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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25장 1-13절
그런즉 깨어 있으라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이 파괴될 것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세상의 종말에 대하여 교훈해 주고 계십니다. 이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일이 이미 영원 전에 작정되어 실행이 될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에 세상의 시작과 더불어 세상의 끝도 정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 날과 그 때에 대해서는 계시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아무도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의 천사도 모르며, 심지어 인성을 입으신 예수님 자신도 모른다고 말씀하실 정도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때는 인성으로서 말씀하시는 것이지, 신성으로서도 모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부 성자 성령은 동일본체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부가 아는 것을 성자가 모른다고 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인성으로서는 모른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세상의 마지막 때에 대해서는 감춰져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영원 전에 선택하신 자들의 수 또한 정해져 있으며, 그 모든 수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부름 받을 때가 마지막 때라는 것은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쨌든 이런 종말의 때 전쟁과 기근, 지진 등과 같은 일들이 일어날 것이고, 특별히 교회와 관련해서는 성도를 미혹하거나 환난과 같은 일도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작정의 불변성, 무엇보다 인격적 피조물과 관련해 선택과 유기라는 예정의 불변성 때문에 하나님은 결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기 백성들을 잃어버리시는 일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종말의 때라 할지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오히려 종말은 택하신 백성에게는 완성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성도는 종말에 대한 고대가 있어야 하고, 그런 측면에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준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언제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지금 당장 오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나태해도 괜찮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제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준비하여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준비하며 살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4장 45절 이하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과 악한 종으로 비교하고 있는데, 악한 종에 대해서 먼저 언급하자면 그는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행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주인이 안 보일 때는 주인에 대한 충성이 전혀 없습니다. 특히 51절에서는 주인이 왔을 때 악한 종에 대해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한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들은 누구와 같은가? 외식하는 자와 같습니다. 외식하는 자와 같기 때문에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을 받는다고 말씀하는 겁니다.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이요, 그런 의미에서 주인이 볼 때는 주인에게 충성하는 것처럼 하지만 주인이 안 볼 때는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 자인 겁니다.
반면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은 말 그대로 주인에게 충성하는 자입니다. 주인이 보든, 보지 않든 충성하는 자입니다. 주인이 없다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행하지 않습니다. 주인이 맡겨 준 일에 늘 충성하며 주인이 오실 때까지 그 일을 성실히 행하는 자입니다.
이런 이해 속에서 볼 때 준비하며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주의 뜻을 따라 사는 것, 주의 명령에 순종하며 사는 것, 주인이 기뻐하는 그 일에 충성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주의 뜻을 따라 살 때, 주의 명령에 순종할 때, 주인이 기뻐하는 일에 충성한다고 할 때 항상, 다시 말해 성실하게 행하는 것이 깨어 있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마태복음 25장은 이런 전반적인 내용을 비유로서 말씀하시는 부분인데, 그 첫 번째가 열 처녀 비유입니다. 그리고 열 처녀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내용은 13절을 통해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그러니까 지난주 살핀 내용과 다르지 않는 것을 비유로 설명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비유와 관련해 이미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비유는 결코 쉽게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정리해 두셔야 합니다. 이 부분은 마태복음 13장에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데, 10절 이하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마13:10-13) 보통 비유라 하면 쉬운 설명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 즉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허락되었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을 뚜렷이 나타내는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알려주지 않기 위해서 비유로 설명하신다는 겁니다. 오직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만 천국의 비밀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겁니다.
