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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서(세 번째 이야기)
지금까지 열두 소예언서를 강의해 주셨는데요, 호세아서, 요엘서, 아모스서까지.
그 부분에서 호세아 예언서는 북이스라엘을, 요엘 예언서는 유다를, 아모스 예언서 같은 경우에는 북이스라엘을, 그리고 그다음 예언서는 아마도 유다를 왔다 갔다 하는 리듬을 타고 있습니다.
호세아와 요엘서 같은 경우에는 신부님께서 짧게 강의해 주셨는데요. 아모스 예언서에 대해서는 조금 길게 강의해 주신다고 하셨어요.
그 이유로, 아모스라는 예언자가 저희들에게 중요한 어떤 화두를 던지는데요.
요즘에도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있었죠? 그처럼 마이클 샌델이 쓴 정의란 무엇인가? 는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가? 에 관해서 철학적인 사유를 했다면 아모스 예언자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하느님의 정의에 대해 신앙의 관점에서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반추해 본다면? 정의??!! 올바른 삶은 무엇인가??!!라고.
여기서 붙어다는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정의, 그리고 다른 하나는 공정.
구약 성경에서 정의란?
율법을 벗어나지 않은 것
공정이라는 것은?
율법을 가지고 재판을 하는데 치우침이 없는 것
나랑 고향이 같다고 해서, 나랑 같은 학교를 나왔다고 해서, 남성이라고 해서, 또는 여성이라고 해서,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다고 해서, 가난하다고 해서...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치우침이 없이 모두에게 동등하고 공평한 것이 공정의 의미라 볼 수 있습니다.
율법에 충실한 삶이 곧 의로운 삶이에요.
그리고 그 율법에 누군가가 벗어났을 때, 그 율법에 의거해서 잘못한 만큼 벌을 받는 것이 또한 공정한 것입니다.
그 공정에 대해서는 시대 정신과 함께 변해가는 것 같아요. 지금으로부터 40~50년 전에는 성범죄에 관해서 관대했습니다.
"뭐, 남자가 술 먹고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렇게 하면 큰일 납니다.
또 50년 전에는 웬만한 곳에서 흡연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요즘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회적 인식과 함께 법에 대한 생각들, 처벌들도 변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법이 평등한가? 공평한가?라는 문제죠.
미국인들에게 AI를 어디에 쓰면 좋겠냐는 물음에 첫 번째가 재판관을 AI로 바꿨으면 좋겠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역시 사람들이 재판에 관한 공정함에 신뢰를 보내지 못하는 것 같고 사회적인 문제도 되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30년 전과 비교해 봤을 때, 그때보다는 조금 더 공정해진 것 같다는 우리의 생각들이 현재 우리가 올바른 길에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 에 대한문제이고,
지금부터 우리가 미래를 생각했을 때 더 공정한 방법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들이 우리들의 고민이고
바로 아모스의 고민이기도 했어요.
우리는 아모스 예언서를 읽으면서 첫 번째로 아모스 예언자를 만납니다.
두 번째로는 아모스 예언자의 예언을 기록해서 예언서로 만든 그 예언서의 저자를 만납니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가 있는데요. 열두 소예언서가 있습니다. 호세아서부터 시작해서...
예전에는 열두 소예언서라는 책을 누군가가 각각에 있던 열두 소예언서를 한 군데에 모아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30년 전부터 신학자들이 열두 소예언서를 읽어보니까 그 전체적인 문학적인 구성이 이사야 예언서랑 비슷하다고 생각하였고, 따라서 열두 소예언서는 그냥 모아둔 것이 아니라 그 열두 소예언서를 합치는 과정에서 편집자가 또 있을 것이라고 말했어요.
따라서 우리는 또 아모스 예언자를 만나고 아모스 예언서의 편집자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두 소예언서의 편집자를 만나고, 마지막으로 그와 말씀 너머에 있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아모스 예언서를 읽으면서 우리는 '나는 지금 누구와 만나고 있는 거야? 예언자? 열두 예언서의 편집자? 아니면 그 너머에 계신 하느님???'하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때그때 다른 관점에서 텍스트와 만나볼 수 있습니다.
아모스 1장으로도 한 학기 강의가 가능하다고 하셨는데요... 저희들이 힘이 드니까,
학문적으로는 이런 식의 생각들이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도록 하겠습니다.
저희는 이미 아모스 강의를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모스 1,1절에서 아모스 예언자의 소개가 나옵니다.
트코아의 목양업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아모스가 전한 말씀.
1,1 트코아의 목양 업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아모스가 전한 말씀.
유다 임금 우찌야 시대에, 곧 이스라엘 임금 여호아스의 아들 예로보암 시대에,
지진이 일어나기 이태 전 그는 이스라엘에 관한 환시를 보았다.
아모스의 말씀들 (직역)
(관계사) 트코아에서 목자들 중 하나였던
(관계사) 그가 환시한/ 이스라엘에 대해
우찌야의 날들에 / 유다 임금
그리고 예로보암 벤 ㅡ 요야슈의 날들에 / 이스라엘 임금
(그) 지진 전의 두 해
트코아는 예루살렘에서부터 16km 남쪽으로 있는 곳으로 아모스는 남유다 사람입니다. 시간적으로 보면 남유다의 시기는 우찌야 임금의 시기였고, 북이스라엘은 예로보암의 시기였어요.
