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동포 나의 민족 !
자성(自省)하고 개척(開拓)하는 추진력을 품은 DNA 민족이 되라.
멈추지 않고 꾸준히 자기 스스로 진보하는 능력을 갖인 능력이 만일 로봇에게 주어 줘 있다면 그는 로봇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 조상님은 재물을 남기는 것 보다, 그 힘을 복돋아 주셨었다.
몇일 전, 임금이 하나도 아니고 꾸역꾸역 찾아 들 온다.
꿈에 세종대왕도 보이고 성종 중종 인조 숙종 영조 정조도 보인다.
세종께서는 나에게 첫 인사가 고맙다고 한다.
훌륭하신 조상님을 모시는 내가 고맙다는 말을 한다.
세종과 함께 나랏일을 맡아 하신 어른이 강호공, 판서공을 비롯하여 여러분을 모시니 아마 이일을 가리어 말씀하시는 것으로 듣긴다.
과연 !
세종시대는 찬란한 시대였다.
그야말로 우리나라 역사에서 그야 말로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였다다.
요행스럽게 어진 임금이 있어 늘 상 백성을 걱정해 주셨다.
지칠대로 지친 지난 여러해, 몽고와 왜구들에게 시달리던 고통을 보듬어주고 농사를 이르켜 유랑을 멈춰주었다. 전쟁도 앞서 막아 도탄에 빠질사람이 없도록 국방을 튼튼히 하였으니 그시대만은 행복이라는 말을 맛 보고 지났을 것이리라.
생각하기에 임금도 어질고, 신하도 훌륭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세종대왕은 늘 말하였었다.
때로는 다른 임금도 찾아와서 비슷한 말을 하곤 한다.
내가 다행스럽게도 이러한 치사를 들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자체가 영광이f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방자히 생각한다해도 조상님을 잘 모신 덕분이 아닌가 하는 것 그이상은 디를 것이 없다. 다만 내 느낌이다.
지금까지 모든걸 감추지 못하고 살아 온나는 또한 부끄러움도 모른다.
가난 한 것을 부끄럽다 한다면 나는 태어 날 때무터 가난했다.
내가 태어날 때, 대복을 받은 집에서 행복하게 태어 났고, 친가는 물론이고 외가도 역시 덕을 쌓고 사셨는지 인심마저 후하였다.
이조 말엽, 혼탁한 세상에사도 그 흔한 불한당때도 `비라이`어른 잠께 실라 조용히 지나가라`고 대장이 말하였다고하고, 외가집에도 천석꾼 집이지만 `구곡댁 내외분 놀라실가 겁난다 조심조심 지나가라` 고 했다는 이야기가 아직도 내고향 언저리에는 사라지지않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 구한 말, 그 혼란도 무리없이 지내오신 집안에서 태어 났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만족할 뿐 더 이상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철이 들 무렵에는 두댁이 한결같이 `농지개혁`을 하여 3개 군에 걸친 옥토를 한마지기에 한말의 쌀만 맏고 토지문서를 넘겨 주었다. 우리고향에는 이러한 부자들이 많았으며, 많은 이들이 다같이 독립운동을 하고자 북만주로, 연해주로, 중국 상해로 흩어진 흔적을 족보에서 볼 수 있다.
그들이 돌아 와야만 이 땅에 독립이 있고 평화가 왔다 생각하는 나다.
내가 아무리 부자라도 옛이야기는 부질없는 바람일 뿐이다.
누구나 어릴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하여 조부는 나에게 겨우 한때기 밭만 주었을 뿐 이를 밑천으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고, 도시로나가서 나머지 학업을 마쳤다.
나는 한국에서는 가장 큰 대전방직이 내가 첫번째 취직한 회사다
몇년 지내는 사이에 훌륭한 가문에서 아름다우신 마누라도 얻고 아이들도 태어나고 보니 이제 내가 욕심을 내고 싶어 졌다. 훌적 서울로 왔다. 아폴로가 달나라로 날아 가서 첫발을 딛였다고 tv에 보여주던 그때 다.
서울와서 힘겹게 지나던 생각이 난다.
그때는 참으로 어려웠다.
먹고 입고지내는 것조차 고달 퍼,
집에 있어도 괴롭고,
거리에 나가도 할 일이 없는 것은 고사하고 온통 눈도 코도 못 열게 끔 메운 연 기속에서 이 골목으로 피하고 저리 개천 둑으로 피하여야 하는 신세가 미웠다.
집에 오면 아이들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고 불고, 먹을 것이라곤 감자 두어 개 아니면, 마누라가 팔다 남겨 온 어묵조각뿐이다.
한번은 대통령이 꿈에 나타나 얼른 얼굴만 보이고 지나간다.
이상하지만 내가 무슨 죄가 지어서 잡혀 갈나나 부다하고 기다리는데
마누라 꿈에도 나타나더라는 것이다.
제기동 개천가에 지은 판잣집 이층은 내가 한동안 머물렀던 집이다.
