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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회 집회서 31장-51장
집회 31,1-31 재물/만찬/ 술
“5 황금을 좋아하는 자는 의롭게 되지 못하고 돈을 밝히는 자는 돈 때문에 그릇된 길로 들어서리라. 6 많은 이들이 황금 때문에 파멸하였고 멸망이 그들 앞에 닥쳤다”(5-6). 재물은 모으려고 열심한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인간이 얼마나 타락할 수 있는지 벤 시라는 경고한다.
“14 남이 눈독을 들인 음식에 손을 내밀지 말고 같은 그릇에 손을 대다 그와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15 네가 좋아하는 것을 남도 좋아하리라고 여기며 모든 일에 신중하여라”(14-15). 음식과 술에 대한 가르침을 하면서 세련된 예절 규범을 상세히 말한다.
술에 대해 저자는 상세히 이렇게 상세히 말한다. “25 술 마시는 것으로 남자다움을 과시하지 마라. 술은 많은 사람을 망쳤다. 26 대장간의 화덕이 담금질로 쇠를 시험하듯 거만한 자들이 말다툼할 때 술은 그들의 마음을 드러낸다. 27 술은 알맞게 마시면 사람들에게 생기를 준다. 술 없는 인생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술은 처음부터 흥을 위해 창조되었다. 28 제때에 술을 절제 있게 마시는 사람은 마음이 즐거워지고 기분이 유쾌해진다. 29 술을 지나치게 마신 자는 기분이 상하고 흥분하여 남들과 싸우게 된다”(25-29).
집회 32,1-13 파티 또는 잔치에서의 자세
파티라는 말을 흔히 쓰기 때문에 여기에서 양해를 바란다. 벤 시라는 교양 있는 사람이 식탁에서 지켜야 할 태도에 대해 길게 권고한다. 먼저 화려한 점심 식사인 잔치에 대해 말하고, 예의와 절제를 권한다(31,12-24). 그리스 문화에서는 이러한 식사 후에 향연(sympósion)을 열곤 했는데, 그때에는 초대받은 이들이 좋은 포도주를 마시며 어떤 주제에 대해 함께 토론을 했다. 플라톤의 <향연>은 이를 보여 주는 고전적인 문학 작품이다. 토론과 함께 음악도 연주했다. 벤 시라는 예루살렘에서도 헬레니즘에 호의적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미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이러한 그리스 관습에 대해서 개방적이지만, 참석할 때의 태도에 대하여 몇 가지 권고를 한다. 그래서 그는 포도주를 마시는 것에 대해서도 말하는데(31,25-31), 여기에서도 절제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끝이 좋지 않을 것이다. 그다음에는 고유한 의미의 향연에 대해 말한다. 이 단락은 히브리어 본문을 사용할 것이다.
집회 32,1-2 잔치 주관자
향연은 초대된 이들이 택한 한 사람의 주관 하에 이루어졌다. 그는 향연이 매끄럽게 진행되도록 감독하면서 우호적인 분위기를 유지해야 했다. 벤 시라가 주관자에게 하는 권고는 다음과 같다. “1 사람들이 너를 잔치 주관자로 내세우더라도 우쭐대지 마라. 그들 앞에서 손님들 가운데 하나로 처신하여라. 다른 사람들을 먼저 보살피고 그다음에 자리에 앉아라. 2 네 임무를 다하고 자리에 앉아라. 그리하여 손님들과 즐거움을 나누고 훌륭하게 처신하여 화관을 받도록 하여라”(1-2).
향연을 주관하는 것이 그 주관자를 교만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 일은 봉사이지 허영이나 자만을 갖게 할 우월함이 아니다. 주관자는 각자가 필요한 모든 것을 받도록 주의를 기울일 것이며,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이 처신할 것이다. 모든 이가 정돈되고 음식을 받은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그리스인들과 그들을 모방한 이들이 잔치나 향연을 위해 눕던 침상에 자리를 잡을 것이다. 향연이 잘 진행되어 모두가 만족하면 겸손하고 봉사적인 주관자는 참석한 이들에게 칭찬을 받을 것이며, 이것이 그의 보상이 될 것이다. 봉사를 받기 전에 봉사하는 것, 한마디로 이것이 벤 시라에게는 주관자의 참된 역할이다.
집회 32,3-6 원로
대화에 관련해서, 벤 시라는 먼저 원로에게 이렇게 권고한다.
“3 원로여, 그럴 자격이 있으니 말하여라. 정확한 지식으로 이야기하되 음악을 방해하지는 마라. 4 여흥이 한창일 때 말을 많이 하지 말고 적절하지 못한 때에 지혜로운 체하지 마라. 5 술자리에서 연주되는 음악은 금장식에 박힌 홍옥 인장과 같다. 맛 좋은 술에 노랫가락은 금 장신구에 박힌 취옥 인장과 같다”(32,3-6).
먼저 말을 하는 것은 원로의 몫이다. 그러나 백발의 원로도 말할 때에는 자제해야 하고, 향연에서는 음악에게도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말을 쏟아 부어 향연에 참여한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는 것보다는 잔에 포도주를 따르는 것이 낫다. 무절제하게 지혜를 쏟아 놓는 것은 사람을 언짢게 한다.
“정확한 지식으로 이야기 하되 음악을 방해하지는 마라.” 이는 유명한 구절이다. 벤 시라에게 향연에서 악기의 멜로디나 사람의 노랫소리는 장신구에 박힌 진주와 같았다. 그런 음악을 기다리게 할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은 벤 시라가 원로에게 하는 권고에 속한다.
집회 32,7-10 젊은이
“7 젊은이여, 필요하다면 말을 하여라. 그러나 사람들이 요청하더라도 두 번 이상은 말하지 마라. 8 많은 것을 간결하게 말하고 알면서도 침묵하는 사람이 되어라. 9 고관들 가운데에서는 권위를 내세우지 말고 노인들이 있는 자리에서는 말을 많이 하지 마라. 10 천둥에 앞서 번개가 치듯 겸손한 이에게는 호의가 앞서간다”
이것은 말이 많고 신중하지 못한 엘리후에 대한 비판일까? 말이 많고 나서는 젊은이는 경험 많은 이들의 인정도 칭찬도 받지 못한다. 반대로, 노인들이 젊은이의 의견을 들으려고 할 때 조심스럽고 겸손하게 말한다면 그는 많은 것을 얻을 것이다. 핵심적인 말을 한다면 그는 모든 이에게 존중을 받을 것이다.
집회 32,11-13 마지막 권고
벤 시라는 교양의 마지막 한 가지 모습을 언급한다. 잔치가 끝나면 머뭇거리지 말고 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다. 집에서는 아직 모든 이들이 지나치지 않게 무엇인가를 먹을 수 있을 것이다(집회 32,11-12).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다.
