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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2:21-25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 하니 그들 사이에 통역을 세웠으므로 그들은 요셉이 듣는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 앞에서 결박하고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 사람의 돈은 그의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
오늘은 요셉의 그 다음 이야기 형들과 나누는 대화 중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찾아 함께 생각해 보길 원합니다,
지난 시간 나눈 말씀처럼 가나안에도 기근이 들어서 야곱은 자식들을 양식이 있다고 하는 애굽으로 양식을 사러 보냅니다.
누구는 보내지 않았습니까?
베냐민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왜 보내지 않았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창 42: 4 “야곱이 요셉의 아우 베냐민은 그의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생각에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왜 보내지 않았다고 합니까?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왜 다른 아들들에 대한 걱정은 적었고 베냐민에 대한 걱정이 많았을까요?
베냐민이 누굽니까?
야곱이 그토록 사랑하였던 라헬의 아들이죠?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하여 몇 년을 봉사하였습니까? 14년을 봉사하였다.
대단합니까? 한 여인을 얻기 위하여 14년을 댓가 없는 머슴살이로 봉사하였습니다.
우리 남자분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그렇게 하실 수들 있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우리 남자 분들은 야곱에게 아내를 사랑하는 그 마음을 좀 배워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시간들을 성경은 수일처럼 여겼더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4년이 지루하였다는 말입니까? 꿈 같았다는 말입니까? 꿈 같았다.
머슴살이가 힘이 들고 고생이 되었지만 너무나 사랑하였던 여인이 함께 하였기 때문에 10년이라는 시간도 수일처럼 여길 수가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러브스토리는 다 우리의 영적 신앙의 의미들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믿음의 삶이 어렵고 힘이 들어도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안에서 이기고 극복하라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다 그러한 마음으로 우릴 그렇게 사랑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주어진 모든 환경 들을 다 이기시고 극복하게 되길 축복합니다.
그런 아내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혼 생활 14년이 지난 후 아버지 집을 떠나 그것도 도망하다 시피 남편 야곱을 따라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오히려 형에게 죽임을 당할 지도 모른다고 이야기를 들었던 그 남편의 집으로 야곱의 집으로 편하지 못한 귀향길에서 둘째 아들을 낳다가 죽고 맙니다.
이후 야곱은 그렇게 사랑하였던 그 여인을 길목에 뭍고 묘비를 세우고 돌아갑니다.
그리고 남은 평생 잊지 못하고 살면서 임종 전에 요셉에게 라헬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창 42: 7 “내게 대하여는 내가 이전에 밧단에서 올 때에 라헬이 나를 따르는 도중 가나안 땅에서 죽었는데 그 곳은 에브랏까지 길이 아직도 먼 곳이라 내가 거기서 그를 에브랏 길에 장사하였느니라 (에브랏은 곧 베들레헴이라)”
성경에는 이렇게 짧은 말씀으로 기록되었지만 라헬을 잊지 못하는 애뜻함이 아들 요셉에게 전하는 말씀 가운데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이제 야곱이 거처하는 집으로 가 보겠습니다.
왜 베냐민을 보내지 않았다고 합니까? 혹 잘못될까 싶어서.
야곱이 애굽에 요셉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의 동생 베냐민을 보내는 것을 망서렸을까요? 얼른 보내려고 했겠죠?
왜 하나님께서는 그런 내용을 야곱에게 숨기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애굽에 요셉이 있다는 것을 모르셔서 말씀하지 않았을까요?
저는 그 이유를 저와 여러분들을 위하여서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이해를 합니다.
그리고 야곱을 위하여서 일 것입니다.
우리는 잘 모르지만 모르는 것이 야곱의 신앙의 길에 더 유익할 것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셨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사탄이 비록 야곱의 집을 흔들어서 믿음의 길에 실패를 던져 주려고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과정을 선으로 이끌어 가시는 것이 야곱의 집을 통해서도 보여 주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이런 말씀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사 59:8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이 행하는 곳에는 정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지만 믿지 못하여서 자기 스스로 굽을 길을 만들어서 가고 있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그럼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솔로몬을 통해서 이런 말씀을 줍니다.
잠 16: 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너의 행사를 어떻게 하라고요? 하나님께 맡겨라.
우리의 길도 때로는 야곱과 같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저는 야곱의 일생이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하늘까지 가는 길과 같다는 생각을 참 많이 합니다.
맡겨도 가고요, 맡기지 않아도 지나는 길이라면 맡기면 우리의 마음이라도 얼마나 평안할까요? 우리 사랑하는 귀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이시여.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길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길 축복합니다.