그런데 거기에 하나의 정보를 더 덧붙입니다. "지진이 일어나기 이태 전( 두해 전)에 그는 이스라엘에 관한 환시를 보았다."
여기서 우리가 첫 번째로 주목해야 할 내용은? 아모스는 말씀을 환시 했다고 전하는 부분.
히브리 사람들에게 말씀을 환시 했다는 의미는 굉장히 편안한 표현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는 것뿐만 아니라 말씀을 본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것을 우리식으로 이야기하면 "인지한다"라는 뜻이겠죠.
이것이 사도행전에까지 영향을 주어서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 사건이 나옵니다. 그 성령강림 사건은 사도들이 성령을 받는다(내린다)는 뜻인데, 혀모양의 불 또는 불모양의 혀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거기에서 불은 정화한다는 것입니다.
또 혀라는 것은 사도들이 소리를 듣는다는 것입니다. 곧 그들을 정화시키는 소리를 들었다는 의미가 될 수 있어요.
그 말씀을 보고 아모스가 환시를 전하는데, 그 시기는 유다는 우찌야의 시기, 북이스라엘은 예로보암의 시기였다는 것입니다.
당시는 남유다도 북이스라엘도 정치적, 경제적으로 번영을 누렸던 시기였습니다.
왜냐면, 유다와 북이스라엘도 시리아로부터 군사적 압박을 받아왔었는데, 우찌야와 예로보암의 시기에는 시리아가 약해졌었어요. 그래서 유다와 북이스라엘은 영토도 넓히고 주변 나라와 교역도 하면서 나라가 굉장히 굳건해졌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졌어요. GDP도 오르고,
그렇다면 그건 좋은 일일까요? 나쁜 일일까요?
좋은 일이에요.
하지만 정작 사회적으로 사람들은 행복해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전의 시기에는 시리아라는 외적이 있어서 사회적으로 사람들이 똘똘 뭉쳐있었어요. 그런데 외적인 힘이 약해졌죠? 그리고 풍요로워졌죠? 그러면서 이스라엘 안에서는 계층이 생겼어요. 상류층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1%와 99%가 생긴 거예요.
그 1%가 99%를 잘 돌보아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북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아요.
1% 상류층은 자신이 갖고 있는 돈과 권력을 가지고 99%의 평범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사기도 치면서 기만하였던 사회였던 것 같습니다.
막스 베버와 같은 사회학자는 "가난한 나라에서 부자 나라로 가는 과정에서 한 번은 천민자본주의가 등장한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천민자본주의는 누군가가 가난하다가 갑자기 돈이 생겼는데 그 돈을 좀 이상한 곳에 쓴다는 것입니다. 1980년도의 대한민국이 그러했습니다.
1980년대는 대한민국이 완전 무역을 이루었던 시기였는데, 그 완전 무역을 때문에 사람들이 예전보다 더 풍요로워졌어요. 그러고 나서 유흥 산업이 발달하게 됩니다. 단란주점이나 룸살롱...
당시에 사회적인 문제가 생긴 게 유흥 산업이 발달하는데, 그곳에서 일을 할 여성들이 부족해서 길가는 여성들을 납치하는 일들이 벌어졌어요. 그것 때문에 대한민국이 한동안 떠들썩했습니다. 북이스라엘도 그러한 상황이었던 것 같아요.
아모스는 그 점을 지적합니다. 또한 그것이 아모스 예언서의 놀라운 점입니다.
지금부터 2700년 조금 넘은 시간에 아모스라는 예언자가 등장해서 이런 사회적인 부정이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오늘날 2025년에도 사회적인 문제에 있어서 어느 주교님이나 누군가가 이야기하면 어떤 분들은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그것은 교회가 간섭할 일이 아닙니다! 사회적인 문제에 관해서 왜? 교회가 이야기합니까? 교회는 그저 기도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는 곳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가톨릭 교회는 아모스 예언자로부터 출발한 이런 정신을 지켜나갑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충분히 신자분들에게 인식이 되지 못해서 그러는데, 성경보다 더 두꺼운 분량의 사회교리를 교회는 갖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노동의 문제에 관해서, 또는 경제적인 정의의 문제에 대해서, 사회적인 평등의 문제에 관해서...
새 교황님의 이름도 또한 레오라고 정하셨습니다. 레오 13세 교황님처럼 사회 교리를 강조하시려는 의도가 아니실까? 하고 신부님은 혼자서 방 안에서 추측해 보셨다고 합니다.
외적으로는 북이스라엘이 강하고 풍요로웠던 시기였는데 내적으로는 오히려 사회적 문제들이 생겨났고 불의하고 폭력적인 상황에 하느님 백성이 맞닥뜨리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바로 그것을 지적하기 위해 예언자는 다음과 같은 나라들의 문제를 지적합니다.
다마스쿠스; 가자; 티로 ; 에돔; 암몬; 모압; 유다; 이스라엘
문학에 있어서 흥미롭게 하려면 반전이 있어야 합니다. 드라마에서 보면 착한 사람이 나중에 보니까 나쁜 사람이었고, 나쁜 사람이 착한 사람이었다는...
아모스서에도 그런 반전이 있습니다. 다마스쿠스에 관한 하느님의 심판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가자, 티로, 에돔, 암모, 모압, 유다까지.
