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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니엘기도회 간증 요약[하나님은 늘 옳습니다(욥기 40:8)]-정윤선 대표(11월 20일)
□ 고통스럽고 힘든 어린 시절과 사춘기를 보냈습니다.
- 저는 언변이 뛰어나서 강의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기독교 디자인 스튜디오 윤선디자인 대표입니다. 저는 한국교회에 디자인을 공급하고, 작은 개척교회를 섬기는 사람입니다. 어느 날 다니엘기도회 운영팀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제가 여기 ‘2020 다니엘기도회’ 이 글씨를 제가 썼습니다. 저 글씨를 썼을 때 디자인을 시작한 지 거의 초창기였습니다. 매년 가을이 되면 파란 현수막에 이 글씨가 보여서 볼 때마다 좀 더 잘 써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다시 써달라는 요청인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간증 요청이었습니다. ‘나는 부족한 사람인데 어떻게 간증의 자리에 설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우리 직원들이 야근하면서 기도회 영상을 매일 회사에 계속 틀어놓았습니다. 직원들이 저를 위해 중보기도도 해주었습니다.
- 저의 삶을 이야기하면, 초등학교 1학년 때 부모님이 이혼을 하셨습니다. 저와 동생은 아버지를 따라 대전의 작은아버지 댁에 가서 살았습니다. 작은어머니는 할머니가 운영하시는 순두부식당에서 일하고 계셨는데, 저희를 사랑으로 키워주셨습니다. 저희를 식당에 데리고 가셨다가, 저녁에 데리고 오셨습니다.
- 어느 날,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있는 분이 할머니 식당에서 숙제하는 저와 동생에게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셨습니다. ‘너가 윤선이니? 너가 윤미고?’ 순간적으로 ‘엄마가 될 분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엄마가 되어 주길 바라면서 주현미의 ‘밤비 내리는 영동교’를 부르며 애교를 부렸던 기억이 납니다.
- 어머니와 아버지는 결혼을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재혼이지만 어머니는 초혼이었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어머니는 저와 동생을 보고 결혼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두 분의 결혼식에 가고 싶었지만, 저희는 허락이 안 되어 갈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초혼이라 가족들의 반대가 심해, 외할아버지가 참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 엄마가 처음 가르쳐주신 것이 ‘성경’이었습니다. 엄마가 이야기해 주는 것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때부터 열심히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어머니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조금씩 마음이 힘들어지시고, 조금씩 악해지셨습니다. 저와 동생을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4-5학년 때쯤 욕조에 물을 가득 채우고 제 머리를 넣었다 빼었다를 반복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물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동생과 저는 매일 매를 맞았던 것 같은데요, 매를 때리면 부러질 때까지 멈추지 않았습니다.
- 방학식 하는 날, 친어머니와 친할머니가 찾아왔습니다. 선생님이 엄마가 왔다고 하는데 저는 본능적으로 저의 엄마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주변 아이들이 엄마 왔다고 빨리 나가라고 재촉해서 어쩔 수 없이 친엄마와 반가운 재회를 했습니다. 친엄마께서 떡볶이를 사주시며 동생은 어떤지 물었습니다. 그 만나는 모습을 동네 아주머니가 보고, 저의 어머니에게 이야기했던 것 같습니다. 그날 집에 들어가서 깜깜한 방에 갇혀서 벌을 받으며, 다시는 엄마를 만나지 않겠다는 글을 방바닥에 여러 번 썼던 기억이 있습니다.
