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지신인문학상 심사평
---하록 씨와 솔미숙 씨의 시에 대하여
인간의 삶과 공동체의 삶이 일치하고 그 꿈과 목표가 일치한다면 그 사회는 더없이 평화롭고 행복한 사회라고 할 수가 있다. 내가 나의 삶에 충실하고 그 꿈을 추구하면 공동체 사회는 나의 삶과 꿈을 다 받아주고, 내가 어렵고 힘들 때마다 마음을 위로해주고 어깨를 두드려 준다면 나는 공동체 사회의 일원으로서 무한한 자부심과 함께, 나의 행복이 공동체 사회의 행복이 되고 우리 모두가 다같이 잘살 수 있는 사회를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공동체 사회가 상호간의 불신과 반목으로 그 꿈과 목표를 잃어버렸을 때는 우리는 모두가 다같이 좌절과 절망을 경험하고 오직 자기 자신의 삶과 꿈만을 위하여 이를 악물고 버틸 것이다. 따라서 우리 시인들이 방법적인 부정 정신을 통하여 도덕과 윤리와 역사와 전통을 비판할 때에는 이 ‘비판의 힘’으로 공동체 사회를 개선하겠다는 꿈과 희망을 가져볼 수도 있을 것이다.
본지는 이번 호에도 [눈부시게 맑은 밤 우리 거기에] 외 4편을 응모해온 하록씨와 [이제부터 나는 북극곰을 사람이라 부르고 사람을 북극곰이라 부르겠다] 외 4편을 응모해온 솔미숙 씨를 애지신인문학상 당선자로 내보낸다. 하록 씨의 세대는 꿈과 희망을 잃어버린 세대이지만, 그러나 그의 슬픔과 좌절과 절망은 “한 길은 벼랑이고 한 길은 절벽일 때” 그 “벼랑의 바닥을 궁금”해 하면서도 “떠도는 별을 잡아 수호성을”([눈부시게 맑은 밤 우리 거기에]) 삼으려는 ‘희망의 찬가’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저무는 땅/ 떨어지는 하늘/ 서슬퍼런 빛줄기를 고스란히 들쓰며// 어서 와, 내 방에/ 색의 뭇매”의 [소나기], “용서하지 않을 거야/ 지독하게 외로울 거야/ 울지 말란 이야기가 의아할 거야// 아 너를 사랑하는 일을 생각하는 것은/ 너무 행복해/ 그래도”의 [희망], “밀려오는 비명과/ 쓸려가는 한탄과” “빛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린다”의 [눈부시도록]의 시들이 그것을 증명해준다. 시는 삶의 의지의 초점이며, 시를 쓴다는 것은 그 어떤 고통과 절망의 밑바닥에서도 꿈과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하록 씨의 시가 사회 역사적인 토대를 잃고 자아 성찰과 내면의식으로 침잠해 있다면, 솔미숙 씨는 문명비판을 통하여 자기 자신과 인간 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 구도자, 즉, 언어의 사제로서의 ‘시인의 길’을 가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북극곰을 인간화시키고 인간을 북극곰으로 변용시킨 ‘역발상의 상상력’은 2050년 ‘인간이 멸종된다’는 충격적인 보고서를 담고 있으며, 하루바삐 무분별한 벌목과 화석연료 사용과 쓰레기의 오염으로부터 이 지구를 구원해내야 한다는 역사적인 사명과 의무감의 소산이라고 할 수가 있다. 자연이 인간을 품어 기르는 것이지, 인간이 자연을 낳고 품어 기르는 것이 아니다. 시인의 길은 구도자의 길이며, 이러한 사실들은 하얀 낙타를 찾아가는 [챠강티메], 중증 치매의 엄마와 함께 “작은 풀꽃 꽃마리”를 보러가고 싶다는 [꽃마리], 시와 삶, 혹은 종교와 삶이 일치하고 너와 내가 하나가 되는 삶을 꿈꾸고 있는 [나는 지금 티벳에 있다] 등이 그것을 증명해준다.
모든 학문과 역사와 정치의 예비학은 비판이며, 이 비판이 없는 사회는 나치와 스탈린 체제처럼 꿈과 희망이 없는 사회라고 할 수가 있다. 현대 사회는 자본독재의 사회이며, 이 자본에 대한 감시와 비판이 사라진 사회이고, 그 결과로서, 민주화의 탈을 쓴 독재체제가 뿌리내린 사회라고 할 수가 있다. 하록 씨의 시는 참으로 맑고 깨끗하고, 참으로 아름답고 슬프다. 이에 반하여, 솔미숙 씨의 시는 건강한 문명비판과 함께, 역사 철학과 존재론적 성찰이 더없이 무르익어 감미롭다고 할 수가 있다. 하록 씨는 역사 철학적인 사유를 넓혀 가야 할 것이고, 솔미숙 씨는 ‘역발상의 상상력’을 통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시인의 길을 모색해 나가야 할 것이다.
시인의 길은 구도자의 길이고, 그 멀고 험한 길에 무한한 행운이 깃들기를 빌어마지 않는다.
----애지신인문학상 심사위원 일동(글 반경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