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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하게 앎 경(S35:60)
Pariññā-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 싸밧티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카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거기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받들었다. "존귀하신(세존)이시여" 라고.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2. “비구들이여, 모든 집착을 철저하게 알기 위한 법을 그대들에게 설하리라.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모든 집착을 철저하게 알기 위한 법인가?
비구들이여, 눈과 형색을 연(緣)하여 눈의 의식이 일어난다(Cakkhuñca paṭicca rūpe ca uppajjati cakkhuviññāṇaṁ).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이다.
감각접촉을 연(緣)하여 느낌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비구는 눈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형색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눈의 의식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눈의 감각접촉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느낌에 대해서도싫어하여 떠난다. 싫어하면서 떠나서 탐욕이 사라지고, 탐욕이 사라지므로
해탈한다. 해탈하면 ‘나는 집착을 철저하게 알았다.’라고 안다.
비구들이여, 귀와 소리를 연(緣)하여 귀의 의식이 일어난다. 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이다.
감각접촉을 연(緣)하여느낌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비구는 귀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소리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귀의 의식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귀의 감각접촉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느낌에 대해서도싫어하여 떠난다. 싫어하면서 떠나서 탐욕이 사라지고, 탐욕이 사라지므로
해탈한다. 해탈하면 ‘나는 집착을 철저하게 알았다.’라고 안다.
비구들이여, 코와 냄새를 연(緣)하여 코의 의식이 일어난다. 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이다.
감각접촉을 연(緣)하여 느낌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비구는 코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냄새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코의 의식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코의 감각접촉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느낌에 대해서도싫어하여 떠난다. 싫어하면서 떠나서 탐욕이 사라지고, 탐욕이 사라지므로
해탈한다. 해탈하면 ‘나는 집착을 철저하게 알았다.’라고 안다.
비구들이여, 혀와 맛을 연(緣)하여 혀의 의식이 일어난다. 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이다.
감각접촉을연(緣)하여 느낌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비구는 혀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맛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혀의 의식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혀의 감각접촉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느낌에 대해서도싫어하여 떠난다. 싫어하면서 떠나서 탐욕이 사라지고, 탐욕이 사라지므로
해탈한다. 해탈하면 ‘나는 집착을 철저하게 알았다.’라고 안다.
비구들이여, 몸과 감촉을 연(緣)하여 몸의 의식이 일어난다. 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이다.
감각접촉을 연(緣)하여 느낌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비구는 몸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감촉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몸의 의식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몸의 감각접촉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느낌에 대해서도싫어하여 떠난다. 싫어하면서 떠나서 탐욕이 사라지고, 탐욕이 사라지므로
해탈한다. 해탈하면 ‘나는 집착을 철저하게 알았다.’라고 안다.
비구들이여, 마노(마음)와 법(마음현상)을 연(緣)하여 마노의 의식이 일어난다. 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이다. 감각접촉을 연(緣)하여 느낌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비구는 마노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법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마노의 의식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마노의 감각접촉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느낌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난다.싫어하면서 떠나서 탐욕이 사라지고, 탐욕이
사라지므로 해탈한다. 해탈하면 ‘나는 집착을 철저하게 알았다.’라고 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모든 집착을 철저하게 알기 위한 법이다.”
Saṁyutta Nikāya 35.60
6. Avijjāvagga
Sabbupādānapariññāsutta Variant: Sabbupādānapariññāsutta → sabbūpādānapariññāsuttaṁ (bj); tathāuparipi pariññā (pts1ed)
“Sabbupādānapariññāya vo, bhikkhave, dhammaṁ desessāmi. Taṁ suṇātha.
Katamo ca, bhikkhave, sabbupādānapariññāya dhammo? Variant: sabbupādānapariññāya → sabbūpādānapariññāya (bj)
Cakkhuñca paṭicca rūpe ca uppajjati cakkhuviññāṇaṁ. Tiṇṇaṁ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Evaṁ passaṁ, bhikkhave, sutavā ariyasāvako cakkhusmimpi nibbindati, rūpesupi nibbindati, cakkhuviññāṇepi nibbindati, cakkhusamphassepi nibbindati, vedanāyapi nibbindati. Nibbindaṁ virajjati; virāgā vimuccati; vimokkhā ‘pariññātaṁ me upādānan’ti pajānāti. Variant: vimokkhā → vimokkha (sya-all, km); vimokkhaṁ (mr)
Sotañca paṭicca sadde ca uppajjati …
ghānañca paṭicca gandhe ca …
jivhañca paṭicca rase ca …
kāyañca paṭicca phoṭṭhabbe ca …
manañca paṭicca dhamme ca uppajjati manoviññāṇaṁ. Tiṇṇaṁ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Evaṁ passaṁ, bhikkhave, sutavā ariyasāvako manasmimpi nibbindati, dhammesupi nibbindati, manoviññāṇepi nibbindati, manosamphassepi nibbindati, vedanāyapi nibbindati. Nibbindaṁ virajjati; virāgā vimuccati; vimokkhā ‘pariññātaṁ me upādānan’ti pajānāti.
