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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무골 성지 -순교자 이선이 엘리사벳이 묻힌 대구 · 경북의 선교의 요람 |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연화리 20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칠곡대로 2189-20
신나무골 성지의 유래
신나무골은 대구에서 서북 방향으로 20km가량 떨어진, 외지고 깊숙한 산골로 외부인의 눈을 벗어난 마을이어서 박해 시대 교우촌의 적지였다. 신나무(단풍나무)가 많아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때 천혜의 피난지이기도 했던 이 곳에 교우촌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이웃인 한티 교우촌과 같이 1815년 을해박해 당시였던 것으로 보인다. 을해박해는 경상도 북부지역인 청송의 노래산, 진보의 머루산, 일월산 산중의 우련전과 곧은정 등의 교우촌에 살던 신자들이 박해를 만나 200여 명이 경주와 안동 등지의 관아에 체포된 사건을 말한다. 체포된 신자들 중 많은 수가 배교를 하고 석방되거나 옥사했지만 33명은 끝까지 신앙을 지켜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어 옥사하거나 처형되었다. 이때 체포된 신자들의 가족들이 박해로 살던 곳에서 쫓겨나 대구 감영에서 멀지 않는 이곳에 숨어들어 은신하고 옥바라지를 한 곳으로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신나무골의 첫 신자는 김해김씨(金海金氏)라고 하는데, 순교자 김종한 안드레아의 가정이라고 한다. 그후 김종한의 가정은 충청도 고향쪽으로 이사를 갔다고 전한다. 한편 당시 이곳에서 가까운 부근의 달성군 하빈 낙골에 살던 이재건 요셉의 모자가 신나무골 신자들에게 천주교 진리를 배워서 세례를 받았으나 문중의 박해로 대구의 새방골로 갔다가 민묵골에 안착했다고 한다. 또 1827년 정해박해 때도 상주와 안동, 봉화 등지에 살던 신자들이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대구의 경상감영으로 이송되어 와서 문초를 받고 감옥에 갇혔을 때 그의 가족들이나 신자들이 신나무골에 피난 와서 살면서 감옥에 갇힌 신자들을 돌보았다고 전한다.
증언에 의한 천주교 신자의 입촌은 김해김씨 김현상(金顯祥) 요아킴이다. 그는 1837년에 서울에서 가족을 이끌고 낙향해서 신나무골로 피난을 왔다. 그러나 1839년 기해박해를 계기로 다시 칠곡 지방의 더 깊은 산골인 한티 교우촌으로 피난을 갔으며 그후 1850년경에는 대구 읍내 가까운 새방골로 이사를 갔었다.
1860년 경신박해 때는 인근의 칠곡 읍내에 살던 배정모(裵正模, 일명 裵孫伊) 이선희(李先伊)가족이 신나무골로 피난을 왔다가 얼마 후에 한티성지로 가서 가족이 순교했다. 그리고 1866년 병인박해 때는 신나무골과 대구 인근의 신자들이 모두 더 깊은 산골인 한티로 피난을 갔었다가 1868년 무진박해 때에 그곳에서 40여명이 장렬하게 순교하였다.
대구 경북지역 사목의 요람
1831년 조선 교구 창설 후 1837년부터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샤스탕(Chastan) 신부가 신나무골과 언양 등지에 머물면서 한반도 남쪽 지역을 맡아서 순회 전교를 하기 시작했다. 1839년 기해박해로 샤스탕 신부가 순교한 후에는 다블뤼 신부가, 1849년부터 1861년 6월까지 12년간은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신나무골을 방문하여 성사를 주곤 했다.