- 그 시절 가장 저에게 힘이 된 분이 교회 사모님이었습니다. 제가 다닌 교회는 전 교인이 20명 정도인 상가 개척교회였는데요, 저는 엄마에게 혼나고 힘들면, 교회를 찾아가 강대상의 십자가를 만지며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면 사모님이 오셔서 ‘윤선아, 괜찮아? 밥은 먹었어? 이리와, 안아줄게.’ 하며 저를 안아주셨습니다. 사모님은 교회 구석구석 살피는 분이셨습니다. 그때 저는 교회 사모님이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 이후 크면서도 청년들에게 희망을 주고, 청년들을 안아주는 사모님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저는 이 시간을 빌어, 방송을 보시는 수많은 개척교회 사모님을 위로하고 싶습니다.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누구보다도 위로받아야 할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 새어머니는 하나님을 떠났고, 제가 신앙의 길로 가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교회에서 유명한 찬양사역자를 모시고 간증집회를 했는데, 교회가 작아서 찬양 인도할 사람이 없다 보니, 제가 찬양 인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 찬양사역자분이 연락하셔서 CCM 앨범을 내보자고 제안하셔서, 고3때 CCM 앨범을 낸 적이 있습니다. 타이틀곡이 ‘친구여 들어보았나’라는 곡인데요, 지금은 없습니다. 들어보았나요? 없으시죠? (웃음) 앨범을 내고 나름 찬양 사역을 다녔고, 사례금을 받아 열심히 저축해서 대학등록금을 마련했습니다.
□ 어렵게 신학대학에 들어갔지만, 중퇴해야 했습니다.
- 대학 갈 때 아버지께서 무슨 학과를 갈 건지 물으셨는데, 저는 교회 사모님이 되어야 하기에 신학과를 간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교회 사모님이 뭘 하는 건지 알아보기 위해 근처 상가교회 수요예배를 보고 오셨는데, 목사님이 설교하시고, 뒤에서 달랑 혼자 사모님이 ‘아멘’을 외치고 계셨다고 합니다. 그것을 보고 오셔서, 그 길을 반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양보할 수 없어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그럼 ‘너가 등록금을 벌어서 다녀라.’ 하셨습니다.
- 저는 98년에 성결대학 신학과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선배들이 꿈을 물어보실 때마다 사모님이 되는 게 꿈이라고 하니, 제일 무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제가 저축했던 돈으로 1학년과 2학년을 마치고, 돈이 떨어져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학교 앞 복사집에서 복사 일을 했습니다. 오후 5시가 되면, 안양중앙시장에 가서 어머니가 하던 호프집에 사용할 안주 재료를 사서, 6시에 호프집 문을 열고 새벽 2시까지 엄마와 함께 술 장사를 했습니다. 이 시간이 저에게는 가장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입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저와 같이,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을 가진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자리에 불러주신 것 같습니다.
- 어머니는 손님들이 저에게 술을 주면 먹으라고 했습니다. 제가 안 먹으면 혼이 났습니다. 안주 값이라도 벌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를 좋아해 주는 손님과 억지로 만나게도 했습니다. 그 손님과 저를 놔두고 셔터를 내리고 가신 적도 있습니다. 그때를 기억하면 두렵고 마음이 아픕니다. 저는 엄마에게 매일 2만 원씩 받았는데, 그 돈과 복사집에서 받은 돈을 합쳐서 5백만 원을 모았습니다.
- 복학하려고 하는데, 설날에 큰아버지께서 사업에 성공하셔서 성공의 상징인 검정색 그랜저를 끌고 오셨습니다. 당시 저희 아버지 차는 엑셀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비교의식이 생기셨는지 ‘네가 꼭 복학해야겠니? 아빠도 좋은 차 타시도록 네 돈을 보태렴.’ 하셨습니다. 저는 너무 괴로웠습니다. 그것만은 안 된다고 했는데, 엄마가 손님들 앞에서 커다란 골뱅이 접시를 저에게 던지고, 양배추를 던졌습니다. 결국은 엄마의 뜻대로 그 돈을 엄마에게 드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신학교는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방끈이 짧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저를 세우신 것을 보니 하나님의 스펙은 세상의 스펙과 다른 것 같습니다.
