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사전 / 김소연
‘호감’에 대하여
존경
대상에 대한 존경심은 취하고 있는 자세만으로도 충분히 표출된다.
존경과 질투는 '자세' 하나로
전혀 다른 길을 간다.
존경하는 대상도 질투하는 대상도 내가 동경하던
그것을 이미 갖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동기는 같지만,
이미 겸허히 흔들고 있는 백기는 적어도 한 수 아래임을 여실히 깨닫고 행해지는 의식이며,
그 백기를 빛에 비춰보면, 마치 복사가 불가능하도록 장치된
지폐의 밑그림처럼
'영원한 노스탤지어'가 깊숙한 곳에 각인되어 있다
동질성을 기본으로 하되, 선망하는 마음으로 승화되기 때문에
저절로 질투의 바깥 세계에 놓여 있다. 그만큼 깨끗하고
단정한 감정 상태에 해당된다.
동경
존경과 유사한 상태이지만, 존경에는 있는 것들이 부재한다.
존경은 이성적인 이유들을 각주처럼 거느린다면,
동경은 그런 것이 없다. 근거라는 것이 언제나 막연하고
미약하다.
그렇기 때문에 존경이 다른 곳으로 쉽게 이동되지 않는다면 동경은 쉽게 이동된다.
단, 거리의 막연함이 늘 확보된다면 끝없이 붙박여 있을
수도 있다.
동경에는 또한, 존경보다는 좀더 복합적인 욕망이,
그리고 흠모보다는 좀더 나른한 욕망이 개입되어 있다.
옹호
존경은 이성적으로 저절로 갖게 되는 마음가짐이라면,
옹호는 일종의 다짐처럼 존재한다.
대상을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감싸안는 마음이기 때문에,
대상의 미흡한 부분에 대한 적극적인 이해나 무조건적인 덮음 같은 것을 전제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다짐은 불가피하다. 미흡함을 몰라서가 아니라,
미흡함을 함께 끌어안는 자세. 그렇기 때문에 거칠고 난폭하며
편협되지만,
그 편견의 자리에 기꺼이 서 있는 상태이다.
신뢰가 간혹 배신이라는 종착점으로 나아간다면, 옹호는
그렇지는 않다.
신뢰를 상실하는 순간에조차 어떤 식으로든 논리를 찾아내어 훼손된 마음을 정화시킨다.
어떤 경우, 내적으로 정화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아도
대외적으로 정화를 포장하고 위시하는 과감함 같은 것도 진정한 옹호는 행하고야 만다.
좋아하다
호감에 대한 일차적인 정서이면서도, 정확하게 분화하지
않은 ('분화되지 않은'이 아닌) 상태를
뭉뚱그릴 때 쓰기 좋은 말이다. '좋아한다'는 고백은 어쩌면,
내가 느끼고 있는 이 호감이 어떤 형태인지 알기 싫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건 아닐까.
사랑이라는 말을 쓰기가 꺼려질 때에 흔히 쓰는 말이고, 존경에도
흠모에도,
신뢰에도 매혹에도 귀속시키기 미흡한 지점에서
우리가 쓰는 말이 바로 좋아한다는 표현은 아닐까 싶다.
어쩌면 더 지나봐야 알 수 있겠다는 마음 상태이거나,
이미 헤치고 지나온 것에 대해 온정을 표하는 예의바른 말이거나,
적극적으로 판단 짓기에는 미온적인 상태이거나,
더 강하고 자세한 호감의 어휘들을 비껴가기 위한 방법적 거절이거나…
이런저런 것들의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버려진 영역의 호감들을 아우르는 말임은 분명하다.
흠모와 열광
존경에 동경과 매혹이 재빠르게 섞여들 때가 흠모라면,
존경에 열정이 화학 작용을 일으킬 때가 열광의 상태이다.
흠모는 열광보다 느리며 대상과의 거리도 멀다. 느리며
멀기 때문에
동경과 비슷하지만, 흠모가 앓고 있는 상태라면, 동경은 그렇지는 않다.
동경과 흠모는 언제나 도로 교통법처럼, 대상과 안전 거리를
확보하고 진행된다.
그에 비하면 열광은 위험하다. 질주를 해야 하므로, 여러 차선을 넘나들며 앞지르기를 한다.
향후, 호감에 대한 것보다 질주에의 환희를 더 즐기게
되는 것도 열광의 위험한 부분이다.
반하다
‘반하다'라는 말 앞에는 ‘홀딱'이란
수식어가 적격이다. ‘홀림'의 발단 단계.
그 어떤 호감들에 비해, 그만큼 순도 백 퍼센트 감정에만
의존된('의존한'이 아니라) 선택인
셈이다.
순식간에 이루어지지만, 그리 쉽게 끝나지는 않는다.
어차피 아무런 판단을 동원하지 않고 행한 호감의 의식이므로. 벼락처럼,
자연 재해처럼 한순간에 완결되는 감정이지만, 수습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매혹되다
‘홀림'이 근거를 찾아나선 상태. 반한다는 것이
근거를 아직 찾지 못해 불안정한 것이라면, 매혹된다는
것은 근거들의 수집이 충분히 진행되어
안정된 상태이다. 풍부하게 제시되는 근거 때문에 매혹된
자는 뿌듯하고 안정적이다.