Ayaṁ kho, bhikkhave, sabbupādānapariññāya dhammo”ti.
Aṭṭhamaṁ.
ㅡㅡ무애해도 9가지 일어남 생겨남 hetu patica paccaya nimitta 등으로서 緣起 이다.
제4장 법에 머무는 지혜
4. Dhammaṭṭhitiñāṇaniddeso
45. Kathaṃ paccayapariggahe paññā dhammaṭṭhitiñāṇaṃ?
"조건(paccaya)을 받아들이는 데서의 통찰지"로써
'법에 머무는 지혜'가 있다]는 것은 어떻게 해서인가? {이하 중복 경문은 생략함, paccaya를 조건에, paṭiccā를
이유로[緣]에 재해석함)
Avijjā saṅkhārānaṃ uppādaṭṭhiti ca pavattaṭṭhiti ca nimittaṭṭhiti ca āyūhanaṭṭhiti ca saññogaṭṭhiti ca palibodhaṭṭhiti ca samudayaṭṭhiti ca hetuṭṭhiti ca paccayaṭṭhiti ca.,
무명[...태어남]은 상카라[...늙음과 죽음]의 일어남이 의존하는 것이며, 이어짐이 의존하는 것이며, 표상이 의존하는 것이며, 쌓음이 의존하는 것이며, 결합이 의존하는 것이며, 장애가 의존하는 것이며, 모여 일어남[집]이 의존하는 것이며, 원인이 의존하는 것이며, 조건paccaya이 의존하는 것이다.
ㅡㅡ
S45:5) 5S1-6p7 5. Kimatthiyasuttaṃ 45:5(1-5) 무엇을 위하여 경
5. Sāvatthinidānaṃ.
Atha kho sambahulā bhikkhū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ṃsu…pe…
ekamantaṃ nisīdiṃsu. Ekamantaṃ nisinnā kho te bhikkhū bhagavantaṃ etadavocuṃ –
1.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 시에 계셨다.
그때 많은 수행승들이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왔다.
가까이 다가와서 세존과 함께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주고받은 뒤 한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2. 한쪽으로 물러나 앉아 그 수행승들은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3. “세존이시여, 여기 외도 유행승들이 저희들에게
‘도반들이여, 무슨 목적을 위해서 사문 고따마 아래서 청정범행을 닦습니까?’라고 질문을 합니다.
‘‘Idha no, bhante, aññatitthiyā paribbājakā amhe evaṃ pucchanti –
‘kimatthiyaṃ, āvuso, samaṇe gotame brahmacariyaṃ vussatī’ti?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세상에 이교도 유행자들이 저희들에게 이와 같이
'벗들이여, 수행자 고따마 아래서 무엇을 위해서 청정한 삶을 사느나?'라고 질문했습니다.
이렇게 질문을 받으면 저희들은 그 외도 유행승들에게
‘도반들이여, 괴로움을 철저히 알기 위해서 우리는 세존 아래서 청정범행을 닦습니다.’라고 설명합니다.
Evaṃ puṭṭhā mayaṃ, bhante, tesaṃ aññatitthiyānaṃ paribbājakānaṃ evaṃ byākaroma –
‘dukkhassa kho, āvuso, pariññatthaṃ bhagavati brahmacariyaṃ vussatī’ti.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질문을 받고 저희들은 그 이교도 유행자들에게 이와 같이
'벗들이여, 세존 아래서 괴로움을 완전히 알기 위해 청정한 삶을 산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이 이렇게 질문을 받았을 때 이렇게 설명하면 세존께서 말씀하신 대로 말한 것입니까?
세존을 거짓으로 헐뜯지 않고 세존께서 설하신 것을 반복한 것입니까?
[세존께서 설하셨다고 전해진 이것을 반복하더라도]
어떤 동료수행자도 나쁜 견해에 빠져 비난의 조건을 만나지 않겠습니까?”