최양업 신부가 과로로 쓰러진 후에는 다시 다블뤼 신부와 리델 신부가 이 지역을 맡아 오다가 1866년 병인박해 일어나면서 신나무골의 신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박해가 잦아들면서 신자들은 다시 신나무골로 모여들었고, 한·미통상수호조약(韓美通商守護條約)이 맺어진 1882년부터는 삼남 지방 선교에 독보적 역할을 한 아킬레 로베르(Achille Paul Robert, 金保祿) 신부가 순회 선교를 시작했다. 그는 특별히 경상도 지역 선교를 위해 1885년 후반 신나무골에 사제관을 지어 정착했다. 로베르 신부는 1886년 한불조약으로 신앙의 자유가 어느 정도 보장되자 이곳 신나무골을 거점 삼아 활발한 전교 활동을 펼쳤다. 당시 대구의 유력한 신자인 서상돈 아오구스티노는 김 신부를 적극적으로 돕는 한편 김 신부의 사촌 여동생이며 순교자 서태순 베드로의 외동딸인 서 마리아를 신나무골에 보내어 김 신부를 적극 돕게 했다.
영남지방 복음화에 헌신했던 로베르 신부는 교육 사업에도 큰 관심을 기울여 이른바 연화 서당이라 불리는 학당을 설립했다. 1883년 세워진 이 학당은 1920년 신동에 초등학교가 설립될 때까지 신학문과 구학문 그리고 천주교 교리도 함께 가르쳤다. 신나무골 학당은 1855년에 설립된 배론 신학교를 제외하고는, 1884년 서울에서 설립된 계성 학교의 전신인 한한(韓漢) 학교와 함께 천주교 내에서는 가장 일찍 신학문을 가르쳤던 신식 학교였다.
이미 1885년 대구 계산 본당이 설립되었지만 바로 시내로 들어갈 정세가 되지 못하여 이곳 계속 남다가 1887년 한불수호조약이 비준·공포되어 신앙의 자유가 한층 나아지자 로베르 신부는 이듬해 대구의 포교 활동을 위해서 대구로 떠났다. 신나무골에 3년을 기다린 후였다. 그는 대구로 가서 현 계산성당을 지었다. 로베르 신부가 대구지역 선교를 떠난 뒤에는 1887년 말에 이곳에 온 보드네 사베리오 신부가 20개월 머물면서 경상도 북부 지방과 전라도 일부 지방을 맡아 선교 활동을 하였다. 그는 1889년 3월에 이곳을 떠나 전라도 완주군 소양면 대성동(일명 대승리)에 성당을 짓고 사목하였다. 이것이 현 전주 전동성당의 시작이었다.(전주 전동 성지 참조)
이어서 조득하 조조 신부가 1889년부터 1890년까지 12개월 동안 신나무골에서 조선말과 풍습을 배우는 한편 선교 활동을 하다가 1890년에 경상남도 지방의 선교를 책임 맡아서 부산의 영도섬 조내기(청학동 성당)로 갔다. 현 범일본당의 시작이었다.
이어서 1894년에는 파이야스 하경조 신부가 신나무골에서 사목하다가 동학란이 끝난 1895년 2월 신나무골을 떠나 인근의 왜관 가실로 가서 그해 9월에 가실성당을 설립하였다.
위의 사실을 미루어보면 신나무골 성지에 머물며 조선의 풍속을 익히며 사목의 역량을 닦은 외국인 사제들이 대구 경북지역 뿐만 아니라 전주 지역, 부산 지역으로 가서 그곳의 사목의 기초를 닦았기에 신나무골은 대구경북 지역뿐만 아니라 호남 지역, 부산 지역 선교의 요람이 라고 볼 수도 있다.
성지개발 과정
1973년 성지 개발 기금을 모금하면서 시작된 신나무골 성역화는 1977년 제1차 사업을 완수하며 이곳에 대구 천주교 요람지 기념비를 세웠다. 이어 2차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을 맞아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의 주선으로 순교자 이선이 엘리사벳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했다. 원래 순교자 이선이 엘리사벳의 유해는 1860년 경신박해 때 포졸들에게 쫓기다 체포되어 한티에서 순교한 뒤 대구시 북구 읍내동(안양동) 산 21번지의 선산에 모셔져 있었다. 그리고 대구 지역 첫 본당 터를 복원하여 2차 개발을 완료했는데, 이때 로베르 신부의 사제관과 신나무골 학당(명상의 집) 등을 복원하고, 마당 한쪽에 로베르 신부의 흉상도 건립했다.
