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세계사] 오키나와
류큐 왕국, 중계무역으로 부 축적… 1879년 일본에 병합돼
입력 : 2024.03.27 03:30 조선일보
오키나와
▲ 오키나와현이 미국에서 반환받은 류큐 왕국 제13대 쇼케왕의 초상화. /오키나와현
일본 오키나와현은 1879년 일본에 강제 병합되기 전까지 독립국 류큐 왕국이 다스리던 지역이었어요. 이 류큐 왕국의 왕들을 그린 전통 초상화 2점이 미국에서 발견돼 최근 오키나와현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오키나와현은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미군과 일본군이 오키나와에서 전투를 했을 때 사라진 초상화와 도자기 등 문화재 20여 점을 미국에서 돌려받았다고 하네요.
류큐 왕국은 왕이 죽은 후 초상화를 왕궁(슈리성)에 보관했어요. 하지만 그동안 왕의 초상화가 일본에서 실물로 확인된 사례는 없었어요. 태평양 전쟁 전에 초상화를 촬영한 흑백사진만 있었는데, 초상화가 어떤 색으로 채색됐는지 등은 알 수가 없었죠. 오키나와현 지사는 "류큐 왕국 시대를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오키나와의 보물이 돌아온 것은 주민들에게 큰 기쁨"이라고 말했어요. 이처럼 오키나와는 류큐 왕국 지역이었다가 일본에 병합되고 태평양 전쟁까지 겪는 등 역사가 깊습니다.
류큐 왕국… 세 왕국 통일로 만들어져
오키나와현은 일본 최남단에 있어요. 14세기 오키나와 지역에는 주잔(中山), 호쿠잔(北山), 난잔(南山) 등 세 왕국이 있었는데, 이 중 가장 힘이 강했던 주잔이 삼국을 통일하면서 '류큐 왕국'을 세웠어요. 류큐 왕국은 명나라와 조공·책봉 관계를 맺어 독립국 지위를 인정받았어요. 명나라와 조선, 일본 등을 연결하는 중계무역으로 부를 축적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16세기 중반 이후 명나라가 상인들이 직접 해상 무역에 나설 수 있도록 해금 정책을 완화하면서 류큐 왕국의 중계 무역 입지는 약화됐어요.
그러던 1609년 류큐 왕국은 일본 규슈의 사쓰마번(藩)의 침공을 받았어요. 사쓰마번은 오랫동안 중계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은 류큐 왕국을 가만히 두지 않았죠. 당시 류큐 왕국은 무기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사쓰마번의 군대 앞에 맥없이 무너졌어요. 이후 사쓰마번은 류큐 왕국에 관리를 파견해 왕실 일 대부분을 간섭했습니다. 예를 들어 류큐 왕국은 사탕수수를 재배했는데 18세기 말 사쓰마번은 류큐 왕국에 공물을 전부 설탕으로 내게 했대요. 이처럼 류큐 왕국은 사쓰마번의 정치·경제적 간섭을 받으며 크게 쇠퇴했어요. 그래도 이때까지는 류큐 왕국이 독립국 지위를 잃진 않았습니다.
1868년 일본이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상황이 달라졌어요. 사쓰마번과 조슈번이 메이지 정부의 중심 세력이 된 후 메이지 정부의 위신을 높이기 위해 류큐 왕국을 일본으로 편입하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메이지 정부는 류큐 왕국을 류큐번으로, 류큐 국왕을 류큐번왕으로 격하했어요. 이후 1879년 류큐번이 폐지되고 오키나와현이 설치되면서 류큐 왕국은 공식적으로 사라졌습니다. 당시 메이지 정부가 내세운 명분은 '민족 통일과 근대화'였어요.
오키나와현이 된 후에도 이곳은 제도 개혁과 근대화가 상당히 늦게 이뤄졌어요. 1920년이 되어서야 법률 제도 등이 일본 본토 수준이 됐죠. 돈을 벌기 위해 오키나와를 떠나 일본 본토 대도시로 나가는 이가 많았지만 본토 사람들에게 이민족이라며 차별당하기 일쑤였어요. 이후 국가 차원에서 '오키나와 진흥 계획'을 추진했는데, 이때 오키나와에서 전투가 벌어졌어요.