□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 하나님은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 어제 동생과 통화를 했습니다. 다니엘기도회에 가게 되어서, 엄마 이야기를 좀 해야 하는데, 좀 떨린다고 하니, 담대한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제가 기억하는 엄마와 동생이 기억하는 엄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동생은 저항하는 편이었고, 저는 엄마와 가족을 묶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져서 순종하는 편이었습니다. 제가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학을 한 사람이 어떻게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냐고 말하지만, 저는 엄마와 가족들의 연결고리를 제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엄마가 새벽 2시에 일하고 혼자 집에 들어와, 가족들이 모두 잠자고 있는 걸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내가 이 집안에 시집와서 왜 이런 고생을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 것 같았습니다.
- 동생은 엄마에게 ‘때리지 마세요. 그렇지 않아요. 나를 내버려 두세요.’라고 저항했다고 합니다. 저는 사실, 하나님께 힘들었던 기억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면서, 어릴 적 기억이 희미해진 상태입니다. 동생이 말해주는데, 엄마가 언니의 얼굴을 발로 짓밟았을 때, 내가 때리지 말라고 소리치니, 엄마가 제 동생에게 ‘니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벌벌 떨며 흥분했고, 그때 아버지가 들어와 엄마에게 대들었다고 따귀를 때렸다고 합니다. 엄마가 동생에게 너랑 같이 살 수 없다고 나가라고 해서, 동생은 너무 행복해하며, 저에게 같이 나가자고 했는데, 저는 ‘아니야, 나는 여기 있어야 해, 엄마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끈이 되어야 한다.’고 했답니다. 그때 동생은 집을 나가서 고시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동생이 너무 아파서 제가 동생을 데리고 지하 허름한 방에서 함께 자취를 했었습니다.
- 저는 온누리교회 간사를 하게 되면서, 서울로 올라갔고, 동생은 엄마와의 연결고리를 염두에 두고 다시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엄마가 피하고 싶은 존재였는데, 동생은 달랐다고 합니다. 동생은 그 집에서 엄마와 엄청나게 싸우면서 엄마의 아픔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엄마가 시집와서 신혼도 없이 아이 둘을 키우면서 너무 외로웠다고 합니다. 아빠는 밖에서 인정받으려고 하다 보니, 집에는 신경 쓰지 않는 방관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점점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었고, 점점 미쳐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점점 아이들에게 못할 짓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못다 받은 사랑을 너희들을 통해 대리 만족하려고 했던 것 같다고 합니다.
- 제가 결혼해서 첫아이를 낳았을 때 저를 보러온 엄마에게 내 뱃속으로 낳은 아이도 힘든데, 뱃속으로 낳지 않은 아이를 키워주시느라 고맙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때 엄마가 처음으로 저에게 ‘고맙네’라는 문자를 보냈습니다.
- 동생과 저는 선택이 달랐습니다. 저는 엄마와 함께 살려고 선택했고, 동생은 저항하는 선택을 했습니다. 제가 대학에서 엄마에 대해 간증을 한 적이 있는데, 학생들이 후기에다가 ‘아닙니다. 그것은 학대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저는 그때 누군가에게 요청할 힘도 없었고, 엄마가 전부여서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가르쳐주었다면 달랐을 수도 있었겠지요. 삶을 살면서 많은 선택을 합니다. 이것이 항상 옳고, 저것이 항상 옳다고 하나님이 생각하실까요? 어제 동생과 나눈 결론은 ‘하나님은 참 선하신 분이시다.’였습니다. 다른 선택을 한 우리들을 하나님이 잘 살게 하셨고, 5년 전에 저희 어머니가 두 사위 앞에서 눈물로 자신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하게 하셨습니다. ‘내가 자네들 앞에서 미안하네. 내가 윤선이와 윤미에게 상처를 많이 준 것을 몰랐네. 정말 미안하네.’ 저와 동생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습니다. 그렇게 엄마와 회복이 되었고, 엄마는 지금도 정신과 약을 하루에 12알씩 드셔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때가 되면 반찬을 싸서 보내십니다. 사랑스런 문자도 보내십니다.