Kacci mayaṃ, bhante, evaṃ puṭṭhā evaṃ byākaramānā vuttavādino ceva bhagavato homa,
na ca bhagavantaṃ abhūtena abbhācikkhāma, dhammassa cānudhammaṃ byākaroma,
na ca koci sahadhammiko vādānuvādo gārayhaṃ ṭhānaṃ āgacchatī’’ti?
세존이시여, 이렇게 설명하면 저희들은
세존께서 말씀하신 대로 말하는 것이고, 진실이 아닌 것으로 세존을 잘못 대변한 것이 아니며,
가르침에 [7] 일치하도록 설명한 것이고, 저희들의 주장의 결론이 비판의 근거를 제공하지 않는 것입니까?"
‘‘Taggha tumhe, bhikkhave, evaṃ puṭṭhā evaṃ byākaramānā vuttavādino ceva me hotha,
na ca maṃ abhūtena abbhācikkhatha, dhammassa cānudhammaṃ byākarotha,
na ca koci sahadhammiko vādānuvādo gārayhaṃ ṭhānaṃ āgacchati.
Dukkhassa hi pariññatthaṃ mayi brahmacariyaṃ vussati.
3. [세존] "수행승들이여, 진실로 그렇게 설명했다면, 내가 말한 대로 말한 것이고,
진실이 아닌 것으로 나를 잘못 대변한 것이 아니며, 가르침에 일치하도록 설명한 것이며,
그대들의 주장의 결론이 비판의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내 아래서 괴로움을 완전히 알기 위해 청정한 삶을 살기 때문이다.
Sace vo, bhikkhave, aññatitthiyā paribbājakā evaṃ puccheyyuṃ –
‘atthi panāvuso, maggo, atthi paṭipadā etassa dukkhassa pariññāyā’ti,
evaṃ puṭṭhā tumhe, bhikkhave, tesaṃ aññatitthiyānaṃ paribbājakānaṃ evaṃ byākareyyātha –
‘atthi kho, āvuso, maggo, atthi paṭipadā etassa dukkhassa pariññāyā’’’ti.
4. 수행승들이여, 이교도 유행자들이 이와 같이
'그런데 벗이여, 이 괴로움을 완전히 알기 위한길이 있고 방도가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이와 같은 질문을 받고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그 이교도 유행자들에게 이와 같이
'그 괴로움을 완전히 알기 위한 길이 있고 방도가 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좋다.
5.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이러한 괴로움을 철저히 알기 위한 도이고 어떤 것이 도 닦음인가?
‘‘Katamo ca, bhikkhave, maggo, katamā paṭipadā etassa dukkhassa pariññāyāti?
Ayameva ariyo aṭṭhaṅgiko maggo, seyyathidaṃ – sammādiṭṭhi…pe… sammāsamādhi.
Ayaṃ, bhikkhave, maggo, ayaṃ paṭipadā etassa dukkhassa pariññāyāti.
Evaṃ puṭṭhā tumhe, bhikkhave, tesaṃ aññatitthiyānaṃ paribbājakānaṃ evaṃ byākareyyāthā’’ti.
5.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을 완전히 알기 위한 어떠한 길, 어떠한 방도가 있는가?
이와 같은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을 완전히 알기 위한 이러한 길, 이러한 방도가 잇다.
6. 수행승들이여, 이처럼 질문을 받으면 그들 이교도의 수행자들에게 이와 같이 대답해야 한다."
Pañcama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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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우리들 현생 삶은 과거의 무지에 의해 연기된 결과이라고 연기된 법에 <사성제>를 말씀하신다.
여기서 과거의 무지는 감각적으로 접촉한 물질에 대한 느낌 인식 형성 알음알이識(색.수.상.행.식, 오온)이 일어나고 반드시 사라지는 바에 모르는 바를 무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하므로,
석가모니 부처님은
삶이 괴로움 절망 분노 회한 등을 일으킨다고 <사성제>의 '집성제'에 밝혀주셨다.
여기 괴로움이 일어나는 12연기의 연기법을 '집성제'에 살펴본다.
