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한 사원’ 껍질 깨고 大衆 속으로 …# 성립 배경
대승불교가 누구에 의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성립되었는지에 관한 확실한 기록은 없다. 단지 현재로서는 중국에서 발간되었던 대승경전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 대강을 추정할 뿐이다. 2세기경 지루가참(支婁迦讖)이 번역한 경전들을 검토해 보면 서기 1세기경에는 대승불교에 몇몇 계통이 존재했으며, 또한 상당히 진전된 교리 체계를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대승불교의 기원은 서력기원 전후의 시기로 추정된다. 대승운동은 안정된 경제적 기반 위에서 사원에 안주하며 일반 대중과 유리된 채 법의 해석에 골몰하던 현학적인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 불교에 회의를 느끼고, 불교의 본래 취지를 되살리고자 했던 선각자들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부처님은 중생들의 요구에 응하여 인간으로 화현해 인간들을 구원하는 화신불(化身佛)이며, 아미타불과 약사여래 등은 자리.이타의 대승적 깨달음을 서원(誓願)해 수기(授記)를 받고 그 수행의 공덕으로 성불한 보신불(報身佛)이라고 설해진다.>
오늘날 학계에서 대승불교의 기원에 대한 견해는 크게 부파불교 중 대중부(大衆部, Maha-sa-m.ghika)나 설출세부(說出世部, Lokottarava-din)에서 기원했다는 설과 재가자의 불탑 숭배에서 기원했다는 설 등 두 가지로 나뉜다. 전자는 보수적인 상좌부(上座部, Therava-da)에 비해 진보적인 대중부의 사상에는 대승불교 사상과 유사성이 있다는 점을 근거로 해 대승불교가 대중부로부터 발전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즉 대중부에서 설하는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나 설출세부에서 설하는 부처님의 초월적 성격이 대승의 교의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중부의 교의가 수록된 문헌에는 ‘대승’이라는 용어가 보이지 않고, 초기 대승불전인 〈반야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대승’이라는 말이 최초로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대중부 계통의 문헌에는 대승적 자각이 보이지 않는다. 근래에 들어서는 오히려 대중부 등이 대승불교의 영향을 받아 그들의 교의를 재구성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대승불교가 재가자들의 불탑 숭배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은 일본의 히라가와(平川 彰)로부터 제기됐다. 이 설에 의하면 대승불교는 승원 중심의 아비달마불교에 반발해 재가자들을 중심으로 발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불탑 숭배는 여러 부파 가운데 상좌부 계통의 법장부(法藏部, Dharmaguptaka)에서 특히 중요시했기 때문에 대승불교가 대중부보다는 상좌부에서 기원한 셈이 되므로 재가자 중심으로 성립했다는 주장과 상충한다. 게다가 원시 대승경전에 속하는 〈반주삼매경〉에서는 재가자의 역할이 거의 인정되고 있지 않다는 점도 일본학자들의 학설에 의문을 갖게 하는 요인이다. 결국 대승불교는 재가와 출가의 구분을 초월한 보살승(菩薩乘)이고, 따라서 대승불교는 기존의 불교에 불만을 가진 출가자와 재가자가 함께 참여한 불교 개혁운동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다.
대중부나 설출세부, 재가자 불탑숭배서 기원 2가지 설
기존불교 불만 품은 출.재가자들 개혁운동 함께 나서
한편 근래에는 이러한 개혁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재가자가 아니라, 엄격한 수행과 지혜를 겸비한 출가자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주목을 받고 있다.
대승운동은 기원전 150년에서 기원후 100년 사이에 남인도, 서북인도, 그리고 동인도 등 인도의 여러 지역에서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한 움직임의 배경에는 인도 서북부를 통한 여러 이민족의 끊임없는 침입과 헬레니즘 문화 및 페르시아 문화의 유입도 있었다. 무수한 전란을 겪으면서 민중들은 종교를 통한 정신적 안정과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갈망했을 것이다. 새로운 문화와 대중적인 힌두교 운동도 대승불교가 탄생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추진력으로 작용했다.
# 불교사적 의미
‘自利 아라한’보다 ‘利他 보살’ 지향
대승(大乘)의 원어는 ‘큰 수레’를 뜻하는 마하야나(maha--ya-na)로서 여기서 승(乘, ya-na)은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수행법을 의미한다. 대승운동을 일으킨 사람들은 기존의 부파불교를 소승(小乘)이라 폄하하고, 대승이야말로 모든 중생들을 구제할 수 있는 대안이라 자부했다.