- 저는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 망하게 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합니다. 망 한다는 의미는 나를 재정적으로 궁핍하게 하거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망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망하게 하시지 않는다는 의미는 나의 생각과 정체성에 대해 무너지지 않게 하시고 온전히 하나님을 붙들게 하는 선하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나와 여러분들의 선택이 옳은 선택이든 또는 세상 기준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선택을 존중하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 교회에서 남편을 만나고, 새 삶을 꿈꾸었습니다.
- 대학 중퇴를 하고 취업을 준비했습니다. 갈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었는데, 벼룩시장 잡지에 어떤 교회에서 선교원 선생님을 뽑는다고 합니다. 사모님이 되려면 아이들 가르치는 방법도 배워야 할 거 같고, 왠지 용기가 생겨서 면접을 보러 갔고, 3년 동안 6살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 그 당시 제가 온누리교회에서 파워스테이션이라는 찬양팀을 하고 있었는데요, 담당 목사님이 간사를 해보라고 하셔서, 선교원 일을 그만두고, 간사로 5년 2개월 동안 일을 했습니다. 행정사역과 주일 3부 예배 싱어를 했습니다. 8명의 싱어가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 모니터에 제 목소리가 높아지고, 제 얼굴 비춰지는 빈도가 많아지는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그때마다 방송실에서 어떤 청년이 담당하고 있었는데, 지금의 남편입니다. 그분이 저에게 고백을 했고, 1년 동안 교회에서 연애를 한 끝에 결혼했습니다. 남편은 작곡가라서 광고회사에 근무를 하게 되었고, 저는 임신하면서 간사를 그만두고 가정주부로 살기로 했습니다.
□ 남편의 뇌종양 판정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 남편이 음악을 만들면서 언젠가부터 머리가 아프다고 했습니다. 타이레놀을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먹어야 했습니다. 시아버지의 권유로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고 전화가 왔는데, 저에게 놀라지 말라며 머리에 뭐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태어난 지 6개월 된 아기를 업고, 시어머니와 병원으로 달려가 의사를 찾아갔는데, 뇌종양이라는 것입니다. 병원을 수소문에서 2010년 9월에 서울대병원에서 뇌종양 수술을 13시간 동안 받았습니다. 남편의 신경에 문제가 있어 바로 깨우지 못하고 재우고 있는 상태였는데, 바로 옆 병동에서 사랑의교회 옥한흠 목사님이 돌아가셨습니다. 훌륭한 분이 가셨다는 생각보다도 내 남편도 데려가시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에 매우 두려웠습니다.
- 남편의 종양은 시신경과 언어신경 사이에 있어서, 수술 후에 말을 거의 하지 못했고, 미각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남편이 포도를 먹고 싶다고 해서 다음날 마트에 가서 포도를 샀습니다. 옆에 지갑을 끼고 계산대로 갔는데, 지갑을 소매치기 당해서 살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어떤 상황인지 알면 도둑이 가져가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수중에 돈이 없어 택시를 타고, 시어머니에게 택시비를 가지고 기다려 달라고 해서, 간신히 집으로 갔는데, 현관문을 여는 순간 모든 서랍장이 열려 있었고, 도둑이 들어온 것을 알았습니다. 경찰들이 왔다 가고 나서야, 아이를 재웠습니다. 아침에 소매치기를 당하고, 저녁에 도둑질을 당하고 나니, 제 마음에 감당이 안 되었습니다. 아이가 깰까 봐 수건을 들고 거실로 나와 ‘하나님, 제가 참 힘들게 살았는데, 어떻게 이러세요?’ 몰래 엉엉 울었습니다. 아이가 깨는 소리가 나서, 다시 방으로 들어가 아이를 토닥거리며 재우는데, 이때 제 삶의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찾아왔습니다.