대구대교구는 2018년 2월 28일 기존의 복원 사업을 통해 성지 내에 복원했던 로베르 신부 사제관과 대구 본당 초가를 철거하고 3차 신나무골 성지 개발에 들어가 2019년 5월 2일 한옥 성당 봉헌식을 올렸다. 성당 바로 옆에는 로베르 신부와 세 명의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머물던 초갓집 사제관을 복원하고, 순례자들이 쉴 수 있는 공간도 마련했다. 성당 외벽에는 로베르 신부의 일대기와 대구 교회 관련 역사를 담은 김옥수 신부(부산교구)의 타일 성화를 설치해 순례자들의 성지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신나무골은 1894년 왜관 가실 본당 소속 공소였다가 1926년 왜관 본당에 소속되었고, 1968년 신동 본당이 설립된 후에는 다시 신동 본당에 속하게 되었다. 신나무골 성지는 그동안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이 관할하며 1, 2차에 걸쳐 개발한 바 있고, 2015년에 대구대교구로 이관되었다.
점심 때가 지난 오후 1시경에 도착했다. 주차장 한쪽에 세상 “끝날 때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면서 높다란 대좌 위의 예수님 상이 팔을 벌리고 맞아주신다. 성지 축대 밑에는 성지 안내도와 표지석, 그리고 ‘한티 가는 길’ 안내석이 함께 모여 있다.
육중한 한옥 대문을 열면 넓은 마당이 있고 맨 먼저 나타나는 건물은 초가 카페이다. 카페 벽에는 초대 주임 로베르 신부와 계산성당, 2대 주임 보두네 신부와 전동성당이 그려져 있다.
초가 카페 바로 앞 마당에는 로베르 신부의 흉상이 있다. 흉상 아래에는 2022년 12월에 조환길 교구장이 프랑스 벨보르 교구 로베르 신부의 생가에서 채취해온 흙이 보관되어 있다. 흉상 측면에는 흉상 제작의 내력이 새겨져 있다. 이 흉상은 로베르 신부를 집에 모셨던 초기 교우 이이전(李以全) 안드레아의 후손들이 1984년에 세웠다.
초가 카페 옆에는 또 하나의 초가가 있는데 바로 2018년에 복원된 로베르 신부의 옛 사제관이다. 사제관 앞에는 로베르 신부의 초기 사목과 관련된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1885년 이곳에 온 로베르 신부는 이이전 안드레아의 주선으로 3칸짜리 건물을 한 채 사서 공소로 삼고 사목했다. 1882년 명동성당과 1833년 이천성당(북한) 다음으로 세 번째로 세워진 성당이었다. 이 당시 복사 이호연 베드로, 서 마리아(서상돈의 사촌여동생, 순교자 서태순의 딸) 등이 보필했다. 그리고 연화학당에서는 충주 출신 박상언 요한과 그의 양자 바실리오가 천자문과 한글을 가르쳤다. 박상언 요한은 시력이 나빠 거의 장님이었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다른 사람들의 문맹(文盲)의 눈을 뜨게 하였다. 안내문을 통해 이런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초가 옛 사제관 바로 옆에는 전통 기와로 이은 성모각이 있고 그 옆에 1977년에 세운 대구천주교 요람지 기념비가 서 있다.
성전
신나무골 성당은 전통 한옥 십자형 성당이다. 이는 로베르 신부가 처음 지은 성당을 2018년에 재현한 형태이다. 남은 사진 한 장을 근거로 했다고 하나 정확한 모습은 알 수가 없다. 로베르 신부가 대구에 입성하여 고딕 성당을 짓기 이전에 지은 성당도 십자형 목조성당이었는데 이를 많이 참조했다. 궁궐에서 볼 수 있는 흰색 석회반죽 용마루, 그리고 팔작지붕 형태는 한옥 성당의 품격을 높여준다.