“이 모든 일을 두고, 너를 만드신 분께 찬미를 드려라. 그분께서는 당신의 선물로 너를 흡족하게 해 주신다”(32,13).
지혜의 스승은 이 구절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그는 자기 시대에 맞추어 살고, 이교 세계에서 유래한 것이라도 사회생활의 특정한 문화적 형태를 원칙적으로 거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또한 자신과 같은 모든 이들에게 예의의 원칙을 상기시키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여겼다. 마지막 축복은 식탁의 즐거움 속에서도 그 즐거움을 주시는 분을 잊지 않는 현인의 모습을 나타내 준다.
집회 34,9-11 여행에 대한 권고
“9 여행을 많이 한 사람은 아는 것이 많고 경험이 많은 사람은 지각 있게 말하리라. 10 시련을 겪지 않은 사람은 아는 것이 적지만 11 여행을 많이 한 사람은 모든 일에 능통하다”(9-11). 여행은 많은 경험을 쌓게 한다. 여행을 통해 지혜와 삶의 가치를 더 깊이 느끼며 포용의 가치를 배울 수 있다.
집회 35,1-26 참된 신앙인
집회서 저자 벤 시라는 종교의 경신례를 중시하면서도, 예언자들의 전통에 따라 율법 준수와 동일시 하고 있는 올바른 윤리 생활을 강조한다. “1 율법을 지키는 것이 제물을 많이 바치는 것이고 2 계명에 충실한 것이 구원의 제사를 바치는 것이다”(1-2). 벤 시라는 제물을 바치는 자에게 올바른 윤리 생활을 요구하시는 하느님께 물질인 제물 자체는 그리 큰 의미가 없음을 밝힌다. “10 기꺼운 마음으로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네 손의 첫 열매를 바치는 데에 인색하지 마라. 11 제물을 바칠 때는 언제나 즐거운 얼굴을 하고 십일조를 기쁘게 봉헌하여라”(10-11). 봉헌의 참된 의미를 여기서 말한다. 기꺼운 마음과 주님께 영광을 드리는 데 어떤 잣대를 갖고 있어선 안된다. 기쁜 마음으로 제물을 바치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하다.
“겸손한 이의 기도는 구름을 거쳐서 그분께 도달하기까지 위로를 마다한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살펴 주실 때까지 그만두지 않으니”(21). 기도는 겸손에서 시작된다. 겸손은 자비의 마음을 갖고 주님게 우리를 전적으로 의탁하는 것이다.
37,1-6 참된 친구와 거짓 친구
“1 모두들 ‘나도 네 친구다.’ 하지만 어떤 친구는 이름만 친구일 뿐이다. 2 동무나 친구가 원수로 변하면 죽는 것처럼 슬프지 않겠느냐? 3 악한 생각아, 너는 왜 생겨나서 지상을 거짓으로 뒤덮느냐? 4 어떤 동무는 친구가 행복할 때는 기뻐하다가 곤경에 놓일 때는 그에게 맞선다”(1-4). 친구가 있다는 것은 삶의 기쁨이다. 서로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친구 한명이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집회 37,27-31 절제
“27 얘야, 살아가면서 너 자신을 단련시켜라. 무엇이 네게 나쁜지 살펴보고 거기에 넘어가지 마라. 28 사실 모든 것이 누구에게나 좋은 것이 아니며 모든 것을 누구나 즐기는 것은 아니다. 29 온갖 사치를 누리려 하지 말고 과도하게 음식을 탐하지 마라”(27-29). 자신을 살피는 것, 수신(修身)은 나를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한다. 절제(節制)는 우리 삶의 기준을 갖도록 하는 지침과 같다.
집회 38,16-23 애도
“16 얘야, 죽은 사람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극심한 고통을 겪는 이처럼 애도를 시작하여라. 죽은 사람의 처지에 따라 그 시체를 염하고 그의 장례를 소홀히 치르지 마라. 17 슬피 울며 통곡하여라. 애도는 죽은 사람의 지위에 따라 하루나 이틀 동안 계속하여 비난받지 않도록 하여라. 그러고 나서 너 자신의 슬픔을 달래라”(16-17). BC 1세기 초부터 AD 2세기 말까지 약 300여년동안 당시 장례 풍습은 사망 당일에 시신을 동굴 속에 안치한 뒤, 1년 후에 뼈를 추려서 유골함에 넣는 2차 장례를 치렀다.
일반적으로 임종(臨終)한지 스물네 시간 안에 장례식을 행한다. 유대인들은 신명 21,23에 의하면 "그 주검을 밤새도록 나무에 매달아 두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그날로 묻어야 한다“를 근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혹 멀리 살거나 여행 중에 있는 친인척의 도착을 기다리는 경우 약간의 시간은 연장하기도 한다. 그들의 장례식 참여가 고인에 대한 경의의 표현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장례 기간은 한국의 삼일장, 오일장, 칠일장 등에 비하여 그 기간이 매우 짧다. 한국의 경우 고인의 지위가 높을수록 장례식 기간이 길어지는 경향이 있으나, 이와는 반대로 유대인들은 시신을 장기간 묻지 않은 상태로 두는 것을 고인에 대한 불경으로 여긴다. 흙에서 왔으니 가능한 한 빨리 흙으로 보내주는 것이 고인에 대한 예우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영혼은 이미 하느님에게로 갔는데 육신은 살아 있는 자의 땅에 오래동안 붙잡혀 있는 것이 고인에겐 모독이요 유족에겐 부끄러움이라는 생각이다.
예로부터 유대인들은 관을 운반하는 일을 특별히 귀한 선행으로 여겨왔다. 관은 고인의 친구들이 운반한다. 운구야말로 죽은 사람에 대한 마지막 선행이며, 어떤 보답을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인의 친구들은 무덤으로 관을 운반할 때 유대 전통에 따라 일곱 번 멈추어 선다. 이는 코헬렛에 히브리어의 '헤벨'이라는 말이 일곱 번 나오기 때문인데, 우리 말로 '허무로다'라는 뜻이다. 관을 무덤에 놓은 후, "그(녀)가 평화 중에 그(녀)의 자리로 돌아가기를"이라고 낭송한다. 삽으로 약간의 흙을 떠서 두세 번 관 위에 붓는다. 이 때 유가족들은 흙이 관 위에 부어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한다. 첫 삽의 흙이 관 위에 부어지는 소리는 유가족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고인과의 영원한 이별의 소리이기 때문이다.
하객들은 관이 완전히 흙으로 덮히기까지 무덤을 떠나지 않는다. 관이 흙에 덮여 보이지 않게 되면 자유롭게 무덤을 떠날 수 있다. 그러나 무덤이 완전히 흙으로 메워지기까지 몇몇 사람들은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이 관례이다. 무덤을 떠난 후 유대의 예법에 따라 손을 씻는다.