- 아이를 토닥이면서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남편에게 갔다가 서울대병원 어린이 병동에 잠깐 앉아 있을 때, 많은 아픈 아이들과 엄마가 지나갔는데, 정말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도 나는 우리 아이를 내 품에 안고 재우고 있음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생각이 찾아왔습니다. ‘그래, 맞아! 내가 손이 있어서 아이를 토닥일 수 있구나. 내가 눈이 있어서 아이를 볼 수 있구나. 내가 귀가 있어서 남편이 포도 먹고 싶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어. 나는 열 손가락과 열 발가락이 다 있네. 남편이 아직 살아 있네.’ 그런데 ‘이 손발이, 이 몸이, 내 것 맞나? 나는 흙인데, 입히시고 먹이셨구나.’ 갑자기 이 모든 것들이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내 것이라 생각해서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돈 주고 산 휴대폰, 내가 산 의식주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나에게 거저 주어진 은혜라고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감사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간 모든 게 달라 보였습니다. 모든 것이 감사로 바뀌었습니다. 그날이 저에게는 터닝포인트였습니다.
□ 남편의 뇌종양은 축복덩어리였습니다.
- 남편은 퇴원을 했고, 1년 동안 투병을 했습니다. 제가 가정경제를 책임져야 했고, 어린아이도 돌봐야 했습니다. 낮에는 간병과 육아를 해야 해서 새벽에 일하는 것을 찾다 보니, 컴퓨터로 하는 디자인이 있었습니다. 우리 집에 컴퓨터가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제가 디자인을 전공하거나, 좋아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에 올려놓은 강의를 보고 배웠습니다. 혼자서 독학을 했습니다. 하나씩 배워나갔고, 제 이름 앞에 디자이너 정윤선이라는 명함도 만들었습니다. 청년 여러분께서도 먼저 여러분 자신을 인정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자신을 값없다고 하시면 안 됩니다. 사람들을 만나서 디자이너 정윤선이라고 소개하고 다녔습니다. 포트폴리오가 없어 일은 들어오지 않았지만, 교회에서 한 일을 나름 포트폴리오로 만들어 개인 블로그에 올렸습니다. 저에게 소망이 생겼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남편의 병이 우리 가정에서 절망의 출발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남편의 병은 가족을 묶어주는 요소였고, 저에게 새로운 일을 하는 시작점이었고, 하나님이 부어 주신 축복 덩어리였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 지금은 10명의 직원이 있는 디자인 사무실로 커지게 되었습니다.
- 남편의 종양이 3년 전에 재발 되었습니다. 재발이 되어 다시 수술을 하고, 지금 경과를 보고 있습니다. 몇 달 전에 가보니 조금 종양이 커진 상태이지만, 지금은 커지지 않고 있습니다. 남편과 저에게는 기도를 끊임없이 하게 하는 대상입니다.
- 또 하나의 감사거리는 제가 친엄마가 보고 싶어서 찾았습니다. 제가 큰아이를 임신했을 때, 먹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친엄마가 나를 임신했을 때는 뭘 먹고 싶었을까? 궁금했고, 태몽도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용산 경찰서에 가서 가족찾기 프로그램을 통해 엄마를 찾았습니다. 딸 둘을 데리고 혼자 사시고 계셨습니다. 친엄마가 먼저 연락을 끊으셨습니다. 왜 끊으셨는지 궁금하지만, 아이가 있는 엄마로서 그냥 이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저에게는 관계가 회복된 새로운 어머니가 계시기에 그분의 삶을 축복하면서, 친엄마를 다시 만나게 한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 진정한 예배자를 소망하며, 개척교회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 저는 결국 교회 사모님의 꿈을 걷지는 못했지만, 다른 꿈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아니라 ‘예배의 시스템으로 예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저희는 작은 개척교회 돕는 일을 많이 합니다. 어느 날 전도지를 무료로 만들어 개척교회에 드렸는데, 그 교회 사모님이 전화하셔서, 내가 무료로 드린 전도지로 전도할 생각을 하니 너무 좋다고 하십니다. 순간 하나님께 죄송해졌습니다. 저는 사무실에서 쉽게 할 수 있는 일에 약간의 인쇄비를 들여서 그분에게 보내드린 것뿐인데, 그분은 ‘예수 믿으세요!’라고 전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정말 섬김과 봉사는 사모님이 하시는데, 제가 감사 인사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17년 동안 다니던 온누리교회를 떠나기로 결심을 하고, 가족들에게 동의를 구하고, 집에서 가장 가까운 개척교회를 다니기로 생각하고 검색을 하니, 지금 다니는 교회가 나왔습니다.
