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⑪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이삭은 브엘라해로이 근처에 거주하였더라. ⑫사라의 여종 애굽인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은 아들 이스마엘의 족보는 이러하고, ⑬이스마엘의 아들들의 이름은 그 이름과 그 세대대로 이와 같으니라. 이스마엘의 장자는 느바욧이요, 그 다음은 게달과 앗브엘과 밉삼과, ⑭미스마와 두마와 맛사와, ⑮하닷과 데마와 여둘과 나비스와 게드마니, ⑯이들은 이스마엘의 아들들이요, 그 촌과 부락대로 된 이름이며, 그 족속대로는 열두 지도자들이었더라.”
꿈에 부모님께서 자주 나타나셨다. 추석 때가 되어서 그랬던지……. 어머니는 수목장으로 모신 덕에, 가끔 부평으로 발길을 향한다. 어머니의 유골은 수목장을 한 지 6개월 만에 벌써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유골이 있던 자리를 찾는다.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그래도 명절 때가 되면 한 번씩 찾게 된다.
그 앞에서 죽음이라는 것을 한참 생각했다. 가난한 집의 장녀로 태어났다는 죄로 인해, 일곱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남의 집으로 팔렸다. 얼마나 고생하셨을까……. 온갖 고생을 하던 중, 아버지를 만나 가정을 꾸렸다. 장남도 아닌데, 장남처럼 시어머니와 11남매의 뒷바라지를 감당하셔야 했다.
방 하나에 시댁식구들이 모여 사는 통에, 발 한 번 제대로 뻗지 못하고 살아야 했다. 세끼 식사 걱정해야 했고, 내일이 아닌 오늘 먹어야 하는 일로 걱정해야 했다. 이래서 자식 걱정, 저래서 자식 걱정……. 그렇게 사시다 운명하셨다. 어머니에겐 죽음이란 무엇이었을까?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김경일 저, 바다出)이 있다. 우리나라는 법치보다는 힘과 핏줄이 앞서는 나라가 되어버렸다. 그것이 우리 민족의 우수성이란다. 그럴까? 원칙보다는 편법이 성행하게 되고, 다양성보다는 폐쇄성을 주장하는 것이 우수성이라고?
유교적 권위와 타협은 불공평과 불투명을 가져왔다. 이것이 한국사회에서 생존권과 인간적 권리를 누리면서 사는 삶을 없앴다. 중국은 문화 대혁명을 통해,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유교 문화를 청산했다. 그에 반해, 우리에게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
은나라에 ‘유’라는 무당집단이 있었는데, 공자가 이들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유’집단은 은나라가 주나라에게 망했지만, 살아남아서 주나라에서 왕실의 족보를 체계화하고, 공통숭배존재로 ‘天’을 제시한다. 그리고 오직 주나라의 왕만이 하늘의 아들이고, 그 아들은 지역 제후인데, 여기에서 혈연주의가 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또 남자가 많이 필요해지니, 축첩제도와 남존여비사상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진시황이 한나라 유방에게 무너지고, 한 무제가 등극하면서, 나라를 다스릴 새로운 사상으로 동중서가 제시한 ‘대일통’론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것은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사상논쟁을 금지하는 것이다. 동중서는 공자의 교훈을 정치적으로 변형하여 이용한다. 황제의 정치적 권한은 하늘의 명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제후들은 왕을 받들고, 신하는 통치자를 받들고, 아들은 아버지를, 아내는 남편을 받드는 것이, 결국 하늘을 섬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 유교만이 최고의 진리라고 역설한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이삭은 브엘라해로이 근처에 거주하였더라.”(11) 아브라함이 죽었다. 그리고 아들 이삭이 복을 받는다. 마치 아브라함이 죽기를 기다렸던 것만 같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복을 주신다.
새 포도주를 담그면, 당연히 새 부대를 준비한다. 부대는 보통 염소나 양의 가죽으로 만든다. 그 속에 새 포도주를 넣으면, 포도주가 발효하여 압력이 높아진다. 새 부대라면 가죽이 탄력성이 있어 압력에 견디지만, 오래 된 가죽이라면 건조하고 딱딱해서 터져 버리게 된다. 때문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새 포도주를 낡고 말라버린 가죽 부대에 결코 넣지 않는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눅 5:38) 이삭의 시대가 열려야 한다. 그런데 이삭의 시대가 열릴 수 없다. 왜? 아브라함이라는 너무 큰 거목이 뒤에 버티고 서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브라함은 좋은 아버지이다. 믿음의 조상이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시대가 열려야 한다. 그러려면 아브라함은 죽어야만 한다.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수 1:2) 모세가 죽기를 마치 기다렸던 것처럼 보인다.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가나안으로 ‘가라’는 것이다. 얼마나 가나안을 향한 ‘가라’는 명령을 기대하고 또 기대했던가! 그런데 이 명령은 모세가 죽은 후에야 주어졌다.