주일 미군 기지의 75%가 주둔하고 있어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 당시, 미국은 일본 본토를 공략하는 발판으로 오키나와를 선택했어요. 1945년 오키나와 주변으로 미군 함대가 약 1500척 집결했고, 폭격이 시작됐죠. 미군은 지상 전투 부대 18만명에다 해군 부대와 후방 보급 부대까지 합하면 54만명에 달했어요. 이 전투로 오키나와 인구의 3분의 1에 달하는 10만여 명이 사망했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자살을 강요당했다고 합니다. 일본 군부는 "미군의 포로가 되면 능욕을 당한다"고 주민들을 세뇌했다고 해요.
전쟁에서 패배한 일본은 미국과 영국, 소련 등 연합군의 통치를 받았어요. 이후 미국은 점차 소련과 대립하게 됐고, 일본을 방공 기지로 삼아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 두고 싶어 했습니다. 결국 미국은 오키나와를 미군의 군사 기지로 만들었어요. 오키나와 중남부 넓은 부지에 미군이 들어섰습니다. 예컨대 '가데나 주일 미군 기지'는 15개 마을이 있던 곳을 미군 기지로 바꾼 것이라고 해요. 오키나와의 미군 기지들은 6·25전쟁과 베트남 전쟁 때 미군의 중요한 거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1972년 오키나와는 일본에 반환됐어요. 하지만 지금도 일본 전체 국토 면적에서 0.6%밖에 안 되는 오키나와 땅에 주일 미군 기지의 75%가 주둔하고 있다고 합니다.
▲ 2019년 10월 화재로 전소되기 전 류큐 왕국 왕궁 슈리성의 모습. /위키피디아
▲ 1945년 오키나와현에서 전투를 치르는 미군들. /위키피디아
▲ 상공에서 찍은 가데나 주일 미군 기지의 모습. /위키피디아
서민영 계남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오주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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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있는 세계사] 오키나와
류큐 왕국, 중계무역으로 부 축적… 1879년 일본에 병합돼
입력 : 2024.03.27 03:30 조선일보
오키나와
▲ 오키나와현이 미국에서 반환받은 류큐 왕국 제13대 쇼케왕의 초상화. /오키나와현
일본 오키나와현은 1879년 일본에 강제 병합되기 전까지 독립국 류큐 왕국이 다스리던 지역이었어요. 이 류큐 왕국의 왕들을 그린 전통 초상화 2점이 미국에서 발견돼 최근 오키나와현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오키나와현은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미군과 일본군이 오키나와에서 전투를 했을 때 사라진 초상화와 도자기 등 문화재 20여 점을 미국에서 돌려받았다고 하네요.
류큐 왕국은 왕이 죽은 후 초상화를 왕궁(슈리성)에 보관했어요. 하지만 그동안 왕의 초상화가 일본에서 실물로 확인된 사례는 없었어요. 태평양 전쟁 전에 초상화를 촬영한 흑백사진만 있었는데, 초상화가 어떤 색으로 채색됐는지 등은 알 수가 없었죠. 오키나와현 지사는 "류큐 왕국 시대를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오키나와의 보물이 돌아온 것은 주민들에게 큰 기쁨"이라고 말했어요. 이처럼 오키나와는 류큐 왕국 지역이었다가 일본에 병합되고 태평양 전쟁까지 겪는 등 역사가 깊습니다.
류큐 왕국… 세 왕국 통일로 만들어져
오키나와현은 일본 최남단에 있어요. 14세기 오키나와 지역에는 주잔(中山), 호쿠잔(北山), 난잔(南山) 등 세 왕국이 있었는데, 이 중 가장 힘이 강했던 주잔이 삼국을 통일하면서 '류큐 왕국'을 세웠어요. 류큐 왕국은 명나라와 조공·책봉 관계를 맺어 독립국 지위를 인정받았어요. 명나라와 조선, 일본 등을 연결하는 중계무역으로 부를 축적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16세기 중반 이후 명나라가 상인들이 직접 해상 무역에 나설 수 있도록 해금 정책을 완화하면서 류큐 왕국의 중계 무역 입지는 약화됐어요.