- 그때 마음은 내가 큰 교회에 있었으니, 눈이 높아져 내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어도, 절대 표현하거나, 실망하지 말자고 결심하고, 예배의 자리를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가자마자 10년 된 현수막이 보여도 바꾸자는 말을 하지 않고 묵묵히 예배만 드렸습니다.
- 어느 날, 사모님이 디자인하신다고 들었다면서 추수감사절 현수막 하나만 해달라고 부탁을 하시는데,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제가 개척교회에 가서 느낀 것은 제가 정말 진정한 예배자가 아니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 보고 예배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을 뉘우치게 되었습니다. 큰 교회에 다니시는 분 중에 다니는 교회가 너무 멀다고 생각되시면, 그래서 가까운 집 근처 교회에서 예배드린다면, 그 교회 목사님이 얼마나 힘이 나실까 생각해 봅니다.
□ 하나님은 선하시고, 위대하시고, 언제나 옳습니다.
- 오늘 저의 간증 주제는 ‘하나님은 옳습니다.’입니다. 사실 제 인생의 이야기를 여러분들이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옳지 않다고도 생각되시죠? 1+1=2여야 하는데, 1+1=4가 되는 경우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것 같습니다. 엄마에게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이 제 인생을 평탄하게 해주실 것이라 생각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결혼 후에 남편의 아픔을 겪게 하셨고, 다른 여러 가지 상황을 겪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왜 하나님은 항상 옳다고 고백할까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 있으세요? 제가 신학교 시절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데, 정말 놀랐습니다. 제가 생각한 하나님은 기도하면 찾아오는 가까운 하나님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공의에 대한 강의 속의 하나님은 어마어마한 존재로 들렸습니다. 하나님은 지구, 우주 차원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 ‘계신 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분을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 하나님은 정말 위대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1+1=2로 우리가 판단하고, 이런 분이시라고 결론지어야 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 하나님이 선하시고, 절대 나를 망하게 하지 않는 분이셔서, 내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길로 가든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인 나는 어떤 고백을 해야 할까? ‘하나님은 늘 옳습니다.’였습니다. 제가 하나님이 옳다고 깨달아서 고백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저를 새로운 일로 인도하셨고, 가족들을 하나로 묶으셨기에 ‘옳으시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의 시어머니는 아픔을 겪으셨고, 지금도 심장이 뛰는 병을 가지고 계시고, 저의 어머니도 저희에게 아프게 하신 대가로 정신과 약을 드시고 계십니다. 저와 동생도 아픈 기억 가운데 있어서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는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옳다고 생각되어서 말씀드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옳으시다고 결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옳으심을 결정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옳으심을 제 삶을 통해 증명해 주시면, 제가 증거 하겠습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 윤선디자인이 개척교회 난방지원이라든지 여러 가지 봉사를 하는데요, 많은 분들의 칭찬이 오히려 저를 두렵게 했습니다. 제가 교만으로 가는 것은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숨어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보폭에 맞추려면 멈추어야겠다고 생각해서, 매년 2월은 쉽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에게 간증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이 자리에 섰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마음이 들까 봐 매우 경계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도구로만 쓰일 수 있기를 기도 부탁드립니다. ‘하나님은 늘 옳습니다’라는 가사의 찬양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늘 옳습니다. 이러하든 저러하든 아니라고 여겨도 하나님은 옳습니다.’