이걸 반대로 이야기해보자. 만약, 모세가 죽지 않았다면? ‘가라’는 명령은 없다. 모세가 10년 후에 죽었다면? 10년 후에 ‘가라’는 명령을 들었으리라. 20년 후에 모세가 죽었다면? 20년 후에 ‘가라’는 명령을 들었으리라.
모세가 나쁜 사람인가? 아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구원자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40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면서 기다렸던 사람이 있다. 모세이다. 그가 나타나 자기들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인도해주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모세는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렸다. 더 드릴 것이 있다면 더 드렸을 것이다. 드리는 것이 하나도 아깝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그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친구로 삼아주셨다. 누구보다도 특별한 존재로 그를 알아, 그에게 축복하시고 또 축복하셨다. 성경에서 모세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 있을까?
모세 옆에 항상 함께했던 사람이 있다. 여호수아이다.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고 산꼭대기에 올랐을 때, 여호수아는 모세와 함께 하였다. 모세는 이 승리를 여호수아로 하여금 기록하게 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산에 올랐을 때, 여호수아 역시 모세와 함께하였다. 모세가 쉼을 얻기 위해 진중으로 돌아갈 때, 여호수아는 끝까지 회막에 남아 지켰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그림자였다. 동역자였다.
모세는 여호수아가 자신의 후계자임을 알았다.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과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보다 먼저 건너가사,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멸하시고, 네가 그 땅을 차지하게 할 것이며, 여호수아는 네 앞에서 건너갈지라.”(신 31:3) 자신이 아닌, 여호수아를 통하여 가나안을 건너게 될 것임을 알았다.
“⑦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에게 이르되,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들에게 그 땅을 차지하게 하라. ⑧그리하면 여호와 그가 네 앞에서 가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신 31:7~8)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호수아가 자신의 후계자임을 정식으로 선포했다. 이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모세가 아닌, 전적으로 여호수아의 몫이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단다. 그렇게 말한다고해서, 여호수아의 마음에 있는 두려움이 사라질까? 용기백배해질까?
이 말은 반대로 이야기하면 이렇다. 여호수아가 매우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자신이 후계자가 되기는 하였지만, 막상 가나안으로 들어가려니, 무척 두렵더라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모세도 하지 못한 일인데? 하나님께서 정말 나를 통해서 이 일을 하실까?
여호수아 생각에, 모세는 엄청 큰 사람이다. 모세가 한 일을 자기가 할 수 있을까? 모세가 하지 못한 일을 자기가 할 수 있을까? 온갖 생각이 여호수아의 마음에 교차한다.
모세는 죽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의 눈앞에서, 여호수아의 눈앞에서 죽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서, 여호수아의 마음에서 죽어야 한다. 모세가 죽어야만 여호수아의 시대가 열린다.
구약 성경에서 엘리야만큼 큰 선지자가 있겠는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1:1의 전쟁을 벌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갈멜산의 승리 후, 엘리야는 극심한 우울증에 빠진다. 그런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왕상 19:16)
엘리야는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오게 하여 군인들을 불태운다. 요단강을 둘로 가른다.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도, 엘리야의 능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런 엘리야가 죽는다고? 죽어야만 한다. 그래야 엘리사가 자기 시대를 열 수 있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죽어야만 한다. 새 시대는 새 사람에 의해 열린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하시고”(눅 9:22)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죽으셔야만 했다는 것을 아셨다. 그래서 거듭 말씀하신다. 자신이 죽어야만 한다고.
예수님께서는 부활 이후의 일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해서, 제자들과 함께 영원토록 이 땅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제자들의 시대가 열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로 올라가셔야만 하신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영원토록 머무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시면 안 되는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다. 성령 충만한 제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어야만 한다. 꼭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당연히 예수님의 능력이 제자들의 능력보다도 크다. 당연히 예수님의 말씀이 제자들의 말씀보다도 위대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올라가셔야만 하신다. 이 땅의 일은 철저히 제자들에게 맡겨졌다.
여호수아가 모세보다 위대하다? 누가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모세는 죽어야만 한다. 엘리야는 죽어야만 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죽으셔야만 하셨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사람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새 술은 새 포도주에 담겨야만 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우리의 죄가 죽어야만 한다. 우리의 연약함이 죽어야만 한다. 우리의 옛 사람이 죽어야만 한다.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