가까운 친척들이나 친구들은 이 기간동안 유족을 방문하여 그들을 위로한다. 유족들은 집에 촛불을 밝히며 이발이나 목욕을 금한다. 화장품을 사용과 가죽 제품의 사용을 금한다. 예를 들어 가죽으로 만든 구두를 신을 수 없다. 자에 앉는 것도 금한다. 그러나 등 없는 낮은 걸상에 앉는 것은 허용한다. 사업 문서에 서명하지 못하며, 목욕도 하지못하며 심지어 토라를 공부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다. 이 기간 동안엔 집을 떠나서도 않된다. 유대 전통에 따르면 상가집을 방문 하였을 때 유족이 먼저 말을 걸지 않는 경우외에는 방문자가 먼저 말하지 않는 것이 예의이다. 칠일의 기간이 지나면 첫번째 맞는 안식일에 회당에 나간다. 장례식 후 칠일이 지난 후 유족을 다시 직장에 출근한다.
집회 39,5-9 기도와 가르침
이 긴 기도는 저자의 명철함과 치밀함을 잘 드러내 준다. 그런데 벤 시라는 이 기도를, 현인이 기도했던 두 가지 점에 대한 가르침 앞에 놓았다. 이 기도와 그 가르침은 어떤 연관이 있는가? 그 연관의 성격을 밝힐 수 있을까? 벤 시라는 이렇게 말한다.
“5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자신을 만드신 주님을 찾는 일에 마음을 쏟고 지극히 높으신 분 앞에서 기도한다. 기도 중에 입을 열어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청한다. 6 위대하신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그는 지각의 영을 충만히 받으리라. 그리하여 그분 지혜의 말씀을 쏟아 내리라”(5-6).
즉, 스승의 가르침은 그의 기도의 결실이며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벤 시라는 이를 확신했기에, 여기서 분석하는 그의 기도가 가르침에 앞서 나오는 것은 현인 자신의 경험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이 두 가지 기도는 충분히 벤 시라 자신의 기도였을 수 있고, 이어서 그가 베풀 가르침은 그가 아침에 주님께 청했던 그 진리의 은혜를 입는다.
그러나 제자는 – 또한 모든 시대의 독자들도 – 여기에서 한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이제는 그가 스승의 경험을 되풀이할 차례다! 지혜의 가르침을 듣기 전에, 그것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먼저 스승의 말이 참으로 우리에게 확신을 주고 또한 우리가 삶에서 그것을 실천할 수 있도록 주님 앞에서 도움을 청해야 하는 것이다.
집회 42,15-50,24 세상과 역사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영광
교훈을 마친 다음 벤 시라는 우주의 하느님 업적의 위대함에 대하여 주님을 찬미한다(42,15-43,33). 이어서 태초부터 그의 시대까지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을 기억하면서 고대 전통에서부터 ‘조상들에 대한 칭송’이라고 불린 본문(44,1-50,24)을 시작한다. 이 두 부분은 상보적이다. 저자는 주님께서 창조하신 세상과 그분께서 이끄시는 인간 역사에서 주님의 활동을 드러내려고 한다.
현인은 주님께서 우주의 모든 요소와 인간 역사의 전개 과정을 완전히 통치하신다고 보는 오랜 성경 전통에서 영감을 받았을 수 있다. 특히 시편 104편과 105편을 생각하게 되는데, 그 가운데 시편 104편은 우주에서 이루어지는 주님의 활동에 대해서, 그리고 시편 105편은 이스라엘의 시초에 이룩하신 놀라운 일에 대해서 주님을 찬미한다. 시편 136편도 생각하게 된다. 여기에서는 두 가지를 결합시켜, 4-9절에서는 창조를 말하고 10-24절에서는 역사를 말한다.
벤 시라의 이 특징적인 본문에 대해서는 히브리어 본문이 전해진다. 우리는 두 부분의 구조를 설명하는 것으로 그칠 것이다.
집회 42,15-43,33 세상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영광
자연을 통하여 드러나는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노래하는 친미가이다. 현인은 앞으로 나선다. “15 나는 이제 주님의 업적을 기억하고 내가 본 것을 묘사하리라. 주님의 업적은 그분의 말씀으로 이루어졌고 그분의 결정은 선의에서 나왔다. 16 찬란한 태양은 만물을 내려다보고 주님의 업적은 그분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다”(42,15-16). 그는 지혜의 스승으로서 말할 것이다. 주님께서 당신 선하심으로 당신 말씀을 통하여 창조하신 업적은 가르침을 준다. 그분의 모든 업적 위에 태양보다 더 빛나는 것이 그분의 영광이기 때문이다(42,16).
스승의 기획은 제한된 것일 수밖에 없다. 유일하게 하느님 앞에 있는 천사들에게도 하느님은 당신의 모든 놀라운 일을 이야기할 수 있는 힘을 주지 않으신다(42,17). 오직 주님만이 지금 존재하고 앞으로 존재할 모든 것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갖고 계신다. 그분은 심연의 비밀과 사람의 마음의 비밀을 드러내신다(42,18-19). 그분의 통찰력에는 한계가 없다. 그것은 절대적이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42,20-21).
인간의 눈은 섬광같이 아주 작은 한 부분밖에 보지 못하지만, 우주에 있는 주님의 업적은 모두 소중하며 필요한 동안 보존된다. 태양과 달처럼 짝을 이루고 있어서 밤이나 낮이나 모든 경우에 대비한다. 그들은 모두 아름답고, 아무도 그 광채를 바라보기에 지치지 않을 것이다(42,22-25).
집회 43,1-26 세상에 대한 묘사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욥 38-39장이 바탕으로 삼은 목록에는 같은 범주에 속하는 것들이 모여 있었다. 이러한 목록은 일차적인 지식을 분류하는 것으로 중동의 현인들은 여러 세기 전부터 이들을 사용했다. 욥 38-39장의 저자와 마찬가지로, 벤 시라도 그러한 목록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이 창조주의 업적이며 그분께서 이들을 살아 있게 하신다는 점을 되풀이하여 말한다.
벤 시라는 우주의 요소를 두 부류로 나눈다. 하늘에 속한 것들이 한편이고(32,1-12), 인간 가까이 땅 위에나 바다에 있는 것들이 다른 한편이다(43,13-36).
창공은 영광이다(43,1). “ 맑은 창공은 드높은 곳의 자랑이며 하늘의 모습은 찬란한 영광 속에 드러난다. 동이 틀 때 떠오르는 태양은 놀라운 도구가 되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한다”(1-2). 고대인들은 “하늘의 궁륭”이라는 표현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였다. 태양에 대해서 그 열기와 눈을 부시게 하는 광채를 강조한다. 태양을 그렇게 빛나도록 하시는 분은 창조주시다(43,2-5). “태양을 만드신 주님게서는 위대하시고 그분의 명령에 따라 태양은 제 궤도를 바삐 돈다”(5).
