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일년 답사 중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 1박2일 6월정기답사이다.
그 것을 무사히 마치면 일년의 농사를 반타작을 하였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좋은 사람들과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낸다는 것은 소중하고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정확한 계획이 없으면 일순간에 모든 일정이 뒤죽박죽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사전 준비와 답사를 하는 것이다.
3월 정기 사전 답사을 맡았던 임원진이 다시 답사조로 자료준비와
발표및 모든 일정을 조정하여야 한다.
그래서 임원회의 겸 사전답사을 하기로 하였는데,
임원 중에 빠쁜 일정이 있어,몇 사람만(이태복감사, 김영기사무국장,연경년총무) 가게 되었다.
조금 서둘러 아침7시 사무국장님 차로 출발하였다.
날씨도 좋다.
가면서 사전에 연락을 나누었던 전국관광문화해설사협회
윤정자사무국장님과 통화를 하여 11시에 초지진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생각보다 좀 일찍 도착하였다. 시간을 벌겸 초지진을 둘러 보기로 하였다.
바람이 분다.
갯벌 넘어 불어 오는 바닷바람에 노송 두 구루가 허이허이 손짖을한다.
외세 침략의 포연 속에 깊은 상처를 입었지만 우리에게 당당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초지진은 근대사에 우리역사의 새로운 시련과 변화의 출발지이다.
초지진 (草芝鎭)
초지진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624번지에 위치한 전적지로
사적 제225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 국방을 튼튼히 하는 차원에서
강화에 천험한 요새를 구축하기 시작하여 효종 7년(1656) 안산에서 이곳으로 옮겨진 것이다.
강화도 해변에 8개의 진을 설치한 것도 이러한 정책의 일부분이었다.
초지진에는 초지돈, 장자평돈, 섬암돈이 소속되어 있는데
이 돈대들은 숙종 5년(1679) 함경도, 강원도, 황해도의 승군 8천 명과 어영군 4천 3백 명을
동원하여 40일 동안에 걸쳐 49개의 돈대를 축성할 때 함께 이루어진 것이다.
이 때 9개의 포대도 축조되었는데 초지진 남쪽 진남포대에는 대포 12문이 설치되었고,
초지진 앞의 대황산 황산포대에도 대포 6문이 설치되었다.
설치 이후 1726년(영조 2)에 진장(鎭將)으로 종4품 무관인 병마만호(兵馬萬戶)가 배치되었다.
1763년에는 진장을 종3품 무관인 첨사(僉使)로 승격시켰으며, 군관 11명, 사병 98명, 돈군(墩軍) 18명,
목자(牧者) 210명을 배치하였고, 진선(眞仙) 3척을 두었다.
좁은 바닷길 사이 등대
1. 열강의 침략과 초지진
1800년대 들어 서구 열강들은 제국주의 침략의 무대를 동으로 옮겨오면서 먼저 천주교 선교사가
들어왔다.
뿌리깊은 유교의 전통문화와 천주교는 크게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고 유생·양반들의
천주교 유포 금지 요구로 대원군은 1866년 정월 선교사 9명과 천주교 신자 8천여 명을 처형했다.
이것이 병인사옥이다. 그해 9월 프랑스 로즈 제독은 병인사옥의 보복을 명분으로
7척의 군함과 2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강화 갑곶진에 들어왔다.
강화읍을 점령한 프랑스군은 사고의 귀중한 도서전적과 도성의 비축물 등을 모두 약탈해 갔고,
선교사 처형 책임자를 처단할 것과 배상금 지급, 이와 함께 한·불통상협정 체결을 요구했다.
대원군은 이에 대해 강경책을 수립하고 이에 장기전으로 돌입한 프랑스군은 서울 점령을 포기하는
대신 강화도를 완전점령하고 겨울나기 준비를 위한 장소로 정족산성을 택했다.
1 0월 3일, 정탐을 나선 프랑스군에게 양헌수가 지휘하는 조선의용군 부대가 매복해 있던
전등사 입구에서 일제히 포격을 가하는데 이 전투에서 패배한 프랑스군은 갑곶진으로 퇴각해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병인양요가 일어난지 그로부터 5년 후인 1871년(고종 8)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프랑스와 병인양요를 치른 그해 미국의 사블호·서프라이즈호가 조선 연안에 닻을 내리고
통상을 요구했으나 실패했다. 그러자 평양에선 다시 제너럴 셔먼호가 상륙해 문화재를 도
굴하고 주민에 대한 약탈과 살육을 일삼았다.