물론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비유의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에 대한 아무런 이해가 없다기보다는 곡식과 가라지가 섞여 있는 지상 교회 안에서는 말씀에 대한 성령의 조명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 본문의 경우 열 처녀 비유로 전체적인 내용이 준비해야 한다,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 말씀에 대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 즉 유기자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말씀으로 있는가? 어떤 이해도 가질 수 없는가? 그렇게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신다고 할 때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해한다고 할 수 있는 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조명이 없으면 이해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엄밀하게 말하면 그 말씀과 상관없는 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통한 열매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비유로 하자면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진 씨와 같고,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씨와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말씀을 듣고 기쁨으로 받을 때도 있지만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 넘어지거나, 혹은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이해는 있을 수 있으나 열매로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 택자들은 어떤가? 외적으로 볼 때는 돌밭에 떨어진 씨와 같고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씨와 같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기쁨으로 받지만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은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 넘어지기도 하고, 또한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기 백성을 위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옥토로 만들어서 반드시 결실케 하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비유로 말씀하시든, 아니면 비유가 아닌 방식으로 말씀하시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성령을 통하여 그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마음에 새기게 하시고 그 말씀이 마음에서부터 작용하도록 하십니다. 오늘 본문 13절로 말씀드리자면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실 때 깨어 있도록 하시기 위해 친히 일하시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실 때 명령의 형식이라고 해서 그 명령을 받는 자 쪽에 어떤 원인이 있는 것처럼 이해하는 방식에 대하여 주의하셔야 합니다. 명령하시지만 그 명령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말해 명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그 명하신 바를 친히 이루시기 위해서 반드시 자기 백성들에게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24장에서는 어떤 식으로 말씀이 되었느냐? 몇 차례 언급했지만 너희에게 환난이라는 것이 있지만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씀하셨느냐?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겠다고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때 날을 감한다는 것은 실제로 날을 감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셔서 구원을 완성하시겠다는 의미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금 명령의 형식으로 말씀하시는 바가 있지만 이런 형식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부분 명령의 형식으로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본문처럼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이란 존재는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신다고 해서 깨어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깊은 잠을 자는 것처럼 있을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 앞에서 깨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 말씀에 자극을 받아 잠시 깨어 있는 삶을 살 수는 있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항상 깨어 있지는 못합니다. 깨어 있다가도 잠을 드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리들에게 깨어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반드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때문에 명령하신다고 해서 명령이 결코 부담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이런 말씀 앞에서 나태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기 때문에 안 해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자세를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보통 하나님이 다 하신다고 하면 두 가지 반응으로 나타날 때가 많은데, 하나는 하나님이 다 하신다면 우리는 뭐냐는 식으로 반응합니다. 이런 반응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높이기 원하는 쪽에서 자주 대응하는 방식입니다. 공로주의 사고가 거기에 깔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다 하신다고 할 때 그러면 우리는 안 해도 되는 것처럼 반응하는 일들이 있는데, 이것도 주의를 해야 합니다. 다시 강조하여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께서 다 하신다고 할 때 인간의 자유의지도 높이지 말아야 하지만 나태한 자세를 취해서는 안 됩니다.
골로새서 1장 2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여러분, 바울의 유명한 고백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오직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없다는 내용입니다. 수고했으나 그 수고조차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골로새서에서 말하는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역사를 따라 바울은 힘을 다하여 수고한다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의 내용과 함께 이해하자면 힘을 다하여 수고하지만 그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바른 자세는 어디 있는가?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충성인 겁니다. 이것이 지혜롭고 슬기로운 모습인 겁니다.
이런 전반적인 이해를 가지고서 오늘 본문을 보시면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비유 전체를 통해 볼 때 지금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는 오늘날 지상의 교회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위 믿는다고 말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무엇에 비유되고 있는가?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고 말씀합니다. 이때 신랑은 장차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본문과 관련해 당시 유대인들의 혼인 예식과 관습에 대해 약간 말씀드리자면(매튜 풀 주석 참조), 그들의 혼인예식은 통상적으로 밤에 치러졌다고 합니다. 그때 신랑의 들러리 역할을 할 청년들이 있었고, 신부의 들러리 역할을 할 처녀들은 신부의 아버지의 집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혼인예식이 밤에 치러졌기 때문에 등이 많이 필요했는데, 신랑이 도착하면 신부의 들러리들인 처녀들은 등에 불을 밝히고 나가서 신랑을 맞아, 신랑과 그의 친구들을 집으로 들이고 신부가 될 여자에게 데려다 주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들어온 후에는 문아 닫히고 혼인예식이 시작되었는데, 오늘 본문의 비유는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배경 자체를 알지 못하다 해도 비유를 알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열 처녀가 있다고 할 때 2절에서는 이들을 두 부류로 나누는데,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미련한 자는 누구고, 슬기 있는 자는 누군가? 마태복음 24장에서 우리는 두 사람이 밭에서 일을 하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고 다른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하는 내용을 살펴보았는데, 미련한 자는 바로 후자입니다. 버려둠을 당하는 자! 반면 슬기 있는 자는 하나님께서 데려가시는 자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고 할 때 그 안에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마태복음 25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미련한 자이고, 다른 하나는 슬기 있는 자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곡식과 가라지에 대한 비유가 나오는데(마13:36-43), 하나님 나라라고 말할 수 있는 교회 안에는 곡식이 있는가 하면 가라지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이들 가운데 슬기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데려가시는 자들이 분명합니다. 반면 미련한 자는 버려둠을 당하는 자입니다.
