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 앞에서는 강하고, 강자 앞에서는 한없이 나약해지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속에서 분노가 용암보다도 더 높이, 더 강하게 분출되는 것을 느끼며, 간신히 이성을 찾을 때가 많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은 남자 중에 더욱 많고, 지식인이든 아니든, 지위가 있든 없든, 나이가 많든 적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오직 자신의 필요를 위해서,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자라면, 자신보다 강한 자라면 무조건하고, 그와 자신을 동일(同一)시키는 데 정말, 분노가 가득차 오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희생을 찾으라면 얼마나 찾을 수 있겠습니까?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내 일도 귀찮아서 미루고, 어떻게 해서라도 편하게 살려고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저만치 구걸하는 사람이 있으면 슬쩍 피해 가고 전철 안에서도 바구니를 든 사람을 보면 눈을 감기가 쉽습니다. 정말, 한 숨이 나오고, 세상을 잘 살아간다는 것이 어찌, 이러한 부류에 속하여 내 자신만의 유익을 추구하며, 이어령비어령(耳於鈴鼻於鈴)격으로 사는 것이 모가 없이 둥글둥글하게 잘 사는 것인가?하고 혼란하기만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아브라함 링컨의 이야기를 잠깐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미국에서 노예해방을 주장한 대통령이었습니다. 미국이 남, 북 전쟁을 할 때, 흑인들에게 노예해방을 약속하고, 북군을 위해 전쟁에 참여하여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 결과, 전쟁은 북군의 승리로 종전되었습니다. 하지만, 곳곳에서 흑인노예들의 해방을 반대하는 백인들이 있었지만, 결국 세월이 흘러 흑인대통령을 세우는 시대에까지 도달했습니다. 이렇게 인종차별을 종식시킨 링컨대통령이 미국을 영원히 떠날 때, 많은 국민들이 애도하였습니다. 그들 중에는 흑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어떤 흑인 엄마는 링컨대통령을 태운 영구차가 자신의 앞으로 지나자 어린 아들을 번쩍 들어 머리 위로 올리고는 “잘 봐라, 우리를 노예에서 영원히 해방시키신 분이시다”라고 하였답니다. 저는, 이 말을 들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앞서서 적은 것처럼, 강자 앞에서는 벌떡 누워 자신의 배를 드러내지만, 약자 앞에서는 하얀 송곳니를 보이며, 사납게 으르렁하는 개와 같은 자들의 행위를 보면서 분노를 억지로 참으며, 이것이 인간의 모습인데... 하면서 속을 달랬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권세잡은 강자 앞에서는 강자로 대면하셨고, 나약한 민초들 앞에서는 나약한 자로 대면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찾는 자들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셨습니다. 권세자들이 주는 온갖 수치와 모욕을 참으며, 십자가에 달림으로 온 몸에 스며드는 참혹한 고통 마치, 아비규환[阿鼻叫喚]의 고통과도 같은 고통을 참으셨던 분이셨습니다. 이 분의 이 고통이 누구를 위한 것이냐?에 저는 망설임없이 저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하겠습니다. 그 분의 그 고통이 저를 죄에서 해방시키셨고, 그 분의 그 고통이 죽음에서 저를 살리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흑인노예들에게 아브라함 링컨이 있듯이 저에게는 영원히 잊지 못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희롱을 다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마태복음 27: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