‘내 맘속에 새겨진 그 진리,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옳습니다.’
‘그러하지 않아도 그러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하신다면 그 길만을 따르리라’
‘내 맘속에 새겨진 그 진리,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 결어 및 기도
- 오늘 저녁이 여러분의 인생에도 터닝포인트가 되는 그 밤이 되기를 바랍니다. 웃으면서 간증을 했지만, 어린 시절과 사춘기 시절에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간증은 많은 임팩트(영향)를 주었습니다. 제가 느낀 것은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어떤 분은 선으로 악을 이긴다고 하지만, 분노로 악을 대적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오늘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을 잘 보여준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인생은 해석이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어떤 관점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는지가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은 해석입니다. 세 번째는 ‘우리 삶으로 드리는 예배가 어떤 것인가, 진정한 예배자가 어떤 것인가’를 우리에게 도전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자의 모습이 무엇인지, 삶으로 드리는 예배가 어떤 것인지 가르쳐주는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줄을 믿습니다. 오늘 간증의 결론은 ‘하나님은 늘 옳습니다.’입니다. 우리 인생의 결론이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내가 겪는 아픔, 고난들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하나님 앞에 항변하고, 따지고, 하나님이 틀린 것 같고, 그럴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그렇게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5분 후를 알지 못하는 인생입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분인데,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인데, 시간과 공간의 한계 속에서 사는 우리들이 하나님이 틀렸고, 나는 옳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옳으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렇게 인정해드리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간절하지 못한 이유는 우리에게 대안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아도 내가 해결할 수 있고, 내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음이 성장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면 우리 입술에서 나오는 고백이 ‘주밖에 없다.’는 고백입니다. 여러분, 정말 주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많은 것을 취해도 주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기도를 하고, 문제해결을 받아도 한순간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신앙의 고백은 주 밖에 없습니다. 다니엘기도회 기간 동안에 오늘 이 찬양을 정말 부르고 싶었습니다. (찬양 : 주밖에 없네)
- 오늘 간증을 다시 한 번 되새기고 기도하며 나가겠습니다. 첫 번째 기도제목은 나도 선으로 악을 이기게 해주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으로 악을 이기게 해주십시오. 분노하고 정죄하고 원망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선으로 악을 이긴다는 것은 성령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선으로 악을 이겼기에 오늘의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 나도 선으로 악을 이기는 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내 삶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진정한 예배자로서의 삶을 살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이 시대의 예배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새롭게 발견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시작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면, 우리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시작됩니다. 하나님, 금번 다니엘기도회가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내가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지금 내게 주어진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깨달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주여’ 한 번 부르고 간절히 기도하며 나아가겠습니다.
- 하나님 아버지,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지만, 선으로 악을 이기기보다는 내 안의 분노와 혈기로 악을 이기려고 할 때가 참 많습니다. 오늘 귀한 강사님을 보내주셔서 선으로 악을 이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그 열매가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성령님, 도와주소서. 오늘 동일한 고통 속에 있는 자들, 선으로 악을 이기게 해 주셔서 우리에게 이런 선한 열매들이 맺어지게 도와주옵소서. 주님,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매일매일 우리의 삶이 직장에서 삶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거룩하신 우리 아버지, 오늘이 간증 마지막 날인데, 오늘 주셨던 말씀들이 깊이 새겨지게 하셔서, 우리 인생에 영원히 기억되고, 우리 삶에 터닝포인트가 될 수 있는 이 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없는 것만을 바라보고 불평하게 하지 마시고, 내게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다가오게 도와주셔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해 주시므로, 우리의 삶에 전환점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