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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지난 종려 주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제자들과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내셨습니다. 타락한 종교권력에게 당신을 내어주셨습니다.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라고 불리는, 우리로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비아 돌로로사”는 처참한 길이었습니다. 슬픔의 길이었습니다. 눈물의 길이었습니다.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참혹한 길이었습니다. 인간한계의 길이었습니다. 당신이 창조하신 피조물에게 당신의 거룩하고 존귀한 몸을 내어 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발가벗겨지셨습니다. 모진 매를 다 맞아 내셨습니다.
초죽음이 될 때까지 맞아내셨습니다. 머리에는 굵은 가시로 엮어 만든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비웃음과 조롱과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당신이 달리게 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살을 찢고 들어오는 대못은 주님의 뼛속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선혈위로 사막의 파리 떼들이 윙윙거리며 달라붙었습니다. 이글거리는 태양빛 아래서 사정없이 몰아치는 사막의 모래 바람은 갈증을 더욱 부채질했습니다. 한편, 예수께서는 지난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와 고난 받는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피와 함께 땀까지 흘리셨습니다.
십자가 위에 달려계시는 동안 나머지 수분도 다 소비되고 말았습니다. 시인은 이 상황을 “나의 입은 옹기처럼 말라 버렸고 나의 혀는 입천장에 붙어 있으니”(시22:15)라고 묘사했습니다. 주님의 입은 바싹 타버렸습니다. 이는 잇몸에 붙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목마르다”(요19:28)라고 절규하셨습니다. 그러나 바싹 타버린 주님의 입술엔 물 대신 쓰디쓴 신 포도주가 적셔졌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눅23:34)라는 주님의 화해와 사랑과 용서의 눈빛은 철저하게, 싸늘하게 외면을 당했습니다.
오히려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도 구하고 우리도 구하라!”(눅23:39)라는 조롱과 야유를 받으셨습니다.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께서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능욕과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마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라고 외치는 아들의 절규를 외면하셨습니다. 마치 캄캄한 하늘을 찢어 버리기라도 하실 듯, 흑암을 가르고 번득이며 달리는 번개와 천지를 뒤흔드는 천둥소리로 아들을 외면하실 수밖에 없는 당신의 피맺힌 절규를 대신하셨습니다. 신음을 쏟아내셨습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기꺼이 “비아 돌로로사”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죽으시기까지 고난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주셨습니다.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를 위한 특권 즉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특권도 주셨습니다.”(빌1:29)라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특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부어주신 은혜에는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되는 특권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기쁨으로 동참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모든 물과 피를 다 흘리시고,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고, 거룩한 몸이 구겨질 정도로 심한 고난을 받으셨던 것처럼, 주님을 위하여 기꺼이 고난 받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삶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어떤 환난과 시험이 주어질지라도 주님만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불태울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는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6:22-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평행본문은 이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5:11-12a)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인자 곧 하나님의 아들인 동시에 사람의 아들로 믿고,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당신의 제자로서 주어진 사명을 따라 복음을 전파하고, 당신이 앞서 가신 좁은 길을 따라가는 이들에게는 반드시 고난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경멸과 조롱거리가 되고, 투옥되고, 재판을 받고, 사형을 당하고, 버려지기까지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피로 얼룩질 고난과 핍박과 순교의 역사는 당신이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해서 반복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당신을 위하여 고난 받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편, “기뻐하라”는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크게 일어나는 벅찬 감정의 상태”를 뜻합니다. 또 “즐거워하라”는 “억제할 수 없을 만큼 흘러넘쳐서 겉으로 드러낼 수밖에 없는 역동적인 환희”로, “기뻐하라”보다 한층 더 강화된 기쁨을 뜻합니다. 제자들이 핍박 중에도 이렇게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는 하늘에 큰 상이 예비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루이스(C. S. Lewis)는 이 상에 대해서 “합당한 보상이란 단순히 그것을 목표로 하는 행동에 항상 결부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결국에는 그 행동 자체가 합당한 보상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구원하기 위하여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모진 고난과 핍박을 받으시고, 죽기까지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 수 있는 것 자체가 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죄와 허물로 인하여 영원한 저주를 받고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위하여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리를 포기하고, 오히려 지극히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당신 때문에 존재 의미를 갖는 피조물들에게 모진 핍박을 받으시고, 차디찬 땅속으로 내려가는 치욕까지 당하신 주님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즐거워할 수 있겠습니까? 