아이들이 그나마 학교는 잘 다니는 것이 좋겠다해서 8학군 지역이니 이사하지 않으려고 여기에 계속 머물렀던 것이다,
무척 미련스럽지! 조상의 은공으로 이만큼 자랐고 내가 믿는 것이라곤 아이들 3남매인데 이들이 다니는 학교라야 그나마 서울에서는 명문들이라서 아무리 쪼들려도 지키고 있었고, 그 덕분에 내가 덜 베운 학교도 다닐 겸 해서 이곳에 자리를 정한 것인데 이누추한 곳을 대통령이 찾아 오시다니, 참 원, 할 일도 없나보다. 하고 웃기만 했던 때가 생각난다.
그후 나는 뜻밖이랄까?
고려대학교 총장의 추천으로 공부도 특별히 잘한다는 학생으로 인정받고, 곧 행정사무관에 임관되는 영광을 안는다.
총무처 인사국장이 어이로 가고싶냐고 묻는다. 먼저 간사원이 어떠냐고, 실핟고 했다.
재정경제부 아니면 산업자원부가 어떠냐고 묻는다.
나는 한마디로 노동청으로 가겠다고 했다.
노동청을 지원한 사람은 나 혼자 뿐이였다.
나는 노동청에 가면 제대호 일 할 것이 많을 듯 했다.
상공부는 굴뚝과 공장을 상대하는 곳이고, 재정부는 돈을 관리하고, 국방부는 군인들, 문교부는 아직 미성년들을, 보사부는 몸이 불편한 분들을, 교통부는 기차와 자동차, 법무부나 법원에가게 되면 내가칼잡이가 되어 사람에게 칼질 할터니, 사실 모두가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기는 하지만 내가 선택하고 싶은 곳은 역시 올바르게 일하는 사람들을 돕는 노동청뿐이라 생각했다. 지금도 그때의 소신은 변함이 없다.
노동청은 몽이 튼튼한 사람들중에서 나라를 이르키는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돕는 곳이고, 이들리 일하다가 다치면 고처주는 곳이다., 이들의 장래를 위하여 더욱 많은 후생할동을 한다면 이나라의 장래가 더욱 발전하는데 원동력을 일깨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간 다음 곧, 노동청은 노동부가 되고 노동부에 내비록 말단이지만 가장 핵심부서에서 내나름대로 일만 했다.
나의 별명을 2244라하는 것도 `둘이사네`는 그런 의미를 갇고 있다.
노동부는 일하는 사람과 일을 시키는 사람과의 사이를 잘 조정하는 일이 그당시에는 큰일중 큰일이다
영국 미국에서 건너 온 산업혁명의 부작용이 우리나라에서도 그대로 싸움닭은 만들었다. 노사문제는 곧 싸움하는 장소였다. 당시는 노사문제가 망국의 원인이라고 하여 누구던지 멀리하는 것을 상책으로 하던때에 나는 직접 여기에 참여하여 내손으로 문제를 풓혀고 한 니의 생각이 그나마 적중하였는지 다소지나친 사람도 없지 않지만 대부분은 온건하게 생각하고 서로 싸우지 않는 방법을 모색하였다.
나의 별명은 곧 2244, 둘이사네이고, 노와사는 함게 이긴다는 WIN-WIN의 정신으로 함께 이기는 길과방법을 모색해 갔고 많은 사람들의공감대를 이루어 오늘날 극날한 조사분규는 줄어들었다.
우리나라가 다른 어느 발전도상국보다 제빨리 성장 할 수 있는 원동력도 이렇한 숙제를 국민들이 영리하게 해결하였다는 놀라운 지혜때문이란 걸 누구나 다 알게 된 것도 이금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노동청에서 그리고 노동부에서 아무도 욕심내지 않는 자리에서 하고 싶은 일을 잘 하여 눈을 감아도 여한 이 없는 삶을 살았다고 자부한다.
숨은 역사이며 나에게는 큰 기회였다,
다시 군사정원이 시작되던 무렵에 일이 생겼다.
앞서 정권에서도 노사조정제도가 없이 노사문제는 강제조정만 하던때.
또 군사정권이 되었으니 이 방침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짐반 나는 달리 생각했다.
이 기회에 노사조정제도를 확창시키고 노사문제는 자율로 해결하는 기구를 두는 생각을 하고 당시 샇회안정에만 급급하여 노동자탄압을 일삼던 시기에는 그다지 황영받지 못하였기에 나의 이 제안에 협력하려는 동료는 아무도 없다.
상관이라는 작자도 출근조 않으니 사무관은 나 혼자 뿐이다.
그날은 마침 토요일이이라 월요일날 이 조정제도안을 제출하려면 토요일과 일요일을 나의 가장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는 우일한 기회였다.
노동위운회규칙을 새로운 조정제도로 고치는 것은 물론이고 간신히 구한 유한양행노동조합의 단체협약을 참고 삼아 평화규약을 개발하여 나름대로 노동위원회규약속에 올렸다.