다시 창세기로 가겠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요셉이 그렇게 되고 난 다음 아버지의 사랑이 베냐민에게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을 보내고 난 다음 슬퍼하는 아버지를 보고 마음들이 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럼으로 베냐민을 데리고 가지 않는 것을 어쩌면 당연하게 생각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들은 애굽으로 곡식을 사러 가는 자들과 함께 갔습니다.
제가 지난번에 말씀을 드렸습니까?
양식을 팔고 하는 일들을 시종들에게 다 맡기고 요셉은 아마도 결재만 하였을 것입니다.
어쩌면 결재도 다른 사람들에게 다 맡기고 아주 중요한 부분만 관여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오는 사람들은 요셉이 직접 챙겼다고 들으셨습니까?
제가 그런 말씀을 드렸는지 모르겠습니다.
가나안에서 오는 사람들은 요셉이 직접 챙겼다, 그럴까요? 왜 입니까?
혹시라도 가나안에 계시는 아버지의 안부를 알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요.
요셉은 그렇게 사랑받았던 아버지를 떠난지 20년이 넘었습니다.
17살 정도 되어서 요셉은 종으로 팔려 갔습니다.
그리고 바로 앞에 섰을 때 나이 30세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고 풍년 7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면 요셉의 나이가 37살이죠? 아버지 집을 떠난지 20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형들과 만나 대화를 할 때 흉년 2년이 지났다고 했으니 요셉의 나이 39세때 형들과 만나게 됩니다.
그러니 기근이 두 해가 지나는 동안 야곱의 가정은 그 흉년을 견디어 내었다는 말씀입니다.
왜 7년이나 애굽에 흉년이 있게 되었을까 라는 내용을 조금 이해를 하시겠습니까?
누구도 그 흉년을 견디어 내지 못할 지경까지 이르게 두셨다는 것입니까?
야곱의 가정도, 그래야만이 어디로 갈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애굽으로
그러나 그런 사실을 전혀 예상못한 야곱의 가정은 기근을 해결해 달라고 수 많은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해결은 되지 않고 어디에 갈 수 밖에 없었습니까? 애굽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성도님들 우리가 세상을 살아나갈 때 혹 세상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까?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살아야 하는데 왜 세상의 도움을 받고 살아갑니까? 그런데 성경에 보니 누구도 그렇게 했습니까? 야곱도 그렇게 살았고 아브라함도 이삭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세상을 의존해서는 안 되지만 때에 따라 세상의 도움이 필요할 때에 그 도움을 거절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믿음의 생활에 적용을 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주관자들을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들의 손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이해하게 됩니다.
제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개인회생에 대한 말씀을 드린 일이 있죠?
제가 그런 일을 그렇게 해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나서 도청 민원실에서 법률과 관련된 일을 하시는, 개인회생을 담당하고 계시는 분을 만나 상담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도 됩니까 라고요,
그러니 그분의 말씀에 당신과 같은 사람들을 위하여서 나라에서 법을 만들아 시행하고 있는데 왜 망설이십니까? 그렇게 함으로 당신에게 돈을 빌려준 이들이나 기관에도 손해가 가지 않도록 정부에서 하고 있으니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 주시는 손길이라 생각하고 망설이지 않고 하였고 오 년이라는 기간을 거쳐 1억이 넘는 돈을 다 갚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라의 도움이 필요할 때는 망설이지 말고 받아라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보다 우선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시고요, 그리고 기도하고요.
이제 그렇게 하여서 야곱의 아들들 10명은 애굽 땅으로 입국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 땅의 통치자앞으로 인도 되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장 42: 6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요셉이 가나안에서 온 이 열 명이 누군지 단번에 알아 보았을까요?
비록 2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어떻게 형들을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요셉의 형들은 어떻게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였을까요?
자기들이 애굽에 판 그 어리광 부리는 동생과 대조할 수 없는 위엄에 생각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말도 통역을 세워서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생각에는 몇 명이 와야 됩니까? 11명이 와야 되는데 몇 명입니까? 10명이다, 누가 보이지 않았습니까? 동생 베냐민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마음이 쿵하고 내려 앉았습니다? 왜 일까요?
증언의 말씀은 이런 기록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부조 224-225쪽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무리를 돌아보고 그들 중에 베냐민이 없는 것을 발견하였다. 베냐민도 이 잔인무도한 사람들의 무도한 책략의 희생이 되고 말았는가? 그는 그 진상을 알아보기로 결심했다”
어떻게 생각하였다는 말씀입니까? 형들 손에 하나 뿐인 친혈육 베냐민도 어떻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들을 시험하기 위하여 이런 말을 합니다.