밖으로 오온五蘊의 일어남과 사라짐(集滅)에 대해 무지한 무명을 조건으로 (신.구.심)상카라 '형성行들'이 생겨나게 하고(몸身의 형성은 내외입처),
그러한 상카라를 거듭 행하는 조건으로부터 분별하며 아는 '식識'이 생겨나게 하고,
이처럼 분별하며 아는 '식'을 조건으로 '물질色'에 대한 수.상.사.촉.작의 등에 기우는(nam) '명색名色'이 생겨나게 하고,
이 '명색'의 일어남(M9,마음의 일어남)을 조건으로 감각토대 육입六入이 생겨나게 되고(육입= 감각대상에 대한 육근을 의미),
육입을 조건으로 감각적 접촉觸을 하게 되고,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受이 생겨나게 되고,
이(과거 훈습에 연결된) 느낌을 조건으로 갈구하는 갈애愛가 생기게 되고,
그래서 갈애를 조건으로 (감각적 욕망, 사견, 계율과 의식, 자아와 교리 등에 대한)취작取이 생기게 되고,
취작을 조건으로 (욕.색.무색)계에 대한 의도로서 존재有를 생겨나게 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의 생生을 갖게 되고,
태어나生 갖게 된 정신작용의 오온(위에서 무명)을 조건으로 '괴로움'을 겪어보게 되므로
따라서, 절망 고통 분노 회한 등의 괴로움을 일으킨다고 <사성제>의 '집성제'에 밝힌 것이다.
부처님이 보리수에서 정각하신 후 사유하신 12연기법을 돌아다보는 밝은 하루입니다._(())_
ㅡㅡ무애해도 법의 지혜 9개 일어나는/생겨나는 조건이 緣이다.
제4장 법에 머무는 지혜
4. Dhammaṭṭhitiñāṇaniddeso
45. Kathaṃ paccayapariggahe paññā dhammaṭṭhitiñāṇaṃ?
"조건(paccaya)을 받아들이는 데서의 통찰지"로써
'법에 머무는 지혜'가 있다]는 것은 어떻게 해서인가? {이하 중복 경문은 생략함, paccaya를 조건에, paṭiccā를
이유로[緣]에 재해석함)
Avijjā saṅkhārānaṃ uppādaṭṭhiti ca pavattaṭṭhiti ca nimittaṭṭhiti ca āyūhanaṭṭhiti ca saññogaṭṭhiti ca palibodhaṭṭhiti ca samudayaṭṭhiti ca hetuṭṭhiti ca paccayaṭṭhiti ca.,
무명[...태어남]은 상카라[...늙음과 죽음]의 일어남이 의존하는 것이며, 이어짐이 의존하는 것이며, 표상이 의존하는 것이며, 쌓음이 의존하는 것이며, 결합이 의존하는 것이며, 장애가 의존하는 것이며, 모여 일어남[집]이 의존하는 것이며, 원인이 의존하는 것이며, 조건paccaya이 의존하는 것이다.
ㅡㅡㅡ사여의족 조사ㅡ
괴로움의 연기와 육육법을 육육에 살펴봄.
<육육경> ‘여섯의 여섯에 대한(cha chakkāni, 六六) 것’이다. 잘 듣고 作意하라 내가 설명하리라. 비구들은 ‘세존이시여,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六內入處(6가지 감각기능 육근, 확립處)에 대하여 알아야 하고,
六外入處(6개 대상 육경, 확립處)에 대하여 알아야 하고,
六識身(6가지 '식'을 가진 이 몸)에 …,(정신작용 명색, 육입)
六觸身(6개 촉의 집멸을 가진 몸)에 대하여…, 六受身(6개 느낌의 집멸을 가진 몸)에 대하여…, 六愛身(6가지 갈애를 가진 이 몸 즉,
근.경.식.촉.수.상.행.갈애.심.사[苦集])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중략)…
그런데 비구들이여, 이것이 ☞
‘有身(※오취온)의 集으로 向하는 방도(sakkāya-samudayagāminī paṭipadā)’다.
眼(~意)을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我다’라고 合隨觀(합하여 아누빠사나)한다.
色(~法)을 …. 眼識(~意識)을 …. 眼觸(~意觸)을 …. 受를 …. 愛를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我다’라고 合隨觀한다.
…(중략)…
그런데 비구들이여, 이것이 ‘有身의 滅로 向하는 방도(sakkāya-nirodhagāminī paṭipadā)’다.
眼(~意)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我가 아니다’라고 合隨觀한다.
色(~法)을 …….[MN. vol.3. pp.280~284 ; (한역 아함에는 다음과 같다. “… 如內六入處 如是外六入處 六識身 六觸身 六受身 六想身 六思身 六愛身 六界身 五陰 亦如上說.”『大正藏』2, 224c.])