달은 여러 단계를 통하여 절기를 결정한다. “6 달은 제때에 맞춰 자리를 잡고 시간과 시대의 표징을 알려 준다. 7 축제의 표징도 달에서 나온다. 이 빛물체는 완전히 찼다가 기운다”(6-7). 이에 따라 축제일도 정해진다(이사 1,13-14 참조). 태양력에 근거하여 축제일을 정하기도 했던 쿰란 공동체에서와 달리 벤 시라 당시의 관습은 그러했다(43,6-8). 벤 시라 시대에 공식적인 전례력은 월력에 기초했고 나중에 이를 바리사이들이 수용한다. 유다인의 양대 축제인 무교절과 초막절은 보름날 시작하여 팔 일 동안 지속되었다. 별들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정해 주시는 자리에 충실하다(43,9-10). “하늘의 아름다움은 별들의 영광이고 별들은 주님의 드높은 처소에서 빛나는 장식이다”(9). 그리고 무지개는 얼마나 엄위로운가! “무지개를 바라보며 그것을 만드신 분을 찬미하여라. 그 찬란함은 매우 아름답다”(11). 무지개는 하느님과 온 세상 사이에 맺어진 계약의 표징이다(창세 9,12-17).
둘째 대목은 지상 세계를 그려 보인다. 특히 저자의 관심을 끄는 것은 겨울에 지상에서 일어나는 기상 현상이다(43,13-20). “18 사람들은 흰 눈송이의 아름다움을 보고 경탄하며 그 떨어지는 모습에 마음을 빼앗긴다. 19 그분께서는 서리를 소금처럼 땅에 뿌리시고 나무 끝에 얼음 꽃을 피우신다”(18-19). 실상 예루살렘에서 겨울은 생각보다 춥다. 해발 800미터인 그곳에서는 추위와 궂은 날씨 때문에 고생할 수 있다. 때로는 날아가는 새처럼 천천히 하늘에서 내려오고 때로는 메뚜기 떼처럼 마구 쏟아지는 매혹적인 눈에 경탄할 수도 있다. 소금을 생각나게 하는 서리나 사파이어처럼 물이 고인 곳을 덮는 얼음을 볼 수도 있다. 반대로 여름에는, 드물게 나타나는 구름이나 아침의 이슬이 뜨거운 열기를 식혀 준다(43,21-22). “21 그분께서는 산을 삼키시고 광야를 달아오르게 하시며 불처럼 초목을 살라 버리신다. 22 그러나 안개가 이내 이 모든 것을 어루만져 주고 이슬이 내려와 더위에서 생기를 찾게 해 준다”(21-22).
바다로 말하자면 – 바다는 성경 신화의 바다 괴물과 마찬가지로 라합이라고도 불리는데(욥 26,12 참조) - 그것을 지배하는 것은 주님의 지혜다(마르 4,35-41 참조,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폭풍을 가라앉히신다). 저자는 지중해와 그곳의 섬인 키프로스, 로도스, 크레타 등을 생각하고 있다. 항해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놀라움을 불러일으킨다(사도 27,9-44, 바오로가 겪은 폭풍 이야기 참조). 그 크기에서만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생명 때문에도 그렇다. 벤 시라는 놀라운 돌고래를 생각하는 것일까? 상인이나 여행자가 바다를 건널 수 있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당신의 힘 있는 말씀으로 바다를 지배하시기 때문이다(43,23-26). “그분 덕택에 그분의 사자가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고 만물이 그분의 말씀에 따라 잘 정돈되어 있다”(26).
집회 43,27-33 끝맺음
벤시라는 이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끝을 맺는다. 마지막에 이상한 말이 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말로 이야기해도 미치지 못하니 ‘그분은 전부이시다’”(27). 최소한으로 말해서, 주님은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천이시며 모든 것이 그분의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스승은 이 단락을 끝내면서 쉬지 말고 목소리를 낮추지도 말고 주님을 찬미하라고 끊임없이 권고한다. 실상 우리의 찬미는 결코 하느님께 맞갖을 수 없을 것이다. 그분은 그분의 찬란한 업적들보다 뛰어나시다(43,28-30). 그분을 뵈었다고 한들 누가 그분을 있는 그대로 묘사할 수 있으며 마땅하게 그분을 찬미할 수 있는가?(43,31) 크신 하느님은 신비로 남는다.
창조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조금뿐이며, 많은 부분이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다. “이러한 것들보다 큰 일들이 많이 숨겨져 있으니 우리는 그분의 업적 가운데 조금만을 보았을 뿐이다”(32)라고 벤 시라는 인정한다. 분명한 것은 한 가지다. “정녕 주님께서 만물을 만드셨고 경건한 이들에게 지혜를 주셨다”(33). 그리고 조상들에 대한 칭송을 예고하면서, 스승은 그분께서 경건한 이들에게 지혜를 주셨다고 덧붙인다.
한마디로, 벤 시라에게 우주에 대한 관조는 창조주를 찬미하도록 자극한다. 창조주는 우주보다 더 위대하시다. 그런 의미에서도 “그분은 전부이시다.” 그분은 당신 업적을 무한히 초월하신다.
집회 44,1-50,24 조상들의 칭송
지혜와 신심은 벤 시라가 칭송하는 조상들의 공통된 덕이다. 그가 서술하는 역사는 계약의 역사가 아니라 하느님 백성 가운데 자리 잡은 지혜의 역사이다. 벤 시라의 조상들에 대한 칭송은 기원전 2세기 경건한 유다인 마타티아스가 남긴 유언(1마카 2,51-64)과 흡사한 면이 있다.
현인이 우주의 놀라움을 관조하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알아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의 역할은 거의 자연적으로 그가 창조의 신학을, 창조된 실재들에 대한 신앙인의 숙고를 펼쳐가게 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은 현인들에게 필수적이었다. 이들은 인간이 성장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따라야 할 길들을 비추려고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인이 자기 민족의 특수한 역사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이스라엘에서 새로운 일이었다. 벤 시라 이전에는 어떤 스승도 이러한 전망을 열지 않았다. 그 이후로는 지혜서의 저자가 그를 뒤따를 것이다.
