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빈의 인생사와 그의 무덤 이야기
박정해(한양대학교 동양문화학과 교수)
tv 드라마를 통해 널리 알려진 희빈 장씨. 그의 삶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다. 아마도 tv 드라마의 영향이 컸을 것인데, 그만큼 그의 삶이 굴곡졌다는 것이다. 희빈장씨는 1659년 11월 3일(음력 9월 19일)에 태어나 1701년 11월 9일(음력 10월 10일) 생을 마친다. 너무나 악독한 여인으로 그려지면서 실제와는 다른 각도에서 장희빈을 기억하는 모습이다. 여기에는 드라마의 극적인 효과를 위해 약간의 과장이 가미된 측면도 있겠으나, 역사는 승자에 의해 기록된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남인의 지원을 받고 왕비에 올랐으나, 반대세력인 노론의 견제로 결국엔 왕비에서 쫓겨나 사약을 받아야 했다. 반대파인 노론에 의해 기록된 장희빈의 모습은 실제와는 많은 왜곡들이 가미되었다. 실제로 천벌로 인해 죽자마자 온 몸이 썩어 냄새가 진동해 즉시 궁 밖으로 시체를 버렸다고 기록한 소설《인현왕후전》이나 죽기 직전에 세자의 고환을 뜯어 고자로 만들었다고 기록한《수문록》등의 야사와는 달리 실록에 기록된 희빈 장씨의 죽음에 대한 예우는 지극히 극진하였다. 뿐만 아니라 전례는 물론 후에도 예를 찾을 수 없을 만큼 파격적이었다.
1701년 10월 10일, 숙종은 이미 장씨가 자진하였음을 통보하며, 아들인 세자 부부에게 상주로서 거애식에 참여하여 망곡례를 행할 것을 명한다. 다음 날인 10월 11일에는 세자 부부의 상복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서자(庶子)로서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는 그 어머니를 위해서 시마복(緦麻服, 3개월복)을 입는다.'는 예조의 말에 따라 그대로 시행하라 명을 했지만 이후 숙종은 이를 번복하여 장씨를 위해 3년복을 입도록 한다.
장씨의 상례부터 장례까지의 모든 절차는 궁에서 주관하고 치루었으며, 종친부 1품의 예로 받들었다. 그녀의 무덤 역시 여느 후궁들과는 달리 친정 식구나 궁속 환관이 구한 것이 아니라 왕실 종친인 금천군 이지와 예조참판 이돈이 지관들을 거느리고 여러 곳을 다니며 구하였다. 경기도 양주 인장리로 결정된 장씨의 묘는 숙종의 명으로 종친부 1품의 예로 단장되었다. 장씨의 장례 역시 여느 후궁의 장례처럼 3월장으로 치루어지지 않고 4월장으로 치루어졌는데, 왕과 왕후의 장례인 5월장보다 단지 하루가 부족한 1702년 1월 30일에 치루어졌다. 장례식 전날에 세자가 친림하였고, 수일 전부터 입관 당일까지 궁에서 식을 거행하였다.
장씨(張氏)를 양주(楊州) 인장리(茵匠里)에 장사지냈는데, 발인과 하관(下棺)할 때 세자와 빈궁(嬪宮)이 금중(禁中)에서 망곡(望哭)하였다.(숙종실록 36권, 숙종 28년 1월 30일(壬子)
1717년 12월, 장씨의 묘가 용맥(龍脈)은 있으나 혈(穴)이 없고 수법(水法)도 합당하지 못하여 완전한 곳이 아닌 것 같다는 함일해의 상소가 올라왔다. 1718년, 숙종은 노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장리 묘의 천장(이장)을 명하였다. 예조참의가 지사로 이름난 자 10여 명을 대동하여 1년간 기내(畿內) 길지(吉地)를 간심한 끝에 가장 평가가 우수한 광주 진해촌으로 와병 중인 숙종이 직접 택점하였다. 1719년에 치루어진 천장식 역시 궁에서 주관하였으며, 숙종이 왕세자 부부에게 망곡례를 명함으로써 노론의 극렬한 반발이 있었다. 천장지 또한 초상 때와 마찬가지로 종친부 1품의 예장으로 단장되었으며 청룡(靑龍) 자락에 앞서 자리하고 있던 종친의 묘와 많은 민전도 모두 값을 치루어 옮기도록 하였다.
장씨(張氏)의 천장지(遷葬地)를 광주(廣州) 진해촌(眞海村)으로 정하도록 명하였다. 처음에 함일해(咸一海)가 상서(上書)하여 인장리(仁章里)의 묘지(墓地)는 불길(不吉)하다고 논하고, 여러 사람의 의논 또한 결점이 많다고 여겼으나, 임금이 이미 천장(遷葬)하도록 명하였었다. 예조 참의(禮曹參議)가 지사(地師)로 이름이 드러난 자 10여 인을 거느리고 길지(吉地)를 기내(畿內)에서 두루 구한 것이 1년이나 되었는데, 처음으로 수원(水原)의 청호촌(靑好村)과 광주(廣州)의 진해촌(眞海村) 두 곳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수원은 비방과 칭찬이 여러 갈래로 많았으므로, 마침내 여러 지사(地師)의 산(山)에 대한 평론(評論)을 갖추어 아뢰자, 임금이 진해촌으로 정하도록 명하였다.(숙종실록 62권, 숙종 44년 12월 23일(丙寅)
앞에서 정리한 내용을 바탕으로 다시금 정리하면, 장희빈의 초장지는 경기도 양주 인장리였다. 현재의 구리시 인창동 궁말 근처였으나, 그 위치를 알기 어렵다. 이후 그곳이 불길하다는 함일해의 상소로 인해 새롭게 이장한 곳이 경기도 광주 진해촌이다. 지금의 오포읍 문형리 일대이다. 이곳은 아무도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지만, 현재 그곳은 위치가 확인이 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의 무덤이 조성되어 있다. 필자가 답사해 보니 그곳을 선택할 만하다고 느껴지는 곳이다. 이후 1969년 6월 도시계획을 이유로 서오릉으로 이장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도시계획이라고 하지만 앞쪽으로 도로가 난 것일뿐 묘소와는 전혀 관련성이 없는 곳이다. 그런데 왜 이장을 하게 되었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그의 삶만큼이나 죽은 후 그의 무덤도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여러 곳을 떠돌아야 하는 신세가 안타까울 뿐이다.
광주시 오포읍 문형리 장희빈의 묘터는 다른 사람의 무덤이 조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