도무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환희에 사로잡힐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권으로 여길 수 있겠습니까? 원래 힌두교의 한 분파인 시크교의 신자였던 선다 싱(Sundar Singh)은, 스물아홉 살에 하나님을 만난 뒤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마흔 살이 되었을 때, 티벳으로 전도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때 히말라야를 넘는 그의 소지품은 담요 두 장과 성경 한 권이 전부였습니다. 아니 그의 배낭은 비어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배고픔과 높고 험한 산은 복음을 전하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굶주릴 때는 힘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높은 산이 앞을 가로막을 때는, 자신의 정신이 그 산보다 높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얼음으로 가득 찬 고갯길을 넘어가야할 때는, 모진 고난을 받은 상태에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해 가시는 주님을 생각했습니다. 고난을 고난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위하여 고난 받을 수 있음을 감사했습니다. 삶으로 주님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마음대로 신앙 생활할 수 있는 환경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을 믿는 것 때문에 고난을 당할 수 있다.”는 말은 매우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곳에서 주님을 믿기 위해서는 고난과 박해를 각오해야 합니다.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네팔에서 “세례”는 “투옥”을 의미합니다. 과거 구소련이나 동구권 국가들에서 세례는 사망진단서에 사인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지금도 이슬람권에서는 하루에 수백 명이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곳이라고 안전한 것은 아닙니다. 불과 100여 년 전의 조선도 그랬습니다. 의료 선교사 알렌(H. N. Allen)의 어학 선생이었던 노춘경은, 기독교를 반박하는 문서를 통해 복음을 접했습니다. 한문 성경을 읽다 거듭났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27년 전인 1886년 7년 18일, 주일에 언더우드(H. G. Underwood)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언더우드는 그에게 조선이 국법으로 기독교 신앙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아무리 혹독한 시험이 주어져도 돌아서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환난과 시험은 자신에게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목숨을 버려할 상황이 주어진다면 기꺼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렇게 신앙의 선배들은 주님을 믿을 수 있는 특권을 누리기 위하여 목숨까지도 초개처럼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특권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특권이 클수록 책임 또한 막중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책임에 대해서 “너희는 온 세상에 나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여라.”(막16:15b)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성령께서 오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행1:8b)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증인된 삶을 살아야할 책임이 주어져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증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순교까지 각오해야합니다. 실제로 복음을 전하던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야고보는 목이 잘려 순교했습니다. 이미 살펴 본대로, 사도들과 초대교회의 수없이 많은 성도들은 복음을 전하다 순교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복음이 증거 되기까지 기독교의 역사는 피 흘림의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피 흘림보다 더 심각한 도전 앞에 놓여 있습니다. 겉으로는 평안해 보이고 죽음을 각오해야하는 상황은 아니지만, 우리의 내면과 삶은 극도로 타락해 있기 때문입니다. 교묘하고 지능적이고 설득력까지 갖춘 음란한 문화와 관습과 무신론적인 가치관과 다양한 이데올로기 앞에서 극도의 무기력함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와 명예와 권세 앞에 고꾸라져 있기 때문입니다. 과감하게 믿음으로 맞서 싸우려 하기보다는, 작은 불이익과 부당한 대우를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사랑하는 이들까지도 내려놓는 대의를 선택하기보다는, 가족들의 생계와 편안한 삶을 확보하기 위하여 타협하고 양보하고 시대의 조류에 편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위한 고난보다도, 자신의 안위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모진 고난과 피 흘리심을 통해 완성하신 복음마저 왜곡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우리의 신앙을 연단합니다. 성숙시킵니다.
우리의 신앙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해 줍니다. 바울은 “자녀가 되면 또한 상속자도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을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이 아닙니까?”(롬8:17)라고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상속자 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외쳤습니다. 무엇보다 오늘,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세상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복된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여러분이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와 함께 기꺼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삼일 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욕을 당하면 복이 있습니다.”(벧전4:12a)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기꺼이 동참하십시오. 특권으로 여기십시오.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마십시오. 그것을 통해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받을 수 있는 특권은 물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벅차고 역동적이기까지 한 기쁨과 환희를 선물로 받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6-28)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전11:2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