성당 내부는 목조 격자형 반자천창 아래 촛대와 감실이 있는 제대는 초기 교회식으로 벽면에 붙어 있고 그 앞에 새 제대를 두었다. 제대 옆에 성모상이 있을 뿐 퍽 간소하다. 제단과 교우석 사이 좌우 측면에 공간을 넓혔고, 벽면은 문살형 한지 창문을 달았다. 교우석은 장의자 20개 정도를 두 줄로 나누었는데 외관에 비해서 좁게 느껴진다. 이는 한옥의 특성이다. 정면 벽면 좌우에는 순교자 이선희 엘리사벳의 유해와 성 샤스탕 신부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성당 외부 벽면에는 로베르 신부의 일대기와 대구 교회 관련 역사를 담은 김옥수 신부(부산교구)의 타일 성화를 설치해 순례자들의 성지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성당 뒤쪽에는 성당과 기와지붕 통로 이어진 벽 없는 조그만 맞배지붕 건물이 있는데 한쪽은 제구실이고 나머지는 쉼터다. 그리고 성당 부근 바깥 담장에는 경상도 지역의 순교사와 남부지방의 신앙전파와 관계된 패널이 연대 순으로 게시되어 있다. 그리고 성당 바로 뒤쪽에는 현재의 사제관이 있다.
마당에 있는 옛날 우물을 끝으로 성당 마당 안은 다 돌아본 셈이다. 로베르 신부가 신나무골에 정착할 무렵 신자수는 8-9가구에 36명이었다고 한다. 이 우물은 그때 교우들이 마신 우물이다. 원래 성당 기둥 자리에 있었는데 조금 떨어진 이곳에 원래의 형태로 복원했다고 한다.
대문을 나가다보면 문 안쪽에 팔마가지를 든 이선이 엘리사벳이 장남 배 스테파노를 안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나가는 길에 옛 빨래터가 있다. 로베르 신부가 왔을 때 마을 가운데를 흐르는 개천과 우물이 있었는데 이곳이 여자들의 빨래터였다.
성당 뒤편으로 돌아들어가면 수녀원이 있다. 들어갈 수는 없다.
순교자 이선이 엘리사벳 묘소
성당 바로 앞 언덕에 순교자 이선이 묘가 있다. 순교자 이선이 엘리사벳의 남편은 성산 배씨(星山裵氏) 가문의 배정모로, 원래는 성주가 고향이었으나 칠곡으로 옮겨 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리 넉넉한 살림은 아니지만 착실한 신앙생활을 해 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던 중 1860년 경신박해의 여파로 경상도 지방에도 박해가 일어났다. 특히 칠곡 읍에는 칠곡 고을을 중심으로 관아(官衙)가 있었기 때문에 신자들에 대한 감시가 꽤 심했다. 배정모의 가족은 박해를 피해 칠곡 읍에서 20여 리 떨어진 신나무골로 피신했지만, 이곳에도 포졸들이 들이닥쳐 신자들은 경황없이 뿔뿔이 흩어졌다.
배정모와 이선이 엘리사벳은 세 아이 도령, 용철, 용덕을 데리고 한티로 총총히 쫓기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2월 말의 매서운 겨울바람 속에서 이들은 갖은 고생 끝에 한티의 사기굴이라는 곳에 도착해 잠시 숨을 돌렸으나 결국은 뒤따라온 포졸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굴 밖으로 끌려 나온 이들을 향해 포졸들이 천주교를 버리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하자 배정모는 배교하고 풀려났다. 하지만 부인 이선이 엘리사벳과 맏아들 스테파노(속칭 배도령)는 “죽어도 성교를 믿겠소.”라며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그 대가는 너무도 가혹했다. 포졸들은 그 자리에서 시퍼런 작두날로 이들의 목을 잘라 모자(母子)가 한자리에서 순교하게 되었다. 남편은 뼈저린 아픔 속에 부인과 맏아들의 시체를 그 자리에 묻었다가 얼마 후 선산이 있는 칠곡의 안양동으로 부인의 시체만 이장했다. 1984년 이곳의 이선이 엘리사벳의 묘를 신나무골 이곳에 옮겼다.