그러므로 즐길만한 것, 떠벌리고 싶은 것이 된다.
수집이 완료되는 순간은 쉽게 오지 않는다.
실망의 언저리를 맴돌다가도 어느새 다시 복원되고야 만다. 흔적이
남지만.
아끼다
사랑의 명백한 한 형태. 부모가 자식에게 행하듯,
아끼는 대상을 아낌없이 아끼기 위하여 스스로를 아낌없이 희생하는 경우가 아낌에 있어서
'최선의 병적'인 상태이다. 오래도록 두고두고 음미하기 위하여
발효의 시간을 기다리는
차분한 설레임도 아낌에 속한다. 그렇지만,
언제 어디서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 우리들의 욕망이라면,
'아낀다'라는 말은 일종의 모독일 수도 있다.
쓰여지지 않고 간직된다는 것은 끌러보지 않는 선물꾸러미 같고,
읽혀지지 않는 책과도 같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반증하는 말일 수도 있고,
도무지 효용성을 찾을 길이 없다는 낭패감을 은유하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틋하게 에워싸는 보호막과도 같은 호감.
손쓸 방법이 없고, 손댈 재간이 없는 대상을 향해 에둘러
포복해 가고 있는 구애.
의식적으로든 아니든, 흠모라든가 동경처럼 '거리'가 확보되어 있지만,
이 경우의 거리는 무수한 주름이 잡혀진 채 접혀 있어서 실제보다 심적 거리는 훨씬 가깝다.
매력
매력이란 늘, 상대방의 부정적인 요소들에게 끌리는 마음이다.
착하고 순하고 정직한 사람에게 우리는 결코 매력 있다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그럴 경우 미덥다는 표현을 더 쓰게 된다. 한 존재가
가진 결핍과 과잉.
모자라거나 지나친 성향들. 그것에 대하여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환호할 때,
이 낱말은 제법 용이하게 쓰이곤 한다. 누군가의 모자란
점과 지나친 점을 곱게 보아줄 때,
매력은 날개를 펼친다. 매력 있는 존재만을 좇는 사람은
자신이 매력 있어 하는 대상과의 관계에 대하여 늘 불충분하다.
결핍과 과잉은 언제나 관계에도 고스란히 전이되어서,
관계 자체의 결핍과 과잉을 낳는다. 게을러서 아름다운
사람은
관계에도 게으르며, 섬세해서 아름다운 사람은 상대방의
섬세하지 못함을 책망한다.
그렇기 때문에 매력덩어리들은 언제나 상대방을 허하게 하거나 피곤하게 한다.
그렇지 않을 때가 오긴 온다. 결핍을 결핍으로 똑바로
인식하고,
과잉을 과잉으로 똑바로 인지하는 때. 그때란 대개 관계의
내리막길을 걸어내려 갈 때이다.
간혹, 매력 때문에 맺어진 관계 자체의 양 날개를 뚝뚝
분지르며 걸어내려 가곤 한다.
보은
관계가 닳고 헤진 자리에 자리잡는 호감이 보은이 될 때가 더러 있다.
주거니 받거니, 아웅다웅하면서, 살아가다가 홀연히 깨달음처럼 다가오는 웅숭 깊은 곳.
오래 입은 스웨터의 팔꿈치가 헤질 때와 같이,
오래 들고 다닌 가죽 가방의 손잡이가 꺼슬꺼슬해질 때와 같이,
그렇게 보은은 찾아온다. 호감의 한 표현으로서의 보은은
반드시 은혜에 대한 대가로 찾아오진 않는다.
안쓰러움과 미안함과 연민의 미세한 알갱이들이, 낡은 스웨터의
보풀처럼 매달려 있을 때,
그 낡음에 대하여 무릎이 꿇어지는 지점이 있다. 경건함. 그리고 가슴 아픔.
그런 것들을 거느리고 언제나 뒤늦게 참회의 밥상을 들고 찾아오는 것이다.
호기심
탐구하고 싶어지는 것. 더 알고 싶은 것. 끝없이 궁금한 것들이 쌓여가는 것.
호기심이 끝없이 연장되며 세세하게 깊어질수록 호감의 강도는 높다.
호기심은 전면적인 호감의 형태는 아니지만,
호감의 필수 구성 요소인 셈이다.
신뢰
흠모와 보은처럼 느리게 찾아온다. 흠모보다는 좀더 느리며
보은보다는 좀더 빠르다.
또한, 흠모보다는 안정된 상태이지만, 보은보다는 불안정한 상태이다.
실망이라는 거추장스러운 마음 상태를 몇 번 거치며 거듭날수록,
불에 달궈진 연장처럼 단단해진다. 대개의 다른 호감들이
추상적이고 희미한 상태에서 진행되어 초점이 잡혀지고 구체적이어지는 과정을 거친다면,
신뢰는 그것을 역행한다.
구체적인 이유들이 점철된 후에야 비로소 막연하고 추상적인 신뢰를 낳는다.
그 순서를 밟은 한, 신뢰는 최적의 강도를 갖게 되고
알맞은 온도와 거리를 찾아 뿌리를 내린다. *
# 김소연 /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