그럼 왜 한 부류에 대해 미련한 자라고 하는가? 그리고 또 다른 부류에 대해서는 슬기 있는 자라고 하시는가? 3절과 4절에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그리고 이런 내용이 이후 말씀과 함께 확인하게 될 때 미련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한 마디로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신랑이 올 때까지 등의 불이 밝혀져 있어야 하는데 언제 올지도 모르는 신랑에 대하여 기름을 준비하지 않음으로 한시적으로만 등을 밝힐 수 있었던 겁니다. 반면 슬기 있는 자들은 등과 함께 그릇에 기름을 담아 불이 꺼지지 않도록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매튜 헨리 주석을 보면 이 부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들은 장차 오는 것을 전망하거나 준비하지 않았다. 그들은 현재 남에게 보이기 위해 등불을 가지고 있었지만, 후에 쓰기 위하여 기름을 준비하지 아니하였다. 많은 신자들이 멸망하는 것은 그들이 사리를 잘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관심은 현재 교제를 하는 이웃들에게 호감을 사는 것이며, 그들이 장차 앞에 서게 될 그리스도에게 인정함을 받는 것은 아니다. 현재 쓸모 있는 것이면 어떤 것도 쓸모 있게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개미가 하는 것처럼 후에 것을 위해 준비를 하지 않으며 또한 ‘장래를 위해 쌓아 두려고’(딤전6:19)도 하지 아니한다.”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마지막 때가 마치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할 때 사람들이 몰두하는 것은 이 세상 나라에 속한 것으로 있지 결코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하지 않았는가? 노골적으로 말하면 이 세상 나라에 너무 몰두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에 대한 관심은 없고 오로지 육적인 일에만 관심을 가졌던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미련한 자들이나 슬기 있는 자들이나 신랑을 맞으러 나갔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나가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달리 말하면 외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자들로 있다는 것입니다. 열 처녀 비유가 지상의 교회를 의미한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지상의 교회는 적어도 외적으로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자들로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두 부류로 나눠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 부류는 미련한 자요, 다른 한 부류는 슬기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미련한 자라고 할 때 그들은 외적으로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린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바리새인들처럼 돈을 좋아하는 자들입니다(눅16:14).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이 있는 것 같지만 실상 하나님 나라가 아닌 이 지상의 나라가 모든 것인 것처럼 생활합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그런 일에만 몰두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외식하는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제로 등은 있는데 기름이 없다는 것은 외식을 나타는 것으로 설명하는 분도 있습니다(JS). 등은 불을 비추기 위해서 있는 것이고, 불을 위해서는 기름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없다는 것은 뭐냐? 경건의 모양만 있고 능력을 부인하는 자와 같다는 것입니다(딤후3:5).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는 자와 같다는 것입니다(롬10:3).
그러나 우리는 어떤 자들인가? 결코 외식하는 자가 아닙니다. 준비되지 못한 자가 아닙니다. 준비된 자요, 그런 측면에서 경건의 능력을 갖추되 자기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는 자들입니다. 로마서 1장 17절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럼 복음이란 무엇인가? 로마서 1장 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그리고 로마서 3장 21절 이하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3:21-26)
여러분, 기름을 준비한다는 것은 이미 앞선 내용들을 살펴보면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열매의 성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열매 이전에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믿음이 있는가를 점검하셔야 합니다. 방금 읽었던 말씀처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분명한 사실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열매만 있으면 된다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열매여야 합니다.
마태복음 22장에서 혼인 잔치 비유를 살펴보았는데, 거기 보면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았지만 예복을 입지 않음으로 쫓겨나는 사람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때 예복이란 무엇인가 했을 때 어떤 사람은 믿음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 열매로서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참된 경건을 낳게 되어 있고, 참된 경건은 참된 믿음에만 근거하기 때문에 둘은 분리할 수 없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로마서 13장에 어떤 표현이 있느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롬13:14) 믿음도 좋고 믿음에 따른 열매도 좋습니다. 그러나 더 근원적인 성격은 무엇인가? 그리스도로 옷 입지 않고는 이 모든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즉 예복은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요, 그리스도가 우리의 거룩이요, 그리스도가 우리의 지혜요, 구원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고전1:30).
