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수행이야기]〈33〉종교 떠나 중국 지식인들 삶의 모델로 인식
<유마경>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된 사람들
장상영의 ‘호법론<護法論>’에 큰 영향
唐 시인 왕유<王維>, 문학에 經내용 적용
송나라 때, 장상영(張商英, 1043~1121, 無盡居士)은 과거 입제 후, 서적과 관련된 일을 하였다. 하루는 사찰을 방문해 경전의 방대한 목록을 보며, “나의 공자 성인의 책들이 오랑캐 책보다 못하구나”라고 자신도 모르게 탄식하였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낮에 보았던 <대장경>의 정교한 목록을 생각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때 부인 상씨가 “왜 잠을 이루지 못하느냐?”고 묻자, 그는 낮에 있었던 일을 설명하며, 이런 말을 하였다.
“아무래도 무불론(無佛論)을 지어야겠소.”
“아니, 당신이 이미 부처가 없다고 해놓고, 무슨 논이 필요합니까?”
장상영은 부인의 말을 그냥 넘겼다. 어느 날 우연히 그가 친구 집에 방문했다가 책상 위에 놓인 <유마경>을 읽게 되었다. 그는 ‘유마거사의 병은 지대(地大)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또한 지대를 여읜 것도 아니다’는 구절에 탄식하고, 경전을 빌려 집으로 돌아왔다. 부인 상씨가 이를 보고 또 말했다.
“이 <유마경>을 숙독한 후에 무불론을 써보시지요.”
장상영은 훗날 매우 신심 깊은 불자가 되어 무불론이 아닌 <호법론(護法論)>을 지었다. <호법론>은 대장경에 입장(入藏)되었고, 유.불.도 삼교 합일을 토대로 불교를 변호한 논으로서 송대의 저서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거사는 동림상총(1025~1091).회당조심(1025~1100).대혜종고(1089~1163) 등 당대의 선사들과 교류하였고, 진정극문(1025~1102)에게서 깨달음을 얻었다. 선사들과 교류하며 수행하였던 장상영은 바로 간화선의 주창자 원오극근과 대혜종고의 사제(師弟) 인연을 매듭지어준 사람이기도 하다. 이렇게 장상영에게 있어 <유마경>은 인생의 터닝포인트(Turning Point)가 되었다.
또 <유마경>을 읽고, 승려가 된 분이 있다. 구마라집의 제자인 승조(僧肇, 374~414)이다. 구마라집은 수백여명의 제자를 두었는데, 승조는 뛰어난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승조는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책을 필사하는 직업으로 생업을 삼았다. 필사 일을 하다 보니 고전과 역사에 지식이 풍부했고, 노장사상에 깊이 심취되어 있었다. 승조는 장안에서 타인들로부터 시기를 받을 정도로 학문적 견해가 뛰어났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유마경>을 접한 뒤 환희심을 얻어 승려가 되었다. 당시 20세의 승조는 구마라집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또한 <유마경>과 인연이 깊은 사람이 있다. 당나라 때, 시인 왕유(王維, 700~761)이다. 그는 자연을 주제로 한 서정 시인이요, 화가로 한 시대 이름을 날린 분이다. 그는 자신의 성 왕(王)씨에 유마힐의 ‘마힐’을 따 스스로 왕마힐(王摩詰)이라고 자청하며, 이 경을 독송하고, 문학 작품 속에 경의 내용을 적용시켰다. 그의 작품에 무심(無生).도심(道心).공문(空門).야선(夜禪) 등 선사상과 부합되는 용어들이 많이 나와 후대에 그를 시불(詩佛)이라고 불렀다.
북위 시대, 용문석굴과 운강석굴 불상에 영감을 준 것도 <유마경>의 영향이며, 그 이외 여러 석굴의 변상도에도 유마와 문수보살의 대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우리나라 석굴암에도 유마거사가 모셔져 있다.
선종의 소의경전은 <금강경>이요, 초기 선종에서는 <능가경>이었지만 <능가경>은 학문적인 연구를 제외하고는 선의 경전으로 거론되지 않는다. 반면 <유마경>은 공사상의 실천사상이 정립된 경전으로 선경(禪經)의 대표적인 경전이며, 유마 거사는 선수행자로 인식되고 있다. 이래서 유마는 선사와 거사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며, 종교를 떠나 중국 지식인들에게 삶의 롤모델이었다.
정운스님… 서울 성심사에서 명우스님을 은사로 출가, 운문사승가대학 졸업, 동국대 선학과서 박사학위 취득. 저서 <동아시아 선의 르네상스를 찾아서> <경전숲길> 등 10여권. 현 조계종 교수아사리ㆍ동국대 선학과 강사.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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