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 '남으로 창을 내겠소'는 소박한 전원생활을 제재(題材)로 노래한 작품으로 자연 친화적(親和的)인 삶의 자세가 드러난, 우리나라 전원시(田園詩)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 흙과 더불어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남(南)쪽'이 주는 밝고 건강한 이미지와 함께 시적 화자의 삶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전원에서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삶의 태도, 훈훈(薰薰)한 인정(人情), 달관(達觀)의 모습을 여실(如實)히 보여 주고 있다.
이 작품은 전원으로 돌아가 자연과 더불어 소박하게 살아가려는 화자의 삶의 자세가 잘 형상화된 작품이다.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고 싶은 마음은 복잡한 도시 생활에 쫓기며 살아가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일종의 모성회귀(母性回歸)의 본능(本能)과 같은 것이다.
그의 초기시(初期詩)에서 후기시(後期詩)로 갈수록 그의 시세계가 어떠한 변화를 겪고 어떤 양상(樣相)을 보였는가에 대한 비교문학적(比較文學的) 고찰(考察)은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를 던져준다. 그것은 바로 전통(傳統)과 외래(外來)와의 만남이다. 월파의 시에서 그 형식(形式)과 내용(內容)에 대한 양면성(兩面性)의 문제는 주요한 시적 특색이 되고 있다.
그 초기시의 정형적(定型的) 율조(律調)에서 후기시의 주지적(主知的) 경향(傾向)에 이르기까지 정형률(定型律)의 형성요인(形成要因)과 시집『망향』에서 비롯되는 전원으로 향한 목가적(牧歌的) 정서(情緖)와 시적(詩的) 고뇌(苦惱)가 바로 그것이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라는 제목에서 '남(南)쪽'은 자연(自然)을 지향(志向)하는 방향(方向)이다. 여기에서 남향(南向)의 의미는 집안을 밝고 환하게 하겠다는 단순한 채광(採光)의 의미를 넘어서 드넓은 자연을 바라보며 살고 싶다는 뜻으로서 건강하고 낙천적인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시인의 소망이기도 하다.
10행의 시가 3연으로 구성된 이 시는 시인의 욕심 없는 세계가 인생론적(人生論的)으로 잘 드러나고 있다. 고시조(古時調)에서 볼 수 있는 동양적인 은둔사상(隱遁思想)도 배어 있으며, 민요조(民謠調)의 소박(素朴)하고 친근(親近)한 가락에다 전원(田園)으로 돌아가서 모든 영화(榮華)와 야심(野心)을 버린 삶을 영위(營爲)하려는 태도를 접할 수 있다.
<한참을 갈 수 있는 농토>인 "한참갈이"는 무욕(無慾)과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심경(心境)을 나타내고 있으며 <구름이 꼬인다 갈리 있소>에서 '구름'은 '세속의 유혹'을 암시한다. 세속적(世俗的)인 부귀(富貴)와 명예(名譽)가 자신을 유혹(誘惑)한다 해도 단연(斷然)히 거부하고 새소리나 들으며 자연 속에 묻혀 살겠다는 뜻이 잘 드러나 있는 것이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에서 시인은 낙천적으로 자연을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이웃과 함께 떡을 떼고 싶어 하는 시인의 넉넉한 마음씨가 잘 드러나고 있다. <왜 사냐건 웃지요>가 의미하는 바는 몇 가지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굳이 답할 필요가 없다'는 뜻일 수도 있고 '말로는 설명할 수는 없다'는 뜻일 수도 있으며 '그냥 스스로 만족하며 산다'는 뜻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시인은 자신의 전원생활에서 얻은 성찰(省察)과 달관(達觀)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 <왜 사냐건 웃지요>의 표현은 중국문학사상(中國文學史上) 최고봉(最高峰)으로 일컬어지는 이백의 명시(名詩) <산중문답(山中問答)>에 나오는 표현을 김상용이 빌려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백의 시 <산중문답>의 원문을 여기에 옮겨본다.
산중문답(山中問答) -이백(李白: 701-762)
問余何事棲碧山 나에게 어찌하여 푸른 산에 사는가 하고 물은즉
笑而不答心自閑웃고 대답하지 않으나 마음이 스스로 한가롭다
전체적으로 김상용의 시 "남으로 창을 내겠소"는 땅을 일구고 자연을 벗하며 인정미(人情味) 넘치는 삶의 여유(餘裕)와 관조(觀照)가 회화조(繪畵調)의 친근한 어조(語調)에 용해(溶解)되어 시적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잔잔한 웃음'으로 답하는 모습은 삶에 대한 깊은 성찰(省察)에서 우러나오는 초월(超越)과 달관(達觀)의 경지를 함축적(含蓄的)으로 보여 주는 시적 표현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