다마스쿠스는 오늘날의 시리아
가자는 오늘날의 필리스티아
티로는 페니키아입니다.
그리고 에돔, 암몬, 모압은 요르단 강 동쪽과 남쪽에 붙어있는 이스라엘에 인접한 나라들입니다. 그 나라들의 범죄 사실과 그 나라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읽고 있는 이스라엘의 독자들은,
"아! 이스라엘을 지켜주시는 하느님이 우리와 갈등 관계에 있는 많은 나라들을 제압하시는구나! 하느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이렇게 싸워주시는구나!"라고 이야기를 읽다가 마지막에 이스라엘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선 다마스쿠스부터 유다까지는 그들의 범죄 사실과 하느님 심판에 대한 내용이 5~6줄이에요.
이스라엘에서는 그들의 범죄를 고발하는 내용이 대략 15줄이에요. 따라서 이스라엘의 죄가 더 무겁다는 의미입니다.
주변 민족을 벌하시는 내용은 준비과정이었고 나중에 이스라엘을 향해서는 "네가 더 나빠!"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앞선 다른 민족들은 야훼 하느님을 알았나요? 몰랐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죄는 도덕적인 범죄입니다. 즉 "하느님은 몰랐지만 창조주인 하느님으로부터 그들도 역시 양심은 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그 양심을 거스른 도덕적인 죄에 관한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하느님과 계약 관계에 있죠? 그들은 하느님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죄는 도덕적인 의미에서의 죄를 넘어서는 신학적인 내지는 신앙적인 의미에서의 죄입니다.
우리도 어린이들이 죄를 지을 때는 벌하지 않지만(어린이들은 그것이 죄인지 아직 몰랐을 테니까요), 어른들이 죄를 지으면 벌을 받습니다.
그것을 알았음에도 죄를 지었을 테니까.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율법에 적혀있으니 당연히 알았습니다. 알면서도 지키지 않은 겁니다.
아모스 1-2장은 결국 이스라엘의 범죄가 얼마나 중대한 범죄인지 그리고 거기에 따른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 심판인지 이야기하면서 2장까지가 마무리됩니다.
유인물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아모스서에 구조에 대해서 설명
1-2장 : 신탁
3-4장 : 야훼의 심판 예고("이 말을 들어라")
5-6장 : 아모스의 애가("이 말을 들어라")
7,1-9,4 : 환시( "보라, 그날이 온다")
9,5-15 : 보편적 심판과 구원("보라, 그날이 온다")
1장과 2장은 아모스 예언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환시하고 그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는데, 그것을 신탁이라고 하셨어요.
뒤따르는 3-4장과 5-6장은 어떤 면에서 조금 겹칩니다.
3장의 시작은,
"이스라엘 자손들아, 주님이 너희를 두고 이집트 땅에서 내가 데리고 올라온 씨족 전체를 두고 한 이 말을 들어라."
5,1
"이스라엘 집안아, 이 말을 들어라. 내가 너희를 두고 부르는 이 애가를."
오늘날 아모스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3장-4장을 야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는 심판의 예고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5-6장은 아모스 예언자가 이스라엘 집안을 위해 부르는 애가(비통한 노래), 우리식으로는 곡을 하는 예언자의 노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이 말을 들어라. 하고 간곡하게 야훼 하느님도 예언자도 요청합니다.
3-4장 파트는 야훼의 심판, 야훼의 통보, 야훼와 예언자의 관계, 이스라엘에 대한 고발, 그들이 받을 벌,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광송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5-6장은 예언자의 애가인데, 여기서부터 약간 변화가 일어나요.
1-2장, 그리고 3-4장에서는 하느님의 심판이 피할 수 없고 이미 결정된 것으로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런데 5-6장의 애가로 넘어가면서부터는 약간 희망을 줍니다.
5,4 정녕 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집안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나를 찾아라. 그러면 살리라.
5,6 너희는 주님을 찾아라, 그러면 살리라.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죽지 않고 살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심판은 계속해서 확장된 모습, 약간의 희망을 남겨놓지만.
하느님에 심판에 대한 애가를 부르면서 마지막 다음과 같은 영광송으로 마무리합니다.
5,8 묘성과 오리온자리를 만드신 분
암흑을 아침으로 바꾸시고
낮을 밤처럼 어둡게 하시는 분
바닷물을 불러오시어
땅 위에 쏟으시는 분
그 이름 주님이시다.
따라서 야훼는 이런 창조주적 권능을 갖고 계시는 분이시라고 노래합니다.
5,14절과 15절에서도 하느님의 심판은 확정적이지만 우리에게 희망은 남아있다고 아모스는 말합니다.
너희는 악이 아니라 선을 찾아라.
그래야 살리라.
그래야 너희 말대로
주 만군의 하느님이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5,15절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정을 세워라.
어쩌면 주 만군의 하느님이
요셉의 남은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지도
모른다.
성문은? 이스라엘에서 아침에 남자들이 눈을 뜨면 성문으로 가서 그날 하루의 뉴스와 정보를 얻기도 하고 일꾼들을 모집하기도 하고 재판도 열리는 곳입니다. 그리고 또 15절에서는 희망을 여지를 보여줍니다.
5,16절에서는 애가라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아이고, 아이고!" 하리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은 곡이에요.
