 입안되는 과정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기회가 됐죠. 2007년 국회에서 로스쿨법(법학전문대학 설치 운영에 관한 법률) 제정안이 통과됐고 사법시험 대신 로스쿨행을 결심했어요."
2009년 5월 군 복무가 끝난 후 치과의사로 1년6개월간 일하며 생활비와 학비를 벌었습니다. 로스쿨에 진학해 보건복지 정책을 입안하는 전문공무원이 되거나 국회의원 보좌관이 되는 진로를 고려했습니다. 2011년 고려대 로스쿨에 입학했고 막상 공부를 해보니 치과의사로 몸담았던 헬스케어산업 전반에 대해 연구해보고 싶어졌습니다. 원래 목표와 달리 생뚱맞게도 회사법과 관련된 수업을 많이 듣게 되었습니다.
"비즈니스를 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어요. 기회가 된다면 변호사 일도 계속 하면서 말이죠. 헬스케어산업을 배우기 위해 당시 부동의 1위 제약회사인 동아제약의 지주회사 동아쏘시오홀딩스에 입사했죠. 제약업계 임원 사관학교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인재를 배출한 회사였어요. 2년간 그곳에서 일하면서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기업의 사내 변호사로서, 또 비즈니스맨으로서 주도적으로 일했습니다. 치과의사로서 구강제품에 관한 의견도 적극적으로 개진했고 성장전략팀에서 M&A나 투자업무에도 관여했습니다. 투자매물을 직접 검토하는 것부터 소싱 작업, 계약서 보고, 날인하는 것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했습니다. 작은 성공경험이 이어지면서 자신감이 생겼고 회사에 보답하기 위해 임플란트 회사 M&A라는 큰 프로젝트를 스스로 기획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직접 매출조사를 했고 2곳의 회사가 관심을 보였어요. 회사에서 최종 승인만 해주면 거래가 진행되는 상황이었는데 최종적으로 성사가 안됐어요. 인연을 맺은 2곳의 임플란트 회사 오너들이 저와 일해보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고 저의 2번째 인생 멘토인 메가젠 박광범 대표와 만나게 됐어요."
'변호사지만 사내 법률관련 업무는 하지 않아도 된다', '내 밑에 들어온다 생각 말고 파트너라는 생각으로 일해보라'는 매력적인 제안을 해준 박대표는 그를 믿어주고 좋은 영감을 불어 넣어주는 멘토입니다. 입사한 지 6개월, 회사의 법률업무도 담당하면서 신사업 기획, 해외수출 등 비즈니스도 신나게 감당하며 몇 년동안 할 만한 경험을 한꺼번에 하고 있습니다. 또한 의료인이든 환자든 정보 비대칭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이들을 위한 프로보노 활동인 ‘매디앤로’를 비영리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본인이 다니는 회사가 연봉이 높다거나 선망의 대상이라거나 그런 건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회사에 뭔가를 이야기했을 때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해주는 곳에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일도 즐겁고 성공의 경험도 할 수 있으니까요. 성공은 우연히 오는 것이 아닙니다. 뼈를 깎는 고통을 견뎌야 하죠. 그런데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 아닌,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한다면 힘든 과정을 견뎌낼 수 있을까요. 누가 시켜서 나온 성과를 두고 성공이라고 하긴 민망한 일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