그러나 벤 시라는 역사가가 아니라 현인으로서 – 지혜서의 저자도 마찬가지인데 – 역사적 계시에 대해 말하고, 그 계시의 보편적 의미를 통찰한다. 앞에서는 17,11-14에서 그렇게 했고, 더 분명하게는 24,8-22에서도 그랬다. 그 찬미에서는, 적어도 명시적으로는 지혜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벤 시라는 이스라엘의 가장 유명한 조상들에 대하여 기술한다. 성경의 역사가 흘러 온 여러 세기 동안 지혜는 어떻게 자신을 받아들인 충실한 이들을 만났던가?(43,33 참조)
지혜 10장 외에, 이와 유사한 초상들은 더 늦은 시기의 1마카 2,51-64에서 볼 수 있다. 이 본문은 모세의 율법에 충실하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또한 히브 11장에서도 조상들의 믿음은 모범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뒤에 언급한 두 본문은 지혜문학의 성격을 갖지 않는다.
집회 44,1-15 서문
벤 시라는 그의 의도를 밝힌다. 조상들 가운데 그는 공동체가 그 지혜를 기억하고 찬미하는 충실한 인물들을 기릴 것이다(44,1-2). “이제는 훌륭한 사람들과 역대 선조들을 칭송하자. 주님께서는 수많은 영광을 마련하시고 처음부터 그분의 위업을 이루셨다”(1-2). 이 유명한 인물들은 공적이고 정치적인 임무를 지녔거나(44,3-4ㄴ) 아니면 영적이고 문화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44,4ㄷ-5). 전쟁 때에 살았던 이도 있고 평화로운 시기에 살았던 이도 있지만(44,6-7) 그 차이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어떤 경우라도, 그들이 살아 있었을 때에 주님은 그들에게 영광을 내려 주셨고(44,2) 그들의 이름은 아직도 유명하다(44,8).
이만큼 충실한 이들이 또 있었지만, 그들은 이미 잊혀졌다(44,9). 벤 시라는 오직 영원히 기억되는 이들, 특히 후손이 남아 있는 이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44,13-15). “13 그들의 자손은 영원히 존속하고 그들의 영광은 사라지지 않으리라. 14 그들의 몸은 평화롭게 묻히고 그들의 이름은 대대로 살아 있다. 15 뭇 백성이 그들의 지혜를 기리고 회중이 그들을 칭송하리라”(13-15).
계약과 율법 수여의 시대(44,16-45,26)
유명한 조상들을 기억하는 데 벤 시라는 시대 순서를 따를 것이다. 먼저 에녹을 언급하였다. 에녹은 카인의 첫째 아들이다. 그는 ‘회개의 모범’(16)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어서 노아에서부터 엘아자르의 아들 피느하스까지 말한다. 이러한 단락 구분의 근거는, 45,25ㅂ-26에 들어 있는 주님을 찬미하라는 초대와 기원이다. 이 시기를 특징짓는 기본 사상은 두 가지인데 그것은 계약과 율법 수여다.
벤 시라가 기억하는 첫 번째 계약은 주님께서 노아와 맺으신 계약이다. 주님께서는 노아에게 다시는 인류를 없애지 않으리라고 약속하셨다(44,17-18; 참조 창세 9,11). 인류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후에 주님은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셨고, 그 덕분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은 보장되었다(44,21; 참조 창세 15,5). 그 계약은 이사악과, 그리고 야곱의 다른 이름인 이스라엘과 갱신되었다(44,22-23ㅁ; 참조 창세 26,4; 28,14).
바로 이어서 모세가 기억된다(44,23ㅂ-45,5). 벤 시라는 시나이에서 체결된 계약을 생략한다. 그 점에서 그는 마찬가지로 시나이 계약을 언급하지 않는 사제계와 일치한다. 그러나 우리의 저자는 모세를 다른 어떤 인물보다 더욱 찬양한다. 모든 사람 가운데 그에게만 주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계시하셨고 그에게만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셨다. 거기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당신의 계명들이, “생명과 지식의 율법”이 그에게 전달되었다(45,5ㄷ).
그다음에는 아론이(45,6-22) 길게 묘사된다. 그에 관하여 벤 시라는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그를 사제로 삼으신 영원한 계약을 언급한다(45,7ㄱ; 참조 탈출 29,9). 아론의 사제복과 장식들이 자세하게 묘사되지만(457ㄷ-14), 마지막에는 그는 성별한 이가 모세임이 강조된다. 그것은 아론과 그의 후손들을 위한 영원한 계약이었다(45,15). 또 백성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그 준수를 보증하는 직무는 주님께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맡기셨지만(45,17; 레위 10,11을 보람) 그 율법을 주님에게서 받은 이는 모세였다. 그러므로 벤 시라에게 아론이 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그의 위대함은 모세의 위대함에 의해 좌우되는 것임을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아론의 손자인 피느하스는 주님으로부터 아론과 그의 ‘온’자손에게 사제직을 맡기는 영원한 계약을 확인받을 것이다(45,24.25ㄹ; 참조 민수 25,11-13). 반면 다윗의 게약은 그의 왕좌를 물려받은 아들 한 명에게만 계승된다(45,25).
결국, 한편으로 벤 시라는 연이은 계약들이 무엇보다 먼저 인류의 생존을 보장하고, 그 다음에는 이스라엘의 존속을, 마지막으로는 아론 사제직의 존속을 보장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다른 한편으로, 율법이 모세에게서 왔고 아론 집안에 맡겨졌음을 단언한다. 그래서 벤 시라는 이 첫 부분을 직접 사제들을 향하면서 이렇게 끝맺는다. “25 주님께서 유다 지파 이사이의 아들 다윗과 맺으신 계약은 대대로 아들 하나에게만 왕직을 물려주는 것이었으나 아론의 사제직은 그의 온 자손에게 계승된다. 26 주님께서 너희 마음에 지혜를 내리시어 너희가 그분의 백성을 의롭게 판결하기를! 그리하여 그들의 번영이 사라지지 않고 그들의 영광이 대대로 이어지기를!”(45,25-26).
집회 46,1-49,10 예언자들과 임금들의 시대
이 긴 단락은 두 부류의 초상으로 나눌 수 있다. 실상, 똑같은 기원이 판관들에 대한 언급 다음에 나오고(46,12) 열두 예언자에 대한 언급 다음에 반복된다(49,10).
① 여호수아부터 판관들까지(46,1-12): 벤 시라는 여호수아에 머물고, 거기에 칼렙을 결합시킨다(민수 13-14; 여호 14,9.14 참조).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전쟁에서 용감하였고 예언자로서는 모세의 후계자였다. 그는 자기 이름이 뜻하는 대로 그분께서 뽑으신 이들 가운데 위대한 구원자가 되어 반역하는 원수들을 응징하고 이스라엘에게 상속의 땅을 차지하도록 해 주었다”(46,1). 이집트를 탈출한 세대 가운데 그들만이 약속된 땅에 들어갔는데, 그들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완전히 충실하게 주님을 따랐기 때문이었다(46,6.10). 벤 시라는 또한 여호수아의 예언자적 역할을 처음부터 강조한다.