아이고, 아이고는 히브리말로 "호호"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호호는 웃음소리인데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호호가 우리말의 "아이고아이고"처럼 곡소리예요.
더욱이 이 부분을 통해 예언자가 이스라엘을 위해 부르는 애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18절에서
불행하여라, 고 말하는 불행선언이 나옵니다. 그들이 왜 곡을 합니까?
그들이 곡을 하는 이유는 이 불행선언이 나오니까.
그 불행하여라, 다음에 주님의 날을 갈망하는 자들!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조금은 충격적입니다.
본래 주님의 날은 야훼 하느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는(축복을 주는) 날로서 좋은 날인데, 그런 주님의 날이
불행하여라, 주님의 날이 너희같이 부정한 사람들에게 심판되는 날이라고 예언자는 말하고 있어요.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돕고 율법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주님의 날이 축복의 날이지만, 너희는 그런 삶을 살지 않았으니 심판의 날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 한번
6,1 불행하여라, 시온에서 걱정 없이 사는
자들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 놓고 사는 자들
으뜸가는 나라의 귀족들!
그들에게 이스라엘 집안이 의지하러 가는구나.
독일의 어떤 철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히틀러가 유다인들을 집단 수용소에 몰아넣고 학살할 때 많은 독일인들은 '우리는 그것을 몰랐다.' 하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독일인들은 솔직하고 진실하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그것을 모르려고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날 우리들의 현실에 반추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나는 잘 지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잘지내지 못하는 이들도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대한민국도, 남미도, 아프리카에서도....
처음에는 방송에서 그들의 이야기가 나오면 ARS를 누루고 참여하였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런 내용이 나오면 채널을 돌리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에요.
우리들의 행복한 삶에 머물면서 다른 사람들의 불행에 대해서 눈감는 마음, 적극적인 의미에서 나쁜 일은 아니니까... 괜찮지 않을까?라고 우리들이 생각할 수 있는데 아모스 예언자는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시온에서 걱정 없이 사는 자들 : 형제들의 불행에 눈감았던 이들
조금 더 생태적인 의미로는 우리가 살고 있던 생태계에 귀 기울이지 않았던 우리들의 모습들.
그러한 부분을 이 안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다인들을 재판하는 일이 있었어요. 나치에 협력했던 이들.
그 재판을 보면서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이라는 책을 썼어요.
신부님은 평범성이라는 말보다 더 좋은 번역이 "악의 생각 없음"이라고 하셨어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 안에 악이 있는데 그것에 우리는 적극적으로 맞서지 않고 생각 없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뜻으로 철학자의 책의 제목을 알아듣게 된다고....,
우리 사회에서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좋지 않은 어둠들을 우리가 그냥 방치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그것들이 점점 커져서 우리들을 잠식해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5,18과 6,1절의 두 번의 불행 선언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왜? 예언자의 곡인 애가를 들어야 했는지를 아모스 예언자는 말합니다.
7장에서 9장 중반에 이르기까지는 환시가 나옵니다.
모두 다섯 개의 환시가 나옵니다.
1-2장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나오고 그 말씀을 환시 하는 예언자의 신탁이 나오고
7장부터 9장 전반부에서, 예언자는 그야말로 환시 눈으로 보는 장면들을 우리들에게 전해줍니다.
첫 번째 환시 : 메뚜기 떼
7,1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이러한 것을 보여 주셨다.
그분께서는 두 번째 그루 곡식이 올라오기 시작할 무렵에
메뚜기 떼를 빚고 계셨다.
그 그루 곡식은 임금에게 바치는 수확 다음의 두 번째
것이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곡식을 수확하면 처음 것은 임금에게 두 번째것은 자신의 것이었어요. 그런데 그 두 번째 그루 곡식을 메뚜기 떼가 와서 다 먹어버리면? 나는 먹을게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습니다.
그리고 두 번 곡식들을 추수했기 때문에 세 번째부터는 별로 남은 게 없는 상황이에요.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중대한 문제가 생긴 거예요.
그러자 예언자가 하느님께 이야기합니다.
7,2 "주 하느님, 제발 용서하여 주십시오. 야곱이 어떻게 견디어 내겠습니까?
그는 참으로 보잘 것 없습니다."
하고 탄원하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7,3 "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서 기도하자, 50명에서 10명까지, 열명의 의인이라도 있으면 나는 벌하지 않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광야에 나섰던 이스라엘이 범죄하자, 모세가 하느님께 탄원했어요. "하느님, 이 사람들을 그만 보내 주십시오."
"모세야, 구리 뱀을 하나 만들어 보게 하면 그들이 죽지 않을 거야." 하고 말씀하셨어요.
예언자의 탄원과 개입을 통해서 하느님의 심판이 되돌려지는 이해를 구약 성경에서 우리는 만났고 여기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두 번째 환시 : 불입니다.
7,4 주 하느님께서 나에게 이러한 것을
보여 주셨다. 주 하느님께서 심판하시려고
불을 부르시니, 그 불이 커다란 심연을 삼키
고 들녘도 삼켜 버렸다.
그리고 예언자가 탄원하고
7,6 그러자 주님께서 뜻을 돌이키셨다.
"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고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따라서 메뚜기 떼와 불을 보고 예언자가 탄원하니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거두셨다라는 게 다섯 개의 환시 중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한쌍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앞선 1-2장을 기억해 봅시다.