대승불교는 붓다관, 수행의 목표, 수행법 등에 있어서 기존의 불교와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대승불교도들이 주체적으로 체험하고 깨달은 다양한 내용을 수록한 방대한 대승경전의 찬술로 이어진다. 기존의 불교와 힌두이즘은 물론이고 조로아스터교를 비롯한 외래의 종교.문화와의 직접 혹은 간접적인 교호(交互) 작용을 통해 콘텐츠와 틀을 보다 다양화하고 심화시켜 간 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궁극 목표는 같지만 수행 목적 등 차이 뚜렷
현세이익 기원 대상…유신론 경향 띠기 시작
어의적으로 볼 때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뜻이지만, 동시에 ‘부처가 되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말할 것도 없이 부처는 ‘깨달은 자’(buddha)라는 뜻이지만, 깨달은 자를 아라한(阿羅漢, arhan)이라고도 했다. 아라한은 원래 ‘(공양을 받을) 가치가 있는 자’라는 뜻이지만, 이것이 발전해 ‘번뇌를 완전히 여읜 자’ 혹은 ‘성자’라는 의미도 갖게 됐다. 실제로 초기경전에서 부처는 종종 아라한이라고도 일컬어졌다. 대승 이전의 불교에서 수행자의 최고 목표는 바로 아라한이었다. 성문(聲聞, ra-vaka)들이 수행하는 사향사과(四向四果)에서 아라한은 최고의 목표이자 경지이다.
그러나 대승적 관점에서 아라한이라는 소승의 목표는 단지 이기적일 뿐만 아니라, 그 깨달음의 경지는 붓다가 도달한 최고 깨달음의 경지에 비해 한결 열등한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따라서 진정한 해탈로 인정받지 못했다.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전자가 아라한이라는 자리적 목표를 추구하는 데 비해, 후자는 보살이라는 이타적 자비행의 화신을 지향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부파불교에서 성문은 아라한을 이상으로 삼는 반면, 대승의 보살은 자신이 성불하기 전에 다른 모든 중생들을 성불시키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이타행을 실천하는 존재이다. 요컨대 대승불교에서 보살은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한다’는 서원을 세우고 실천하는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부상한다.
부파불교, 특히 상좌부의 대표적인 수행법인 팔정도(八正道) 대신에 대승은 이타를 실천하기 위한 보살행의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육바라밀을 제시한다. 이것은 석가모니가 전생에 연등불 앞에서 보살의 이상을 추구하면서 오랜 세월에 걸쳐 바라밀을 실천한 결과 현생의 석가모니불이 되었다는 전생 설화에 착안한 것일 수도 있다.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의 육바라밀 가운데 마지막의 지혜(반야)바라밀은 다른 다섯 바라밀의 결과인 동시에 목적이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보시행을 강조하는 것이 보살도(菩薩道)이다. 지혜바라밀은 모든 사물의 공성(空性, u-nyata-)을 증득하는 무분별지이다.
대승불교도의 수행법으로서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반야경〉 등에서 강조하는 육바라밀의 수행이 대표적이지만, 이 외에 〈화엄경〉 등에 보이는 불탑예배, 그리고 〈반주삼매경〉 등에 보이는 관불삼매(觀佛三昧) 등도 중시됐다. 특히 〈법화경〉에서는 경전의 수지(受持).독송(讀誦) 및 서사(書寫)가 권장되고 있다. 이러한 수행법의 저변에는 대승불교가 기존의 불교와는 달리 영원성과 초월성을 갖는 법신불(法身佛)에 의거하고 있다는 의식이 자리잡고 있다.
불교는 보편적 진리인 법의 자각을 추구하는 종교이며, 따라서 이 법을 깨닫고 실현하는 자는 누구나 부처가 된다. 부파불교에서도 과거칠불(過去七佛)이나 미륵불과 같은 미래불(未來佛)을 설하지만, 대승불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과거와 미래뿐만 아니라 바로 지금 모든 곳에 편재하는 진리 그 자체로서의 법신불(法身佛)을 설한다. 이처럼 대승불교에서는 여러 부처와 보살들, 그리고 그 형상이 곧 현세이익적인 기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는 대승불교가 무신론을 본질로 하고 있으면서도, 현상적으로는 유신론적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 대승불교의 영향
한국 중국 등 동아시아 전통문화의 기층 형성
대승불교에서는 지혜의 추구와 실현을 최고 목표로 인식했다. 대승불교의 역사는 한마디로 ‘과연 지혜란 무엇이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가’를 밝히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중관학파와 유식학파로 대표되는 대승불교도들은 이러한 과제의 해결에 진력했으며, 이로써 대승불교의 교학 체계는 한층 공고해졌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불교와 인도의 전통사상 사이의 대립과 경쟁도 한몫 했다. 불교와 인도사상은 치열한 논쟁을 통해 상호 허점을 보완함으로써 학문 체계를 강화시켜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인도불교의 말기에 일어난 밀교(密敎)도 이러한 상호간의 교호 작용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대승불교는 결국 인도 국경을 넘어 주변 지역으로 전파됐고, 특히 중국과 한국을 위시한 동아시아 각 국에서 불교는 전통문화의 기층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첫댓글 그렇군요...상식으로 굳혀두기에 더 없이 좋은 글입니다.....대승불교가 무신론적 본질임을 견지하면서도, 왜 여러 부처와 보살을 신격화하는 유신론적 현상을 갖는가,
에 대해서는..개인적인 오랜 의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