위 경문에서 관심의 부분은 '합수관'이다.
아래의 수타 니파타의 Sn3:12 두 겹으로 정수관(Dvayatānupassanāsutta)을 참조하여 <육육경>에서 합수관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가늠 할 수 있다.
☞☞
비구들이여, <또 다른 방법으로도 ‘두 겹으로 정수관(正隨觀, =sammā-dvayatānupasasnā)’할 수 있는가?>라고 누가 묻거든, ‘있을 수 있다’라고 대답해도 좋다.
그 어떤 고(苦)가 생겨나더라도 ‘모두 무명을 조건으로 한다’는 것이 첫 번째 아누빠사나(anupasasnā, 합수관)이고,
‘그러나 무명의 무여이탐(無餘離貪)과 멸(滅)로부터 고(苦)의 생겨남이 없게 된다’는 것이 두 번째 아누빠사나(anupasasnā,합수관)이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두 겹으로 정수관(正隨觀, =sammā-dvayatānupasasnā)’하여 방일하지 않고 ……
위 경 앞부분에서 <고 고집>이 첫 번째 합수관, <고멸 고멸도>가 두 번째 합수관 이라고 한다. ☜☜
고의 생겨남과 생겨남 없음은 무명과 무명의 멸(=명)로 12연기로 대치하면 유전문의 합수관 환멸문의 멸 합수관 역시 두 겹으로 정수관을 가능 하다.
무명과 무명의 멸 이외에도 다양한 정수관에 대하여 관찰 된다.
<육육경에서도 '유신의 집과 멸의 합수관'을 언급한다. 두 겹으로 정수관이 가능하다.>☜
763. 덮여 있는 사람에게는 어둠이 있다.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암흑이 있다. 참사람에게는 열림이 있다. 보는 사람에게 빛이 있는 것처럼,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은 자는 앞에 있어도 그것을 모른다.
764. 존재에 대한 탐욕에 사로잡히고 존재의 흐름을 추구하며, 악마의 영토에 들어간 자들은 이 진리를 깨닫기 힘들다.
765. 고귀한 님들을 빼놓고 누가 이 경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이 경지를 올바로 알면, 번뇌 없이 완전한 열반에 들리라.”
ㅡㅡㅡ사여의족 조사ㅡ
M115 <여러가지 요소경>에서는 사여의족 '조사'를 요소와 감각장소(처)와 연기에 말한다.
"아난다여, 비구가 요소[界]에 능숙하고
감각장소[處]에 능숙하고 연기(緣起)에 능숙하고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에 능숙할 때
그 비구는 현자이고 검증하는 자라고 불릴 수 있다."*
* 비슷한 문장이 『상윳따니까야』「일곱 가지 경우 경」(S22:57) §11에 이렇게 나타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는 세 가지를 면밀히 조사하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요소[界]에 따라서 면밀히 조사하고,
감각장소[處]에 따라서 면밀히 조사하고, 연기(緣起)에 따라서 면밀히 조사한다.”
ㅡ고익진 선생의 12연기 글 ㅡ
‘12연기’를 설명할 때, <‘육육법’에 기반을 두고서 설명>하지 않는 것은 뜬 구름 잡는 이야기이다.[☜이 지적을 최초로 하신 분은 ‘고익진 박사’이다.]
육육(六六)[‘육육법(六六法)’이 아니고 그냥 육육(六六)을 말함.]은 ‘현실상황’을 설명하는 연기이다.
뭇 삶들의 현실은 “육입(六入)상태다.”라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다.
육육(六六)은 그러한 <육입(六入)상태>에서 출발하는 ‘연기’이다. 경전에 <육입(六入)을 갖춘 신(身, kāya), 식(識)을 갖춘 신(身, kāya)> 등의 표현이 나타는데,
그 표현은 <신(身, kāya)>이 그러한 것들을 갖추고 있다는 말이다. ‘육입(六入)’ 자체에도 자세히 보시면 ‘신처(身處)’라는 처(處)가 들어있지만, 그 신처(身處)가 전체 ‘육입(六入)’을 함유하고 있는 상황이다. 귀하의 ‘kāya(身)’밖에 안(眼)이 위치하고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육육(六六)은 육입(六入)상태에서 출발하는 ‘연기’이다.
‘kāya(身)’는 <상(相, nimitta)을 가지고 식(識)이 지어내는 것>이다. 그 과정을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하는 연기가 육육(六六)인데,
결론은 ※ ‘오취온(五取蘊)’이다.