"내가 다마스쿠스의, 가자의,...죄를 심판하겠다."
그들은 몇 번씩 죄악을 저질렀습니까? 세 가지 죄, 네 가지 죄를 저질렀습니다.
따라서 거기에서도 주님께서 "내가 두번 까지는 참았어. 세 번째부터는 내가 안 참아."라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도 다섯 가지의 환시 중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넘어갔지만, 다음 환시가 문제입니다.
세 번째 환시 : 다림줄
7,7 그분께서 나에게 이러한 것을 보여
주셨다. 다림줄을 드리워 쌓은 성벽 곁에
주님께서 다림줄을 손에 들고 서 계셨다.
이 부분은 다른 번역의 가능성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다림줄은 히브리 말로 어떤 금속입니다. 어떤 사람은 납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주석이라고 생각해요.
납이라고 하면, 납으로 만든 추같은게 있어서 하느님께서 납으로 만든 추를 가지고 이스라엘의 잘못을 가늠한다는 의미인가?라고 해석하는 이들이 있고,
신부님은 이것을 주석이라고 생각하신다고 하셨어요. 과거의 고대 사회에서 철기 시대에 주석은 구리와 결합해서 청동을 만드는 유용한 금속이었습니다. 구리는 그 자체로 강하지 못해요. 하지만 구리와 주석을 혼합하면 청동이 되고, 청동은 무기로도 쓸 수 있고 비교적 단단한데,
주석 내지는 청동으로 만든 성벽 곁이 아니라 직역하면,
성벽 위에 야훼께서 청동(주석)을 들고 계셨다.
이 말은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안심이 되는 내용입니다. 즉 야훼 하느님이 단단하게 지어진 성벽 위에 무기를 들고 이스라엘을 지켜주는 모습임으로,
그런데 반전이 일어납니다. 우리를(이스라엘을) 지켜주는 줄 알았던 하느님이 우리를 공격합니다.
7,8 주님께서 나에게 "아모스야,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시기에, 내가 "다림줄(주석, 청동)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지금 내 백성 이스라엘 한가운데에 다림줄을 드리우려고 한다."
=> 내가 내 백성인 이스라엘 한 가운데에 그 무기를 놓으려 한다. 나는 더 이상 그들을 지나쳐 버리지 않겠다.
7,9 이사악의 산당들은 황폐해지고
이스라엘의 성소들은 폐허가 되리라.
내가 칼을 들고 예로보암 집안을 거슬러
일어나리라.
=> 우리를 지켜주는 야훼 하느님인줄 알았는데 오히려 우리를 공격하신다는 말씀이 세 번째 환시입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그림을 보여주시고 그 의미가 확실했습니다.(메뚜기 떼, 불) 그러자 예언자가 하느님께 탄원하고 하느님은 결정을 뒤엎으셨습니다.(철회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그림자체가 불분명하고, 예언자가 그 그림에 관해서 깨닫고 하느님께 탄원하기도 전에 하느님이 그 그림에 의미를 설명하시고 바로 끝나버립니다. "너희를 지켜주시는 그림이 아니라 너희를 심판하시는 거야."
그리고 그 심판의 이유를 설명하시면서 우리가 앞서 보았던 베텔의 사제인 아마츠야와 아모스의 대화가 등장합니다.
아모스는 남유다의 예언자입니다.(다시금 기억 강조^^)
그런데 북이스라엘에 와서 예언하니까 북이스라엘의 사제였던 아마츠야가 아모스에게 뭐라고 했을까요?
"너, 고향으로 돌아가! 거기서 예언하면서 살아. 왜? 남의 집에 와서 이래???"라고 말하면서 아모스를 죽이려 합니다.
그 말에 아모스가 반발하는 내용을 우리는 7,14-17에서 볼 수 있습니다.
네 번째 환시 : 여름 과일 한 바구니
8,1 주 하느님께서 나에게 이러한 것을
보여 주셨다. 그것은 여름 과일 한 바구니였다.
앞부분에서는 첫째 그루 곡식, 둘째 그루 곡식이 나왔는데 여기서는 여름 과일 한 바구니가 나옵니다. 아마도 학자들은 무화과 열매를 이야기하는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저녁 식사를 본당 신부님과 함께 하셨는데 무화과가 나오셨다고 말씀하셨어요.^^(하느님의 뜻이신 것 같다고.)
8,2 그러자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종말이 다가왔다."
자, 이 부분에서 설명이 필요합니다.
여름 과일 한 바구니??라는 단어와 종말이라는 단어가 우리 말로는 서로 다른 단어인데 히브리어로는 비슷하게 발음이 됩니다.(동음 이의어)
언어의 유희입니다.
여름 과일 한 바구니를 보여주고 이것은 종말을 보여주는 환시야!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냐면, 발음이 비슷하니까요.
예전에 신부님이 초등학생 미사를 하시다가 일단 퇴장을 하신 적이 있으셨다고 합니다.
신부님이 초등학생들에게 "여러분 구원이 뭔 줄 아십니까?"
그러자 1학년? 2학년? 아이가 손을 들고서,
"신부님!! 돈!! 아니에요????"
십원에서 일원을 빼면 구원이니까요 ㅡㅎㅎㅎㅎ
제의실에 들어가셔서 한참 웃고 나오셨다는 이야기셨어요.