박규수가 점잖게 타이르고 식량을 대주며 평화적으로 돌아갈 것을 설득했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격분한 평양 관민이 합세해 셔먼호를 불태워 버리고 무장선원 24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보고받은 그랜트 미국 대통령은 사건의 진상 확인을 요구하며 배상금 지급,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는 한편, 극동함대를 파견해 강화해협을 정찰했다.
사정거리 700미터 당시 포
1871년 4월 23일 함포 지원 아래 미국 해병 450명이 강화해협을 침략해왔다.
이들은 초지진·덕진진을 잠시 점령하였으나, 어재연 장군에 의해 광성진에서 격퇴된다.
조선군 또한 이 전투에서 어재연 장군과 그 휘하의 병사들이 모두 전사하는 참변을 당했다.
이때 진내에 있던 군기고(軍器庫)·화약고·진사(鎭舍)등 군사 시설물은 미군에 의하여
모조리 파괴되었으며, 포대에 남아 있던 40여문의 대포 역시 파괴되거나
그들에 의하여 강화해협에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신미양요가 일어 난지 4년이 지난 1875년에 이번에는 일본군이 마실 물을 구한다는
핑계로 강화도에 군함 운요호를 들이대고 행패를 부렸다.
드디어 접전이 벌어졌지만 우리의 주무기는 구경12cm에 사정거리 700m에도 못 미치는
대완구포(大碗口砲)였고 일본군은 명중률과 사거리가 우리와는 비교도 안 되는
함재포(艦載砲)를 적재하고 있었다.
사력을 다하여 싸웠으나 우리는 35명의 전사자를 비롯하여 수많은 부상자를 냈고,
일본측은 겨우 경상자 2명만 발생케 한 일방적인 패배였다.
이것이 소위 운요호사건이요, 그 결과로 다음해에 일본의 강압에 못 이겨 불평등조약이요,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 조약인 '강화도조약'을 체결했다.
그 뒤 초지진은 폐진되었고, 시설은 모두 허물어져 돈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1973년 초지진의 초지돈만 복원되었는데, 높이가 4m 정도이고 장축이
100여m되는 타원형으로 이 돈에는 3개소의 포좌가 있고 총좌가 100여개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대포 1문이 전시되어 있으며 지금도 성채와 돈 옆의 소나무에는
전투 때 포탄에 맞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 미국 및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과
맞서 격렬하게 싸웠던 전투상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웅진출판사, 1991
≪답사여행의 길잡이-경기남부와남한강≫, 한국문화유답사회, 돌베개, 1996
≪빛깔있는 책-강화도≫,대원사
강화도에는 5진과 7보, 53개의 돈대가 있다.
강화 5진 7보
● 강화도의 해안선을 따라 53 곳에 있는 강화53돈대를 관할하는 진과 보.
● 진과 보는 모두 조선시대의 군대를 뜻하는 것으로
진은 요즘 군대의 대대,
보는 요즘 군대의 중대 규모에 해당한다
그러나, 진과 보 사이에는 상하 관계가 없고
진, 보 아래에는 돈대가 소속되어 있다
돈대 : 주변보다 높고 평평한 곳을 뜻하는 말
포대: 군대가 포병 위주로 구성된 군대를 뜻
초지진대교
갯벌에서 어부
감사님(벅수)사무국장님(바른생활)
참고자료/강화 5진7보
강화 5진
● 월곶진 : 강화5진의 하나. 강화읍 월곶리.
● 제물진 : 강화5진의 하나. 강화읍 갑곶리.
● 용진진 : 강화5진의 하나. 선원면 연리. 향토유적 제8호.
● 덕진진 : 강화5진의 하나. 불은면 덕성리. 사적 제226호.
● 초지진 : 강화5진의 하나. 길상면 초지리. 사적 제225호.
강화 7보
● 광성보 : 불은면 덕성리에 있는 강화7보의 하나. 사적 제227호.
● 선두보 : 강화7보의 하나. 길상면 선두리.
● 장곶보 : 강화7보의 하나. 화도면 장화리.
● 정포보 : 강화7보의 하나. 내가면 외포리.
● 인화보 : 강화7보의 하나. 양사면 인화리.
● 철곶보 : 강화7보의 하나. 양사면 철산리.
● 승천보 : 강화7보의 하나. 송해면 당산리.
포탄을 맞었던 노송들
풍상을 지켜내온 뿌리 깊고 밑둥이 우람한 우리소나무
한바퀴 휘돌아 나아보니 윤선생님이 오셨다.
반갑게 해후를 나누고 바로 다음 답사지인 광성보로 이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