그 오취온의 다른 이름이 ‘※유신(有身, sakkāya, 지금 여기에서의 현재의 ※몸)’이고, 요약하여 <신(身, kāya)>이다.
그 <신(身, kāya)>을 ‘해체하여 보니’ ※다섯(오취온)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1. 색취온(色取蘊)=색온(色蘊)[=색신(色身)]
2. 수취온(受取蘊)=육수신(六受身)[=명신(名身), 촉(觸)을 연(緣)하여]
3. 상취온(想取蘊)=육상신(六想身)[=명신(名身), 촉(觸)을 緣하여]
4. 행취온(行取蘊)=육사신(六思身)[=명신(名身), 촉(觸)을 緣하여]
5. 식취온(識取蘊)=육식신(六識身)[=명신(名身), 명색(名色)을 緣하여]
위와 같이 <‘유신(有身, sakkāya, 지금 여기에서의 현재의 몸)’인 오취온>은 육육(六六)의 흐름을 따라서 쌓여가는 것이고, 그러한 육육(六六)의 흐름은 12연기의 내용으로 설해진다는 것이다.
(이런 육육 설명은 오류가 아닌가? )
①무명(無明)-②행(行),
③식(識)=육식신(六識身)[=명신(名身), 명색(名色)을 연(緣)하여]
④명색(名色)-⑤육입(六入),
⑥촉(觸)=육촉신(六觸身)[=명신(名身), 3사화합(?, ★촉의 집멸/중간경)]
⑦수(受)=육수신(六受身)[=명신(名身), 촉(觸)을 연(緣)하여]
⑧애(愛)=육애신(六愛身)[=명신(名身)]
⑨취(取)(=오취온[=색신(色身)+명신(名身)] ) 오류?
⑩유(有)-⑪생(生)-⑫노사(老死)
[SN. vol.2, pp.2~4 요약, ‘⑨취(取)’의 경우는 경문에 없음]※■
위에서 보다시피 여섯(六)을 어떤 이유에서 단순화[=단수] 시키고, 재배열한 것이 ‘12연기’이다. 이와 같은 ‘12연기의 제법들’은 모두 쌍요자나이다,
관련 출처 : [다음카페] (8)‘12연기’에 대한 이해☞http://m.cafe.daum.net/pali-study/DnnI/13?svc=cafeapp
첫댓글 정어업명은 계에
대념처경 팔정도는 도성제이다,
전법륜경 팔정도는 중도이다고 동일범주의 정견을 토대로 전개한 팔정도의 正見
S12:15<가전연경>의 正見은 '집법즉멸법'의 연기.
안이비설신의 감각이 짓는 세상(loke)의 일어남集(그침滅)을 있는 그대로에 보는 자는 없다無(있다有)라는 사견邪見을 갖지 않는다
중도 깨달음과 깨달음이후 정견에 의한 보림 체계의 고찰.
전법륜경은 중도를 팔정도에 대념처경을 도성제를 팔정도에 서술하는데, ★이는 팔정도에 의해 중도 깨달음의 되먹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부미자경의 경험을 중도에 깨닫고 안목앎지혜사성제 열반의 보림에 이끔,
중간경 유신 집.멸로 연기하듯이 집.멸성제 정견을 통해서 보림한다. 즉 수행관점의 팔정도의 보림 정견, 정사유 ..정정(오온의 전개로서 집성제를 경험하는 등 ♥팔정도의 보림으로서 중도 깨달음에 되먹임하는데, 그 보림의 역할은 감각접촉과 오온 사유 등의 청정함 즉, 근경식 촉수상 행 애 심사에 대한 갈애를 내려놓아 버린 전개로서 오염원을 떨쳐버리고,
흐름.루asava 그침를 정견하고 연기에서 벗어니 열반한다.
Chachakka-sutta(六六經)
Cha ajjhattikāni āyatanāni veditabbāni, cha bāhirāni āyatanāni vedinabbāni, cha viññāṇakāyā veditabbā, cha phassakāyā veditabbā, cha vedanākāyā veditabbā, cha taṇhākāyā veditabbā. Ayaṃ kho pana bhikkhave, sakkāya-samudayagāminī paṭipadā:
六內入處에 대하여 알아야 하고, 六外入處에 …, 六識身에 …, 六觸身에 …, 六受身에 …, 六愛身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중략)… 그런데 비구여, 이것이 ‘有身의 集으로 向하는 방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