그 다음날 보사부 신현학 장관에게 국장도 없이 혼자서 결제 받았다.
총무처, 내부부, 경제제2위원회등등을 거티는 동안 노동문제에 대해 아는 자가 없었던 대라 무조건 반대하는 자도 없고해서 결제 받기도 좋았다. 모든 기관협조가 끝나고 마침내노동위원회법이 위원회를 통과하고 일괄 국회의가결이 끝나 숨가쁜 시간은 마침내 우리나라에서 가장 획기적인 `산업평호하조항`이 나타났고 중앙노동위위가 독립기관으로 승격되고, 내무부 소속 지방노동위원회도 통합시켜 이제는 노동부를 제치고 독립된 노사조정기관으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종래 내부부에 예속된 지방노동위도 노동부로 통합시키는 기적을 낳게 된것이다. 비록 군사정권이지만 녹사문제는 무척 민감하여 노사자율원칙을 생각한 내 생각그대로 단숨에 반영되었다. 통쾌하다! 쾌제라!
욕심이 없으면 남에게 감출것도 없다.
대통령을 꿈에 본 다음에 이러난 기적이라고 마누라는 말하지만, 고려대학교 총장상을 받았던 성적으로도 6년동안을 취직자리 하나 생기지 아니하는 꼴이란 무슨 더러운 운명같은 것이 나를 막아 서는 줄 알았는데 다행히 기다리던 일이 뜻 아니한 계기로 잘 풀려나갔다.
요즘 종중일로 두서없는 세월을 살고 있다.
아무리 생각을 하더라도 조상땅을 빚어서 밥상에 올려 먹을려하는 작자들이 여럿 있어서 내 딴에는 어릴 때부터 배워 온 대로 하느라고 수백년전에 나에게 주셨던 고향땅에 몇 안 되는 세전지물을 팔아서 비용에충당하고 간신히 못된 짓을 막아 놓기는 하였으나 워낙 양반들이 입만 갖고 사는 모양인지 그나마도 말힘이나 보태려드는 사람이 몇 않되어 늘 외롭게 내 생각을 지켜나가고 있다.
그런데 요즘 웬일인지 꿈속에서 임금들이 찾아오니 어리등절하다.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셀 수 없이 찾아와서 고맙다느느인사를 하고 가는데 이들마저 표정들이 쓸쓸맞은지 별로 기쁜 얼굴은 아니다.
물론 금심이 될 터이지?
그러나 다행한 일은 이꿈을 꾼 지 다음날, 기다리던 자료들이 쏟아저들어 왔다.
그동안 종중땅에 혓바닥을 문지르고 다니던 자들의 정체를 밝히는 자료들이다.
아마 임금의 심부름으로 누가 보낸 것 같다.
해 볼만 하다. 그냥! 그저
로봇에게 작동능력을 붙여주면 스스로 일도하고 밥도 짖고 청소도 한다.
나아가 로봇에게도 사람처럼 자진하여 개발하는 능력을 붙여 준다면 이미 그것을 로봇이 아니라 신이 된다.
민족이여!
고종황제가 보였다.
말씀 하시기를, 고맙다였다.
대한제국이라는 이름으로 황제노릇도 제대로 못해 결국 나라를 빼앗겼지만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하였다. 1919. 3. 1 만세운동이 일어나던 그해는 고종도 임종하던해였다.
대한민국이 상해에서 임시정부라는 이름으로 탄생한데 데하여 경하하엿다
1919. 4.13. 석오 이동녕선생이 이렇게 이름지은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大韓民國 이라 부른다. 대한제국에서 제왕이 지배하던 시기가 가고 국민이 주인이 되는 순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종은 이점을 높히 치하한다. 그나마 대한이라는 이름을 지킨 다는 것, 고맙다고 말이다. 특히 석오 이동녕에 대하여 고맙다고 하였다. 나같은 ㅅ가람에게도 그랬다. 정말 그렜다, 나 역시 석오선생과 같은 연안이씨 이니까 ?
남북아 하루속이 합쳐라,
원산 공동묘지에 모셔저 있다는 석오선생 부친을 모셔 올수 있을 탠데....
나라위해 서슴없이 동분 서주하시느라 불가항력에
석오성생의 아픈 마음을 위로 할 길이 없구나
대한민국 국민은 모두 신과 같은 존재로 보인다.
5000년의 역사속에서 비로소 국민이 땅의 주인이 된 나라이다.
세계에 국민이 그 따의 주인인 나라가 몇몇 인가?
영국은 왕의 지배하에, 일본은 천황이라부르는 귀신의 지배한다.
중국은 일부 극소수 노동자들의 나라일 뿐이고, 북한도 그렇다.
당당히 나라를 내땅을 호 소유하는 민족이여
당신들 모두 神이다! (신=神) 2244
횡설수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