그러던 1609년 류큐 왕국은 일본 규슈의 사쓰마번(藩)의 침공을 받았어요. 사쓰마번은 오랫동안 중계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은 류큐 왕국을 가만히 두지 않았죠. 당시 류큐 왕국은 무기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사쓰마번의 군대 앞에 맥없이 무너졌어요. 이후 사쓰마번은 류큐 왕국에 관리를 파견해 왕실 일 대부분을 간섭했습니다. 예를 들어 류큐 왕국은 사탕수수를 재배했는데 18세기 말 사쓰마번은 류큐 왕국에 공물을 전부 설탕으로 내게 했대요. 이처럼 류큐 왕국은 사쓰마번의 정치·경제적 간섭을 받으며 크게 쇠퇴했어요. 그래도 이때까지는 류큐 왕국이 독립국 지위를 잃진 않았습니다.
1868년 일본이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상황이 달라졌어요. 사쓰마번과 조슈번이 메이지 정부의 중심 세력이 된 후 메이지 정부의 위신을 높이기 위해 류큐 왕국을 일본으로 편입하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메이지 정부는 류큐 왕국을 류큐번으로, 류큐 국왕을 류큐번왕으로 격하했어요. 이후 1879년 류큐번이 폐지되고 오키나와현이 설치되면서 류큐 왕국은 공식적으로 사라졌습니다. 당시 메이지 정부가 내세운 명분은 '민족 통일과 근대화'였어요.
오키나와현이 된 후에도 이곳은 제도 개혁과 근대화가 상당히 늦게 이뤄졌어요. 1920년이 되어서야 법률 제도 등이 일본 본토 수준이 됐죠. 돈을 벌기 위해 오키나와를 떠나 일본 본토 대도시로 나가는 이가 많았지만 본토 사람들에게 이민족이라며 차별당하기 일쑤였어요. 이후 국가 차원에서 '오키나와 진흥 계획'을 추진했는데, 이때 오키나와에서 전투가 벌어졌어요.
주일 미군 기지의 75%가 주둔하고 있어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 당시, 미국은 일본 본토를 공략하는 발판으로 오키나와를 선택했어요. 1945년 오키나와 주변으로 미군 함대가 약 1500척 집결했고, 폭격이 시작됐죠. 미군은 지상 전투 부대 18만명에다 해군 부대와 후방 보급 부대까지 합하면 54만명에 달했어요. 이 전투로 오키나와 인구의 3분의 1에 달하는 10만여 명이 사망했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자살을 강요당했다고 합니다. 일본 군부는 "미군의 포로가 되면 능욕을 당한다"고 주민들을 세뇌했다고 해요.
전쟁에서 패배한 일본은 미국과 영국, 소련 등 연합군의 통치를 받았어요. 이후 미국은 점차 소련과 대립하게 됐고, 일본을 방공 기지로 삼아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 두고 싶어 했습니다. 결국 미국은 오키나와를 미군의 군사 기지로 만들었어요. 오키나와 중남부 넓은 부지에 미군이 들어섰습니다. 예컨대 '가데나 주일 미군 기지'는 15개 마을이 있던 곳을 미군 기지로 바꾼 것이라고 해요. 오키나와의 미군 기지들은 6·25전쟁과 베트남 전쟁 때 미군의 중요한 거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1972년 오키나와는 일본에 반환됐어요. 하지만 지금도 일본 전체 국토 면적에서 0.6%밖에 안 되는 오키나와 땅에 주일 미군 기지의 75%가 주둔하고 있다고 합니다.
▲ 2019년 10월 화재로 전소되기 전 류큐 왕국 왕궁 슈리성의 모습. /위키피디아
▲ 1945년 오키나와현에서 전투를 치르는 미군들. /위키피디아
▲ 상공에서 찍은 가데나 주일 미군 기지의 모습. /위키피디아
서민영 계남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오주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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