창 42: 9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그 말을 들은 요셉의 형들은 사실을 고백을 합니다.
우리는 다 형제들인데 원래 12형제로서 하나는 없어지고 하나는 집에 아버지와 함께 있습니다 라고요,
그 말을 들은 요셉은 다시 이런 말을 합니다.
창 42:16 “너희 중 하나를 보내어 너희 아우를 데려오게 하고 너희는 갇히어 있으라 내가 너희의 말을 시험하여 너희 중에 진실이 있는지 보리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는 과연 정탐꾼이니라 하고”
그렇게 하고 그들을 삼일을 가두어 두었습니다.
그리고는 계속 그렇게 둔다면 집에 있는 아버지와 다른 가족들이 굶주림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안 요셉이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합니다.
창 42:18-20 “사흘 만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 너희가 확실한 자들이면 너희 형제 중 한 사람만 그 옥에 갇히게 하고 너희는 곡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 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러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니 그들이 그대로 하니라”
그러한 결론이 났을 때 요셉의 형들이 서로 이런 말을 합니다.
창 42:21-22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 하니”
곁에 요셉이 있든 말든 형들이 그런 말을 합니다.
애굽사람이 자기들의 말을 알아 들을 수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 말을 들은 요셉이 어떻게 하였다고 합니까?
창 42:24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 앞에서 결박하고”
요셉이 어떻게 했다고요?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저는 여기서 우리를 위해 지신을 들어내지 못하시고 혼자서 우셨던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형들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자신을 들어내고 싶었을까요? 내가 요셉입니다 형님들 하고 말하고 싶었을까요? 그러나 아직 아니라고 생각한 그는 몰래 울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몰래 우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세 번 눈물을 흘리신 기록이 성경에 나옵니다.
한번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였습니다.
요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제 나사로를 살리실텐데 왜 예수께서 우셨을까요?
예수님의 눈물을 본 유태인들은 예수께서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기에 그의 죽음을 보시고 우시는가 했습니다. 그리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였던 분이 나사로를 죽지 않게 할 수는 없었는가 했습니다.
예수께서 왜 우셨습니까?
증언의 말씀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소 534 “그리스도께서 우신 것은 그의 앞에 전개되는 장면 때문만이 아니었다. 무거운 각 시대의 모든 슬픔의 짐이 그의 위에 놓여졌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범법의 무서운 결과를 보셨다. 예수께서는 아벨의 죽음에서 시작하여 세상 역사에는 선과 악의 투쟁이 간단없이 계속되어 왔음을 보셨다. 미래를 내려다 보실 때에 그는 고통과 슬픔, 눈물과 죽음이 사람들의 운명임을 보셨다. 각 시대와 각 나라에 사는 인간 가족들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예수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하였다. 죄 많은 인간의 재난은 예수의 심령을 무겁게 짓눌렀고 그가 그들의 모든 고통을 덜어 주시려고 하실 때에 그의 눈물의 샘이 터졌던 것이다”
무엇 때문에 우셨다고요?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이르게 될 사람들의 운명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내가 너희들을 구원하기 위해 온 하나님이다 라고 자신을 들어내시고 싶은 마음은 없으셨을까요?
그러면 진짜로 믿고 구원받을 영혼까지 잃어버리게 될 것을 아시고 그렇게 하시지 못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감람산 위에서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구원을 거절하는 이스라엘을 생각하시면서 세상 종말에 있을 헤아릴 수 없는 수 많은 사람들의 멸망을 바라보시면서 통곡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눈물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이죠?
세상 죄를 지고가시는 그 길이 얼마나 어두었으면 이런 기도를 드렸을까요?
삼년 반의 봉사의 기간에도 주님을 알지 못하였던 사람들의 손에 팔리고 죽으실 것을 보신 아들되어 오신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 솓아집니다.
오늘도 나를 위해 눈물의 샘이 마르지 않는 아버지의 눈물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곁길로 나갈 때마다 못자국안 손을 펼치시고 우릴 잡으려는 주님의 손길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 주님 맞기 위해 우리도 좀 울어야 되겠습니까?
나의 죄를 위해 그리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해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들의 영적생명을 위해 예수님의 마음으로 간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원합니다.
그러다가 우리를 기다리시는 눈물 많으신 그 예수님을 꼭 만나시는 은혜가 우리 모두와 함께하길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