십자가의 길
앵베르 주교의 편지에 의하면 감옥에 갇힌 신나무골 신앙의 증거자들이 자기의 죄를 미리 신부에게 편지로 써서 보내고 신부가 감옥 앞을 지날 때 신호에 맞추어 통회하면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지를 물었다고 한다. 실제 이렇게 하여 7명이 샤트탕 신부로부터 큰 기쁨으로 사죄를 받았다고 한다.
또 드망즈 주교의 일기에 의하면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가 김천에서 대구로 기차를 타고 올 때 신나무골 앞을 지났는데 이를 미리 알고 철로 옆 비탈길에 교우들이 강복을 받기 위해 무릎을 꿇고 있었다고 한다. 이 사실들로 미루어 당시 교우들의 신심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성사의 소중한 가치를 오늘날 우리는 그들의 10분의 1이라도 인식했으면 좋겠다. 1시 반 다음은 새방골 성당이다.
새방골 성당 - 대구 지역 선교의 전초 기지 |
대구시 서구 새방로27길 9
새방골은 대구 시가지에서 서쪽으로 10리가량 떨어진 와룡산(299m)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이곳에 어느날 돌풍이 불어 집이 한 채 날아왔다. 새로 집이 생겨 새방골이라고 한다. 처음 함안 조씨가 살았으나 임진왜란 때 왜란을 피해 진주 강씨, 옥산 전씨등이 부락을 이루어 정착하게 되었다.
이곳에 천주교 들어온 천주교 교우 가문은 김현상 요아킴 가문, 서상돈 아우구스티노 가문, 이재영 고스마 가문 등이다.
김현상 요아킴은 1837년, 그의 나이 38세에 부인 김 바르바라, 장남 응배 요한(12살), 장녀 아가다(9살) 차남 진배 가롤로(6살)를 데리고 경성을 떠나 신나무골과 한티에 와서 살다 경신박해(1860)때 한티에서 새방골로 이사 왔다.
김현상 요아킴의 딸인 김 아가다는 서철순의 아내가 되어 경상도 김산군(현 김천) 군내면 마좌산리 마잠에 정착하여 서상돈 아우구스티노(대구본당의 초대회장, 국채보상운동 주창자)를 낳았다. 서철순 바오로가 상주 청리에서 세상을 떠나자 10세의 맏아들 상돈 아우구스티노와 둘째 상정을 데리고 1859년 친정이 있는 이곳 새방골로 와서 외조부 김현상에게 의탁했다.
서상돈의 고조부 서광수(徐光修)는 우리나라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에게 영세를 받은 초기 신자였다. 그는 1785년 '을사추조(乙巳秋曹) 적발 사건' 때 연루되어 문중으로부터 제명당한 이후부터는 조정 및 주변 사람들로부터 박해받는 처지가 되었다. 이에 그의 슬하 6남 2녀는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데 이때 그의 4남 서유오(徐有五)는 문중 땅이 있던 충청도 충주목으로 숨어들었고, 1839년 기해박해 때 그의 아들 서치보(徐致輔)(서상돈의 조부)는 아들 5형제, 서인순(徐隣淳)·서명순(徐名淳), 서철순(徐哲淳), 서익순(徐翼淳) 요한, 서태순(徐泰淳) 베드로를 이끌고 경상도 문경현 여우목 교우촌에 들어와 살았다. 이중 서철순이 서상돈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한편 이재영 고스마는 원래 경북 칠곡군 동명면 송산동의 대치부락(어골)에 살았다. 이재영은 아내가 천주교 신자가 된 것을 나중에 알고 집안이 망할 것을 두려워하여 아내에게 배교를 강요했다. 김 마리아는 신앙을 버리겠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몰래 신앙생활을 계속했다. 이재영은 이를 알아내고 작두에 목을 갖다 대라고 위협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아내는 태연자약하게 목을 작두에 갖다 대면서 죽는 한이 있어도 신앙을 버리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아내의 목을 자르지 못하고 아내의 이러한 신앙에 감명을 받아 온 가족과 함께 그리스도인이 되고 경신박해(1860)를 피해 밤에 새방골의 송골로 피신해 와서 살았다.