그러므로 기름을 준비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입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 다시 말해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신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 없이는 결코 준비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믿음을 점검해야 하고, 또한 믿음에 따른 열매가 있는가를 점검하셔야 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오셔서 5절을 보시면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이것은 주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처럼 언제, 어느 날 주님께서 오실지 모른다는 측면에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심판의 때가 분명 있지만, 그것도 하나님 안에서는 변치 않는 것으로 있지만, 우리는 그 날과 그 시에 대해서는 모르기 때문에 신랑이 더디 오는 것처럼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신랑이 더디 오는 것으로 인해 열 처녀가 다 졸며 잔다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13절에서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실 때 그 내용은 분명 이후 내용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기름을 준비했느냐, 준비하지 않았느냐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름을 준비했다고 해서 밤중에 신랑을 맞는다고 할 때 졸지 않고 있을 수 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칼빈의 경우 졸며 잔다는 것에 대해 ‘신자들이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 매여 있을 수밖에 없는 지상적인 것에의 집착’으로 해석합니다. 매튜 풀 주석의 경우는 졸거나 잤다는 것은 아무리 훌륭한 신앙인들일지라도 그들의 마음은 깨어 있지만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졸거나 잘 수밖에 없다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런 해석들을 참고하자면 참된 신자일지라도 육신의 연약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고, 또한 육신의 연약함을 따라 지상의 것에 마음을 쏟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무엇이 다른가?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기름을 준비했느냐, 하지 못했느냐에 있습니다. 6절 이하에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마25:6-10) 밤중에 신랑이 왔다는 것은 앞선 본문과 비교해 볼 때 환난과 역경의 어두운 때, 그리고 사람들이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오셨다는 것이고, 비록 모두가 잠들었지만 신랑이 왔다는 소리에 등과 기름을 준비한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 그리고 참된 믿음에 따른 열매를 맺고 있는 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등만 가지고 있고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자는 외적으로 볼 때는 그리스도로 옷 입은 것 같고, 참된 믿음을 가진 것 같고, 그리고 그에 따른 열매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지막 때 그렇지 않은 것이 다 드러날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기름을 좀 나눠주는 것이 미덕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 비유의 목적, 다시 말해 주님께서 비유를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지를 생각해야지, 초점과 거리가 먼 것으로 시비할 것은 아닙니다.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성도는 하나님께서 각 개인에게 주신 분량에 따라 서로가 서로를 도와가면서 살아야 합니다. 교회가 있다고 할 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라는 생각을 가져야 하고, 부족한 자가 있다면 넉넉한 자가 부족한 자를 채우는 일이 필요합니다. 달리 말하면 서로가 서로에게 유익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오늘 본문의 비유는 그런 측면의 내용인 아닌 겁니다.
매튜 풀 주석에서는 이 부분과 관련해 이런 해석도 내놓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조금 빌려 달라고 했을 때, 슬기로운 처녀들이 자신들이 쓰기에도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는 것은, 위선자들과 외식하는 자들이 마침내 벌을 받게 되었을 때에 다른 사람들이 지닌 은혜와 선한 행실들에 기대어사 자신들의 벌을 면해 보려고 애를 써도, 그것은 헛수고가 될 것임을 우리에게 알게 해준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 가톨릭의 교리로서 성인들의 잉여분의 공로가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굉장히 어리석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앉아 있는 우리 자녀들도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은 혹 내 부모 때문에 나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생각은 버리셔야 합니다. 부모 신앙 때문에 천국에 가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여러분이 언약의 자손이긴 하지만 여러분이 그리스도로 옷 입지 않고는, 다시 말해 여러분이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고는 결코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때문에 주일 예배 시간에 들려지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가정에서 가정예배를 드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에서 드리기 때문에 좀 편안한 마음으로 드릴 수 있고, 자칫 부주의하기 쉽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시간에는, 예배를 드린다고 할 때는 좀 진지하게 앉아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들음은 그리스도의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지 않고는 믿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그리고 동일한 차원에서 어릴 때부터 성경을 읽으십시오. 읽으시면서 하나님께 지혜를 주시도록 그리고 믿음을 주시도록 기도하면서 읽으셔야 합니다.
11절 이하 13절을 보시면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여러분, 위선자들이나 외식하는 자들이나 형식적으로 신앙 고백을 하는 자들은 외적으로는 믿음의 고백을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지 않으면 외적인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야지만 성령의 열매 또한 가능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런 말씀을 주시는 것은 마지막 때 회개하려고 해도 늦기 때문에 지금 자신을 돌아보도록 한다는 의미에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깨어 있으라는 겁니다. 잠을 잘 수도 있습니다. 육신의 연약함과 우리의 어리석음 때문에 항상 깨어 있지 못한 모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이상,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이상, 열매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지난주에 데살로니가전서 5장의 말씀을 살폈는데, 그 내용 가운데 열매와 관련된 부분과 그 이후 부분까지 살피면서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11절부터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5:11-24)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성도 안에 화목이 있어야 합니다.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는 일이 있어야 하고,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면서 오래 참아야 합니다. 악에 대하여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갚아야 하는 것이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입니다. 항상 선을 따르는 것, 그리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성도의 열매여야 합니다.
특히 19절 이하에서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존중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말씀과 분리하지 않고 일하시며, 때문에 말씀에 대한 존중은 성령을 소멸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범사에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말씀하시면서 바울이 어떤 말을 하느냐? 23절에서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너희가 이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지만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4절에서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그러니까 우리의 열심은 그분의 은혜의 결과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열심을 안 내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려주시지 않았기 때문인가?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때는 우리의 나태함, 우리의 안일함이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준비하라,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실 때 서두에서 말씀을 드린 것처럼 누가 이루시는지를 분명히 해야 하고, 그리고 난 뒤 그 안에서 우리의 마땅한 바가 무엇인지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천국은 바로 이런 자들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