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歷史 속의 8월 22일
사건事件 |
1864년 |
국제적십자 조약 성립 |
1881년 |
영국, 아일랜드 토지법 성립 |
1904년 |
한일 외국인 고문용빙(顧問傭聘)에 관한 협정서 조인 (제1차 한일협약) |
1911년 |
모나리자 도난 발표 |
1911년 |
조선교육령 공포 |
1918년 |
미주의 각종 부인단체, 대한여자애국단으로 통합 |
1937년 |
서울에 등화관제 실시 |
1946년 |
국립서울대학교 신설 |
1949년 |
반민특위 폐지안 국회 통과 |
1950년 |
국민병(國民兵) 소집 개시 |
1957년 |
간첩 김정제 검거 |
1965년 |
서울 지방 고교-대학생 등 1만여 명, 비준(批准) 무효화 데모 |
1966년 |
아시아개발은행(ADB)발족 |
1987년 |
서울시내버스 총파업 |
1990년 |
한국-니카라과, 국교 수립 |
1991년 |
한국-알바니아 국교 수립 |
1992년 |
대만 단교선언, 대한 무역 우대조치 철회 |
1997년 |
산업표준화법 개정돼 KS표시 허가제도가 인증제도로 전환 |
2000년 |
북한-일본 국교정상회담 |
2003년 |
미셸 위, 캐나다 남자 프로골프인 베이밀스오픈 출전, ‘性 대결’ 벌임 |
2004년 |
노르웨이 뭉크박물관에서 뭉크의 ‘절규’ 도난 |
2005년 |
‘제2회 한국에너지의 날’ 전깃불 소등 행사 |
2005년 |
아프가니스탄 파병 공병.의료지원 다산(6진).동의부대(8진) 환송식(경기도 성남 육군종합행정) |
탄생誕生 |
1860년 |
텔레비전의 주사원리 발견한 독일의 니프코브 출생 |
1862년 |
프랑스 작곡가 드뷔시 출생 |
1904년 |
중국 등소평 출생 |
사망死亡 |
1883년 |
러시아 작가 투르게네프 사망(구력 8.22 / 신력 9.3) |
1963년 |
‘모리스’자동차 처음 생산한 영국의 너필드 사망 |
2004년 |
체코 ‘프라하의 봄’ 주역 경제학자 오타 시크 사망 |
|
|
“신은 우리를 굽어보시고 백인들이 한 모든 짓을 알고 계시나이다. 선량하신 우리의 신께서 (우리의) 원수를 원수로 갚으라 명하시나이다. 신께서 우리의 전쟁을 주관하시고 우리를 도우시나이다.”
거사는 부두교 제사장이 주재하는 의식과 함께 시작됐다. 제사장은 살아 있는 돼지를 창으로 찔러 흘러나오는 피를 마시고 크리올어(語)로 기도를 올리며 추종자들을 흥분 상태로 이끌었다.
노예들은 제각각 무리를 지어 자신의 주인을 살해했고 농장을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었다. 평원이 온통 화염에 휩싸여 폐허가 됐다. 지평선 전체가 불의 장벽을 이뤘다. 노예들은 지칠 줄 모르고 닥치는 대로 파괴했다. 광란 상태에서 눈에 띄는 것은 모조리 죽였다.
그들은 “복수를! 복수를!”이라고 외쳤다. 한 흑인은 손에 잡히는 대로 여자를 겁탈했다. 자신의 아내가 백인들에게 수없이 당했던 데 대한 앙갚음이었다. 한 흑인은 백인 아이를 창에 꿰어 깃발처럼 들고 다녔다.
1791년 8월 22일 카리브 해의 프랑스 식민지 산도밍고(아이티의 옛 이름) 북부에서 시작된 흑인 노예의 폭동은 이토록 참혹했다.
하지만 ‘블랙 자코뱅’의 저자 C L R 제임스는 “그들은 놀랄 만큼 온건했다. 그들의 주인이 예사로 저질렀던 짓과 비교하면 (그들이 한 짓은) 무시해도 좋을 수준이었다. 흑인들에게 자행됐던 야만적이고 극악한 고문이 백인에게 자행된 사례는 한 건도 없었다”고 썼다.