8,2 나는 더 이상 그들을 그냥 지나쳐 버리지
않으리라.
8,3 그날에 성전의 노래가 통곡으로 바뀌리라.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
시체가 너무 많아
온갖 곳으로 던져지리라. 조용히 하여라!"
그러면서 여름 과일 한 바구니와 관련된 고발이 나옵니다.
8,5 너희는 말한다.
"언제면 초하룻날이 지나서 곡식을
내자 팔지?
언제면 안식일이 지나서 밀을 내놓지?
(사실 이 부분은 범죄가 아닙니다)
에파는 작게, 세켈은 크게 하고
가짜 저울로 속이자.
8,6 힘없는 자를 돈으로 사들이고
빈곤한 자를 신 한 켤레 값으로 사들이자.
지스러지 밀도 내다 팔자."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화폐에 대한 신뢰에 기초합니다.
내 주머니에 천 원 짜리가 하나 있는데, 그 천원짜리가 어느 정도의 가치인치 각인되어 있어요.
천원 혹은 만원을 가지고 밥을 먹으면 먹을 수 있다는 , 옷을 살 수 있다는 화폐에 대한 신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신뢰가 없는 나라들이 있어요. 후진국일수록...
식당에 들어갈 때는 곰탕 한 그릇에 만원이었던 가격이 나올 땐 메뉴판의 가격이 만 이천 원으로 바꿔져 있어요. 실제로 남미의 몇몇 나라들은 식당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 가격이 바뀌어져 있어서, 들어가면서 계산을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선진국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죠? 사회적인 신뢰가 높다는 것입니다.
외국인들이 요즘에 한국에 관광와서 놀라는 것 중에 하나가 카페나 음식점에서 사람들이 노트북이나 핸드폰을 놓고 화장실을 다녀온다는 거예요. 외국에서는 없어져 버리는데....
"와! 대한민국 대단하구나. 사회적인 신뢰가 이정도로 높다니...."
물론 그게 사회적인 신뢰 때문인지 CCTV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지만 30~40년 전과 비교해 봤을 때 사회적인 신뢰가 높아진 것은 사실입니다.
여전히 대한민국 택시값에 불편을 외국인들이 있지만....(밤이 되면 변하는 택시값으로 인해서)
전 세계적으로 관광객을 중심으로 사회적인 신뢰가 높고 쾌적하게 관광할 수 있는 일등인 나라가 일본이라고 합니다. 요즘에는 우리나라도 10등 안팎에서 오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GDP를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서로서로 믿을만한 사회로 만드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8,7 주님께서 야곱의 자만을 두고 맹세하셨다.
"나는 그들의 모든 행동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8,8 그 때문에 땅이 뒤흔들리고
온 주민이 통곡하지 않겠느냐?
온 땅이 나일강처럼 불어 오르고
이집트의 나일강처럼 부풀었다가 잦아
들지 않겠느냐?
아모스서를 시작하면서 아모스 예언자가 환시를 합니다. 그건 지진이 일어나기 두 해전이에요.
신명기에서 보면 모세가 "내가 죽은 뒤에도 하느님께서는 계속해서 예언자를 보내주실 거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물어봅니다. "그가 참 예언자인지 아닌지, 우리가 어떻게 하면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모세가 다소 황당한 대답을 합니다. "그가 예언한 것이 이루어지면 참 예언자이고 이루어지지 않으면 가짜 예언자다."
그 부분을 우리는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예언자가 예언을 했을 때, 그 예언이 이루어진 것을 보고 그다음에 대해서는 하느님의 예언을 믿을 수 있는 예언자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 내년쯤에 어떤 일이 일어날 거야. 그리고 십 년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 거야." 하고 신부님이 말씀하시고, 2026년이 되었을 때 그 일이 이루어졌다면 2035년에 신부님이 한 이야기가 또한 이루어질 거라고 믿을 수 있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모스 예언자가 지진 이태 전에 지진에 관해서 예언했는데, 그 지진을 하느님의 분노, 하느님의 심판으로 생각한 겁니다.
그 지진에 관한 기록은 아모스 예언서뿐만 아니라 다른 예언서에서도 나옵니다. 실제로 그런 지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지진이 그냥 자연재해가 아니라 하느님의 심판이었고, 아모스 예언자의 예언은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자연재해뿐만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역사적인 사건,
722년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의해서 멸망하고 587년에 유다가 바빌론에 의해서 멸망하는데 , 그것도 단지 세속적인 정치적인 사건이 아니라 그 안에 하느님의 뜻이 있다며, 그것은 하느님의 심판이라며 예언자는 이야기합니다.
그것을 확실하게 이야기하기 위해서 아모스 예언서의 저자는,
"아! 아모스 예언자가 이런 환시를 했는데, 그게 지진 이태 전이었고, 그때 그 말씀은 바로 지진에 관한 예언자의 예고였어. 하느님의 심판이라고 예언자는 말하고 있어. 그러니까 그 이후에 있을 더 중대한, 어떤 종말론적인 하느님의 심판에 관해서도 우리는 예언자의 말을 믿어야 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환시인
다섯 번째 환시 : 성전의 진동
9,1 나는 주님께서 제단 옆에 서 계신 것을
보았다.