이상으로 볼 때 늦어도 경신박해가 일어난 1860년대부터는 새방골에 천주교 신자들이 살았던 것이 확실하다. 이들 세 가족 밖에도 장씨 집안, 전씨 집안, 조씨 집안이 이곳에서 교우촌을 형성했다.
병인박해 때 이곳 신자들은 한티 등 타지로 피난을 갔는데 피난 중 체포되어 순교하기도 했다. 서상돈 아우구스티노의 삼촌인 서익순 요한은 절두산에서, 서태순 베드로는 상주 감옥에서 순교했다. 그리고 피난 가지 않고 이곳에 남았다가 박해를 받기도 했다. 김현상의 아들 김응순 요한은 병인박해 때 세 번이나 대구 아문에 체포되어 장터에서 공개적으로 30대의 매를 맞고 풀려나왔다.
병인박해가 끝나자 피난 갔던 신자들이 대부분 다시 돌아옴으로써 새방골의 신자촌으로 부활했다. 이어서 1880년대 선교의 자유를 얻게 되어 교우촌은 활기를 되찾았다. 1885년 프랑스 선교사 로베르 김보록(金保祿 Robert, Achille Paul, 1853~1922) 신부는 신나무골에 와서 경상도 사목의 기틀을 열었는데 그는 교구로부터 대구 선교의 사명을 받았으나 박해의 여파 등 여건이 성숙하지 못해 1888년 신나무골을 떠나 대구의 초입인 이곳에 와서 또 다시 3년을 기다린 끝에 1891년 드디어 대구로 들어가게 된다.
새방골 성당의 역사는 1888년 11월 송골 이장언 소유의 초가집에서 시작되었다. 1891년 로베르 신부가 대구로 가서 계산 성당을 설립한 이후, 1911년 새방골 교우촌은 계산 성당 관할 공소가 되었다가 1927년 11월 1일 날뫼에 비산 성당이 설립되면서 비산 성당 관할 상리공소가 되었다. 1963년 11월 20일 상리공소 신자들은 비산 성당의 강당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나온 벽돌을 가져와 공소 건물을 허물고 성당을 신축하였고, 상리공소는 준본당으로 승격하였다. 상리 준본당은 죽전공소, 감산공소, 세천공소를 관할하였고, 1963년 12월 14일 성당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1978년 상리성당으로 승격되고, 1983년 2월 4일 관할 공소인 죽전공소, 감산공소, 세천공소 신자들이 죽전성당으로 분가하였다. 2008년 6월 13일 교구장 승인을 받아 상리성당에서 새방골 성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신나무골 성지 순례를 마친 시간이 오후 1시 반. 점심시간이 이미 늦은 시간이만 내친 김에 멀지 않은 새방골 성당 가까이 가기로 했다. 약 20분 이동하여 막상 새방골 성당에 도착하고 보니 규모가 작은 성당이어서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을 것 같아 순례한 후 점심을 먹기로 했다.
성지 입구에 성당 표지석이 있고 성당 안내판에 글자가 빼곡하다. 글씨가 작고 내용이 많은데다가 세운지 오래되어 읽기가 만만찮다.
입구에서 성당 안마당에는 오른쪽으로 나지막한 교육관, 그 옆에 큰 건물인 관리동이 있고 그 옆에 성전이 있다. 그리고 마당 맨 안쪽에는 성모동산이 있고 그 왼쪽에 보록 쉼터라는 건물이 있다. 그리고 관리동 맞은 편 마당에 조그만 정자 보록정 - 이것이 새방골 성당의 전부다.