이런 평가는 무리가 아니었다. 악취 나는 선실 속에 주검들과 뒤엉켜 실려 온 아프리카인들은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잔혹행위를 당했다. 백인 농장주는 이들에게 온갖 종류의 고문과 신체 절단을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항문에 화약을 가득 넣은 뒤 불을 붙이기도 했다.
불과 몇 주 만에 전국으로 번져간 폭동은 어쩌면 흑인 노예들의 일시적 분풀이와 피의 복수극으로 끝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탁월한 흑인지도자 투생 루베르튀르가 나타나 ‘반란 노예’들을 조직된 힘으로 이끌었다.
루베르튀르의 지도 아래 흑인들은 스페인군, 영국군, 프랑스군을 차례로 물리쳤다. 비로소 1804년 1월 1일 세계 최초의 흑인 공화국 아이티(‘산이 많은 곳’이라는 뜻의 크리올어)를 탄생시켰다.
역사상 유일하게 성공한 노예들의 반란으로 기록되는 아이티혁명은 그러나 ‘색 바랜 혁명’이 되고 말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독립국가 건설 이후 오늘까지 이어진 아이티 200년의 독재와 내전, 혼란과 가난의 현실 때문일 것이다.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80822/8620969/1에서 가져옴.
|
[1910년] |
한일합병조약 조인 |
 |
한일합병 후 왕족과 총독부 고관들이 함께 찍은 사진. 정 가운데에 고종황제가 앉아있다. |
일제의 한국 병탄은 일련의 치밀한 과정을 거쳐 전개됐다. 1905년에 가쓰라ㆍ테프트밀약(7월), 제2차 영ㆍ일동맹(8월), 러ㆍ일강화조약(9월)을 체결, 한국에서의 독점적 권리를 국제적으로 승인받은 일제는 한국과도 3차에 걸쳐 한일협약을 강제로 체결해 재정ㆍ외교ㆍ내정권을 모두 빼앗는다.
음모는 일본에서도 진행됐다. 1909년 각의에서 한국 병합이 결정되고 천황도 이를 재가하자 1910년부터는 야욕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6월에 새로운 통감으로 부임한 육군대신 데라우치가 모든 옥내외 집회를 금지시키고 신문ㆍ잡지도 검열을 강화해 사실상 한국을 계엄상태로 만든 가운데 이완용은 8월18일, 내각회의에 합병조약안을 상정해 통과시킨다.
일본군이 속속 서울에 집결하고 한국인은 2명 이상 모일 수 없었던 8월22일 오후 2시, 어전회의에서 합병안을 가결시킨 이완용은 발길을 통감부로 돌렸다. 그리고 오후 4시, 이완용과 데라우치가 한일합병조약안에 조인함으로써 한국은 조선왕조 건국 519년만에 문을 닫았다. 일제는 8월29일 순종으로 하여금 양국(讓國) 조칙을 강제로 내리게 했지만 친필서명이 없어 지금까지 불법과 무효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
http://srchdb2.chosun.com/history/를 기본으로 다듬었음. |
첫댓글 [1791년]에서 마지막 문단 1번째 줄에 '역사상 유일하게 성공한 노예들의 반란으로 기록되는 아이티혁명은'이라는 문장은 조금 가다듬는 편이 나을 듯싶습니다. '아이티혁명은 역사상 유일하게 노예들이 성공한 반란이다. 그러나 아이티혁명은 '색 바랜 혁명'이 되고 말았다는 평가를 받는다.'로 고치면 어떨까요?
* 이환이의 문제제기, 좋아요. 나는 <이렇듯 역사상 유일하게 성공한 노예 반란으로 기록되는 아이티혁명이지만 '색 바랜 혁명'이 되고 말았다는 평가를 받는다.>로 고치고 싶지만, 남의 글을 가져온 글이기에 위의 문장은 그대로 두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