이어서, 판관들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충실했다(46,11). 그래서 현인은 이렇게 기원한다“판관들도 각각 그 이름에 걸맞게 우상 숭배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고 주님에게서 돌아서지도 않았다. 그러니 그들이 축복 속에서 기억되기를!”(46,11).
② 사무엘부터 소예언자들까지(46,13-49,10): 다음에 벤 시라는 왕정 시대를 묘사할 것인데, 그 시기는 그가 전혀 언급하지 않는 사울에서부터 유배 때까지다. 임금들 특히 다윗과 솔로몬, 히즈키야와 요시야에 대해 말하겠지만 그는 당신의 임금들과 함께 언급되는 예언자들에게도 주의를 기울인다.
사무엘은(46,13-20) 무덤 속에서도 예언자였고(46,20; 참조 1사무 28,8-19), 동시에 판관이고 사제였다(46,13). “사무엘은 주님께 사랑을 받고 주님의 예언자로서 왕정을 수립하였으며 그분의 백성을 다스릴 통치자들에게 기름을 부어 주었다”(46,13). 사무엘이 기름을 부어 축성한 임금은 사울과 다윗이다. 다음으로는 다윗과 같은 시대의 인물인 나탄 예언자가 있었다(47,1).
다윗에게서(집회 47,2-11) 벤 시라는 젊은 시절의 활동과 – 골리앗에 대한 승리 – 필리스티아인들을 물리친 일을 기억하지만, 축제와 전례 노래를 조직했다는 점도 덧붙인다(1역대 16,4-5 참조). 그는 한가지 잘못을 범했지만, 그의 왕조를 세워 주셨던 주님께서는 그 잘못을 용서하셨다(2사무 7장; 11-12장 참조). 다윗에 대한 칭송 가운데 절반 이상이 그의 전례 활동을 대상으로 한다. 여기서 벤 시라의 주요 관심사 가운데 하나를 엿볼 수 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유명한 현인이었다. 그가 성전을 지었다(47,12-13). “솔로몬은 하느님께서 사방을 평온하게 해 주셨기 때문에 평화로운 시대에 나라를 다스렸다. 그리하여 솔로몬은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짓고 그 안에 영원한 성소를 마련해 드렸다”(47,13). 이어서 벤 시라는 직접 임금을 향해 말한다. ‘젊은 시절에 당신의 지혜는 세상을 가득 채웠지만, 당신은 여자들에게 자신을 내맡겨 당신의 영예를 더럽혔다’(47,14-20). “14당신은 젊은 시절에 얼마나 현명하였습니까? 당신은 강물처럼 지식이 흘러넘쳤다...19 그러나 당신은 뭇 여인 곁에 누워 육체의 노예가 되었다. 20 당신은 당신의 영예를 더럽히고 당신의 혈통을 오염시켜 자식들에게 징벌을 불러들였고 어리석은 행동으로 그들을 통탄하게 하였다”(14.19-20) 주님의 진노가 그의 후손들을 치셨고, 주님은 다윗 왕조를 보존해 주셨지만 그의 왕국은 분열되었다. 솔로몬의 후계자는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이스라엘에서 권력은 탈취당했다. 우상 숭배가 일어났고 결국은 북왕국이 멸망하기에 이르렀담(47,21-24; 참조 1열왕 17,5-23).
그 사이에 엘리야 예언자가 나타났다(48,1-48,11). 벤 시라는 그에게도 솔로몬에게 했던 것처럼 직접 말을 한다. 흔들림 없는 그의 열정과 활동을 기억하고, 또한 말라 3,23-24와 이사 49,6의 예언들에 의하여 열리게 된 희망찬 전망들도 언급한다. 엘리야에 대한 칭송은 행복 선언에서 절정에 이른다. “당신을 본 사람들과 사랑 안에서 잠든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우리도 반드시 살아날 것이다”(11).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를 본 사람들이 재림 또는 부활에 대한 사상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벤 시라에게서 드물게 나타나는 사후의 삶에 대한 희망을 보게 되는 것이다.
엘리야 예언자는 북 이스라엘 출신으로 평생을 ‘바알 우상’ 타파에 헌신했던 분이다. 솔로몬 이후 남북으로 갈라진 이스라엘은 서서히 우상숭배에 빠져 들어간다. 사회가 불안하니까 감각적인 ‘가나안의 바알신앙’에 심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북쪽은 잦은 정변으로 백성들을 다잡아 줄 인물이 없었기에 더욱 심했다. 다음은 북 이스라엘 초기에 일어났던 정변의 내용이다.
첫 임금 예로보암이 죽자 그의 아들 ‘나답’은 왕권을 이어받지만 2년 만에 ‘바아사’의 쿠데타로 살해된다. ‘바아사’는 철권통치로 24년을 버티다 죽고 아들 ‘엘라’가 왕이 되지만 ‘지므리’의 모반으로 처형된다. ‘지므리’ 역시 왕이 된지 7년 만에 ‘오므리’의 쿠데타로 제거된다. ‘오므리’ 왕의 아들이 유명한 7대 임금 ‘아합’이다. 이렇듯 초기 이스라엘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예언자 엘리야는 아합 치세에 등장하여 생의 대부분을 그와 투쟁하며 보냈다.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던 850명의 예언자들과 겨루었던 ‘카르멜 산의 대결’도 아합 때의 일이다.(1열왕 18,19) 엘리야는 바알우상의 어리석음을 백성들 앞에서 폭로했던 것이다. 이후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고 죽지 않고 승천한 구약의 인물이 되었다.(2열왕 2,11)
아합은 바알 신앙에 젖어 있었지만 엘리야를 존경했고 예언자로서의 그의 능력을 인정했다. 그리고 그를 따르던 민중을 배려해 주었고 때로는 이용하였다. 아합은 뛰어난 정치가였던 것이다. 그의 치세에 이스라엘 정국은 비로소 안정을 되찾게 된다. 엘리야는 전통신앙을 지켜냄으로써 정신적 안정을 도왔다. 아합은 이스라엘의 부강을 위해 정략 혼인한다. 당시 북쪽의 강국이었던 ‘페니키아’와의 유대를 위해 ‘시돈’ 호족의 딸 ‘이제벨’을 아내로 맞이한 것이다.(1열왕 16,31) 당시 시돈은 페니키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하지만 이제벨은 이스라엘 왕궁에 우상을 가져왔고 자신의 세력구축을 위해 아합왕을 흔들었던 막강한 여인이었다.