안내판에는 새방골 성당의 연혁이나 유래를 소개하고 있는데 작은 일화도 있다. 로베르 신부님 정착 당시에 신부님께서 세수할 때 비누를 썼는데 신자들이, 거품이 잘 나고 냄새도 좋고 잘 닳지도 않는 그것이 무엇인지 물으니 ‘사봉(프랑스어 sabon)’이라고 했다. 그 이후 지역 사람들은 모두 세수비누를 ‘사분’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도 ‘사분’이니 ‘구라분(콜드크림)’ 이니 ‘구리무’니 하는 말을 많이 들었다.
새방골 성당 성전은 아담한 고딕식 적색 벽돌 건물이며 옆에 등나무가 있지만 때가 아니라서 꽃은 볼 수 없다. 출입구 측면에 있는데 출입구 옆에는 김보록 신부 흉상과 돌형구가 나란히 있다.
형구돌(항쇄돌)은 옛날 죄인들을 포박하는 여러 방법 가운데, 다리를 묶는 것을 우리는 흔히 ‘족쇄(足鎖)’라고 하며 지금도 그 말은 남아있다. 그리고 목을 묶거나 목에 큰 칼을 채우는 것을 ‘항쇄(項鎖)’라고 하였다.
여기 있는 이 형구돌은 감옥에다 두껍게 벽을 칠 때 위에서 한 자 쯤 되는 곳에 끼워 넣어 담을 만들고 매를 맞아 기진한 천주교 신자들이 형장으로 옮겨 가지 못할 만큼 되었을 때 그 구멍사이로 올가미를 한 밧줄을 끼워 넣어 목에다 걸고 반대편에서 여러 명이 함께 잡아 당겨 죽이는 방법으로 쓰이던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항쇄돌, 또는 항쇄바위라고 하였으며 이 말이 와전되어 흔히 ‘황새바위’로 불리어졌다. 이 형구돌은 경주의 감영이 있던 자리 부근에서 수습되어 개인(성악가 바리톤 이동환)이 소장하고 있다가 이곳 새방골 성당에 기증한 것이다.
이상이 형구돌에 새겨진 내용이다.
청도 구룡공소에서도 항쇄돌이 있는데 이것을 경주 관아에서 가져왔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면 경주 관아에서 이런 방식의 사형이 많이 행해졌다는 말이 된다.
새방 성당은 조그만 성당이지만 현재 대구 시내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대구 사목의 최전선 전초 기지라는 의미를 지닌다. 다만 시내에 소재한 관계로 주변이 좀 복잡하다. 그리하여 주변 환경면에서는 성지로는 열악한 면이 있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보록정, 보록 쉼터... 모든 것이 로베르 김보록 신부로 귀결된다.
이리하여 한티성지, 신나무솔 성지, 새방골 성지를 다 순례했다. 성지의 성격상 이들은 한 세트로 묶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같은 시기에 한꺼번에 순례하기를 권하고 싶다.
오후 2시가 되어 예정된 순례가 끝나고 2시에 전통 시장에 가서 이리저리 식당을 찾아 상호만 보고 찾아가니 태반은 문이 닫혔다. 정말 경기가 좋지 않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겨우 한 곳을 찾아 시장한 김에 곰탕이며 돼지고기 두루치기며... 배불리 먹고 나도 세 시밖에 되지 않는다.
왜관 하면 생각나는 데가 베네딕도 왜관 수도원이며 구상문학관이다. 아무래도 순례차 나선 길이라 베네딕도 왜관 수도원을 잠시 들려 외관만 둘러본 뒤 돌아왔다. 준비없이 찾았기에 당연한 귀결이다. 하지만 왜관만 보더라도 한때는 북한과 간도 대목구를 관할했던 베네딕도 덕원 수도원이 그 역량을 이곳 왜관에서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언젠가 피정이라도 와서 제대로 성령체험이라도 해보고 싶다.(김 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