이 부분도 신부님께서는 조금 다르게 번역하셨습니다.(직역)
"나는 야훼가 제단 위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구약에서 제단은 우리말에서 번역하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구약에서 제단은 흙이나 돌을 쌓고 그 위에 제물을 바치는 조금 높게 쌓은 구조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교회에서 제단은 밟고 올라서고 있고, 제단 위에 제대가 있습니다.
제대 위에서 우리는 미사를 드립니다. 따라서 우리가 제대를 사용하는 것과 구약의 백성들이 제단을 사용하는 것은 사실 비슷합니다. 구약에서 제단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나올 때마다, 제단으로 해석할지 제대로 해석할지 어려움이 있으시다고 합니다.
다른 성서공부하시는 신부님들, 수녀님들도 어려움이 있으셔서 기존의 번역을 그대로 사용하신다고 합니다.
9,1절에서 야훼는 제물도 아니신데 제단 위에 서 계십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다섯 번째의 환시인 만큼, 첫 번째와 두 번째가 비슷했습니다. 세 번째와 네 번째가 비슷했고, 그리고 다섯 번째는 조금 독립적에요. 바로 제단 위에 서 있는 야훼가 그 환시의 의미를 바로 설명하십니다.
"기둥머리를 쳐서 문지방들이 흔들리게 하고
기둥들이 모든 사람의 머리 위에 떨어지게 하여라.
그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은 내가 칼로 죽이리라.
아무도 도망치지 못하고
아무도 피신하지 못하리라."
제단 위에 서 계시면서 지진에 관한 예고를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신학적으로 과장합니다.
9,2 그들이 저승으로 파고들더라도
내 손이 거기에서 잡아끌어 올리고
그들이 하늘로 올라가더라도
내가 거기에서 끌어내리리라.
9,3 그들이 카르멜 꼭대기에 몸을 숨겨도
내가 거기에서 찾아내어 붙잡아 오고
그들이 내 눈을 피해 바다 밑바닥에 숨더라도
내가 바다뱀에게 명령하여 거기에서
그들을 물게 하리라.
9,4 적군 앞에서 끌려가더라도
내가 칼에게 명령하여 거기에서 그들을
죽이게 하리라.
행복이 아니라 재앙을 겪도록
그들에게서 내 눈을 떼지 않으리라."
하느님의 심판이 단호합니다.
지금까지는 아모스 예언자의 편집자의 작품이었습니다. 이제부터의 내용은 열두 소예언서 편집자가 더 확장한 내용입니다.
열두 소예언소의 편집자는 아모스서 1장 1절부터 9장 4절까지의 환시(마지막 다섯 번째의 환시까지)를 일단 완결하고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9,5 주 만군의 주님께서 땅에 손을 대시면
땅이 녹아 버리고
그 모든 주민이 통곡하며
온 땅이 나일강처럼 불어 오르다가
이집트의 나일강처럼 잦아든다.
야훼 하느님의 창조주적 권능을 일단 찬미하면서 시작합니다.
9,6 하늘에 당신 처소를 지으시고
땅 위에 당신의 궁창을 세우시며
바닷물을 불러올리시어 땅 위에 쏟으시는 분
그 이름 주님이시다.
그 창조주 야훼 하느님은 보편적 권능을 지니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부분 : 하느님은 창조주적 권능을 가지셨고 이 세상의 모든 민족은 그 권능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9,7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나에게
에티오피아 사람들과 똑같지 않으냐?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스라엘을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왔듯이
필리스티아인들도 캅토르에서,
아람도 키르에서 데리고 올라오지 않았느냐?
9,8 나는 이 나라를 땅에서 없애 버리리라.
그러나 야곱 집안은 완전히 없애 버리지 않으리라.
열두 소예언서의 편집자는 아모스서를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아모스 예언서와 이사야의 메시지를 조금 비슷하게 만듭니다.
이사야의 메시지도 유다가 망하지만 다윗의 후손 가운데 하나가 메시아로 등장하게 돼서 새로운 하느님 백성이 시작한다는 것이 이사야 예언자의 메시아사상입니다. 그와 비슷하게 여기서도 나라를 없애버리시지만 야곱 집안을 완전히 없애버리지는 않는다고 하십니다.(희망의 여지를 남겨 둡니다)
9,9 보라, 내가 이제 명령한다.
체를 흔들듯
내가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이스라엘
집안을 흔들리니
돌멩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으리라.
하느님의 심판은 결정적이다. 곧 이스라엘은 망할 것이다.
9,10 내 백성 가운데에서
"재앙이 우리에게 가까지 오지도
덮치지도 않을 것이다." 하는 죄인들은
모두 칼에 맞아 죽으리라.
그들이 이야기하는 거짓 예언들, 하느님에 대한 거짓 이야기들은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9,11 그날에 나는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일으키리라.(이사야의 메시아사상을 그대로 가지고 온 내용)
벌어진 곳은 메우고
허물어진 곳은 일으켜서
그것을 옛날처럼 다시 세우리라.
9,12 그리하여 그들은 에돔의 남은 자들과
내 이름으로 불린 모든 민족들을 차지하리라.
ㅡ 이 일을 하신 주님의 말씀이다.ㅡ
9,13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로 9,13절과 9,15절이 마무리가 됩니다.
유인물 내용에서 왼쪽에서는 8,11-14절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9,13-15절의 내용이 있습니다.
8,11절은 9,13절과 거의 동일합니다.
8,11 보라, 그날이 온다.