48장 12-16절은 북이스라엘 예언자 엘리사에 대해 말한다. “살아생전에 엘리사는 기적들을 일으켰고 죽어서도 그의 업적은 놀라웠다”(14). 엘리사(Elisha)는 엘리야의 제자로 그의 모든 권한을 이어받았다. 엘리사의 역할은 우상숭배에 빠진 ‘아합왕조’를 뒤집는 일이었다. 임금을 제거하는 모반이었기에 목숨을 걸어야했다. 그는 군인이었던 ‘예후’를 부추겼고 그와 함께 반란을 주도했다. 이렇게 해서 ‘이즈르엘의 대학살’을 이끌어냈다.
당시 이즈르엘은 북 이스라엘의 수도였고 임금은 아합의 둘째 아들 ‘요람’이었다. 그는 아람족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치료받고 있던 중이었다. 틈새를 놓치지 않고 예후의 군대는 왕궁을 덮쳤다. 쿠데타였다. 저항하던 요람은 도망을 쳤지만 예후는 그를 활로 쏴 죽인다(2열왕 9,24).
그리고는 ‘이제벨’을 찾아내어 살해했다. 이제벨은 자신의 처소에서 화장을 하고 당당하게 예후를 맞이했다. “자기 주군을 죽인 지므리 같은 자야, 평안하냐?”(2열왕 9,31) 죽음을 각오한 이제벨은 마지막 순간까지 말리지 않았다. 분노한 예후는 내시에게 창밖으로 던지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렇게 해서 이제벨은 땅에 떨어져 죽었다.
쿠데타에 성공한 예후는 즉시 정적들을 제거했다. 아합의 아들 70명과 남아 있던 관료들을 모두 살해한 것이다. 이것이 이즈르엘의 대학살이다. 훗날 ‘호세아’는 예후를 비난하는 예언을 남긴다(호세 1,4). 그만큼 잔인한 사건이었다. 예후의 후광으로 엘리사는 활동에 지장을 받지 않았다. 구약의 예언자들 대부분이 비난과 핍박을 받았지만 엘리사의 삶은 예외였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겸손했고 청렴하게 처신하였다.
그러기에 엘리사는 많은 기적을 일으켰다. 물이 좋지 않은 성읍의 지하수를 정화시켰고 죽은 제자의 부인을 애련히 여겨 기름이 많아지는 기적을 베풀었다. 그리고 보리빵 스무 개로 백여 명을 먹게 했으며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리기도 했다(2열왕 4,35). 가장 유명한 기적은 아람(Aram)의 군대 장관인 ‘나아만’을 고친 일이다. 그는 문둥병에 걸려 있었는데 엘리사의 지시대로 요르단 강에서 목욕하자 병이 나았던 것이다(2열왕 5,14).
엘리사는 예언자로 불림받기 전에는 평범한 시골 농부였다. 그런데 엘리야가 부르자 즉시 응답했다. 그만큼 결단력이 빨랐던 것이다. 그리고는 동네 사람들을 불러놓고 성대한 송별식을 가졌다(1열왕 19,21). 미루어보건대 상당한 부자였던 것 같다. 하지만 평생 허름한 옷에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 대머리였고 가끔은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기도 했다(2열왕 2,23). ‘임금의 후원’을 받는 막강한 예언자였지만 일생을 소박하고 겸허하게 살았던 것이다. 신약에서도 구약의 매우 유명한 인물이었던 엘리사가 언급되고 있다. 예수님은 나자렛의 회당에서 엘리사가 나아만의 문둥병을 낳게 한 이야기를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를 도운 이야기와 함께 인용하면서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의 정당성을 설명하였다(루카 4,27).
유다 왕국에서는 다윗 집안이 유지되지만, 히즈키야와 요시야만이 충실한 태도를 보였고 나머지 임금들은 많은 죄를 지었다(48,15-16). 그래서 벤 시라는 훌륭한 다윗 후손인 이 두 명을 길게 칭송한다. 히즈키야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산헤립의 도전과 이사야의 개입을 기억하고(48,17-21; 참조 2열왕 18,13-19,36), 이사야서에 담겨 있는 주요한 예언들을 언급한다. “히즈키야는 주님의 뜻에 맞는 일을 하였고 자기의 환시에 충실하고 위대한 이사야 예언자의 명령에 따라 자기 조상 다윗의 길을 굳건히 지켰다”(48,22). 여기에서 말하는 이사야서는 전통에 의하여 전수된 이사야서 전체로서, 이사 40-55장과 56-66장을 모두 포함한다(48,22-25).
벤 시라는 요시야에게도 몇 절을 할애한다(49,1-3). “요시야에 대한 기억은 향 제조사의 솜씨로 배합된 향과 같다. 그것은 누구의 입에나 꿀처럼 달고 주연에서 연주되는 음악과 같다”(49,1). 요시야에 대한 기억은 향연 때에 수금 반주로 부르는 노래와 같다(49,1ㄹ; 참조 32,5). 현인은 “무도한 자들이 살던 시대”의 임금인 그가 행한 종교 개혁을 강조한다(2열왕 22-23장 참조). 그러나 무엇으로도 최후의 멸망을 피할 수는 없었다. 끝까지 죄를 지었던 유다의 임금들은 그들의 권력을 잃었고 이방 민족이 예루살렘을 불태웠다(49,4-6; 참조 2열왕 24,1-25,12). “다윗과 히즈키야와 요시야 말고는 모두가 잘못을 거듭 저질렀다. 과연 그들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법을 저버렸기에 유다 임금들이 사라지게 되었다”(49,4).
남은 것은 예레미야, 에제키엘, 그리고 열두 소예언자들의 이야기이다(49,7-10). 열두 소예언자는 야곱 후손들에게 도덕적인 건강을 회복시켜주었고, 그들의 희망을 굳세게 함으로써 그들을 구했다. “그리고 열 두 예언자들이 있었으니 그들의 뼈가 그 무덤에서 다시 피오나기를! 정녕 그들은 야곱을 위로하고 굳센 희망으로 그들을 구원하였다”(49,10). 히브리 말 경전의 순서에 맞추어 삼대 예언자 다음에 “열두 예언자”가 언급된다는 사실은 벤 시라 시대에 이미 히브리 말 성경의 예언서 전체가 완성된 형태로 있었음을 입증해 준다.
결국, 다윗의 후손은 자신의 잘못으로 자신의 역할을 잃어버렸다. 예언자들만이, 육적인 후손은 없으면서도 충실함과 희망을 유지했다. 사제들에게 별도의 위치가 주어지지 않았던 이 두 번째 시기는 멸망으로 끝난다. 그러나 희망은 남아 있다.