주 하느님의 날이다.
9,13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바로 그날은 주님의 날입니다. 그런데 8,11절에서 첫 번째 반전이 일어납니다. "너희들 이스라엘 사람들아, 야훼의 날이 좋은 날인줄 알았지? 아니야! 그렇지 않아, 그날은 내가 이 땅에 굶주림을 보내고 그들은 더 이상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그리고 처녀 총각들이 목이 말라 지쳐 쓰러지는 날이야.(첫 번째 반전)
9,13절에서 두 번째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럼 야훼의 날은 심판의 날이네?" 아모스 예언서의 최종적인 편집자는 "아! 그렇지만 그게 끝이 아니야.
밭 가는 이를 거두는 이가 따르고(한 사람이 밭을 가는데 뒷사람이 바로 소출을 거두는 풍요로움)
산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모든 언덕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넘치리라.
9,14 나는 내 백성 이스라엘의 운명을 되돌리리니
그들은 허물어진 성읍들을 세워 그곳에 살면서
포도밭을 가꾸어 포도주를 마시고
과수원을 만들어 과일을 먹으리라.
9,15 내가 그들을 저희 땅에 심어 주리니
그들은 내가 준 이 땅에서 다시는 뽑히지 않으리라.
아모스의 하느님 나라는 굉장히 소박합니다. 아모스가 꿈꾸는 하느님 나라는? 누구나 자신이 일한 만큼 열매를 거두는 나라예요.
형제가 형제를 억압하지도 착취하지도 않고 서로서로 존중하고 배려하고 돕고 아끼는 나라.
자신이 일한 만큼 자신의 몫을 거두는 그와 같은 나라.
따라서 야훼의 날에는 심판의 날로서, 8장에서 첫 번째 반전이 일어나고 아모스서를 마무리하는 9,13-15절에서는 그와 같은 심판이 지나가고 나서 이스라엘이 정화된 후 하느님께서 하느님 당신의 백성을 어떻게 새로이 당신의 나라를 세우실 것인가에 대한 예언자의 이상적인 그림을 남겨 놓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아모스서를 읽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할 점이 있는 것 같으셔서, 유인물 반대쪽에는 최신부님의 생각들을 🌟로 적어주셨습니다.
맨 끝에서 두 번째 부분을 읽어봅니다.
* 아모스 예언서의 마무리에서 야훼는 이스라엘을 "내 백성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고, 자신을 "야훼 너의 엘로힘"이라 부른다. 이는 북이스라엘 또는 예언서가 염두에 둔 하느님 백성과 야훼의 계약이 아직 유효함을 의미한다. 그 율법에 대한 충실함이 제의적 경건함과 함께 사회적 공정과 정의의 실현에 있음을 예언자는 지속적으로 상기시킨다.
* 성경이 전하는 신적 의지, 하느님의 뜻은 세상 안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특히 사회적 약자들과 연대를 실천함으로써, 교회는 신적 계시를 실증한다. 시편 128,2는 아모스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네 손으로 벌어들인 것을 네가 먹으리니. 너는 행복하여라, 너는 복이 있어라."
아모스 예언자는 우리에게 정의에 관하여 질문을 던집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거죠.
자신의 시대에 자신이 겪은, 그리고 본, 하느님의 말씀, 환시를 우리에게 전하면서 이스라엘이 무엇 때문에 하느님의 심판을 받았는지에 관해서 예언자는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백성이라면,
이웃과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하는지...
자신에게 권력과 힘과 돈과 그 밖의 능력이 주어졌을 때, 그것을 어떻게 하느님의 백성인 공동체 안에서 또 자신이 속한 사회를 위해서 사용해야 하는지를, 그것을 자신만을 위해서 감추어두고 사용하며 마구 휘두를 때, 어떻게 되는지를.... 하느님의 백성 안에서 정의에 대한 사유로 우리에게 묻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많은 문제에 관해서 맞닥뜨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안에서 여러 가지 시대적인 징표들을, 정치적으로는 계엄과 탄핵의 사건과 여러가지 재판들이 진행되고 있고, 외교적으로는 미국과 우리나라의 관계, 북한과 우리나라의 관계
그 안에서 어떤 것이 하느님의 뜻인지를 우리는 하루하루 힘들게 내다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은 신앙과 무관한 것일까요?
아니면 신앙과 관계된 것일까요?
아모스 예언자는 그 모든 것들이 신앙의 문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안에서 새로이 성찰되어야 한다고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동남아로 여행 갈 필요가 없었던 올해의 여름은, 내년의 여름을 예상할 수 없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앞으로의 세상을 생각하면, 2025년은 가장 시원한 한 해로 기억될 거다.라고
우리가 살고 있는 생태계의 문제, 지구 온난화의 문제도 또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안에서 무엇이 올바른 것인가? 무엇이 정의로운 것인가? 공정한 것인가? 와 같은 질문들과 함께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그리스도인들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들.
이런 생각들을 아모스서를 읽으면서 함께 해보게 됩니다.
나머지 별표의 내용도 보시면서, 최승정 신부님께서 이런 내용들을 생각해 보셨구나!라고 읽으셨으면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특히나 잠이 안 오시면, 주무시는데 도움이 되실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영광송으로 마침기도 함께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신부님의 특강은 계속됩니다.

첫댓글 아멘 고맙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