③ 예루살렘과 성전의 쇄신(49,11-50,24): 유배에서 돌아온 때이다. 벤 시라는 다윗의 후손인 즈루빠벨과 사제 예수아를 함께 언급한다.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기원전 520년부터 제단과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한 것이 그들이기 때문이다(49,11-12). “11 즈루빠벨을 우리가 어떻게 찬양할까? 그는 오른손에 낀 인장 반지와 같았다. 12 여호차닥의 아들 예수아도 마찬가지였다. 이 두 사람은 자기네 시대에 집을 짓고 거룩한 성전을 주님께 봉헌하였는데 그 성전은 영원한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11-12).
그 후 기원전 445년경 느헤미야는 도성의 성벽과 성문을 재건했다(49,13). 조상들에 대한 칭송의 첫 부분에서 사제 에즈라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놀랍고, 주석가들은 이를 설명하지 못한다.
이어지는 세 절(49,14-16)도 뜻밖이다. 여기에서 홍수 이전 선조들의 이름이 나온다. 에녹은 엘리야와 마찬가지로 하늘로 올라갔고(창세 5,24), 요셉은 시선을 이집트에서 가져와 스켐에 모셨으며(여호 24,32), 마지막으로 셈은 노아의 아들이고(창세 9,18-276) 아브라함의 조상이다(창세 11,10-26). 셋과 에노스는 각각 아담의 아들과 손자이다(창세 4,25-26). 아담은 이 특이한 명단을 끝맺는다. “셈과 셋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지만 아담이야말로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 위에 있다”(49,16). 아마도 벤 시라는 기원으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끝맺으려고 한 것일 수 있다.
그런데 벤 시라는 여기에 다시 대사제 시몬을 기리는 긴 시를 덧붙인다(50,1-21). “오니아스의 아들 시몬은 대사제로서 생전에 주님의 집을 수리하고 자기 생애에 성전을 견고하게 만들었다”(50,1). 시몬은 기원전 187년경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죽은 후에야 벤 시라는 이 칭송을 엮을 수 있었다. 의인 시몬은 성전과 도성의 요새들을 수리했다(50,1-4). 그는 즈루빠벨, 예수아, 느헤미야의 뒤를 이은 것이다. 또 성전에서 사제직을 행할 때 걸쳤던 그의 장식들은 아론의 장식들을 상기시키는데, 벤 시라는 그보다 더 자세하게 묘사한다. 여기에서 서술되는 것은(51,5-21) 대속죄일의 전례가 아니라 매일 드리는 일일번제 때의 전례(탈출 29,38-42; 민수 28,3-8 참조)이다. “그런 다음 시몬이 내려와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회중을 향하여 손을 쳐들고 입술로 주님의 복을 빌어 주며 그분의 이름을 현양하였다”(50,20).
한마디로, 벤 시라에게 유배에서 돌아온 뒤부터 그의 시대까지 이르는 시기는 예루살렘의 재건, 특히 성전 재건을 특징으로 하며, 그것은 주로 아론의 후손 전체의 사제직에 힘입어 이루어졌다. 사제들을 향하여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는다.
“22 이제 만물의 하느님께 찬미를 드려라. 그분께서는 어느 곳에서나 위대한 일을 하시고 우리의 나날을 모태에서부터 높여 주시며 우리를 당신의 자비로 대해 주신다. 23 그분께서 우리에게 마음의 기쁨을 주시고 우리 시대의 이스라엘 안에 옛날처럼 평화가 깃들게 해 주시기를! 24 그분께서 당신의 자비를 우리에게 베푸시고 우리 시대에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를!”(50,22-24).
벤 시라는 사제직의 후손에게 희망을 둔다. 그는 사제들을 위하여 주님께 마음의 지혜를 청하지만(45,26ㄱ; 50,23ㄱ; 참조 43,3ㄴ), 자신을 사제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찬란하게 장식한 옷을 입고 직무를 수행하는 시몬은(50,5-11) 지혜를 닮지 않았는가?(24,13-15) 불행히도 기원전 170년에 오니아스 3세가 살해되면서(2마카 4,30-35 참조) 고대 사제직의 후손은 끝났다.
조상들에 대한 칭송에 대하여 여기에 제시한 해석을 보면 벤 시라가 오경과, 고대 전승이 ‘전기 예언서’라고 부르던 여호수아기에서 열왕기 하권까지의 모음집, 그리고 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과 열두 소예언자들의 이름 아래 수집된 책들을 알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모아진 성문서의 내용은 아직 최종적으로 확정되지 않았는데, 그 가운데에서 벤 시라는 역대기와 느헤미야기와 시편을 알았고, 또 49장에서 에제 14,14.20을 언급하면서 인용하는 욥기를 알고 있었다.
집회 50,27-29 결론
벤 시라의 책은 가톨릭교회의 구약성경에 있는 지혜문학서들 가운데 가장 길다. 여기에서는 중요한 몇 단락을 설명하는 것 이상은 할 수 없었다. 다른 많은 본문도 마찬가지로 주의를 기울일 만한 가치를 가진다. 우리는 단순히, 예루살렘 현인이 숙고한 바의 다양성과 풍요로움을 보여 주고자 했을 따름이다.
“27 나는 지성과 지식에 대한 가르침을 이 책에 기록해 놓았다. 예루살렘 출신 엘아자르의 아들, 시라의 아들인 나 예수는 마음으로부터 지혜를 이 책에 쏟아 부었다. 28 이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이는 이는 행복하고 그것을 마음에 간직하는 이는 지혜로워지리라. 29 사람이 그 가르침을 실천하면 만사에 강해지리라. 주님을 경외함이 그의 인생 행로이고 주님께서 경건한 이들에게 지혜를 주셨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영원히 찬미를 받으소서. 아멘. 아멘”(27-29).
우리는 지혜와 하느님을 경외함, 현인의 역할과 지혜를 얻는 방법에 대한 그의 가르침을 해석했다. 그가 기도에 부여하는 위치를 보았고, 그가 가난한 이들의 영예를 옹호하고 하느님 앞에서 인간의 자유를 주장하면서도 죄인에게 회개하도록 초대하는 것을 들었다. 또한 그가 율법의 지혜문학적 차원을 설명하고 성경 역사를 해석하는 방법도 보았다. 그의 책은 그 밖에도 수많은 문제, 예를 들어 참된 경신례, 가족 관계, 우정, 질병과 죽음 등에 대한 숙고를 포함하고 있다.
그의 독창성은 명백하다. 그는 의식적으로 종합 작업을 했다. 지혜문학의 조류에 충실하면서도 그의 선배들보다 개방되어 있었다. 아마도 여자 문제에 대해서만은 예외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 그는 자신의 신앙에 반대되지 않으면 외부에서 들어온 행동 방식도 받아들일 줄 알았음을 보여 준다. 그는 현인이면서도 자기 백성의 영적 유산에 본능적으로 결합되어 있었다. 그에게, 현인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묵상했던 율법과 예언서들은 그가 깊이 받아들이고자 했던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